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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장 씨! 장 씨 있는가?”
장육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힘없이 문을 열었다.
무림맹의 위사인 곽호와 함께 네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장육이 밖으로 나오며 고개를 조아렸다.
“대협, 오셨습니까?”
“거참, 대협이라고 하지 말래도. 사람 꼴이 이게 뭔가? 어여 인사드리게. 자네 처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 청룡당의 높으신 분들께서 나오셨네.”
곽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을 건넸다.
“예? 정말이십니까?”
장육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맹의 맹주가 다시 조사를 하라고는 했지만, 청룡당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기 때문에 실망을 하여 멍하니 집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청룡당에서 사람이 나온 것이다.
곽호의 말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그럼 내가 왜 왔겠는가?”
“감사합니다. 대협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장육이 연신 고개를 조아리자 곽호의 뒤에 서 있던 당영기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나는 무림맹 의당의 당주인 당영기라고 하네. 자네 부인의 시체를 묻은 곳이 어디인가?”
“묻다니요. 소인은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장육이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치자, 당영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시체를 어디 두었단 말인가?”
“그야 방 안에 있습지요.”
“아니, 그럼 여태까지 시체와 같이 잤단 말인가?”
곽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저 사람의 원통함을 풀어 주기 전까지는 결코 보낼 수 없습니다요. 저 사람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구먼요.”
“거, 사람 참…….”
장육의 애절한 말에 곽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는 남궁천호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일세. 나를 알아보겠나?”
“예? 아…… 그 육포를 많이 사 가시던……?”
의아한 표정으로 남궁천호를 쳐다보던 장육은 뒤늦게 남궁천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청룡무사 임무의 특성상 원행을 자주 다녀야 했던 남궁천호는 비상식량으로 쓸 육포를 사기 위해 장육의 푸줏간에 자주 들렀다. 그 덕분에 장육과도 제법 얼굴을 익혔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육포쟁이일세.”
“아이고, 대협! 한동안 안 보이셔서 어디 멀리 가셨나 했습니다요.”
“그래, 다른 곳에 좀 가 있었네. 자네 처의 일은 내가 책임지고 조사를 할 터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게.”
“감사합니다요. 대협! 꼭 제 처의 원통함을 풀어 주십시오!”
남궁천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장육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당영기 등을 향해 말했다.
“그만하고 들어들 가 보세.”
남궁천호와 장거운 등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시체의 부패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당영기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시체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보니 그래도 장육이 염(殮)은 하였는지 시체는 깨끗하게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비강을 후벼 파는 시체 썩는 냄새를 처음 맡아 본 장거운은 얼른 손으로 코를 막으려다가 충혈된 눈으로 부인의 시체를 쳐다보는 장육을 보곤 손을 내려 버렸다. 차마 장육의 앞에서 코를 막기 위해 손을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냄새였다.
당영기는 시체의 손을 먼저 만져 보았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시체의 손은 확실히 오그려 들지 않고 펴져 있었다.
그때 뒤늦게 방으로 들어선 염소수염을 한 장년인이 당영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당 대협, 그 손은 염을 하며 편 것일 수도 있고, 익사를 하더라도 창자에 물이 들어가지 않아 손을 펴고 있는 시체도 있습니다.”
말을 한 염소수염의 장년인은 관에서 검험을 담당하는 관리인 검험관 반호천이었다.
그는 당영기가 익사한 시체의 손을 살펴보지 않았다고 질책을 할까 봐 미리 말을 건넨 것이다. 주로 초검이 아닌 복검을 담당하는 반호천은 남궁천호와 당영기와는 잘 아는 사이여서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동료 검험관들의 실수 여부를 검증하는 일이어서 마음이 편치는 않은지 약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영기는 반호천을 힐긋 쳐다보고는 별말 없이 시체의 심장 밑에서부터 배꼽까지 손으로 두드려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시체의 옷을 벗기고는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시체의 등 쪽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당영기가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시체가 너무 차갑게 굳어서 육안으로는 자상(刺傷, 칼에 베인 상처)이나 혈음(血蔭, 구타를 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 늑살(勒殺, 목을 졸라 죽임)의 흔적도 없고 말이야. 그런데 여기를 두드려 보게.”
당영기가 가리킨 곳은 심장 아랫부분이었다. 반호천은 시체 옆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는 처음 당영기가 한 것처럼 시체의 심장에서 배꼽까지를 두들겨 보기 시작했다.
반호천이 침중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음……. 유난히 딱딱하게 굳어 있군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죽은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군요.”
반호천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자 당영기는 나직하게 꾸짖듯이 말을 뱉었다.
“바로 그것일세! 그런데 검장(檢狀)에는 전혀 그와 같은 기록이 없더군. 부인을 검시함에 잉태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던가?”
“초검에 소홀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반호천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당영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다시 말을 뱉었다.
“그게 나한테 죄송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정밀하게 복검을 할 것이니 사리(司吏, 검시를 참관하는 관리)로서 참관하게. 그리고 곽 위사는 근처에 아는 취생파(取生婆, 산파)가 있으면 불러오게.”
“예, 알겠습니다.”
곽호가 당영기의 지시를 받고 나가자 남궁천호는 장거운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뒤 주위를 살펴보다가 마당의 한가운데 적당한 자리를 골라 땅을 파라고 지시했다. 장거운은 헛간에 가서 곡괭이를 찾아 들고 남궁천호가 시킨 대로 딱딱하게 굳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네 녀석은 땅만 파고 살아도 먹고살겠구나.”
장거운이 땅을 파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천호가 실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확실히 어릴 때부터 도끼질을 비롯해 온갖 노동으로 단련된 장거운인지라 한 번 땅을 찍을 때마다 땅거죽이 푹푹 패여 들었다. 적당히 곡괭이질을 하고 나서 장거운이 삽으로 흙을 파내자 불과 일다경도 안 되어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널따란 구덩이가 마당에 생겨났다.
땅을 파는 것을 지켜보던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뱉었다.
“그래, 그 정도면 되겠다. 이젠 가서 장작이나 좀 들고 오너라.”
“근데 왜 마당에다 묻어요?”
“마당에 묻는 것이 아니라, 부인의 몸에 숨겨진 상흔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미 뻣뻣하게 굳은 시체의 몸을 따뜻하게 덥히면 숨겨진 상흔이 나타나는 것이지.”
장거운의 물음에 남궁천호가 담담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장거운은 장작을 가지러 뛰어갔다.
잠시 후 곽호가 취생파 일을 하는 노파를 불러오고 모든 준비를 마치자 당영기는 지게미 다섯 근에 마황(麻黃) 가루와 감초(甘草) 가루 각 석 냥씩을 넣고 달여서 만든 죽(粥)을 시체의 온몸에 골고루 바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궁천호는 술과 식초를 장거운이 판 구덩이에 뿌리고는 시체를 구덩이로 옮겼다.
뒤이어 당영기가 솜과 거적자리로 시체를 빽빽하게 덮고 나자 남궁천호가 삼매진화를 일으켜 구덩이 주위에 쌓아 둔 장작에 불을 피웠다. 이른바 증엄법(蒸짙法)이라는 방법으로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다.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당영기는 불을 끄고 시체를 꺼내 밝은 곳에 눕히고는 취생파로 온 노파에게 맹물에 술을 넣어 미리 삶아 놓은 백포(白布, 하얀 면수건)로 꼼꼼하게 시체를 닦도록 시켰다. 증엄법으로 부드럽게 한 시체를 이와 같이 닦게 되면 숨겨진 상흔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노파가 시체를 다 닦고 나자, 당영기가 다가가서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살펴보던 당영기는 침중한 낯빛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군데군데 희미한 상흔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흔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영기가 치명적인 상흔을 찾지 못하고 일어서자 반호천의 얼굴엔 저도 모르게 화색이 돌았다. 무림맹의 의당을 맡고 있는 당영기조차 상흔을 찾지 못한 이상 장육의 처는 자살이 분명해졌다. 초검의 과정에서 잘못은 있었을지라도 더 이상의 추궁은 면하게 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남궁천호가 다가서며 물었다.
“어떤가?”
“그게…… 타살로 볼만한 흔적이 없네.”
당영기가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남궁천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장육을 쳐다보았다.
“여보! 당신이 왜 자살을 한단 말이오!”
장육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려 하자 곽호와 장거운이 급히 막아서며 만류를 했다.
“이 사람! 진정하게!”
그런 장육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당영기가 처연한 표정으로 노파에게 물었다.
“아이의 사체를 꺼낼 수 있겠소?”
“아이고! 그냥 제 어미랑 같이 있게 놔두지, 꺼내시게?”
노파의 말에 당영기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부인의 시체를 보고 있는 장육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죽은 아이지만, 세상구경은 한번 시켜 줘야 하지 않겠소? 아이를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비의 소원도 들어주고 말이오.”
“그러면야 뭐, 꺼내지요.”
노파는 대답을 하고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시체의 다리를 벌리고 음부에 손을 넣기 시작했다.
“에구머니나! 이게 뭐야!”
노파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오?”
“아이고, 산문(産門)에 이상한 것이 있어!”
당영기의 물음에 노파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산문에 무엇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어서 꺼내 보시오!”
“에그, 이게 뭐야!”
노파가 시체의 음부에서 꺼낸 것은 한 자 길이의 오죽을 깎아 만든 비도인 죽비(竹匕)였다. 단단한 오죽으로 만든 죽비는 광택이 없고 쇠의 차가운 예기가 느껴지지 않는 데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약간의 내기만 주입하면 일반 비도와 다름없기 때문에 종종 살수들이 은밀히 살행을 할 때 쓰는 무기였다.
당영기는 노파가 떨어뜨린 검은색의 죽비를 주워 들고 부들부들 치를 떨고 있었다. 당영기가 그토록 치를 떨며 화를 내는 것은 흉수의 수법이 너무나 잔악했기 때문이다.
흉수는 장육의 처를 간음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비를 산문에 깊숙이 박아 넣어 죽인 것이다. 게다가 죽비는 취생파인 노파가 뱃속에서 죽어 있을 아이를 꺼내기 위해 시체의 자궁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손을 넣지 않았다면 쉽게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흉수는 잔악하면서도 치밀한 놈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거운 역시 경악에 찬 표정으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생각조차도 해 보지 못한 세상의 흉험함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청룡무사가 된다면 일상처럼 맞닥뜨려야 될 세상의 무서움이었다.
“오죽색마!”
갑자기 남궁천호의 입에서 외침이 흘러나왔다.
“오죽색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작년에 산서성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네. 그때는 피해를 입은 여인이 죽기 전에 발견이 되어 놈의 인상착의와 수법이 드러나게 되었지. 오죽색마란 이름도 그놈이 사용한 오죽으로 만든 비도 때문에 붙여진 것일세. 놈은 그 이전에도 다섯 번의 간살 사건을 더 저지른 것으로 판명된 흉악한 변태 색마 놈일세!”
당영기의 물음에 남궁천호는 얼굴이 상기된 채 설명을 했다.
오죽색마는 남궁천호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자였다. 산서의 태원지당에서 오죽색마의 사건이 벌어지자 남궁천호는 놈을 추격하여 거의 다 따라잡았지만, 결국 장성 밖으로 달아나는 오죽색마를 놓치고 말았었다. 그런데 놈이 다시 이곳 항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죽색마, 이 개자식! 신수, 자네가 여길 마무리해 주게.”
남궁천호는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말을 내뱉고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룡! 어디 가는 건가?”
“맹주를 만나러 가네!”
당영기는 남궁천호의 외침에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복귀를 결심한 모양이군. 휴…….”
제4장 입맹시험(入盟試驗)
“삼십삼 번 장거운!”
“예! 갑니다요! 어서 가 봐라. 잘해!”
무사 시험을 진행하는 심사관이 장거운을 호명하자 곽호가 손을 번쩍 들며 외치고는 장거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장거운이 무사 시험을 보기 위해 입맹하자 곽호는 자신이 삼관까지 안내를 해 주겠다고 하면서 근무까지 내팽개치고는 장거운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러고는 장거운이 삼관에 입관할 때까지 같이 기다려 주던 중이었다.
“예, 걱정 마세요. 헤헤.”
장거운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곽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씩씩하게 삼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거운이 심사관을 따라 삼관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인공 연못이 보였다. 그곳이 곽호가 말한 경공을 심사하는 일관의 연못인 모양이었다. 그 앞에는 이제 막 심사를 치르려는 듯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명의 청년과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냉가혜의 모습이 보였다. 냉가혜는 자신의 앞 순번인 서른두 번째의 지원자였다.
모두들 이제 막 심사를 하는 지원자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지, 장거운이 들어왔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냉가혜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앗!”
서른한 번째의 지원자인 청년이 내공을 충분히 끌어올렸는지 호기로운 기합과 함께 신형을 연못 위로 날렸다. 그러나 청년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삼 장 정도 지나자 벌써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다시 물을 박차며 신형을 띄우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곧바로 물에 풍덩 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장거운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힘차게 신형을 날렸던 청년이 건너서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히 오 장의 거리가 결코 날아서 건너기에 쉬운 거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심사관들의 시선이 냉가혜에게로 향했다.
“삼십이 번 냉가혜! 앞으로 나오시오!”
자신이 호명되자 냉가혜는 앞의 도전자가 실패를 했음에도 별다른 긴장감이 없는지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돌아보던 냉가혜의 시선이 장거운과 마주쳤다.
장거운은 저도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지만 냉가혜는 차가운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고는 즉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는 진화루에서의 일에 대해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냉가혜는 별 망설임 없이 신형을 띄웠다. 그러고는 빠르게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백색 경장을 입고 연못 위를 날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한 마리의 물새와도 같았다.
냉가혜는 미끄러지듯이 허공을 날아가다 연못의 끝 부분에 이르러 신형이 아래로 떨어지자 자신의 왼 발등을 오른발로 찍으며 몸을 다시 솟구쳐 올리고는, 우아하게 건너편에 내려섰다. 비연표에 이은 발보등천의 매끄러운 연결 수법이었다.
“휘이! 대단하군. 수면을 한 번도 차지 않다니 말이야!”
여기저기서 감탄을 하며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장거운은 이곳 일관 안에는 보기보다 보는 눈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면을 차고 건너가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아마도 냉가혜 앞에서 실패한 지원자는 물을 제대로 차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장거운은 원래 시도하려고 하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사실 장거운은 일관인 경공관이 제일 자신이 없었다. 경공이라는 수법을 따로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택한 방법이 용형보를 빠르게 펼쳐 땅 위를 달리듯이 물 위를 달리는 방법이었다. 장거운은 자신이 전력으로 펼치는 용형보가 제법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성공할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냉가혜가 수면에 닿지도 않고 연못을 건너자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자신도 수면에 발을 닿지 않고 연못을 건너고 싶었던 것이다. 장거운은 다시 선택한 방법을 떠올리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삼십삼 번! 장거운.”
자신이 호명되자 장거운은 쭈뼛거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장거운은 냉가혜가 섰던 연못 끝의 출발점에 서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심사관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무엇을 말인가?”
“그러니까, 반드시 여기 끝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더 멀리서 경공을 펼치겠단 말인가?”
“예, 저기 저 뒤에서 하면 안 됩니까?”
“거리가 멀면 멀수록 불리하지 않은가?”
심사관이 장거운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여 보려고 연못에 바싹 붙어서 서는데 장거운은 오히려 뒤쪽에서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물었다.
“그게, 어쨌든 물에 빠지지 않고 연못만 건너면 되는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물론 출발점에 대한 규정은 없네. 물에 빠지지 않고 연못만 가로지르면 된다네.”
“예, 감사합니다.”
심사관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을 하자 장거운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성큼성큼 뒤로 물러났다.
장거운이 갑자기 연못의 출발점에서 한참 뒤로 물러나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공으로 오 장의 거리를 넘는다는 것은 제법 고수 소리를 듣는 이들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장거운은 오히려 더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출입구까지 물러난 장거운은 심사관을 쳐다보고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갑니다!”
바바바박!
고함 소리와 함께 장거운이 연못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핫!”
순식간에 연못 끝의 출발점에 도달한 장거운의 신형이 기합 소리와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쾅!
벽에 물체가 부딪히는 큰 소리와 함께 장거운의 신형이 연못의 건너편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건너편까지 날아간 장거운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힌 것이다.
두두둑! 두두둑!
몸을 일으킨 장거운이 목과 팔다리를 돌리며 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연못을 건넜다는 사실에 장거운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심사관님! 저 합격 맞지요?”
합격 여부를 판정하는 심사관이 멍하니 장거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 자네 괜찮은가?”
“예, 헤헤, 제가 원래 좀 튼튼해서요. 근데 저 합격 맞죠?”
“그, 그게…… 삼십삼 번 통과!”
잠시 머뭇거리던 심사관이 통과를 선언했다.
장거운이 뒤에서 달려오는 탄력을 이용하여 말 그대로 연못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경공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물에 빠지지 않고 연못을 건넌 것은 사실이었다. 규정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심사관의 미덕이었다.
“흥!”
냉랭한 콧소리가 들려오자 장거운이 고개를 돌렸다. 암기관인 이관으로 가는 입구에서 냉가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연못을 뛰어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암기관의 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거 얼마를 뛴 거야? 칠 장은 넘지 싶은데. 무슨 대와공(大蛙功)이라도 새로 생긴 거야? 개구리보다는 벼룩에 가깝지 않나?”
예상보다 쉽게 일관을 통과한 장거운이 들려오는 온갖 잡소리들을 뒤로하고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암기관에 들어서자, 냉가혜가 암기관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 앞에서 심사관의 주의 사항을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주의 사항을 다 듣고 난 뒤 냉가혜는 차가운 눈초리로 장거운을 힐긋 쳐다보고는 즉시 동굴의 입구로 몸을 날렸다.
장거운이 다가가자 심사관이 다시 주의 사항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암기관은 삼십 장의 동굴로 되어 있네. 그 삼십 장의 동굴을 일각 안에 통과해야 하는 것이지. 그리고 동굴을 지나는 동안 정확하게 백팔 개의 다양한 암기가 날아올 것일세. 암기에는 수면독이 발라져 있어 암기를 맞게 되면 그 자리에서 잠들게 되어 있으니 암기를 맞지 않고 동굴을 통과하면 되는 것이지. 출발은 일각 후일세. 일각이 지날 동안 나오지 않으면 심사관들이 들어가서 자네를 꺼내 올 것이니 피곤하면 그냥 암기 한 대 맞고 그곳에서 푹 자면 되네.”
“당 당주님. 입 안 아프세요?”
장거운이 실소를 지으며 물었다.
암기관의 심사관은 의당의 당주인 당영기였다. 생각해 보면 의술 못지않게 암기술이 뛰어난 당가 출신인 그가 암기관을 맡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당영기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쉿! 아는 체하면 안 돼! 잘해 보게!”
“알겠습니다!”
장거운은 동굴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는 동굴의 입구로 다가섰다.
“삼십삼 번 출발!”
들어가도 좋다는 지시가 떨어지자 장거운은 숨을 가다듬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 안은 일정한 간격으로 등불들이 걸려 있어서 완전히 컴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반인이나 무공이 약한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제대로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쉭!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오자 장거운의 손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장거운의 손바닥에는 끝이 뭉툭한 비도가 놓여 있었다. 비도는 시험을 치루는 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끝을 뭉툭하게 갈아 놓았지만 비도의 끝에는 작은 침이 박혀 있었다. 그 침에 수면독이 묻어 있는 모양이었다.
장거운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듣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자신 있거든요. 우리 할배가 솔잎으로 얼마나 날 괴롭혔는데!”
쉭! 쉭! 쇄액! 쇄액!
날아오는 암기들이 늘어남에 따라 장거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라진 움직임과는 달리 장거운의 표정은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그의 말대로 날아오는 암기들은 할아버지가 던졌던 솔잎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백타의 기본은 온몸으로 느끼는 초인적인 감각과 육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동물적인 반사 신경이라고 주장하면서 틈만 나면 솔잎들을 날려 댔다. 누군가 그까짓 솔잎 맞아 봐야 아프기나 하냐고 묻는다면, 장거운은 당장에라도 당신이 한번 맞아 보라고 외칠 것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철두공과 금강나한공이라는 무식한 외공을 온몸으로 익혀 웬만한 칼에는 상처도 나지 않는 장거운이었다. 그 덕분에 일관에서 그토록 강하게 벽에 부딪히고도 전혀 탈이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 철갑 같은 장거운의 몸을 그 부드러운 솔잎이 여지없이 일 촌가량이나 박혀 들었다. 말이 솔잎이지 할아버지가 던지는 솔잎은 무쇠 침보다 더 단단한 솔잎이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할아버지의 솔잎에 대한 악몽을 떠올리면서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동안 어느새 동굴은 끝이 나고 있었다. 장거운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관문들이 좀 싱겁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관인 암기관을 나섰다.
암기관의 출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십 대 초반의 여자 심사관은 장거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오자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약간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색을 하고는 외쳤다.
“삼십삼 번 장거운, 이관 통과!”
“천호 오라버니는 어리바리하다고 하더니만 그렇지도 않네? 호호호!”
또다시 장거운의 귀로 전음이 파고들었다.
이관의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관은 당영기의 여동생인 당영영이었다. 그녀 역시 의당에 속해 있었지만 암기에 관해서는 당영기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어 암기관의 심사관을 맡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남궁천호에게서 장거운이 어수룩하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장거운은 자신에게 전음을 보낸 여자 심사관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저기요, 심사관 누님! 이거 어떻게 해요?”
“누님? 호호호! 그게 뭔데?”
앳돼 보이는 장거운이 누님이라고 하자 기분이 좋아진 당영영이 교소를 터뜨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저기 안에서 누가 던져 주던데요?”
“뭘 던져 줘? 어머! 이걸 다 받아 가지고 왔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백여덟 개 맞을 거예요. 놓친 건 없거든요. 그럼 수고하세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당영영 앞에 동굴에서 받아 낸 암기들을 쏟아 낸 장거운은 싱글거리며 삼관으로 향했다.
장거운이 삼관으로 들어서자 한쪽 편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냉가혜의 모습이 보였다. 냉가혜는 이관을 통과하면서 제법 기력을 소모했는지 다소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거운이 웃는 얼굴로 냉가혜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를 발견한 냉가혜의 눈에 이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장거운이 이관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이관을 지나고도 지친 기색 없이 싱글거리고 있는 장거운의 모습에 놀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냉가혜가 장거운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장거운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냉가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 그날은…….”
냉가혜가 서릿발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자 장거운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삼십이 번 냉가혜!”
때마침 심사관이 호명을 하자 냉가혜는 새침하게 눈을 아래로 깔고는 심사관 쪽으로 가 버렸다.
‘햐,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네. 확실히 이름이 안 좋아.’
“어이, 거기 자네가 장거운인가?”
냉가혜를 쳐다보며 속으로 투덜대고 있던 장거운은 화들짝 놀라며 앞을 바라보았다. 삼관의 심사관이 자신에게 이름을 묻고 있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도 이리로 오게. 어차피 자네가 마지막이라고 하니 같이 설명을 해 주겠네.”
“옛!”
장거운은 큰 소리로 대답을 하며 심사관 앞으로 다가가 냉가혜의 옆에 섰다. 장거운이 곁눈질로 흘깃 냉가혜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삼관의 출입구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장거운은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심사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잘 듣게! 삼관 안에는 모두 일흔두 명의 목인이 있네. 목인들이라고 해서 나무인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본맹의 위사들이지. 다만 그들은 등갑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목인이라고 하는 걸세. 삼관의 규칙은 간단하네. 그들 칠십이 명의 위사들을 모두 제압하고 출관하면 되는 것일세. 혹시 다른 질문이라도 있나?”
“저기, 제압한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장거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제압이라고 하면 십이금룡수로 상대의 완맥을 쥐거나, 관절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상대의 팔다리를 부수어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심사관이 말하는 제압은 의미가 다른 것 같았다.
심사관의 대답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제압을 하는 것이네. 물론 제압을 하라고 해서 목인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라는 뜻은 아니네. 그들은 맹의 위사들이니 말이야. 제압을 한다는 것은 점혈을 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말일세.”
“저, 점혈……!”
장거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외쳤다. 그러한 장거운의 외침에 냉가혜의 눈에 잠시 이채가 스쳤다.
심사관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장거운을 쳐다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왜 그리 놀라는가? 설마 점혈법을 모르지는 않겠지? 위사들이 입고 있는 등갑에는 개개인마다 각기 다른 위치에 구멍이 하나씩 나 있는데, 그 구멍은 바로 사람의 신체에 있는 일흔두 개의 마혈을 짚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네. 그냥 일흔두 개의 마혈을 차례대로 짚어 나간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일세.”
“안 쉬운데…….”
장거운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장거운 역시 눈을 감고서도 상대의 혈을 짚을 만큼 점혈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금강지와 같이 직접 상대의 혈을 누르는 지법뿐만 아니라, 탄지신공과도 같은 격공지의 수법까지도 배웠다.
흔히 점혈이라는 말은 상대의 혈을 치거나 눌러 순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과 지금 심사관이 말하는 점혈법,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심사관이 말한 점혈법은 점혈을 하면서 내기를 심어서 그 내기가 혈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은 상대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그러한 방법이 더 일반적인 점혈법이었다. 다만 내기를 밖으로 뿜을 수 없는 장거운으로서는 방법은 알아도 그러한 점혈법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청석도 꿰뚫을 수 있는 단단한 손가락으로 상대의 혈도에 구멍을 내어 죽일 수는 있지만 상대를 일정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거운이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냉가혜의 질문이 이어졌다.
“반드시 손으로 점혈을 해야 하나요?”
“아, 그건 각자 자신 있는 무기로 해도 되네. 검으로 검기점혈을 해도 되고 간단히 지공으로 점혈을 해도 된다네.”
심사관의 말에 냉가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검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아무래도 검파인 화산파의 제자인 냉가혜로서는 매화지와 같이 손으로 펼치는 수법보다는 검기를 뿜어 상대의 혈도에 내기를 심는 검기점혈이 더 편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냉가혜는 여자인지라 상대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점혈을 해야 하는 매화지의 수법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검을 사용하는 검기점혈이 더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장거운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저기, 반드시 점혈을 해야 하나요?”
“일흔두 명이나 되는 사람을 점혈을 하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가 있나?”
“그게…… 없는 것 같군요.”
“아, 물론 삼관의 심사 규정에는 반드시 점혈을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네. 능력이 된다면 섭혼술이나 제령술로 그들을 제압해도 되네. 단, 절대로 그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고 말일세.”
“…….”
장거운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모양새는 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장 걱정했던 일관을 무사히 통과하자 삼관 통과는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었던 장거운이었다. 암기관이나 목인관은 나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관인 목인관은 할아버지가 어릴 적 얘기해 주던 소림사의 삽십육목인방을 생각했다.
소림사의 목인방 역시 혈도를 점해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것이지만, 목인과 사람은 달랐다. 목인은 혈도 부위를 강하게 눌러 버리면 동작을 멈추지만, 사람은 한 번 누른다고 해서 계속 동작을 멈추지는 않는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당신이 목인방을 통과할 때 썼던 방법을 쓸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서른여섯 개의 목인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고 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심사관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이미 일관과 이관을 통과한 장거운이 점혈법을 모른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우측 출구에서 위사가 나타나 청색 깃발을 들어 보이자 심사관은 냉가혜에게 입관을 지시했다.
“준비가 된 것 같군. 삼십이 번 냉가혜! 삼관으로 들어가게.”
냉가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삼관의 입구로 다가갔다.
“흥! 멍충이!”
귓속을 파고드는 전음에 장거운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냉가혜가 삼관의 입구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점혈법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조롱의 말을 던지고 사라진 것이다.
‘저게! 진짜…….’
장거운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똑같이 전음으로 ‘얼음귀신!’이라고 한마디 돌려주고 싶었지만, 전음도 쓸 수 없는 그로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째려보는 것 외에는 달리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
냉가혜가 사라지고 나자 장거운은 주위를 빙빙 돌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점혈, 점혈…… 점혈!”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던 장거운이 갑자기 이관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어디 가는가? 심사를 포기하려면 출구는 저쪽 우측일세!”
심사관이 외쳤지만, 이미 모습이 사라진 장거운의 외침만이 이관으로 향하는 통로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요. 이관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요. 누님! 잠시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