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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가뜩이나 날씨도 쌀쌀한데 휑하군!”
소연무장에 들어선 모용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악우진도 소연무장에 마련된 각 당의 면접대를 둘러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각 당의 면접대에는 무사를 지원하는 자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반면에 청룡당의 면접대는 휑하니 비어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후기지수들이 청룡당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지원자들이 줄어 올해는 달랑 두 명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나마 그 두 명도 삼관 통과를 아직 못했는지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청룡당에 몸을 담고 있는 악우진과 모용현으로서는 착잡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모용현이 면접관의 자리에 앉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흠, 무슨 저잣거리의 장터도 아니고 꼭 이렇게 해야 하나…….”
“무사 시험 면접은 원래 각 당이 모두 모여 이렇게 연무장에서 같이 보는 게 전통 아닙니까?”
“그건 맞는데, 상황이 이러니 기분이 좀 그렇군. 청룡당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 반대일 때도 있었지. 지금 우리가 곤란하다고 오랜 전통을 바꾸자고 하면 되겠는가?”
악우진의 말에 중얼거리며 대꾸를 하던 모용현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남궁천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임 청룡 일대주였던 남궁천호가 청룡당주로 맹에 복귀를 한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가 뭐란다고 바뀔 것도 아니고…….”
남궁천호에게 읍을 한 뒤 모용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뱉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청룡당의 일대주인 모용현은 전임 당주인 관종호의 사임 소식을 듣고 내심으로는 자신이 당주가 될 것으로 기대를 했지만, 산서의 태원지당에 있던 남궁천호가 갑자기 신임 당주로 복귀하자 남궁천호와는 조금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물론 그로서도 자신보다 먼저 청룡당 일대주를 역임한 적이 있고, 명성도 높은 남궁천호가 신임당주가 된 것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기에 다소 아쉬웠던 것이다.
남궁천호 역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약간은 착잡한 표정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늘 지원자로 북적이던 청룡당의 면접대가 이제는 너무 초라해져 버린 것이다. 자신이 처음 청룡당에 입당할 때를 생각하면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청룡당의 면접대에 앉은 세 사람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돌아보고 있을 때 천방추가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대주님! 대주님!”
“또 무슨 일인가?”
모용현이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묻자 천방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건넸다.
“기록이 깨졌습니다. 삼관 기록이 십 년 만에 깨졌다고요.”
천방추의 말에 모용현이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십 년 전에 그 기록을 세운 사람이 바로 악우진이기 때문이었다.
악우진은 십 년 전에 정확하게 이각 만에 삼관을 돌파하여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 말을 들은 악우진도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당연히 그로서도 자신의 기록이 깨어진 것이 기분이 좋을 리는 없는 것이다.
모용현이 다시 물었다.
“얼마 만에 돌파한 거야?
“예, 이각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삼관을 통과했답니다. 그것도 우리 청룡당 지원자입니다.”
이번에는 악우진이 물었다.
“청룡당 지원자? 그게 누구라고 하던가?”
“냉가혜입니다. 그 매화옥녀 냉가혜 말입니다.”
“호! 백 년 내 화산제일의 기재라더니 과연 제법이군.”
모용현이 감탄의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도 이번에 지원한 냉가혜에 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물었다.
“청룡당 지원자 중에 통과한 자는 그 아이밖에 없다고 하던가?”
“에이, 청룡당 지원자라고 해 봐야 달랑 두 명밖에 없잖습니까? 나머지 한 놈은 반 시진 가까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못 나오고 있다고 하던데요.”
천방추가 약간은 호들갑스럽게 대답을 하자 모용현이 그의 말을 받았다.
“하나면 어떤가! 섬창의 기록을 깬 아이가 들어오는 마당에 말이야.”
남궁천호가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뱉었다.
“그 아이가 청룡무사가 되고 안 되고는 면접을 봐야 결정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그 아이를 면접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청룡당은 무공의 고하보다는 인성을 중시하는 곳이야! 인성이 안 되어 있다면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받아들일 수 없네.”
모용현의 물음에 남궁천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악우진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지금 당의 인원이 많이 부족합니다. 한 명의 손이라도 아쉬운 판에 그만한 인재를 떨어뜨린단 말입니까?”
“반드시 떨어뜨린다고는 하지 않았네. 다만, 검증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지.”
“…….”
남궁천호의 말에 악우진은 더 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과거 상관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남궁천호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모용현이 천방추에게 말을 건넸다.
“근데, 삼관을 통과했으면 이리로 와야지 왜 안 오는 것이냐?”
“그게 저…… 오다가 맹주님이 잠시 이야기를 하고 보내시겠다고 해서…….”
천방추의 말에 남궁천호가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천방추, 자네가 가서 냉가혜라는 아이에게 일각 이내로 오지 않으면 실격이라고 전하게.”
“옛? 아니, 그게 맹주님이 시간을 좀 내 달라고 하신 건데…….”
“맹주님이건 누구건 간에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걸세. 가서 당장 전하게!”
“저기 오는군요.”
모용현이 앞쪽을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앞쪽에서는 냉가혜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장거운이 히죽거리며 따라오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의 모습을 본 남궁천호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떠올렸다. 통과가 힘들 것 같다고 하더니 그래도 다행히 삼관을 통과한 모양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면접대 앞으로 다가온 냉가혜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냉가혜가 머리를 숙이자 남궁천호의 눈에 살짝 이채가 스쳤다. 진화루에서 만난 냉가혜와는 조금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냉가혜가 조금 차가운 성정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싹수가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모용현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아니, 뭐 늦을 수도 있지. 천천히 숨이나 고르게.”
“자네는 뭔가?”
악우진이 냉가혜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장거운을 보고 물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장거운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장거운인가? 통과를 못할 것 같다고 하더니 용케 통과를 한 모양이군.”
모용현이 무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예, 그게 약발이 잘 안 받아서…….”
“약발? 심사 보기 전에 만년삼왕이라도 달여 먹었나?”
“그게 아니라, 빨리 잠들지 않아서…….”
모용현이 농담처럼 말을 던지자 장거운은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뭐, 어쨌든 통과를 했으니 여기로 왔겠지…….”
모용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 있는 악우진도 겨우 삼관을 통과한 지원자답게 어리바리한 대답을 하고 있는 장거운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장거운을 대하는 모용현과 악우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궁천호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냉가혜에게 말을 걸었다.
“냉가혜, 청룡당을 지원한 이유가 뭔가?”
“그게, 사부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언젠가 우연찮게 세원록(洗寃錄)이라는 책을 봤는데, 세상에는 강자들의 횡포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런 사람들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싶었습니다.”
“세원록이면 원대에 기록된 검안서로군. 사체를 놓고 이것저것 살펴보며 풀어나가는 것이 재밌어 보였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단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남궁천호는 냉가혜의 말에 이채를 띠고는 다시 물었다.
“말은 그럴듯하군. 혹시 자네가 차고 있는 검이 왜 두 개의 날을 가지고 있는지 아나?”
“그건…… 흔히 양날의 검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쓰기에 따라서 타인을 해칠 수도 있고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지. 검은 곧 힘을 의미하고 그 힘은 타인을 벨 수도, 자신을 벨 수도 있다. 그만큼 힘을 가진 자는 그 힘을 쓸 때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지. 무인은 별생각 없이 타인의 손목을 잘라 버릴 수 있지만, 그 손목을 잘린 사람이 무인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생업을 포기하고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 수도 있네.”
“그건…….”
냉가혜는 남궁천호가 진화루에서의 일을 질책한다는 것을 알고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남궁천호가 말한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손속이 과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도 그날 돌아오면서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음을 자책했던 것이다.
자신을 건드리려는 음적의 손길 정도는 매화산수로 가볍게 흘려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마혈을 짚어 꼼짝 못하게 한 뒤 창피를 주는 선에서 끝을 냈어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이제껏 접해 보지 못한 시끄럽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냉가혜의 표정을 보고 있던 남궁천호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면접은 그만 마치도록 하지!”
“저기, 저한테는 뭐 안 물어보십니까?”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남궁천호의 물음에 장거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천방추, 자네가 이들을 데리고 가서 사공한에게 인계를 해 주게. 두 사람은 이대에 소속될 것일세.”
“둘 다 합격입니까?”
남궁천호의 말에 악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남궁천호가 장거운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자, 당연히 탈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궁천호가 말을 뱉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냉가혜는 몰라도 장거운은 아직 검증이 안 되었습니다. 그의 사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삼관을 통과했으면 자격은 된 것이고, 사람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면서?”
“사람은 부족합니다만, 당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무나 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 멍청하기는 하지만, 아무나 정도는 아니니 그냥 데려다 쓰게.”
“그래도…….”
악우진은 뒤늦게 남궁천호가 장거운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논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장거운과 냉가혜를 보며 말을 건넸다.
“어쨌든 두 사람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청룡무사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악인을 쫓다 보면 노숙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과중한 업무 때문에 개인적으로 수련할 시간조차 따로 가질 수 없다. 물론 사황련이나 마교의 효웅 거마들과 싸워 천하에 무명을 날린다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어쩌면 무의 극의에 도달해 보겠다는 무인으로서의 꿈마저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청룡고를 울린 뒤 너희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진정 어린 감사의 말 한마디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남궁천호의 말에 모두가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용현이나 악우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일을 행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청룡무사의 길을 걸어 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저기,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숙연해진 청룡당 면접대의 분위기를 깨고 불쑥 끼어든 이가 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외당의 당주인 적면철권 황보명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둥그스름한 얼굴을 가진 그는 남궁천호의 친구였고, 또한 이관의 출구에 서 있던 심사관인 당영영의 부군이기도 하여서 당영기와 남궁천호 등과는 친분이 각별한 사람이었다.
남궁천호가 물었다.
“철권, 무슨 일인가?”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여기 장거운이라고 있나?”
“예, 전데요?”
“너 이 자식!”
장거운이 대답을 하자 황보명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예?”
“무슨 일인가?”
장거운이 멍하니 대답을 하자 남궁천호가 나서서 황보명에게 물었다.
황보명이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이 자식아! 너 우리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남궁천호가 다시 물었다.
“저놈이 어떻게 점혈을 했는지 목인으로 차출된 위사 애들이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다잖아!”
황보명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장거운에게로 향했다. 특히 냉가혜는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장거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관의 입구에서 장거운이 점혈법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거운이 쭈뼛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게요. 수면독이 조금 약한지 잘 안 듣더라고요. 그래서 두 방 찔린 사람도 있고 해서 그렇지,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수면독이라니? 목인들을 점혈하지 않고 수면독으로 재웠단 말이냐?”
“예, 그게 제가 점혈은 할 줄 아는데 힘 조절이 잘 안 되거든요. 그래서 다칠까 봐…….”
남궁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장거운이 대답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남궁천호의 물음이 이어졌다.
“수면독을 어디서 났느냐?”
“그거, 이관에서 날아온 암기에 수면독이 묻어 있잖아요.”
“그럼 그 암기를 모두 받아 가지고 삼관에 들어갔단 말이냐?”
이번에는 황보명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게 제가 원래 나올 때 심사관 누님한테 드렸는데요, 삼관의 심사관님이 반드시 점혈을 안 해도 목인들을 제압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에 그 누님한테 다시 가서 받아 왔어요. 그럼 안 되나요?”
“그야, 뭐,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근데 이 자식이! 누구보고 누님이라고 하는 거야?”
장거운의 말에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황보명이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장거운이 암기관의 심사관을 맡았던 자신의 처인 당영영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궁천호가 나서며 말을 건넸다.
“그만하게! 어차피 무기는 원래 상관이 없으니 수면독이 발린 암기를 사용했다는 게 규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내 말은, 통과는 했는데, 이 자식이 우리 영영이보고 누님이라고 하잖아!”
황보명이 불퉁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때 황보명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이 어때서 그래요?”
“헉! 부인! 어, 언제 오셨소?”
“당신은 내가 어려 보여서 누님 소리 좀 듣는 게 그렇게 화가 나요?”
“아니, 절대 그렇지 않지!”
황보명은 고개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어 보였다.
당영영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남의 면접장에 와서 무슨 말이 그리 많아요? 위사들은 다들 해독시켜 놨으니 그만 가요!”
“어? 어. 가야지.”
황보명은 얼른 앞장을 섰다.
걸음을 옮기려던 당영영이 장거운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머, 동생, 청룡무사 된 거 축하해!”
“헤, 감사합니다, 누님!”
장거운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어졌다.
그 덕분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냉가혜가 자신을 냉랭한 시선으로 째려보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다만, 들릴 듯 말 듯 귓속으로 파고든 냉가혜의 냉랭한 코웃음 소리를 듣고는 퍼뜩 고개를 들어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제5장 청룡당(靑龍堂)
청룡각 내에 자리한 청룡이대의 집무실로 천방추가 들어섰다. 그 뒤를 장거운과 냉가혜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선 집무실에는 한 명의 사내가 의자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희멀건 얼굴을 하고 있어 무사라기보다는 서생처럼 보이는 자였다.
그가 바로 청룡당 이대의 부대주를 맡고 있는 추광쾌검 사공한이었다. 사공한은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과 별호가 말해 주듯이 쾌검을 잘 쓰는 자로 점창파 출신의 무사였다. 그것도 점창파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사일검수 출신이었다.
천방추가 사공한이 앉아 있는 탁자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이봐! 사공 부대주!”
“나 독서 중인 거 안 보이나?”
사공한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뱉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사공한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천방추가 눈을 살짝 치켜뜨고 언성을 높여 말을 뱉었다.
“야! 사공한!”
“허! 거참, 지금 때가 어느 때인가?”
사공한이 고개를 들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천방추가 물었다.
“뭔 소리야?”
“지금이 가을 아닌가? 이른바 천고마비의 계절! 바로 독서의 계절이란 말일세!”
사공한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천방추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좌우로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지랄, 만날 엉터리로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주제에 독서의 계절은 무신……. 신입들 왔으니깐 교육이나 시켜!”
“흠, 신입이라고?”
사공한이 중얼거리며 천방추의 뒤에 서 있는 장거운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그토록 목 빠지게 기다리던 신입이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라. 나 간다!”
“어, 잘 가게!”
천방추가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얼른 말을 뱉고는 밖으로 나가 버리자 사공한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는 장거운을 보며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흠, 어려 보이는군. 몇 살?”
사공한은 커다란 체구에 비해 앳돼 보이는 얼굴을 가진 장거운에게 나이를 물었다.
“열여덟인데요?”
“흠, 역시 너무 어리군…….”
“어리지만 잘할 수 있습니다!”
장거운이 정색을 하고는 외쳤다.
“호! 그래도 생긴 것만큼이나 남자답게 호방하군.”
“예, 그렇죠? 헤헤.”
사공한이 호의를 보이며 말을 건네자 장거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공한은 장거운의 인상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얼굴로 다시 말을 건넸다.
“좋아, 자네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드는군. 이름이 뭔가?”
“예, 장거운입니다.”
“그래, 장거운! 좋은 이름이로군. 흠, 거기 소저는 어떻게 오셨는가?”
뒤늦게 장거운의 체구에 가려 있던 냉가혜를 발견한 사공한이 눈가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냉가혜가 냉랭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이번에 신입무사로 뽑힌 냉가혜예요.”
“흠, 여자가 청룡무사라니 별일이군. 장거운,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예? 아, 예. 그, 그렇죠.”
사공한의 갑작스런 물음에 장거운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갑자기 장거운의 뒤통수에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냉가혜가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공한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냉가혜에게 물었다.
“왜 하필 청룡당에 들어온 것이지?”
“전 그냥 청룡무사가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여자는 청룡무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이라도 있나요?”
냉가혜가 차가운 눈으로 사공한을 노려보며 대꾸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여자가 왜?’라는 말이다. 그러한 성격 탓인지 그녀는 사문인 화산에서도 단 한 번도 남자 제자들에게 뒤처져 본 적이 없었다.
냉가혜의 냉랭한 대꾸에 사공한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뱉었다.
“뭐, 그런 규정은 없지. 게다가 높으신 양반들이 결정한 문제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됐네요.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나 말씀해 주시죠.”
사공한은 냉가혜의 쌀쌀맞은 대꾸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다시 말을 했다.
“특별히 할 건 없는데, 보자, 뭐부터 해야 하나……. 장거운이라고 했나?”
“예!”
“그래, 장거운, 내가 나이가 한참 많은 것 같으니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
“그럼요, 편하게 하세요. 헤헤.”
장거운이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지어 보이자, 사공한은 흡족한 표정으로 장거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꾸나. 거운아, 너는 뭘 하고 싶으냐?”
“그게, 저…… 배가 고픈데요.”
“그렇군, 사람의 인생에서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도록 하자꾸나.”
“예, 저야 좋죠. 헤헤.”
사공한이 어깨를 두드려 주며 걸음을 옮기자 장거운이 실실거리며 그를 따랐다.
문 앞에 이른 사공한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냉가혜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냉가혜라고 했나? 자네도 같이 갈 건가?”
“부대주로서의 명령이라면 가죠.”
냉가혜가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면서 한 명의 청룡무사가 들어섰다. 마른 체격에 하얀 얼굴과 선한 눈매를 가진 청룡무사는 청룡당 이대 소속의 유자명이었다.
유자명이 상기된 표정으로 사공한에게 말을 걸었다.
“신입 들어왔다면서요?”
“그래, 신입 한 명하고 신입 한 분이 오셨구나.”
사공한은 여전히 냉가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장거운은 유자명이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장거운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반갑다. 난 유자명이라고 한다. 여! 냉가혜! 정말 청룡당에 들어왔구나.”
장거운에게 반갑게 말을 건네던 유자명은 냉가혜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외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형.”
냉가혜가 차가운 표정을 풀고는 유자명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유자명은 화산파 출신으로 냉가혜의 사형이었다.
“정말 청룡당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기록까지 갈아 치웠다면서?”
“흠, 기록을 깨다니? 무슨 소리냐?”
사공한이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유자명의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 냉 사매가 악 대주님이 십 년 전에 세우셨던 삼관 돌파 기록인 이각을 훨씬 앞질렀다고 하네요.”
여자라고 무시했던 냉가혜가 이번에 신임 이대주로 승진한 악우진이 입맹 당시 세웠던 기록을 깼다고 하자, 사공한은 속으로 움찔하면서도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입을 열었다.
“이각? 나도 이각쯤은 얼마든지…… 안 되고. 흠흠, 거운아, 너는 얼마에 돌파했느냐?”
“저요? 저는 뭐, 반 시진 거의 다 걸렸는데요.”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사공한이 장거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그래! 그까짓 기록이 뭐 중요하겠냐?”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헤.”
“그럼그럼. 우리는 밥이나 먹으러 갈까?”
사공한과 장거운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던 유자명이 문득 생각이 난 듯 소매에서 서찰을 꺼내 들며 말을 건넸다.
“아 참! 항주부의 신 추관에게서 전서가 왔어요.”
전서를 건네받은 사공한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전서에는 서호 옆의 뇌봉산(雷峰山) 기슭에서 목이 잘린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현장으로 와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의 경우 대부분이 무림인들과 관련이 있으므로 관행적으로 관에서 협조 요청을 하곤 했다.
‘흠, 목이 잘린 시체라. 신참들에게, 특히 저 싸가지 없는 신참 분에게 제대로 토사물을 올릴 기회를 줘야겠구나.’
잠시 머리를 굴린 사공한은 정색을 하고 전서를 접으면서 입을 열었다.
“흠, 신참들! 가자! 너희들에게 청룡무사가 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마!”
“신입들 데리고 가시게요?”
“그럼, 데려가야지! 다녀오마!”
유자명의 물음에 사공한은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기, 부대주님, 식사는 안 하세요?”
“어? 그럼 밥 먹고 가자!”
장거운의 말에 사공한은 잘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이왕에 토사물을 게워 내게 하려면 속을 채워 놓는 게 더 보기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공한은 목이 잘린 시체를 본 풋내기 신입들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떠올리며 의기양양하게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