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8화

기종으로 봐서는 적어도 100년 전에 생산이 중단된 물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공장에서 바로 꺼내 포장지를 뜯은 듯 사용되는 장비나 기계들이 무척이나 깨끗했다.
단종이 된 지 100년이 훨씬 넘은 구형의 장비를 만들려면 그만한 시설을 만들어야 하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좋은 것들을 놔두고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위해 새로 만들었을 턱이 없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가끔씩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보살피는 사람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일가 친척 하나 없는 고아에 정부의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3급 시민권자였다.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인물이라면 분명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주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누군지를 알아내는 것이 궁금증을 해결해 줄 단서라는 것을 직감한 차훈은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자신을 관찰하며 치료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일 리가…….’
황충길을 기억해 낸 차훈은 자칫 바이탈 사인의 고정이 풀릴 정도로 놀랐다.
황충길은 전쟁 발발과 함께 참여했던 작전 중에 상부로부터 지급받은 정보 중에 있던 자 중 하나였다. 자신이 기억해 낸 인물과 동일인이라면 결코 그는 절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지만 바이탈 사인의 변동 폭이 급격히 올라가면 관찰자에게 통보될 것이기에 급히 마음을 안정시켰다.
‘설마! 아니다. 우리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다.’
기억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훈은 자신의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고 있는 황충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틀림없다. 바로 그 사람이다.’
정보에 있던 황충길이라는 초저온의학자는 이미 137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 전에 죽은 인물이 살아나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차훈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혹시, 과거로 거슬러 온 것인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시간여행은 지금까지도 공상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뒤죽박죽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차훈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한정된 공간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도 어려운 상태라 혼란만 가중됐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지금의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닥칠 위험을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육체를 회복하는 것에 급선무였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우선은 몸부터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 한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라면 내게 걸려 있는 금제까지도 풀어할지 모른다.’
육체를 회복시키며 지금까지 수집했던 정보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했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여러 가지 위험 상황도 대비를 해야 했다.
차훈은 앞으로도 자신이 깨어났음을 숨기고 육체를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4장. 시간 회귀의 가능성




차훈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 후, 제임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대감이 너무 큰 탓이었다.
오늘도 오래간만에 들러 통제실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제임스는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멈출 수 없었다.
“휴우, 박사님,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네. 뇌파와 바이탈사인이 모두 정상인 것을 보면 이제 깨어날 때도 됐는데 말이야.”
황충길로서도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체크한 바로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자는 이미 깨어났어야 정상이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최후의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내일 복귀해야 하는데 실망이군요.”
턱밑까지 추적해 온 CIA의 촉수를 따돌리는 것도 이제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기에 제임스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기대한 것인지도 모르지. 이제 깨어나지 못해도 할 수 없는 일이네. 얼마간 더 지켜보다가 마지막 방법을 시행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이제 시간도 거의 없고,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남은 그 방법밖에는 없겠군요.”
마지막 방법은 강제로 기억을 읽어 들이는 탓에 대상자는 백치가 되거나 생명을 잃는다. 결코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그러나 정보의 중요성을 감안해 사용이 불가피한 만큼 제임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인식장치는 확보한 건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제임스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황충길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지막 방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물건이라 확보 여부가 궁금했다.
“다행이 놈들 모르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처리했으니 앞으로도 그것이 사라진 줄은 모를 겁니다.”
“후후후, 그들도 아직 그것이 사람의 기억을 강제로 빼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테니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테지. 이제 기억인식장치를 확보했으니 조만간 저자의 기억을 읽어 낼 수 있겠군.”
“하지만 읽어 낼 수 있는 기억도 일부분일 뿐이고, 그 장치를 사용하면 완전히 백치 상태가 되어 버릴 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야. 자네 말대로 앞으로 시간도 없고.”
“할 수 없지요.”
황충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지 말고 위로 올라가세. 여기에 죽치고 있어 봐야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일이니. 그리고 오랜만에 왔는데 그냥 가긴 섭섭하니 나와 한잔하세. 삼겹살을 좀 사오라고 부탁을 해 놓았으니 말이야.”
“후후후,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기대가 무너진 탓에 마음이 좋지 않았던 제임스는 황충길의 말에 갑자기 소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차피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일을 준비해야 할 때다.’
일이 틀어진 이상 깨끗하게 마음을 접었다. 이제부터는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일에 매진해야 했다.
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가슴속에 들어찬 절망감을 없애는 데에는 소주만 한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유리창 너머 실험실에 누워 있는 차훈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더니 이내 통제실을 나와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추적추적 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정말이지 소주가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두 사람이 통제실을 떠나고 난 후 차훈이 실눈을 떴다. 고개는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살짝살짝 돌려 가며 실험실을 주변을 살폈다.
기감을 이용해 샅샅이 살폈지만 인기척이 없다. 검은 유리벽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기척이 사라졌다.
감시하는 눈길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차훈은 그동안 준비해 오던 것을 결행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제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로군. 한동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끝내자.’
차훈은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금제된 자신의 능력 중 하나를 깨우기 위해서다.
전쟁 시 자신이 지원을 맡았던 특전팀원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알려 주었던 비기 중 하나다.
우웅!
정신이 집중되자 머리 쪽에서 기이한 파동이 생겨났다.
부르르!
시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머리에서 시작된 의문이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자 대기가 조금씩 흔들렸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다. 머리에서 시작된 기이한 파동은 잔잔한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가슴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배꼽까지 빠르게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팔과 다리로 뻗어 나갔다.
동심원처럼 번지는 파동은 이내 일곱 군데에 자리를 잡았다. 황충길이 생체활성물질을 주입한 곳이다.
일곱 개의 접점에서 작은 파동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은 잔잔하던 파동이 점차 세력을 넓혀 나갔다.
설명이 불가능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차훈의 몸에 장착된 각종 계측기들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차르르―
다만 차훈의 머리에 붙어 있는 센서로 측정되는 뇌파측정기만이 조금 전과는 달리 약간 높은 파장을 나타냈다.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워낙 변동하는 양이 적어서 그런지 전의 것과 비교해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차훈은 지금 싸이코 매트릭스(정신계 회로망)를 이용해 주변에 있는 하이드내츄럴포스를 불러들이고 있는 중이다. 적진에 침투해 부상을 입었을 경우,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고 정신동력을 이용한 회복술의 일종이다.
정신 능력자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연지기라 불리는 기운을 흡수해 에너지 통로를 다시 복구하는 것이기에 현재 기술로는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24세기에 군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스펙트럼 분석기가 하이드내츄럴포스를 감지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회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회복술이니 황충길이나 제임스로서는 차훈의 상태를 알아낼 수 없으니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한 번 시전하게 되면 초기를 제외하고는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빠른 시간에 알아서 운용되는 것이기에 잠시 후 차훈은 정신 집중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휴우, 다행히 되는구나.’
신경망이 되살아나고 세포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무기력하던 육체에 천천히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회복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천의 힘을 끌어 올리는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싹트자 하이드내츄럴포스가 빠르게 흘러들어 오며 힘을 보탰고, 육체 또한 원상태를 찾아갔다.
‘생각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 하이드내츄럴포스의 양도 많아서 그런 건가?’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육체 활성화를 받아야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 일이지만 특전팀을 지원하는 것과 아울러 직접 전투에 참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전역하면서 복무하면서 육체에 걸어 놓았던 모든 특수 능력은 군에 의해 회수되었다.
민간인에게는 필요 없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 사용되었다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금제를 가한 것이다.
덕분에 하이드내츄럴포스의 흡수가 약간은 가능하지만 이 정도까지의 양은 아니다.
군에 있을 당시에도 부상을 당해 회복술을 시도해 보기는 했지만 하이드내츄럴포스가 충만한 기분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다.
금제가 가해지지 않았을 때보다 흘러들어 오는 양이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다. 아직 금제가 해제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면 여긴 정말 특별한 곳일 수도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흡수되는 하이드내츄럴포스가 점점 많아지고 강렬해지고 있었다.
차훈으로서도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양이었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감에 의혹이 깊어 갔지만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리기 시작한 탓이다.
‘크으, 이런…….’
금제를 가하기 전이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하이드내츄럴포스가 밀려들어 오고 있었기에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애를 쓰면 쓸수록 밀려오는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강한 반발만 돌아올 뿐이었다.
‘크으윽, 금제가 풀린 건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라 의문이 들었다. 금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도 의문을 풀기 위해 잠시 자신의 육체를 점검한 차훈은 금제가 풀린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금제가 풀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아! 그렇구나. 너무 많은 양이 좁은 통로로 밀려들어서 그렇구나. 그렇다면 일단 제어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간신히 회복한 것도 물거품이 된다.’
임계량이라는 것이 있다. 핵폭탄도 한 장소에 일정량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없으면 폭발하지 않는다.
지금도 비슷한 현상이다.
엄청난 양을 한정된 곳으로만 흡수하고 있었다. 밀도가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크으으, 어쩔 수 없다. 전신을 개방한다.’
신체 회복을 위해 한정된 곳만 개방시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까닭에 차훈은 하이드내츄럴포스를 전신으로 퍼트렸다.
차훈의 판단이 옳았다.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모세혈관은 물론 세포 사이까지 하이드내츄럴포스가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제어가 쉽지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양이?’
전신을 개방하면 아무리 큰 힘이라도 분히 제어할 수 있는데도 힘이 드는 것은 이 주변에 있는 하이드내츄럴포스의 양하고 상관이 있었다.
금제가 풀린 것이기 보다는 주변에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양의 하이드내츄럴포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음, 이 정도의 양이면 거의 7대 성지에 육박한다. 정말, 내가 성지에라도 와 있는 건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구나.’
지구 존재하는 특이 에너지의 90퍼센트 이상이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7대 성지다. 그렇지만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혹여 머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정해진 성지의 기운은 오직 그만이 쓸 수 있기에 자신에게 흡수될 일은 없었기에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 사실이고. 혹시! 정말 그자와 관계가 있다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생각을 접으려던 차훈은 자신이 보았던 황충길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이 부정했던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래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왔다는 전제하에 그자가 진짜 황충길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럼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 으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 이곳이 마지막 작전을 수행했던 곳이라면 이 현상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일이다. 지금이 그가 살던 시대라면 이곳의 주인은 정해지지 않았을 테니까.’
가정이기는 하지만 양자가속기 안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의문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자. 지금이 정말로 과거라면 저들은 결코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과거로 거슬러 온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깨어난 것을 관찰자들이 모르는 이상, 시간은 아직까지 자신의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