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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진귀해 보이는 각종 실내 장식이 눈을 어지럽혔다. 누워서 자도 될 것 같은 크고 푹신해 보이는 기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것이었다.
―왼쪽 방에 가셔서 벽에 붙어 있는 문을 열면 옷이 있을 겁니다.
―고마워, 미라클.
정신없이 구경하던 차훈은 미라클 말에 침실과 떨어져 있는 다른 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
인공 섬유를 소재로 한 푸른색의 옷이 걸려 있었다.
양팔과 다리 부분에 세 가닥 흰줄이 있는 옷이지만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릎 부분이 조금 튀어나온 것이 입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입었었나? 으음, 좀 후줄근하군.”
옷을 걸치자 까칠한 느낌이 전에 입던 작업복에 비하면 그야말로 형편없는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알몸인 상태라 그나마 이런 옷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기에 옷을 입고 지퍼를 여몄다.
―미라클, 이제 나가 볼까?
―혹시 모르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방을 나가려는 찰나 미라클이 제지했다.
―왜?
―혹시, 위성 감시 시스템이 작동할지 모르니 광학 굴절 모드를 작동시키겠습니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 않을까?
―마스터 신체를 기준으로 상층부만 작동하니 그다지 많이 소모되지는 않을 겁니다. 흡수한 하이드내츄럴포스도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작동을 시작했으니 나가셔도 됩니다, 마스터.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니까 빨리 나가 보자. 밖으로 나가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까.
―예, 마스터
미라클의 대답을 들으며 차훈은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에서 느꼈던 수많은 생명 에너지의 주인들이 어떤 모습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과거의 자연환경을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차훈은 걸쳐 입은 옷을 대충 확인하고는 미라클을 등에 다시 매고는 방을 나와 응접실을 지난 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버튼을 누르십시오.
―저거?
―예.
차훈은 망막에 떠오른 정보대로 미라클이 가리키는 곳을 눌렀다.
삐리리!
전자식 자물쇠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내는 것 같은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호흡기를 타고 들어왔다.
“정말 시원하군! 어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상쾌한 기분을 더욱 만끽하려 숨을 깊이 들이마시려 고개를 쳐든 순간, 차훈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벼, 별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하의 모습이 온 하늘에 가득했다. 눈이 부실 듯 시야 가득 들어왔다.
별을 한 번도 실물로는 보지 못한 차훈이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서 보았던 이미지가 별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기에 저절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저런 모습이라니? 저, 정말, 그 말이 사실이었어.”
공해로 찌들어 우중충한 하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는 글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 밤하늘이다.
“역시, 내가 살던 곳이 아니었어.”
별이 보이는 맑은 밤하늘을 보며 차훈은 자신이 낯선 세계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시선을 돌리자 어둠에 잠긴 숲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내가 느꼈던 생명 에너지의 주인들이로군.”
익숙한 패턴의 에너지군이 주변에 가득했다.
초봄이라 그런지 바싹 말라 있는 초목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는데 나무들에게서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굉장하군. 나무와 풀들이 이렇게 많다니, 만약 이곳이 숲이라는 곳이면 난 과거로 온 것이 맞다.”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숲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는 사라진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최고위층만이 산다는 저택에 딸린 정원이라 불리는 곳은 있었지만 이런 숲은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최고위층의 정원을 숲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고작해야 100평방미터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과시욕 차원에서 숲이라 지칭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따져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이렇게 큰 곳을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숲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제국민이 알게 된다면 당장에라도 권력을 잃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었던, 아니,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끝을 알 수 없는 나무 군락을 바라며 차훈이 자신이 정말 과거로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미라클, 생장에 문제가 생긴 건가?
숲에 대해 생각하며 가만히 바라보니 숲이 어쩐지 이상했다. 생체 활성기를 사용하기 전에 느꼈었던 상태보다도 생명 에너지의 밀도가 상당히 떨어져 보였기에 차훈이 물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샘플을 분석해 봐야 하지만 분석기가 아직 없으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그래,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살펴볼 동안 미라클은 성좌의 좌표를 확인해서 이곳이 정확이 어디인지 파악해 봐.
―예, 마스터.
파파팟!
미라클에게 지시를 내린 차훈은 곧장 산장을 떠나 숲 속으로 달려 나갔다. 좀 더 멀리 보기 위해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휘익! 휙!
귓가를 지나치는 차가운 산 공기의 간지럼을 뒤로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신이 났다. 이처럼 상쾌함을 느끼며 달려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속력을 더해 달리자 자신을 받을 듯 나무들이 다가왔지만 그것마저 반가웠다.
별빛이 찬연한 밤하늘 아래 산등성이를 달리는 느낌은 그동안 가슴 조렸던 차훈의 마음에 따뜻함을 전해 왔다.
‘여기는 생명 에너지 밀도가 무척 높다. 아까 그곳과는 다른 곳인가?’
한참을 지나치자 산장에 있을 때와는 달리 왕성한 생기가 느껴졌다. 처음 기감을 퍼트려 확인했을 때 지상에서 느꼈던 강렬한 생명 에너지 반응과 같았다.
바싹 말라 있던 산장 주변의 숲과는 달리, 나무와 풀들이 생기가 철철 넘쳤다.
‘정말 이상하군. 올라가서 한 번 살펴보자.’
파팟!
차훈은 빠르게 정상으로 올라갔다.
“후우! 좋군.”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굽이굽이 이어지는 능선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별빛이 비치는 산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차훈은 숨을 돌리고 난 뒤 자신이 지나 왔던 곳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아까 거기는 숲이 죽어 가고 있었던 건가? 이렇게까지 확연히 차이가 나다니 말이야. 정말 모를 일이로군.”
숲이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다. 한쪽은 생기를 잃어 가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생기가 넘쳤다.
자신으로 인해 숲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차훈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마스터!
산야를 치달리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차훈을 방해하기 싫어 가만히 있었던 미라클이 말을 걸어왔다.
―왜?
―심상치 않은 자들이 포착됐습니다.
미라클이 심상치 않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면 상당한 자들이기에 차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지?
―확인을 해 봐야겠습니다만, 적어도 2급 전사 정도는 되는 자들입니다.
‘혹시나 했었는데…….’
자신을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계속해서 불안했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은 한 일이지만 2급 전사가 있다는 사실은 차훈으로선 조금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금 시대가 자신이 예상한 것처럼 과거라면 2급 전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다.
앞으로 한참 뒤에나 후에나 나타날 자들이기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미라클, 어떤 자들인지 자세하게 파악을 해 봐.
급한 마음에 차훈이 재촉을 했다.
―생체 탐색 범위를 벗어나 있고, 현재 모습을 감추며 이동하고 있는 중이라 여기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미라클이 파악하기 어렵다면 정말 2급 전사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자들, 지금 어디에 있지?
―좌측 700미터 지점부터 곧장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를 쫓고 있다는 말이지. 그러면 유인할 만한 장소를 한 번 찾아봐. 전투에 유리한 곳으로 말이야.
2급 전사들이 작정하고 쫓고 있는 것이라면 도주는 불가능했다. 전투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남쪽으로 1.2킬로미터 지점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자.
―예, 마스터.
파팟!
정상에서 내려온 차훈은 곧장 미라클이 알려 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망막에 비친 안내를 따라 한번에 10여 미터씩 날듯이 달렸다.
* * *
사사삭!
일단의 사나이들이 신형을 완벽히 감춘 채 숲 속을 질주하며 이동을 하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한번에 5, 6미터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간혹 나무를 스치는 작은 소리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소음 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자들이다.
간혹 멈추어 서서 흔적을 살피거나 방향을 가늠했다. 움직이는 행태를 보니 누군가를 추적하는 모양새다.
이들이 추적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차훈이었다.
모종의 목적으로 지리산으로 잠행을 나섰다가 우연치 않게 산야를 달리고 있는 차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뒤를 쫓는 중이었다.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저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앞서 가던 수하가 멈추어 서서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전음을 보내왔다.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중이었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드디어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다른 놈들과 접선을 할지도 모르니 흔적을 숨기고 추적을 한다.”
차훈을 놓칠 수 없기에 등정무(鄧丁懋)는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서둘렀어야 하는 건데… 동시에 그런 정보가 들어온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 정보를 교란한 것이 틀림없다.’
지리산에 상당한 양의 물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은 얼마 전이었다. 워낙 늦게 입수한 터라 최대한 서둘렀다.
속도가 생명이라 근접해 있는 자들 중 별동조로 운용되는 자들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물건에 대한 정보에 뒤이어 갑자기 지킴이들에 대한 단서도 포착되었다. 별동조를 출발시킨 후라 자신이 직접 지킴이들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러나 지킴이들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목된 자를 찾았지만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허탕을 치고 난 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곧바로 이동을 해 왔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물건은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수하들을 풀어 주변을 수색하며 흔적을 찾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정보에 명시된 물건이 어디로 떠났는지는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있다고 생각했는데 교란 정보와 함께 예상한 시간보다 먼저 사라진 것을 보면 누군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완벽하게 따돌림을 당해 버린 것이다.
작전 실패를 직감하고 곧장 후퇴를 지시했다. 허탈한 마음에 발길을 돌리려하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차훈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산을 타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시간상 뭔가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들에 못지않은 움직임과 작전 지역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으니 추적을 하는 것은 지킴이 중에 한 명인 등정무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하들을 넓게 산개시키고 종적을 놓치지 않도록 포위망을 구축하며 쫓았다.
흔적을 놓칠 정도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보면 지킴이인 것이 확실하기에 등정무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으음, 놈에게 그 물건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만약 없다면 이 작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정보 교란으로 인해 시간을 허비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됐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기에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직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저놈이 때마침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런 흔적을 남길 정도의 움직임이면 지킴이가 틀림없다. 지킴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잘하면 놈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저놈을 발견한 것이 어쩌면 나에게 행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움직임을 보면 한국 무인들이 보이는 특유의 동작이 분명했다.
지킴이로 보이는 자가 나타난 이상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등정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가능성을 발견한 이상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더 지켜보자.’
마음을 안정시키며 등정무는 수하의 뒤를 쫓았다.
앞서 가는 차훈과 신형을 감춘 채 뒤를 쫓는 이들의 추격전은 한동안 계속됐다. 훤히 드러낸 채 유람하듯 움직이는 차훈과 은밀함을 유지하며 뒤를 쫓는 자들의 기이한 추격전이었다.
‘수련 중인 지킴이었던가?’
추적을 계속하는 동안 등정무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야밤에 산을 타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한가로웠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동을 하면서 간혹 심호흡을 하거나 간단하게 연무를 하고는 곧장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는 등정무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이목을 속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리 유심히 살펴봐도 수련을 위해 산을 타는 것이 분명했다.
‘으음, 내 기대가 너무 컸었나 보군. 놈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철수를 한 것이었는데 말이야. 앞서 가고 있는 놈도 지킴이가 분명해 쫓아오기는 했지만 저 녀석이 우리가 찾고 있는 물건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아무리 봐도 없다. 제길! 목표물은 포착하지도 못하고 엄한 녀석이나 쫓고 있었다니 내 꼴이 말도 아니군.’
등정무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부여받은 임무는 달성하지도 못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목표물과 관계없는 자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서였다.
등정무는 한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천랑단(天狼團)을 지휘하는 단주다.
십가맹(什家盟)을 이루는 주축 가문인 천랑무가(天狼武家)의 서열로 따지만 최소 10위권 안에 드는 실력자다.
명색이 단주라는 자신이 작전을 실패한 것도 모자라 관련도 없을 것으로 보이는 차훈을 쫓고 있는 것이 영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건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그가 보내온 정보 중에 틀린 것은 없었으니까. 어떤 놈이지? 분명 누군가 개입을 하기 했는데…….’
등정무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정보를 얻은 과정을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디서 틀어졌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렇지만 십가맹 내에 간자(間者)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다.’
이번 작전을 입안하게 된 계기는 적진에 침투한 자로부터 들어온 정보 때문이다.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시작했지만 실패를 했다.
중간에 일어난 정보 교란 때문이다.
조직 내에 간자가 있지만 자신을 속일 정도라면 상당한 위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헬리콥터까지 이용했다면 예사 조직은 아닐 것이다. 비행 허가를 받지 않고 헬리콥터를 쓸 수 있는 존재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CIA나 중앙정보국 같은 조직이 아니면 냄새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을 테니 돌아가면 그쪽부터 뒤져 보도록 해야 할 것 같구나. 이십팔숙(二十八宿)이라면 놈들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등정무는 추적 방향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한 물건의 행방을 알아낼 수는 길은 없었다. 마지막 단서는 누군가가 헬리콥터를 이용했다는 사실뿐이지만 충분히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헛걸음하게 만든 대가는 내 반드시 치러 주마.’
물건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꼬리를 감춘 채 자신들의 시야를 벗어나 있던 자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련의 움직임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해 보였기에 추적하고 있는 자들과 관련된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적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얻었으니 그리 손해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생각하던 중에 수하 중 하나가 전음을 보내왔다.
작전과는 상관이 없는 자임을 수하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아직은 모르니 일단은 좀 더 살펴보자.”
등정무는 치밀한 자였다.
일말의 가능성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추적은 계속됐다. 두 개의 능선을 더 넘으며 차훈을 살펴봤지만 특이한 사항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놈은 그냥 수련을 하며 이동 중이다. 뭔가 목적이 있는 놈은 절대 아니다.’
수련을 위해 산을 타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이 쫓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쫓고 있는 자들과도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였다.
만약 자신이 쫓고 있는 자들과 관련이 있다면 충분히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놈은 물건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추적을 중단해야겠다. 더 이상 머무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어차피 일이 틀어져 버린 이상 지킴이로 보이는 저 녀석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번 일의 실패를 보상받을 수밖에…….’
등정무는 앞서 가고 있는 차훈이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과 상관이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혹시나 사라져 버린 물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물건을 찾는 일은 실패했지만 자신이 한국으로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고대의 무맥을 이어 가고 있는 지킴이를 없애는 것이다. 발견한 이상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경공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공격에 대비하는 자세는 좋았지만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킴이인 것 같으니 제거하고 곧장 이곳을 떠난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다들 숙지하고 있을 테니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등정무는 부단주인 조인호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킴이들 중 가장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권역 안이니 발각되기 전에 빨리 제거하고 자리를 떠야 했다.
“지킴이로 보인다는 말씀입니까?”
“움직이는 방법도 그렇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자세를 보면 틀림없는 것 같다. 놈을 한적한 곳으로 몰아넣고 곧바로 제거하도록 한다.”
“단주, 정말 저자가 지킴이 중 하나라면 정보를 캐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지킴이를 생포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문제는 다른 지킴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제령술을 사용해 봐도 소용이 없었고, 고문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로잡은 자들이 지킴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파악해 놓은 지킴이들은 대부분 제거가 끝난 상태였지만 다른 지킴이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앞으로의 활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정보가 있어야 하기에 조인호가 반문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생포를 한다고 해도 정보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는 적진이다. 자칫 우리의 행적이 발각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단숨에 끝내는 것으로 간다. 부단주, 사기가 떨어진 단원들도 생각해야 한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단원들에게 놈을 잡기 위한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지리산은 자신들이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아니다. 단주의 말대로 적진 한복판에서 시간을 끌어 봐야 위험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임무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헛되이 움직인 탓에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킴이의 피로 사기를 드높일 필요도 있었기에 조인호는 등정무의 말에 곧바로 수긍을 하고는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의 숨통을 끊는다.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니 생포가 아니라 제거임을 명심해라.”
제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천랑단원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 감시하며 추적 중이던 천랑단원들이 빠르게 포위망을 좁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