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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제3장 진화루(珍華樓)
무림맹의 정문을 나서 항주의 남문을 향해 일 마장쯤 내려가다 보면 우측 편에 진화루라는 이름을 내건 허름한 주루가 하나 나온다. 석회를 칠해 놓은 외벽엔 거미줄마냥 금이 쫙쫙 가 있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허름한 외관과 달리 화주가 맛있기로 소문이 난 진화루는 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주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르르!
구슬을 주렁주렁 매달아 늘어뜨려 놓은 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진화루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두 사람은 장거운과 무림맹 위사인 곽호였다.
“왕팔아! 이리 와 보거라!”
“곽 위사님 오셨어요?”
점소이로 보이는 열세 살가량의 꼬마가 달려와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뒷방 있지?”
“뒷방이야 당연히 있지요. 방이 발도 없는데 어디 가겠어요?”
“이 녀석이! 거기 오늘 밤에 깨끗이 치워 놓아라.”
“방은 늘 깨끗한데요?”
“그러냐? 오늘부터 이 친구가 며칠 그 방에 묵을 테니까 네가 신경 좀 써 주어라.”
“잉? 그럼 난 어디서 자요?”
왕팔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면서 묻자 곽호가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네 할아버지하고 자면 되잖냐?”
“싫어요. 제가 왜 제 방 놔두고 할아버지랑 자요?”
“까불지 말고 내 말대로 해!”
“힝, 싫은데.”
곽호가 눈을 부라리자 왕팔이 울상을 지었다.
장거운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제가 소형제와 같이 자겠습니다.”
“엉? 그래도 손님인데 그럴 수야 없지!”
“아닙니다. 전 원래 혼자 자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소형제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흠, 왕팔이 너 그럴래?”
곽호가 묻자 왕팔은 장거운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물었다.
“저기, 혹시 코를 심하게 곤다거나 뭐 그런 거는 아니죠?”
“그래, 다행히 그런 버릇은 없구나.”
“쩝, 알았어요. 할아버지랑 자는 것보단 낫겠죠. 곽 위사님은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코를 심하게 고는지 모르죠? 밤새 한숨도 못 잔단 말이에요.”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가서 술이랑 안줏거리나 좀 가져오너라.”
“예!”
왕팔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주방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자 장거운이 말을 건넸다.
“저 때문에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아냐. 어차피 서로가 돕고 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참 어린데…….”
“그래도 그럴 수가 있나? 어쩌면 상관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곽호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그도 장거운이 마음에 들어 편하게 대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장거운은 무사 시험을 지원해 놓고 있었다. 곽호가 보기에는 별로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장거운이 덜컥 무사가 되어 버린다면 정말로 자신의 상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나중에 되어 봐야 알지요. 그냥 막내 동생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흠흠, 그럴까?”
“예, 그래야 저도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를 것 아닙니까?”
“형님? 하하하, 그거 참 듣기 좋군!”
곽호는 장거운이 붙임성 있게 말을 하자 꽤나 기분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장거운의 말대로 곽호는 순박한 인상의 장거운이 막내 동생처럼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십 년 가까이 무림맹에서 지내오면서 늘 빳빳하게 날이 서 있는 청년들만 보아 오다가 순박한 장거운의 모습을 보니 고향인 소주에 있는 막내가 생각난 것인지도 몰랐다.
잠시 후 왕팔이 술과 안주를 내어 오자 곽호는 장거운의 앞에 놓인 잔에 화주를 가득 따라 주었다.
“거운아, 한 잔 쭈욱 들이켜라! 여기 진화루가 가게는 허름해도 술맛은 항주 최고거든.”
“예, 흐읍.”
장거운이 잔을 들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화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어때? 화끈한 게 목구멍이 확 뚫리는 기분이지?”
“크헉, 근데 이거 무슨 맛으로 먹어요?”
시금털털하면서도 입안을 화끈거리게 하는 화주의 맛에 장거운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곽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진화루의 화주를 마셨을 때 장거운과 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화루의 화주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니 계속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무슨 맛이라니! 이 화주는 말이야, 코에 대면 뻥 하고 콧구멍을 뚫어 주고, 한 모금 머금으면 화끈하게 입천장을 쏘고, 꿀꺽 삼키면 목구멍을 알싸하게 울려 주는 바로 그 맛으로 먹는 거야.”
“형님 표현이 더 재밌네요.”
“그러냐? 하하하! 어쨌든 그 세 가지 맛이 원래 바로 이곳 진화루에서만 특별히 맛볼 수 있는 화주의 진미란 말이지.”
“헤, 이거 알딸딸하니 기분 좋은데요. 한 잔 더 주세요.”
장거운이 벌써 취기가 도는 듯 조금 빨개진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곽호는 화주를 따르려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려, 자자. 근데 거운이 너, 술 처음 먹는 건 아니지?”
“에이, 그럼요. 제가 할아버지 술심부름하면서 몰래 몰래 많이 먹어 봤거든요.”
“하하하! 사내대장부라면 모름지기 다섯 말의 술은 마셔야지!”
“그럼요. 헤!”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너의 무림맹 입맹을 기원하며 건배 한 번 하자!”
장거운이 기분 좋게 웃음을 흘리자 곽호가 자신의 화주 잔을 높이 들고는 건배를 제안했다.
그때, 장거운의 귓속으로 나직막한 코웃음 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입맹 시험 때가 되니 개나 소나 무림맹 타령이군.”
장거운은 중얼거림이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곽호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지만 코웃음을 친 상대가 백호당의 무사임을 알아보고는 슬그머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스레 나섰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수가 있는 것이다. 곽호가 혹시나 싶어 장거운을 쳐다보니, 그는 백호당의 무사가 아닌 다른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장거운은 빈정거리듯이 말을 뱉은 백호당의 무사가 아닌 그의 맞은편의 막 자리를 하고 있는 백의 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아침에 무림맹 정문에서 보았던 냉가혜였다. 그녀의 옆에는 백호당의 무사와 닮은 듯한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동행을 하고 있었다.
냉가혜와 동행한 백호당의 무사는 언가의 삼공자인 언충기였고, 또 한 명의 소녀는 그의 동생인 언무희였다. 언충기는 백호당의 선배 무사인 영호군의 부탁으로 그의 동생과 함께 냉가혜에게 항주를 구경시켜 주고 있는 길이었다.
언충기로서는 화산 최고의 기재이자 천하삼미로 손꼽히는 냉가혜를 수행하는 일이라 한껏 들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비웃음도 그러한 기분에서 나온 것이다. 자고로 남자란 미인 앞에서는 우쭐거리고 싶어지는 법인 모양이었다.
언충기는 장거운이나 곽호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도 하지 않은 채 냉가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냉 소저,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 이런 곳을 오자고 하십니까?”
“그래요, 언니. 여긴 너무 지저분하고 시끄러운데…….”
“언 공자님, 전 이런 곳이 좋아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잖아요.”
냉가혜를 보고 있던 장거운은 눈에 살짝 이채를 띠었다. 차갑고 도도한 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냉가혜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거운은 곧바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장거운의 호기심이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냉가혜가 고개를 돌려 장거운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장거운은 자신이 그녀를 몰래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어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반면에 냉가혜는 장거운이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냉소와 함께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사문인 화산을 떠나 이곳 항주로 오는 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장거운과 같은 불편한 시선들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그녀였다.
언충기가 말을 건넸다.
“그래도 이곳은 너무 허름하고 지저분하여 냉 소저와는 어울리지 않은 곳인데, 괜찮겠소?”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사실 사부님이 항주에 가면 꼭 먹어 봐야 할 것이 이곳 진화루의 화주라고 말씀하시곤 해서 한번 와 봤어요.”
“호! 화산제일검이신 백매검협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오?”
“그래요. 사부님은 이곳 술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냉가혜는 무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한편 장거운이 냉가혜에게 신경을 쓰는 듯하자 행여 언충기와 시비라도 붙을까 봐 걱정이 된 곽호는 잔을 내밀며 얼른 말을 걸었다.
“거운아, 뭐하냐? 자, 마시자!”
“예? 에예, 마셔야지요!”
화들짝 놀란 장거운이 얼른 잔을 들어 올렸다.
화주를 들이켜던 장거운의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았다. 한 명의 취객이 맞은편에 앉은 냉가혜 일행에게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취객은 상당히 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꺼억! 어라, 웬 선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냉가혜 일행의 탁자를 지나가던 취객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냉가혜 쪽으로 넘어지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냉가혜의 손에서 검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앉아 있던 장거운의 신형이 곽호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곽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장거운은 어느새 등을 보이고 있었다.
장거운은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는데, 한 손은 냉가혜의 손목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냉가혜가 내뻗은 검을 손등으로 막은 채 취객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취객이 자신에게 넘어지면서 손을 뻗자 냉가혜가 발검하여 손목을 잘라 버리려는 것을 장거운이 막아선 것이다.
“이익!”
냉가혜는 장거운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놔!”
냉가혜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장거운이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놓아 버리자 취객은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냉가혜는 냉랭한 표정으로 앉은 자세에서 몸을 틀며 검으로 장거운의 목을 베어 갔다.
장거운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냉가혜의 검을 피하는 순간 장거운의 왼쪽 옆구리로 강맹한 힘을 담은 주먹이 박혀 들었다. 냉가혜의 앞에 앉아 있던 언충기가 왼 주먹으로 언가권을 펼치며 달려든 것이다.
장거운은 왼손을 부드럽게 흔들며 언충기의 주먹을 살짝 밀어냄과 동시에 그의 왼 손목을 잡은 채 앞으로 쭉 당기면서 신형을 회전시켜 오른쪽 팔꿈치로 언충기의 목 뒷부분을 눌러 버렸다.
“큭!”
언충기는 외마디 신음만 흘릴 뿐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제압을 당한 것이다.
“반선수…….”
장거운이 언충기를 제압한 수법을 본 냉가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장거운이 언충기의 주먹을 흘린 수법은 소림의 무공인 반선수였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의 손목을 꼼짝 못하게 옥죄었던 수법은 십이금룡수의 한 수로 보였다. 왜 소림의 제자가 음적으로 보이는 자를 돕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냉가혜는 언충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냉가혜가 다시금 검을 고쳐 잡고 공격을 하려는 순간 입구 쪽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들 하지!”
장거운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나타난 사람은 정주의 명화루에서 장거운과 만났던 남궁천호와 삼십 대 중반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마른 체격의 사내였다. 그는 남궁천호의 친구이자 무림맹의 의당을 맡고 있는 당주인 흑면신수 당영기였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 위해 단골 술집인 이곳 진화루로 들어서다가 장거운 등의 행동을 목격하고는 싸움이 격해지는 것을 만류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장거운을 알아본 남궁천호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장거운 역시 남궁천호를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언충기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풀어 버렸다. 남궁천호는 장거운이 자신을 알아보자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한편 장거운의 손에서 풀려난 언충기는 재빨리 신형을 바로잡아 볼썽사납게 나자빠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엇보다도 냉가혜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어 더욱 화가 난 것이다.
“이놈!”
외마디 고함을 치며 다시 장거운에게 달려들려던 언충기는 냉가혜 등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에 박혀 있음을 느끼고는 공격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충기의 눈에 남궁천호와 당영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충기는 그제야 나타난 사람이 의당 당주인 당영기임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의당 당주님을 뵙습니다.”
“이런, 자네였군.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언충기를 알아본 당영기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언가의 삼공자이자 백호당의 무사인 언충기가 앳돼 보이는 청년에게 제압을 당했음을 알자 다소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당영기의 시선은 자신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장거운에게로 향했다. 언가의 삼공자를 손쉽게 제압한 장거운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언충기가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이자가 냉 소저를 덮치려 한 음적을 도왔습니다.”
“나는 단지 그녀의 손속이 과하다 싶어서 말린 것뿐이오.”
장거운이 언충기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번에는 당영기가 아직도 쓰러져 있는 취객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자가 음적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자가 냉 소저를 덮치려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단지 취해서 비틀거렸을 뿐이오.”
냉가혜가 장거운의 말을 받았다.
“거짓말이에요! 저자의 손에서 내기가 느껴졌어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냉가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손목을 잘라 버리려 했단 말인가?”
“그래요.”
대답을 하는 냉가혜의 표정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음적의 손목 정도는 잘라 버린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사부인 백매검협 기형두뿐만 아니라 화산파 전체의 떠받듦을 받아 온 그녀의 입장에서는 실로 당연한 생각일지도 몰랐다.
남궁천호가 쓰러져 있는 취객 쪽으로 다가서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진짜 취객인지 아닌지 보면 되겠군.”
취객에게 다가서던 남궁천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취객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취객이 갑자기 뛰어오르며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장거운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소검이 들려 있었다. 장거운은 단순히 취객이라고 생각하고 구해 주었던 자가 소검을 뽑아 들고 오히려 자신에게 덤벼들자 배신감에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놈!”
화들짝 놀란 곽호가 고함을 쳐 보았지만, 이미 장거운의 목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취객의 소검이 닿아 있었다.
당영기가 곽호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자네, 곽 위사 아닌가?”
“예, 당주님 안녕하십니까? 대주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저 아이가 자네 일행이었나?”
“예, 제 막내 아우뻘 되는 동생이온데…….”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곽호는 남궁천호의 물음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고는 분한 마음이 드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장거운을 인질로 잡은 취객이 말을 뱉었다.
“켈켈! 남궁천호, 아니 창천검룡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오랜만이군. 크크크.”
장거운을 제압한 취객이 괴소를 흘리며 말을 뱉자 언충기와 냉가혜 등의 얼굴에도 놀람의 빛이 흘렀다.
그들은 당영기와 함께 나타난 남궁천호의 정체를 알고 놀란 것이다. 당영기와 함께 나타난 사람이 만리추살의 전설을 가진 창천검룡 남궁천호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궁천호는 별반 표정의 변화 없이 장거운을 제압한 취객의 눈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남궁천호가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은 낯설었지만 눈빛은 남궁천호가 알고 있는 자였다. 취객의 정체는 상습적으로 부녀자를 추행한 혐의로 자신에게 잡혀 맹의 뇌옥에서 이 년간 형을 살았던 백변음마 구문호였던 것이다.
구문호는 진화루의 화주를 마시기 위해서 이곳을 왔다가 미모가 뛰어난 냉가혜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옛날 버릇이 나와 취한 척하며 슬쩍 냉가혜를 건드려 보려다가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장거운이 아니었다면 그의 손목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을 터였다.
냉가혜의 반격에 간담이 서늘해진 구문호는 끝까지 취객 행세를 하며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자신을 잘 아는 남궁천호의 목소리를 듣자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결국 구문호는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장거운을 인질로 잡는 도박을 벌여 성공을 한 것이다.
남궁천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백변음마 구문호! 감히 항주에 다시 기어들어 오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크크크.”
“등잔 밑에 또 등잔이 있을 수도 있지.”
“클클, 네놈의 궤변을 더 들어줄 시간이 없어 아쉽군. 어쨌든 이 멍청한 놈 때문에 두 번이나 살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직은 모르지.”
구문호가 장거운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말을 뱉자 남궁천호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비켜 주실까?”
구문호가 인질로 잡은 장거운의 목에 닿아 있는 소검을 바싹 당겼다.
그 순간 장거운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의 귀로 남궁천호의 전음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네 녀석 오지랖 넓은 것은 여전하구나!”
콰직!
장거운의 머리가 갑작스럽게 흔들리더니 안면이 박살 난 구문호가 피를 뿜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남궁천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장거운이 뒷머리로 구문호의 안면을 박아 버린 것이다. 장거운의 철두공은 앞쪽만 단련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화가 잔뜩 난 장거운은 재빨리 신형을 돌려 재차 구문호를 공격하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냉가혜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검으로 장거운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냉가혜는 냉랭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외쳤다.
“살인멸구를 할 셈이냐?”
“검을 거두게!”
남궁천호가 다가오며 외쳤다.
그러나 냉가혜는 검을 거두지 않은 채 대꾸했다.
“이자도 같은 일당이에요!”
“무슨 소리요! 거운이가 저런 자와 같은 일당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곽호가 나서서 펄쩍 뛰면서 손사래를 치며 외치자 이번에는 언충기가 나서며 호통을 질렀다.
“닥쳐라! 그럼 네놈도 같은 일당이구나!”
“그만들 하지, 이들이 음적과 같은 일당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지.”
장거운의 앞으로 다가온 남궁천호가 냉가혜의 검을 밀쳐 내며 말을 뱉었다.
“하지만…….”
언충기는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장거운에게 제압을 당했다는 사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언충기로서는 당장에라도 장거운을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그를 막아선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창천검룡 남궁천호는 이제 일 년차인 백호당의 평무사가 맞서기에는 너무 벅찬 존재인 것이다.
남궁천호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있는 구문호의 혈도를 짚고 난 뒤 다시 언충기와 냉가혜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같은 일당이라면 자네들을 제압하는 선에서 끝내지는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그리고 자넨 맹의 위사를 보고도 음적과 같은 일당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 그건…….”
언충기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남궁천호의 시선이 다시 냉가혜를 향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언충기와는 달리 냉가혜는 냉랭한 시선으로 멍하니 서 있는 장거운을 한 번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언충기는 당영기와 남궁천호에게 급히 고개를 조아리고는 동생인 언무희와 함께 급히 냉가혜의 뒤를 쫓았다.
검미를 찌푸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천호는 걸음을 옮기려다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장거운은 단순히 취객인 줄 알았던 구문호가 음적으로 드러나자 충격을 받았는지 쓰러져 있는 구문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남궁천호는 장거운과 곽호가 앉았던 탁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장거운에게 말을 걸었다.
“뭘 그리 보느냐? 이리 와서 앉아라.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곽호는 남궁천호가 장거운을 아는 듯하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남궁 대주님이 어찌 거운이를 아십니까?”
“예전에 정주에서 잠시 인연이 있었소. 곽 위사도 앉으시오.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한잔합시다.”
“예, 일단 저놈 먼저 치워 놓고 오겠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그냥 밖에 던져 버리시오. 제 놈도 이번에 손목이 날아갈 뻔하였으니 당분간 헛수작은 못할 것이오.”
“예, 알겠습니다.”
곽호는 정신을 잃고 있는 구문호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냐? 이리 와서 한 잔 받아라.”
장거운이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본 남궁천호가 고함을 쳤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장거운이 쭈뼛거리며 남궁천호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와 자리를 했다.
남궁천호는 장거운에게 화주를 따라 주며 물었다.
“조금 전 그놈이 그냥 취객이 아니라서 놀랐냐?”
“그게…… 그렇습니다. 전 단순하게 취객이 억울하게 손목이 잘릴 것 같아서 막아섰는데…….”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네 말도 맞고, 네 행동도 크게 그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의 일은 너나 그 화산의 아이나 둘 다 너무 자신의 판단만 믿은 것이다. 너는 막아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놈을 놓아주기 전에 화산의 아이에게 왜 검을 뽑았는지 물어봤어야 했다. 물론 그 화산의 아이도 자신의 판단만 믿고 함부로 검을 놀린 것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둘 다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지.”
“휴! 어렵네요.”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장거운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당영기가 말을 건넸다.
“자자,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하세.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장거운이라고 합니다.”
“그래, 장 소협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리게. 차차 살아가면서 배우게 되는 이야기들이야.”
“꼬맹이한테 소협은 무슨…….”
당영기의 말에 남궁천호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구문호를 밖에 내다 버린 뒤 술병과 잔들을 들고 탁자로 다시 돌아온 곽호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 경을 칠 뻔하였습니다.”
“됐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무슨 공치사인가? 이리 앉게.”
당영기가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 주었다.
자리에 앉은 곽호는 남궁천호에게 술을 따라 주며 말을 건넸다.
“예, 하하! 근데 남궁 대주님은 다시 복귀하신 것입니까?”
“그건 아니고, 항주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왔네.”
남궁천호의 말을 받아 당영기가 물었다.
“참, 솔직히 말해 보게. 맹주께서 자네를 보자고 하였다면 자네의 복귀를 거론하려는 것이 아닌가?”
“글쎄, 아직 만나 보지 않았으니 나로선 그 양반 속내야 알 수 없지 않은가?”
“아무튼 혹여 검군께서 복귀하라고 하면 딴생각하지 말고 두 눈 딱 감고 그러겠다고 하게. 청룡당을 위해서나 자네를 위해서나 무조건 복귀를 해야 하네.”
“뭐,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구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게!”
남궁천호가 계속해서 심드렁하게 대답을 하자 당영기는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남궁천호도 맹주인 화중혁이 자신을 보자고 한 것이 자신의 청룡당 복귀와 관련해서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문제가 아니라면 맹주가 달리 그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자신의 거취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남궁천호와 당영기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인이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궁 대주님, 웬만하면 복귀를 하시지요. 솔직히 이번 장가 놈 일만 해도, 대주님이 계셨다면 그렇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장가의 일이라니?”
곽호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결심을 한 듯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남궁천호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남궁 대주님도 아실 것입니다. 시전에서 푸줏간 하는 그 장육이 말입니다.”
“푸줏간 하는 장육이라면…… 아! 기억이 나는군. 아마 삼 년 전에 늦장가 든다고 싱글벙글거리고 다니던 그 푸줏간 장씨 말이군.”
“그 인간 내자가 얼마 전에 횡사를 당했습니다.”
“장 씨의 처가 횡사를?”
남궁천호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묻자 곽호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안됐지요. 예쁜 마누라 얻었다고 그렇게 싱글벙글거리고 다녔는데. 게다가 아이까지 잉태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청홍교를 지나다가 시신 수습하는 걸 봤는데 그 인간이 죽은 제 안사람의 손바닥을 뺨에 비비면서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지켜보던 저도 콧등이 시큰거리더라고요.”
곽호의 말을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갑자기 굳어진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당영기를 쳐다보았다.
“가만, 손바닥을?”
“타살이군.”
남궁천호와 눈이 마주친 당영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타살이라니요?”
곽호가 화들짝 놀라며 당영기를 쳐다보았다.
장육이 자신의 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타살당한 것이라고 그토록 울부짖었지만, 장육의 처가 자살을 할 이유도 없었지만, 타살을 당할 이유도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곽호는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의당 당주인 당영기가 타살이 확실하다는 투로 말을 하자 곽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이란 말만 듣고 어떻게 타살이라고 아세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거운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당영기가 장거운을 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물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서 급하게 숨을 쉬게 되어 창자에 물이 들어가게 되지. 창자에 물이 들어가면 자연히 두 손이 오그라지게 되어 있다네. 물에 빠진 시체들을 살필 때는 두 손을 움켜쥐고 있는지를 먼저 보는 것이 원칙인 게야.”
“그럼 익사체가 손바닥을 보였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사람을 죽이고 난 후에 물에 던졌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장 씨가 죽은 처의 손바닥을 강제로 펴지는 않았을 테니, 누군가가 이미 죽여서 물에 던져 넣었다는 말이지. 물론 다른 징후들도 살펴봐야겠지만, 곽 위사가 그날 본 게 사실이라면 타살이라고 의심해 볼 수 있지.”
당영기는 호기심을 보이는 장거운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어찌……!”
당영기의 설명을 듣고 있던 곽호는 울분이 치솟아 말을 잇지 못했다.
맹의 정문 앞에서 너무나 원통하게 울부짖던 장육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초에 관헌들은 백정에 지나지 않는 장육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의당의 당주인 당영기가 검험관이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놓쳤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묵묵히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장 씨가 청룡고는 울렸던가?”
“물론입죠. 그런데 부패를 받는 바람에 나흘 동안이나 맹의 정문 앞에서 생난리를 치기까지 했지요.”
“부패를 받았단 말이지.”
남궁천호가 눈을 빛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당영기가 불안한 표정으로 만류를 하고 나섰다.
“천호! 자네…… 그럼 안 되네!”
“이 사건은 확실히 의혹이 있지 않은가?”
남궁천호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그래도 자네는 안 되네. 결국 자네가 산서의 태원지당으로 밀려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부패가 던져진 사건을 억지로 파헤치다가 이렇게 된 것 아닌가 말일세. 가뜩이나 자네 말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하는 그 자존심 강한 관 당주가 가만있을 것 같은가?”
“가만있지 않으면?”
“이 사람이! 이번에도 관 당주와 싸우게 되면, 태원지당이 아니라 아예 청룡무복을 벗을 수도 있네!”
“벗어야 된다면, 벗을 수밖에 없겠지.”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궁천호의 태도로 보아 그는 이미 확고하게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만리추살’ 남궁천호가 청룡무복을 벗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당영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남궁천호가 가볍게 냉소를 흘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후후, 얼마 전에 어떤 녀석이 내게 그러더군, 청룡무사가 불의를 보고도 그냥 가도 되냐고, 그렇게 자비심이 말라 버린 가슴에서 청룡이 승천을 할 수 있냐고 말이야.”
“……!”
장거운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궁천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화가 나서 무심결에 뱉은 말을 남궁천호가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하지만 자네…….”
다시 말을 하려던 당영기는 말문이 막혔다.
누구보다도 남궁천호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당영기는 자신이 만류를 하여도 남궁천호의 생각이 바뀌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청룡무사로서의 초심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남궁천호의 태도로 보아 어떻게든 이번 사건을 파헤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사건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청룡당주인 관종호와의 충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 자신이 끼어들어야 했다.
당영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네. 자네가 꼭 파헤치겠다면, 장 씨의 부인을 내가 검시하겠네.”
“도와줄 텐가?”
“시일이 지난 일이라 과연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런 근거 없이 날뛴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
“고맙네. 그리고 꼬마야, 너도 내일 할 일 없지?”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천호가 갑자기 장거운에게 물었다.
“예? 그런데요?”
“그럼 같이 시체나 보러 가자!”
“시, 시체요?”
장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남궁천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장거운은 어이가 없었다. 뜬금없이 시체를 보러 가자고 해 놓고는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시체 구경이 무슨 경극 관람도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