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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사공한과 장거운, 그리고 냉가혜가 뇌봉산의 사건 현장에 도착을 하자 그곳엔 몇 명의 관원들이 모여 있었다. 사공한이 앞장서서 관원들 쪽으로 다가가자 팔자수염을 기른 삼십 대 중반의 키가 큰 사내가 급히 다가왔다. 그는 항주부의 추관으로 있는 신규진이었다.
신규진이 사공한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 부대주가 되셨다고요?”
“그게 벌써 소문이 났습니까? 하하!”
“경사스런 일이니 널리 소문이 나야지요! 하하하. 근데 뒤에 두 분은?”
너스레를 떨던 신규진이 장거운과 냉가혜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사공한의 대답이 이어졌다.
“예, 이번에 새로이 청룡무사가 된 신입들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안녕하십니까? 새로이 청룡무사가 된 장거운입니다.”
사공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거운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신규진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받았다.
“아이고, 부탁은 제가 해야지요. 장 무사님, 앞으로 많이들 도와주십시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장거운을 보는 신규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항주부의 추관으로서 많은 청룡무사들을 만나 본 신규진으로서는 장거운과 같이 정칠품의 추관에 지나지 않는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무사를 처음 본 것이다. 그나마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해 대기는 하지만 사공한 정도가 예의를 지켜 줄 뿐 대부분의 청룡무사들이나 무림맹의 무사들은 관원을 대하는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당시에는 무림인들이 관원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강했던 것이다.
사공한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 사체의 신원은 밝혀졌소이까?”
“저도 이제 막 도착하는 길이라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같이 가보시지요.”
“그럼 같이 가십시다.”
사공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규진과 나란히 사체가 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뒤를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장거운과 냉가혜가 따랐다.
“대인, 오셨습니까?”
사체를 지키고 있던 포두 한 명이 신규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수고가 많네. 혹시 신원을 알 수 있던가?”
“예, 다행히 호패를 지니고 있는 데다 포쾌 중에 죽은 자의 얼굴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의 신원이 쉽게 밝혀졌다니 그거 다행이군. 그래, 뭐하는 자인가?”
포두의 말에 신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의 신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면 훨씬 조사가 편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방을 붙여 공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의 신원을 밝히는 데만 해도 오랜 시일이 걸려 제대로 흉수를 찾기가 어려웠다.
포두의 말이 이어졌다.
“사체는 요 아래 서호변의 소정촌에서 기루를 운영하는 자로 한도중이라는 자입니다.”
“기루를 운영하는 자라. 그래, 사체 주변은 잘 보존해 두었겠지?”
“예. 그런데 검험관이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검험관이 올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예, 밀려 있는 사건들이 많아서 당장에 이곳으로 올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허, 참. 어찌 이런 흉측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지…….”
신규진의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사공한이 나서며 말을 건넸다.
“흠, 사체를 한번 봅시다. 웬만한 자상 정도는 나도 구별할 수 있소.”
“예.”
상관인 신규진의 눈치를 살피던 포두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대답을 하며 사체를 덮고 있는 거적자리를 걷어 냈다.
거적자리에 덮여 있던 사체는 목과 팔다리가 잘려 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잘려 나간 부분들은 관원들이 수습하여 대충 몸통 근처에 모아 놓은 것으로 보였다. 시푸르죽죽하게 변색이 된 시체의 목과 잘려 나간 사지가 연출하고 있는 기괴한 광경에 모두들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사공한은 노련한 청룡당의 부대주답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허리를 숙이며 사체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그는 먼저 잘려 나간 목 부위부터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사체를 살펴보던 사공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창백한 얼굴로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듯이 헛구역질을 삼키고 있을 장거운과 냉가혜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공한이 다시 시선을 사체의 몸통으로 돌려 사체의 목이 있던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완전히 생선 장만하듯이 토막을 내 놨군. 어이, 신입들! 이리 와 보라고. 목이 잘린 시체는 말이야, 이 부분이 젤로 중요하거든. 이 부분이 이름이 뭐냐 하면……!”
“견정(肩井)이죠.”
갑자기 들려온 말에 사공한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냉가혜가 무심한 표정으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시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공한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보자 장거운은 뒤에서 곧 올릴 듯한 표정으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해 댔다. 사공한이 튀어나온 입을 헤벌쭉 벌리고 냉가혜를 다시 쳐다보았지만, 냉가혜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능숙하게 목이 잘린 단면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공한이 애써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견정이 왜 중요하냐 하면 말이야…….”
“목이 잘린 시체의 경우 견정을 보면 목이 잘린 시점을 알 수 있죠. 생전에 목이 잘렸는지, 아니면 죽고 나서 목이 잘렸는지 말이죠.”
“헉! 그걸 어, 어떻게……?”
사공한이 최대한으로 눈을 부릅뜨고 냉가혜를 쳐다보았다.
냉가혜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목이 잘려 나간 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생전에 목이 잘렸다면, 여기 목이 잘린 부분의 피륙이 말려서 도드라지고 이곳 견정에서 피륙을 벗겨 내면 쉽게 벗겨지죠. 그런데 이 사체는 죽고 난 뒤에 목이 잘렸군요. 목 부분의 피륙도 말려 있지 않고, 견정에서 벗겨지지도 않는군요.”
“웁! 웁!”
냉가혜가 섬섬옥수와 같은 하얀 손으로 죽은 사체의 피부를 헤집자 그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사공한이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냉가혜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멍충아! 거기 팔하고 다리 좀 줘 봐!”
“파, 팔하고 다리?”
“그래, 니 앞에 있잖아!”
어느 정도 사체에 적응이 된 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던 장거운은 냉가혜의 말에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팔과 다리를 집어 냉가혜에게 건네주었다. 냉가혜는 다시 잘려 나간 팔과 다리의 절단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냉가혜가 추관인 신규진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팔과 다리도 모두 죽은 이후에 잘린 것이네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소이까?”
“잘린 부분의 살색이 붉지 않고, 특히 피와 골수, 그러니까 뼛속에서 나오는 기름이 말라 있어요. 이는 이 사람이 죽은 후에 기혈이 돌지 않고 있을 때 절단한 것이에요.”
신규진의 물음에 냉가혜가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사공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우리 냉 무사가 말한 대로 사후에 팔다리가 잘려졌기 때문에 절단면의 피부가 돌출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오.”
신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자의 사인은 무엇이라고 봐야겠습니까?”
“그것은, 흠흠. 일단 좀 더 조사를…….”
사공한이 즉시 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을 때, 뒤에서 사체의 목을 살피고 있던 냉가혜가 나직하게 외쳤다.
“늑살을 당한 것이에요! 잘린 목 앞부분에 검은 액흔(목이 졸린 흔적)이 남아 있어요. 아마도 흉수는 뒤에서 줄로 목을 졸라 죽였을 거예요. 그리고 사지를 잘라 낸 단면을 보면 몇 개의 층이 있는 것으로 봐서 흉수는 무공을 익힌 자가 아니에요.”
“흠흠,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힌 자라면 죽은 자의 시체를 잘라 낸 단면에 층을 남기지는 않소이다.”
사공한이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음!”
신규진은 냉가혜와 사공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된 것이다. 사공한 등의 말대로 흉수가 무림인이 아니라면 청룡당의 협조를 받을 수 없었다. 살인 사건과 같은 흉악범은 청룡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놈들이었다.
냉가혜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철수를 하죠?”
“냉 무사, 그냥 가신단 말이오?”
“아시다시피 청룡당은 무림인이 개입된 사건에만 협조를 하게 되어 있어요. 현재로써는 흉수가 무림인이라는 정황이 없으니 저희들은 개입할 수가 없어요.”
신규진의 말에 냉가혜가 냉랭하게 대꾸를 했다.
“그건 그렇지만, 사공 부대주님, 어떻게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흠, 그게 원칙은 원칙인지라……. 나중에 조사를 해 보고 혹여 무림인이 개입된 정황이 있으면 다시 연락을 주시구려.”
“음…… 알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공한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신규진으로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청룡당의 규칙이나 형편은 그도 잘 알고 있는 편이어서 끝까지 사정을 할 수는 없었다.
“뭐, 수고랄 게 있습니까? 아무튼 고생하십시오. 거운아! 가자!”
사공한이 다시 말을 건네고는 장거운을 불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공한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그냥 가요?”
“그래, 그냥 간다. 가자!”
장거운이 쭈뼛쭈뼛 사공한을 따라나서며 신규진에게 말을 건넸다.
“신 추관님, 수고하십시오. 그냥 간다고 하네요. 별로 도움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아이고! 장 무사님, 아닙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신규진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던 장거운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말을 건넸다.
“저기, 제 생각인데요. 흉수가 고의로 무림인의 짓으로 가장하기 위해서 사체를 손댄 것으로 보면, 아마도 죽은 사람의 주변 인물이 흉수일 거예요. 그리고 죽은 사람 주변에는 무림인들이 제법 많고요. 흉수는 의도적으로 주변의 무림인들에게 시선을 돌리려고 한 것이죠. 만약 관에서 주변의 무림인들을 중점적으로 조사를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흉수는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말이에요.”
“흥, 아예 매설자로 나서지.”
장거운의 옆을 지나치던 냉가혜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그녀는 장거운이 제멋대로 추측을 해서 떠든다고,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돈을 버는 매설자(賣舌者)로 나서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장거운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냉가혜를 무시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럼 수고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장 무사님,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신규진의 인사에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한 장거운은 기다리고 있는 사공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매어 놓았던 말의 고삐를 풀던 사공한이 장거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냉가혜는 어디 갔냐?”
“어? 조금 전에 나보다 먼저 지나갔는데…….”
장거운이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사공한의 말대로 냉가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거운이 냉가혜를 찾아 나서려 하자 사공한이 장거운을 만류하며 말을 뱉었다.
“뭐, 오겠지. 아서라. 그런 여자를 누가 잡아갔겠냐? 어후, 소름이 다 끼치네. 어찌 연약한 여자가 그토록 태연하게 사체를 헤집는지…….”
“에이, 원래 여자들이 피나 상처, 뭐 이런 거에 남자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냉가혜는 참으로 유별난 것 같지 않냐?”
“뭐 좀 유별나긴 하지요.”
그렇게 사공한과 장거운이 자신을 놓고 사이좋게 뒷담화를 하는 사이 냉가혜는 숲 속의 한쪽 구석에서 토사물을 게워 올리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사체를 보는 순간 곧바로 구토가 치밀어 올랐으나, 억지로 참았다. 사공한과 장거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가 사공한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체를 살핀 것도, 사체의 검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체로 자신의 기를 죽이려는 사공한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장거운을 지나오면서 문득 처참한 사체의 모습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구토가 치밀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숲 속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냉가혜가 나타나지 않자 사공한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얘는 여자애가 숲 속에서 큰 거라도 보나?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때, 갑자기 뒤에서 냉가혜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시죠.”
“흠흠, 가야지!”
사공한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을 몰아 앞장을 섰다.
잠시 후 장거운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달리고 있는 냉가혜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을 건넸다.
“야, 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걸 척척 다 알 수 있냐?”
“흥! 청룡무사가 되어 가지고 사체도 볼 줄 모르는 니가 무식한 거지.”
“쩝! 그것도 그러네. 나도 사체 검안법 좀 배워야겠다. 뭐 어쨌든 너 진짜 대단하다!”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엄지를 치켜 올리자 냉가혜도 장거운의 칭찬이 싫지는 않은 듯 다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하긴 멍충이 너도 대단하다. 어떻게 말 타는 법을 몰라서 그 먼 거리를 뛰어다니…….”
냉가혜가 갑자기 입을 닫고 멍하니 놀란 눈으로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니 장거운은 그냥 뛰어오면서도 말을 타고 달리는 자신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그녀가 잠시 멍하게 보는 사이 장거운이 씨익 하고 웃으면서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 * *

청룡각의 입구에 들어서며 장거운은 혼자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방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실 장거운은 뇌봉산을 다녀온 이후에 틈만 나면 마방으로 가서 말 타는 연습을 해 왔던 것이다. 용형보를 펼치면서 뛰어다니는 일은 어릴 때부터 늘 그렇게 해 왔던 일이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남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데 혼자 뛰어다니는 게 좀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금방 배울 것 같았던 기마술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거야 어찌하든지 할 수는 있었지만, 자세도 엉성했고, 무엇보다도 말이 제멋대로 달리는 게 문제였다. 원하는 대로 가지를 못하니 말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곽호의 소개로 만난 마방의 책임자인 홍두성의 지도 덕분에 제법 말과 호흡을 맞춰 한 시진 가까이 말을 탈 수 있었다. 이젠 말을 타고 원행을 간다 해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도 냉가혜에게 ‘말이 필요 없는 놈’으로 무시당하지 않게 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녀석! 뭐가 좋아서 혼자 히죽거리고 있냐?”
고개를 돌려 보니 남궁천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그냥 뭐…….”
장거운이 얼버무리자 남궁천호가 청룡각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지낼 만은 하냐?”
“예! 재밌습니다.”
“너 말도 못 탄다면서?”
남궁천호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아니, 누가 그런 모함을 해요? 얼음귀신이죠? 걔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말을 잘 타는데요.”
장거운은 입을 샐쭉하니 내밀며 대꾸를 했다.
“그동안 연습 좀 했나 보네. 오늘 밤 보면 알겠지.”
“오늘 밤요? 오늘 밤 무슨 일…….”
남궁천호가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가며 말을 건네던 장거운은 급하게 입을 닫았다. 회의실 안에는 청룡당의 무사들이 모두 모여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천호가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다들 앉지. 장거운! 너도 멍하니 서 있지 말고 거기 맨 끝자리에 앉아!”
남궁천호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서 좌중을 둘러보고 말을 건넨 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장거운에게 비어 있는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지시를 했다.
장거운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장거운이 슬쩍 옆을 바라보니 냉가혜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맹에 남아 있는 청룡무사들은 모두 참석한 듯싶었다. 자신은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아마도 당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전원회의가 소집된 것 같았다.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이게 한 건 다른 게 아니고 그동안 추적해 왔던 살수 집단인 혈루각의 소재가 파악되었다. 놈들이 신분을 감추고 소흥의 술집인 천루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오늘 밤 놈들을 치러 간다. 현재 일대가 홍염방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이번 일은 이대가 맡도록 하지. 그리고 혈루각의 삼대 살수인 혈루삼마와 각주인 혈인마 구충은 절정 이상의 무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놈들과 상대를 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도록 하라. 그럼 이번 일에 대해 달리 질문은 없나?”
악우진이 물었다.
“이번에 신참들도 참가시키는 것입니까?”
“현재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몇 명이지?”
“신참들을 합해도 저까지 칠 명입니다.”
“그럼 신참들도 참가시키게. 그리고 보위사들 서른 명을 데리고 가도록 하고.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갈 것일세.”
“예, 알겠습니다.”
남궁천호가 자신도 참가를 한다고 하자 대답을 하는 악우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남궁천호가 직접 움직일 만한 일은 아닌데 같이 간다고 하니 의외였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이번에는 천방추를 보며 물었다.
“천 부대주, 내가 부탁한 오죽색마 건은 어떻게 되었나?”
“예, 관에 놈의 용모파기를 알려 주어 수배를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순찰당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음, 분명히 놈은 아직 항주에 머물고 있을 것이야. 놈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곳도 아닌 맹의 총단이 있는 이곳 항주로 들어왔을 때에는 이곳에서 뭔가 할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니, 순찰당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하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천방추의 고개가 탁자에 닿을 듯이 꺾였다.
“그럼 각자 준비들 하고 출발은 사시 말에 하기로 하지.”
“예!”
남궁천호가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청룡무사들은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장거운이 재빨리 냉가혜의 귀에 대고 물었다.
“야! 회의 있는데 왜 말 안 했어?”
“흥! 멍충아, 니 일은 니가 챙겨! 그리고 나 열아홉이니까 자꾸 말 놓지 마라! 나이도 어린 게, 콱!”
냉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뱉고는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가 버리자, 장거운이 양쪽 귀 위에 손가락을 세우며 혀를 쑥 내밀어 마귀 얼굴을 흉내 내어 보였다.
그때 유자명이 장거운의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뭐하냐? 너 어디 갔었냐? 아까 가혜가 막 찾아다니던데.”
“예? 아, 저기 마방에 좀 다녀오느라고…….”
“네가 마방엔 왜 가냐? 넌 말이 필요 없는 놈이잖아!”
“에이 참, 이젠 말 잘 탄다고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유자명이 말을 건네자 장거운이 불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를 흘겨보았다.
유자명이 웃으면서 다시 말을 건넸다.
“가자! 너도 준비해야지.”
“예, 저야 뭐, 따로 무기도 없는데…….”
“하하하! 다른 무기는 필요 없고 그 단단한 철두만 있으면 된단 말이냐? 출정을 할 땐 무기뿐만 아니라 신호전과 여러 가지 도구들을 챙겨야 하는 법이다. 뭐, 유서도 써야 하고.”
“유, 유서요?”
유자명의 말에 장거운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했다.
죽으면서 남긴다는 유서 따위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장거운이었다. 갑자기 유서라는 말이 가슴이 콱 박혀 들고 있었다. 출정을 나가면 싸우다가 죽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나는 장거운이었다.
유자명은 장거운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치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 유서. 출정 나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미리 유서는 써 놔야지.”
“그, 그거 꼭 써야 돼요?”
“그럼! 당연히 써야지!”
“아, 뭐라고 쓰지?”
유자명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장거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이 마냥 귀여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린 유자명은 장거운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하하! 농담이다. 가자, 가! 녀석, 참 순진하기는…….”

남궁천호와 장거운을 비롯한 청룡당 이대의 무사들은 초경 무렵이 되자 소흥의 입구 어림에 자리한 촌락인 흥하촌의 나루터에 도착했다. 나루터에는 일곱 척의 오봉선(烏逢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탈 오봉선은 크기가 가장 큰 사명와(四明瓦)였다. 사명와는 대나무로 짠 검은색의 둥그런 지붕이 양쪽으로 덮여 있고 가운데는 사람들이 타고 내리게끔 열린 공간이 있었다.
그와 같은 오봉선의 구조는 네 명은 지붕 안에 숨고 두 명은 달빛을 즐기는 취월객으로 가장하여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봉선을 이용하지 않고 무턱대고 말을 탄 채 우르르 소흥으로 들어갔다간 이미 입구에서부터 자신들이 나타난 것이 알려져서, 소흥의 한복판에 자리한 천루관에 도착할 때쯤이면 놈들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리고 난 뒤일 것이다.
사공한, 냉가혜 등과 한 조가 된 장거운은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오봉선에 올랐다. 세 명의 보위사와 사공한이 지붕 밑으로 숨고 장거운과 냉가혜는 나란히 앉아 술과 달빛을 즐기는 월하의 가객들로 위장했다.
냉가혜가 낮게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멍충이, 설마 배도 처음 타는 것은 아니겠지?”
“항주로 올 때 배 많이 탔거든요!”
“아무튼 뱃멀미한다고 은근슬쩍 나한테 기대면 죽는다.”
“하이고, 배 위에서 얼어 죽을 일 있나?”
“이게! 콱!”
발끈하여 주먹을 들어 보였던 냉가혜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의식하여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장거운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처럼 오봉선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장거운과 냉가혜의 시선은 손과 발을 동시에 이용해 노를 젓는 오봉선의 사공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노를 젓는 것은 둘 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봉선들이 소흥의 중심지로 접어들자 수많은 석교들에 걸린 등불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풍취가 장거운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술과 향락의 도시로 알려진 소흥의 아름다운 밤 풍광에 취한 장거운의 코끝에 싱그러운 난향이 파고들었다.
장거운이 흘깃 옆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냉가혜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부대끼며 자신의 코끝을 간질이고 있는 것이다. 장거운이 좀 더 고개를 돌리자 박꽃같이 새하얀 냉가혜의 뺨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도 소흥의 풍광에 빠졌는지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사공한을 쳐다보았다. 사공한은 소흥의 아름다운 밤의 정취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이 꾸벅꾸벅 졸고만 있었다. 평소에 그토록 사람이 책을 봐야 정서가 메마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니, 막상 절로 탄성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공한이었다.
사공한의 모습에 피식하고 실소를 흘리던 장거운의 눈에 순간적으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묘한 감각이 장거운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장거운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냉가혜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냉가혜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째려보자 장거운은 자신의 눈을 한 번 가리키고는 다시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것은 누군가가 감시한다는 의미의 장거운만의 수신호였다. 전음을 쓸 수 없는 장거운이 동료들에게 은밀히 말을 건네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문제는 냉가혜 등이 그와 같은 장거운의 수신호를 제대로 알아보느냐 하는 것이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냉가혜가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냉가혜는 살짝 긴장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슬쩍 잡아 가며 내기를 끌어올려 온몸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일깨웠다. 조금씩, 아주 희미하지만 뭔가 기분 나쁜 감각들이 그녀에게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냉가혜는 다시 한 번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주위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장거운의 모습을 보는 냉가혜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있었다. 장거운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방금처럼 전음도 못해서 수신호를 하는 주제에 이질적인 감각은 그녀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고 있었다.
평소에 보면 그저 멍청하고 무공도 떨어져 보이는 장거운이지만, 한 번씩 그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다. 입맹 시험에서도 그랬고, 말보다 더 빨리 달리는 무식한 보법이 또한 그녀를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놀란 것은 뇌봉산의 사체에 대한 장거운의 추리였다.
사건이 있은 지 며칠 후 그녀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사건은 장거운의 추리대로 죽은 남자의 첩과 눈이 맞은 종복이 저지른 사건으로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죽은 자는 기루를 하는 탓에 주변에 많은 무림인들이 있었고, 종복은 그들에게 의심을 돌리기 위해서 사체를 토막 내어 무림인의 짓으로 위장하려고 했다고 자백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추리가 대단히 천재적이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어느 정도는 그와 비슷하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멍청하게만 보이는 장거운이 그와 같은 추리를 하였다는 점이 그녀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장거운의 본모습이 그녀가 보는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냉가혜였다.
툭! 툭!
또다시 장거운이 냉가혜의 팔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냉가혜의 시선이 장거운을 향했다. 장거운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다시 머리 위에서 손가락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냉가혜가 그의 수신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거운이 냉가혜의 손을 잡아채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장거운의 이야기는 세 명의 사내가 수로 변을 따라 계속 자신들이 타고 있는 오봉선을 감시하며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냉가혜의 뺨에는 홍조가 살짝 깃든 것 같기도 했다.
장거운의 말을 이해한 냉가혜가 그 사실을 즉시 전음으로 전달하자 사공한 등은 긴장의 빛을 보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들키지 않게 위장을 했지만 놈들이 이미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사공한이 고개를 살짝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더니 장거운 등에게 전음을 보냈다.
“거운! 천루관 앞이다. 하선을 준비하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장거운은 살기를 감지하고는 갑자기 앉은자리에서 진각을 밟아 버렸다. 그의 발이 배의 밑판을 박살 내며 아래로 박혀 들었다. 의심을 품고 따라오던 놈들은 청룡당의 무사들이 탄 오봉선들이 차례로 천루관 근처에서 정박을 하려 하자 자신들을 치러 온 것을 확신하고는 선제공격을 하려 한 것이다.
사공한과 냉가혜, 그리고 지붕 아래 숨어 있던 보위사들이 각기 배의 지붕을 찢어발기며 일어서서는 천루관 앞의 제방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배들에서도 남궁천호를 비롯한 악우진 등이 속속들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배와 제방까지의 거리가 제법 됨을 알고 잠시 주춤하던 장거운은 숨을 크게 쉬고 힘차게 뱃전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장거운이 타고 있던 오봉선이 거대한 격랑에 휘말린 듯 뒤집어질 듯이 흔들림과 동시에 장거운의 신형은 어느새 방죽을 넘어 천루관의 정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가던 장거운의 눈에 세 명의 흑의인이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자신이 타고 있던 오봉선을 계속 따라왔던 흑의인들이었다. 장거운이 허공에서 허리를 튕겨 비룡번신의 수법으로 신형을 회전시키면서 두 흑의인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양발로 흑의인들의 어깨를 찍어 버렸다.
콰직!
어깨뼈가 박살이 나는 소리와 함께 두 흑의인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상대들의 어깨를 밟은 힘을 이용하여 앞으로 튀어 나가며 마지막 남은 흑의인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발꿈치로 흑의인의 등을 찍어 차고는, 천루관의 굳게 닫힌 정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꽝!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천루관의 정문이 박살이 나며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정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장거운이 서서 머리를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장거운은 상대의 등을 차는 탄력을 이용하여 날아가서는 철두공으로 천루관의 정문을 박살 내어 버린 것이다.
“호! 과연 철두공이네!”
장거운의 모습을 보며 사공한이 감탄의 표정으로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다시 일단의 흑의인 무리들이 천루관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장거운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웬 놈들이냐?”
“그건 저놈들이 해야 할 소리 아니냐?”
“그러게요. 저놈들이 웬 놈들이냐? 해야 제가 우리는 청룡당의 청룡무사다! 하고 멋지게 외칠 텐데. 아무 말도 안 하잖아요.”
장거운의 말에 사공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장거운은 어지간히 ‘우리는 청룡무사다!’라는 소리를 외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상대편이 ‘웬 놈들이냐?’라는 말을 해 주길 너무 간절히 바라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정신 차렷!”
장거운과 사공한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본 악우진이 뒤에서 호통을 치며 창을 날렸다. 그의 창이 사공한과 장거운을 스쳐 지나며 달려드는 상대의 목에 박혀 들었다.
“크억!”
악우진의 창을 맞고 목에 구멍이 난 흑의인 하나가 피 분수를 뿜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장거운은 그 모습을 보고는 제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버렸다. 장거운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토록 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심장의 박동은 온몸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살인의 공포가 장거운을 휘감은 것이다.
챙! 챙!
“장거운! 뭐하는 거야!”
사공한이 장거운에게 달려드는 흑의인들의 도를 걷어 내며 고함을 쳤다.
장거운이 천천히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악우진의 단창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박혀 들 때마다 흑의인들은 피 분수를 뿜으며 나가떨어지고 있었고 남궁천호의 검은 낭창하게 휘어지며 상대의 팔과 다리를 자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한순간 장거운은 남궁천호와 눈이 마주쳤다. 남궁천호는 연민이 어린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거운은 그의 눈이 자신이 무사가 되겠다고 하였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두 분 할아버지의 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무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그런 눈빛을 보였는지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강호 무사들의 세계인 것이다. 상대를 베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호랑이의 본능이라면, 적을 베는 것이 무사의 본능이었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한 할아버지의 말은 결코 그냥 해 본 말이 아닌 것이었다.
한편 두 명의 흑의인을 더 베어 버린 남궁천호는 장거운에게 다가오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은 장거운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기에 좀 더 지켜보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남궁천호가 굳이 이번 일에 따라나선 것도 장거운 때문이었다. 장거운의 심성을 잘 아는 그로서는 장거운이 처음 겪는 싸움에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겪어야 하고 이겨 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장거운을 참가시키고 자신도 따라나선 것이었다.
챙! 챙! 챙!
“멍충이! 뭐해!”
냉가혜의 외침이 다시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장거운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냉가혜가 세 명의 흑의인들에 둘러싸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위태하거나 다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거운은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장거운은 입을 악다물었다. 자신이 멍하게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동료들 가운데 누군가가 적의 칼에 베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흑의인 한 명이 달려드는 장거운의 목을 노리고 도를 휘둘러 오자 장거운의 신형이 꺼지는 듯 밑으로 주저앉으며 나한각으로 상대의 정강이를 찍어 버렸다.
콰직!
뼈가 박살이 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휘청거렸다. 그러나 상대는 그 순간에도 쓰러지지 않고 도를 밑으로 내려 베고 있었다. 장거운은 신형을 위로 솟구쳐 올리며 상대의 안면에 이마를 박아 버렸다.
콰지직!
상대가 안면이 박살이 나서 나가떨어졌다. 장거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볍게 지면을 차고 뛰어올라 냉가혜를 베어 들어가던 흑의인의 도를 왼발로 차 버리고는 오른발로 상대의 목을 찍어 버렸다. 목이 급격하게 꺾이며 상대는 제자리에 꺼지는 듯이 주저앉고 있었다.
갑작스런 장거운의 등장에 놀란 나머지 한 명의 흑의인이 멈칫거리는 틈을 이용해 냉가혜의 검이 상대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검을 뽑아 낸 냉가혜가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장거운은 자신의 발아래 쓰러져 있는 두 명의 흑의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는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냉가혜는 멍하니 서 있는 장거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첫 살인의 기분이란 그런 것이다. 장거운과 달리 검파인 화산에서 자란 탓에 어릴 적부터 수많은 검상들을 보고 자란 그녀였지만, 막상 처음으로 사람을 베었을 때, 검날이 살을 헤집고 지나가며 서걱거리는 그 느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검상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첫 살인의 느낌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멍충이, 가자!”
냉가혜가 장거운을 향해 외치고는 몸을 날려 천루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냉가혜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린 장거운이 눈을 차갑게 빛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강호의 무사인 것이다. 피와 죽음의 칼날 위를 걸어가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스스로 선택한 자로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었다.
장거운의 신형이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