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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제6장 혈루각(血淚閣)


장거운이 천루관의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룡당의 보위사들은 세 명씩 한 조로 삼재진을 형성하여 흑의인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청룡무사들은 그들을 적절히 도우며 각기 자유롭게 움직이며 적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눈에 띄게 적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은 남궁천호와 악우진이었다. 단지 대조적이라면 남궁천호는 상대의 팔다리를 베어 내거나 검기점혈을 하는 등 비교적 여유 있게 적들을 상대한다면, 반면에 악우진의 단창은 독이 오른 독사처럼 사정없이 적들에게 피 구멍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운의 시선을 끄는 사람은 그들보다도 사공한이었다. 막상 본격적으로 싸움에 임하자 사공한은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혀 무사답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 다소 엉뚱한 말도 잘하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점창이 자랑하는 사일검수 출신답게 육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섬광 같은 쾌검이 흑의인들을 난자하고 있었다. 그의 명호가 달리 추광쾌검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장거운이 시선을 돌려 냉가혜를 찾아보았다. 냉가혜는 그녀의 사형인 유자명과 같이 조를 이루어 이십사수매화검을 펼치며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특히 유자명이 상대의 공격을 막는 동안 냉가혜가 암향표를 펼쳐 순간적으로 상대의 사각으로 들어가 베어 버리는 합격술은 유려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적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청룡당이 상대를 압박하고 있는 형세인 것을 보고는 다소 마음의 여유를 가진 장거운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보위사들을 돕기 위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보위사들의 키를 훌쩍 뛰어넘은 장거운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세 명의 흑의인들 가슴을 허공에 뜬 채로 양발을 번갈아 가며 차 버렸다. 열여덟 번을 허공에 뜬 채로 찰 수 있다고 알려진 소림의 관음십팔족이었다.
장거운은 또다시 착지를 하자마자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파고드는 상대의 협봉검을 반선수로 밀어내고는 신형을 회전시켜 팔꿈치로 상대의 목 뒷부분의 풍부혈(風府穴)을 찍어 버렸다. 전날 진화루에서 언충기를 제압할 때는 단지 팔꿈치로 같은 부위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점혈을 할 수 없으니 단호하게 손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스각!
날카롭게 옷자락이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나타난 한 자루의 도가 장거운의 가슴 어림을 베고 지나갔다. 장거운은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금강나한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의 가슴은 쩍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거운보다 더 놀란 것은 도를 휘두른 상대였다. 분명히 장거운의 가슴을 베었는데 옷자락만 잘렸을 뿐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는 것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흑의인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장거운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콰직!
흑의인이 멈칫거리는 순간 장거운이 허리를 가볍게 튕기며 이마로 상대의 안면을 찍어 버렸다. 머리와 얼굴이 깨진 상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있었다. 장거운이 눈을 빛내며 주저앉은 상대의 어깨를 밟아 누르고는 흑의인들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적의 도를 가슴에 허용했던 장거운은 전화위복으로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상대가 검기나 도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자신을 베지 못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난전에서 백타를 사용해야 하는 장거운에게는 정말 필요한 자신감이었다.
그러한 자신감은 장거운의 행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흑의인들 사이에 뛰어든 장거운은 열 명이 넘는 적들 사이를 폭풍처럼 헤집고 다녔다. 반선수로 상대의 도를 흘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십이금룡수를 펼쳐 상대의 팔 관절을 꺾어 버렸고, 항마신퇴로 뒤에서 다가오는 적의 무릎을 찍어 버림과 동시에 관음십팔족으로 측면의 적 두 명을 동시에 날려 버리고 있었다.
장거운의 신형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처럼 어지럽게 휘둘러 오는 상대의 도를 흘리며 파고들더니, 신형을 솟구쳐 올리며 상대의 턱에 아라한신권을 작렬시키고 있었다. 공중에서 팽이처럼 회전을 한 장거운의 발이 선풍각의 수법으로 뒤에서 달려드는 적의 턱을 날려 버렸다. 한순간에 두 명의 적들이 이빨이 몽땅 뿜어내며 턱이 부서져 주저앉고 있는 것이다.
“이야! 제법인데!”
사공한이 장거운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쳤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악우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백타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는 장거운의 모습은 악우진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던 것이다.
기실 악우진은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장거운이 엉성하게 삼관을 통과한 데다 남궁천호가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그저 그런 무위를 지닌 장거운이 남궁천호의 배려로 청룡무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장거운의 무위가 청룡무사가 되기에는 한참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장거운이 보여 주는 무위라면 생각을 달리해야 될 것 같았다. 파괴적인 권기를 뿜어내는 강력함은 없었지만, 유려하면서도 감각적인 연환 공격은 수법들이 완전하게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장거운 역시 다른 청룡무사들처럼 명사의 지도 아래 오랜 세월을 고련해 왔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어느덧 모두들 손을 멈추고 장거운이 싸우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유자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 녀석 머리 하나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내려친 도가 두 동강이 나냐?”
“비껴 맞았어요. 머리를 슬쩍 틀어 날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오히려 도면을 머리로 쳐 버린 것이죠.”
냉가혜가 장거운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유자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뭐, 어쨌든 대단하지 않냐?”
“대단하긴 하지요. 그가 달리 철두겠어요.”
냉가혜가 묘한 눈빛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남은 흑의인의 무릎을 박살 내어 주저앉힌 뒤 고개를 돌리던 장거운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 순간 남궁천호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살기!”
땅속에서 검광이 섬전처럼 튀어나오며 장거운의 회음혈을 노리고 파고들고 있었다.
천루관으로 위장한 혈루각의 진짜 살수들이 등장한 것이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혈루각의 삼대 살수와 혈루각주인 혈인마 구충 등은 땅속에 매복을 한 채 청룡당의 일행들이 방심하여 틈이 생길 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각!
땅속에서 튀어나온 살수의 검이 장거운의 허벅지를 베며 스쳐 지나갔다. 장거운의 허벅지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좀 전과 달리 살수의 검은 강한 검기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동물적인 감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장거운은 살수의 검기에 사타구니 아래의 회음혈이 꿰뚫려 즉사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장거운을 노리고 살수의 검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곳곳에서 땅거죽이 일어나며 살수들이 청룡당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방심하고 있던 몇 명의 보위사들이 살수의 검에 당해 쓰러지고 있었다.
쾅!
장거운이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살수를 향해 발끝에서 시작하여 허리와 어깨를 회전시키며 주먹을 내뻗었다.
“혼원일기!”
장거운을 향해 몸을 날리던 남궁천호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방금 장거운이 펼친 초식은 소림사 나한당의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나한십팔세의 한 초식인 혼원일기의 초식이었다. 악우진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소림 칠십이절기 가운데 하나인 나한십팔세는 속가제자로 알려진 장거운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혈인마!”
남궁천호의 입에서 다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유령과도 같은 보법으로 장거운의 나한십팔세를 흘린 살수가 장거운의 목을 노리고 검기를 머금은 붉은 검을 찔러 가고 있었다. 살수의 붉은 검은 혈인마 구충의 혈인검이었다. 남궁천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하필이면 혈루각주인 구충이 장거운을 상대하고 나선 것이다.
다급해진 남궁천호가 장거운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고 했지만 옆에서 파고드는 살수의 검을 막아야 했다. 살수의 검이 파르스름한 검기를 머금은 것으로 봐서는 혈루각 삼대 살수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스각!
또다시 혈인마 구충의 붉은 검이 장거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살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검기를 머금은 상대의 붉은 검은 금강나한공으로 단련된 단단한 그의 몸을 거침없이 베어 내고 있었다. 장거운은 조금 전의 흑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를 만난 것이다.
상대의 검은 철두공이나 금강나한공을 믿고 함부로 맞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자 장거운은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장거운을 바라보는 구충의 눈에 살짝 경멸의 눈빛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장거운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처음 겪는 초짜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흔히 강호에서는 실력이 삼이요 경험이 칠이라고 한다. 그만큼 실전을 많이 겪은 자와 수련만 죽도록 한 자의 차이는 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뻣뻣하게 긴장하고 있는 장거운은 더 이상 구충의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구충의 신형이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그의 혈인검이 장거운의 미간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장거운은 자신의 미간을 파고드는 구충의 검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순간 장거운은 오른쪽 가슴에서 불에 달군 인두를 지지는 듯한 화끈한 느낌을 받았다. 미간을 찔러 오던 구충의 검이 그의 가슴에 박혀 든 것이다.
장거운의 신형이 뒤로 용수철처럼 튕겨 났다. 냉막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구충의 눈빛에 이채가 돌고 있었다. 구충은 살수였다. 그것도 혈루각이라는 작지 않은 살수 집단을 이끌 만큼 대단한 살수였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도 상대를 찔렀을 때의 감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감각은 상대를 찔렀다는 확신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충은 노련한 살수답게 찰나의 의혹을 떨쳐 버리고 다시 장거운에게로 짓쳐 들고 있었다. 조금 미진한 느낌이 든다면 다시 찔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구충의 검이 가슴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거운의 복부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팟!
구충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구충의 검이 복부를 꿰뚫으려는 찰나 멍하니 서 있던 장거운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검을 흘려 버렸던 것이다.
구충이 눈에 이채를 발하며 다시 횡으로 검을 휘둘러 장거운의 허리를 베어 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장거운의 신형은 마치 유령처럼 뒤로 물러나며 그의 검을 살짝 비켜서고 있었다. 구충이 이를 악다물며 재차 장거운을 찔러 갔으나 역시 또 한 번 장거운의 신형이 옆으로 비켜서며 그의 검을 흘려 버렸다.
정신이 없는 줄 알았던 장거운이 연이어 자신의 검을 피해 버리자 구충은 공격을 멈추고 장거운을 노려보았다. 장거운은 그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구충이 흠칫 놀라며 눈을 치켜떴다. 장거운의 눈빛에서 전혀 생기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사자(死者)의 눈빛과도 같았다.
‘사, 사술인가?’
구충은 속으로 혼잣말을 삼키며 다시 자신의 혈인검을 고쳐 잡았다.
구충의 신형이 장거운을 향해 다시 폭사되었다. 그의 붉은 혈인검은 거의 검강에 가까울 정도로 형상화된 검기를 머금고 있었다. 구충이 전력을 다해 장거운을 공격해 들어 간 것이다.
스팟!
구충의 신형이 급격하게 옆으로 비켜섰다. 이번에는 장거운이 반보만 옆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검을 흘리고는 갑자기 주먹을 내질러 반격을 해 온 것이다. 구충은 재빠르게 장거운이 내뻗은 권격을 피했지만, 주먹에 스친 어깨가 욱신거려 옴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둔탁한 쇠망치를 비껴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구충은 고통을 제대로 느낄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야 했다. 장거운의 팔꿈치가 자신의 관자놀이의 태양혈(太陽穴)을 노리고 파고들고 있었다. 장거운의 팔꿈치가 웅 하는 파공음과 함께 구충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커억!”
구충은 상대의 팔꿈치를 피했다고 느끼는 순간 우측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어느새 장거운의 왼 무릎이 그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일 장가량 튕겨 나서 겨우 신형을 바로 세우던 구충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 있었다. 언제 따라붙었는지 장거운의 무릎이 자신의 턱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구충의 신형이 뒤로 급격하게 꺾였다.
콰직!
장거운의 무릎이 구충의 가슴 한복판에 박혀 들며 구충의 가슴뼈를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 장거운은 여전히 뭔가에 홀린 듯한 멍한 눈빛으로 구충의 가슴에 파고든 무릎을 세우며 일어서고 있었다.
자신에게 달려든 혈루각 삼대 살수 중의 한 명을 해치우고는 장거운에게 달려가려던 남궁천호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막 구충을 쓰러뜨리고 일어서고 있는 장거운을 향해 있었다.
‘혈인마 구충을 죽였단 말인가?’
남궁천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어려 있었다. 장거운이 보기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음은 진화루에서 언충기를 제압할 때 이미 알아보았지만, 혈인마 구충을 죽일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전 장거운이 보여 준 무위는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구충은 무림의 후기지수들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지녔다고 하는 자신이나 악우진이라고 해도 만만하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구충이 암습을 가한다면 승부를 쉽게 장담할 수 없고 정면으로 싸운다고 해도 능히 백 초는 다투어야 할 상대인 것이다. 그런데 장거운은 구충의 암습을 피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살수를 해치우는 사이 가슴을 박살 내어 죽여 버린 것이다.
장거운이 구충을 해치운 사실에 악우진도 놀랐는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악우진은 오늘 장거운에 대해 여러 번 놀라고 있었다. 정제된 백타를 보여 주더니 갑자기 나한십팔세를 펼쳐 장거운의 진정한 정체를 의심케 했을 뿐만 아니라, 이젠 자신으로서도 부담스러운 혈인마 구충까지 죽여 버렸다. 갓 열여덟에 지나지 않은 신입 청룡무사가 보여 줄 수 있는 무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야!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더니 장거운, 한 수가 있구나!”
사공한이 놀람에 찬 목소리로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제야 장거운은 퍼뜩 정신이 드는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공한에게 말을 건넸다.
“어! 끝났어요?”
“그래, 네가 혈루각주인 구충을 끝냈잖냐. 이렇게 말이다.”
사공한이 가리킨 구충의 시체를 본 장거운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가슴이 함몰된 채 죽어 있는 구충의 시체가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다.
“자식! 원래 첫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상대를 해치웠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끝이 나 있는 것이지.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거야!”
사공한이 장거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장거운은 멍하니 죽어 있는 구충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의 검기에 살갗이 베이고 피가 튀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상대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자 죽음을 떠올렸던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것이다.
장거운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가슴 한가운데에 구충의 검에 찔린 자상이 보였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는지 이미 피딱지가 말라 있었다. 분명히 상대의 검을 맞긴 맞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검기를 머금은 상대의 검에 맞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지 그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장거운은 계속 그 순간을 되짚어 보지만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고 있었다. 장거운은 슬쩍 소름이 끼쳐 왔다. 자신의 내면에 자신조차도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러한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한 자아일 것이다. 저토록 참혹하게 상대를 박살 내 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잔혹한 자아가 지금의 자아를 삼켜 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라는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장거운은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다시 구충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런 악마적인 존재가 없다면 과연 자신이 절정의 고수라는 구충을 이길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닐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아서 이긴 것일 것이다. 아니면…… 그래! 어쩌면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검전무아(劍前無我)라는 말의 본뜻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지. 검 앞에서 나를 잊는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상대의 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자 나도 모르게 실력이 발휘된 것이야! 그래, 바로 그거구나!’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거운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무서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던 무리의 요체를 죽음 직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운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멍충이! 뭐해? 빨리 정리 안 해?”
고개를 들어 보니 냉가혜가 냉랭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 아니, 저, 정리해야지.”
“그깟 검상 조금 입었다고 죽을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멍충이 맞네!”
“이, 이거는 뭐…….”
냉가혜가 자신의 상처들을 흘깃 쳐다보고는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하자 장거운은 급히 가슴과 어깨의 상처를 가리며 얼버무렸다.
“약 한 번 바르면 낫겠네, 뭐. 그딴 상처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정리하고 가자!”
냉가혜가 뭔가를 휙 던져 주며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냉가혜가 던진 물건을 낚아챈 장거운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그의 손바닥 위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약통이 놓여 있었다. 냉가혜가 던져 준 것은 화산의 제자들이 검상을 입었을 때 바르는 금창약인 매화고라는 약이었다. 장거운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냉가혜의 뒷모습을 보며 씨익 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장거운을 남궁천호와 악우진이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서 와라! 네가 여긴 웬일이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장거운이 고개를 삐죽 내밀자 당영기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았다.
“그냥 당주님 뵙고 싶어서 왔지요. 헤헤.”
장거운이 안으로 들어서며 실실 웃음을 흘리자 당영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흠, 달리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니에요. 근데 닭 가지고 뭐하고 계세요?”
“뭐하긴, 그냥 수련하고 있지.”
장거운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닭을 가지고요?”
“그래, 의술은 함부로 사람을 가지고 수련을 할 수 없으니, 뭐 불쌍하긴 해도 짐승을 가지고라도 수련을 해야 나도 밥값은 하고 살지 않겠냐?”
“그것도 그러네요. 근데 닭 가지고는 뭐 수련하세요?”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고 있었다.
“침술을 수련하고 있다. 구침지희(九鍼之戱)라는 것이지.”
“구침지희요?”
“그래, 이 침들은 각기 참침, 원침(員鍼), 시침, 봉침(鋒鍼), 피침, 원리침(員利鍼), 호침(毫鍼), 장침(長鍼), 대침(大鍼)이라고 하는데 이 아홉 가지의 침을 모두 닭에 침두가 보이지 않도록 꽂아 넣어도 닭이 아파하거나 죽지 않도록 수련을 하는 것이다.”
장거운의 물음에 당영기는 아홉 가지의 침들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자세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구침지희는 처음 화타가 제자들에게 침술을 가르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하였으나 나중에는 의원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거나 서로 간의 재주 겨루기로 변질된 대표적인 침술 수련법이었다.
“우와, 이렇게 별별 이상한 침을 다 꽂아 넣어도 닭이 안 죽어요? 대단하네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난 아직 대의에 이르지도 못했다.”
장거운이 탄성을 지르며 놀랍다는 듯이 쳐다보자 당영기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장거운이 다시 물었다.
“대의라면?”
“침을 여덟 개까지 꽂아 넣는 경지다. 아홉 개 모두를 꽂아 넣을 수 있으면 태의라고 하지.”
당영기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구침지희는 다섯 개를 성공하면 범의, 여섯 개는 교의, 일곱 개는 명의라 했고, 여덟 개와 아홉 개는 각각 대의와 태의라고 했다. 아홉 개를 모두 성공시킨 단계인 태의는 침 하나로 다스리지 못하는 병이 없는 경지라고 칭했다. 화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명의가 되어야 병자를 돌보게 했다고 한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일곱 개까지는 성공하신 거네요.”
“그래. 그 정도는 성공했다.”
“와,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잖아요.”
“하하하, 그 정도는 대단한 게 아니라 평범한 것이다. 세상의 의원들 중 절반은 일곱 개까지는 모두 할 수 있을 게다.”
당영기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장거운이 눈을 흘기며 말을 건넸다.
“에이, 정말요?”
“그래.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
“그래도 보통 의원도 아니고 무림맹의 의당을 맡고 계시는데…….”
“하하! 그래, 네 녀석 말이 맞다. 명색이 무림맹 의당을 맡고 있는 내가 좀 더 분발을 해야겠구나.”
“아니, 뭐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것은 아닌데…….”
당영기가 너무 쉽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 버리자 장거운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말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영기는 원래가 담백한 사람이어서 인정할 것은 쉽게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무림맹의 의당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당가에서도 독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암기라면 몰라도 침술은 다른 의원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침술만 놓고 본다면 그보다는 동생인 당영영이 훨씬 더 뛰어났다. 그녀는 이미 이 년 전에 여덟 개의 침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당영기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거운에게 물었다.
“한데 솔직히 말해 보아라. 웬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냐?”
“저 그게…… 검안법을 좀 배울 수 없나 해서요.”
“검안법을?”
“예, 아무래도 앞으로 사체들을 많이 봐야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죽은 원인을 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이에요.”
당영기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냉가혜 그 아이가 세원록을 읽고 제법 검안법을 안다고 하더니,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구나.”
“아니,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당영기가 정곡을 찌르자 장거운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물론 검안법에 대한 호기심도 컸지만, 그보다도 냉가혜에게 계속 멍청이 소리를 듣는 게 더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냉가혜의 핀잔은 은근히 그를 열 받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당영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흉악범을 쫓는 청룡무사라면 검안법을 제대로 알고 있을 필요는 있지. 기실 검안법과 같은 것은 청룡무사로서 일을 하다 보면 경험을 통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네가 배우고 싶다면 내가 가르쳐 주마. 마침 내게 세원록과 평원록(平寃錄), 결안정식(結案程式) 등의 책들이 있으니 가져다 보거라.”
“감사합니다, 당주님!”
장거운이 반색을 하며 고개 숙이자 당영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만 모든 무공이나 학문이 그러하듯이 책만 봐서는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우므로 틈틈이 의당으로 와서 상처들도 보고 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게 묻도록 해라.”
“옛! 당연히 그래야죠. 헤헤.”
그냥 책만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당영기가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장거운의 입이 귀에 걸렸다. 검안법에 있어서는 무림맹 내에서 최고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당영기가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장거운으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좋아서 실실거리고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던 당영기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맹 안에 네 소문이 무성하더구나. 이번 혈루각 사건에서 활약이 대단했다면서?”
“에이, 활약은 무슨…… 아니에요.”
장거운이 멋쩍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혈루각 사건으로 인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였다는 것은 장거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부러워하는 시선도 있었고, 그를 경계하는 시선도 느껴졌다. 물론 냉가혜처럼 변함없이 무시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말이다.
남궁천호의 경우에는 진화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정주에서의 생활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나 장거운으로서는 이제껏 그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 외에는 달리 해 줄 말이 별로 없었다.
다만 그날의 이상한 기억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진한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 그날 일에 대해 말을 꺼내면 저절로 멋쩍은 표정을 짓곤 했다.
당영기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너의 그 철두가 번뜩일 때마다 놈들이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말들이 많던데. 혈루각주인 혈인마 구충도 박살 냈다면서?”
“그거야 운이 좋았을 뿐이죠. 전 그자가 혈인마 구충인지도 몰랐어요. 그것도 어찌하다 보니까 그냥 죽어 있더라고요.”
장거운의 말에 당영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참, 녀석 말 편하게 하는구나! 어찌하다 보니까 혈인마 구충이 죽어 있더라? 혈인마가 지옥에서 들었다면 원통해서 잠을 못 잘 것 같구나!”
“에이, 어차피 지옥에서는 잠도 못 잘 건데요, 뭐.”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냐?”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당영기와는 달리 장거운은 살짝 인상을 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참,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뭘 말이냐?”
“이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제가 점혈을 할 수가 없거든요.”
장거운의 말에 당영기도 생각하던 바가 있었는지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나도 네가 삼관을 통과한 이야기를 듣고 그게 궁금하던 참이다. 너는 점혈법을 모르는 것이냐?”
“아뇨, 점혈법은 아는데…… 그게 제가 내기를 밖으로 뿜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내공을 익히지 않고 외공만 익힌 것이로구나.”
“저 내공도 익혔는데요. 그것도 세 살 때부터요.”
당영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흠, 내공이 있는데도 내기가 밖으로 뿜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냐?”
“예, 그렇죠. 제가 운공을 해 보면 분명히 조금 약하긴 하지만 내기가 움직이는 것은 느끼거든요.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밖으로는 내기를 뿜을 수가 없네요.”
장거운의 말에 당영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생각을 해 보더니 다시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심공들이 있고, 그 특성들도 다양하기 짝이 없어 그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 아마도 네가 익힌 심공 또한 그중의 하나인 모양이구나.”
“그래요?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 봐서는 그다지 특이한 심공은 아닌 것 같았는데…….”
장거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당영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내가 물어보기는 뭣하지만, 혹시 네가 익힌 내공심법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냐?”
“그거요? 역근경과 세수경요.”
“뭐! 역근과 세수를 익혔다고?”
“예. 그게 뭐 잘못된 심공인가요?”
자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당영기를 보고 장거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당영기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 천하에 누가 있어 역근과 세수를 두고 감히 그런 말을 하겠느냐? 네가 철두공과 반선수를 익히고 있어서 소림과 인연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어찌 계인이 있는 직전제자도 아니면서 역근과 세수를 익힐 수가 있었느냐?”
“그야 당연히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셔서 익힌 것인데요.”
장거운이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듯이 멀뚱멀뚱 쳐다보자 당영기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
그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역근경과 세수경은 소림의 직전제자라고 하더라도 선택된 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 중의 비전이었다. 그가 알기로 소림사의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장거운이 익힐 수 있는 심공이 아니었다.
결론은 둘 중의 하나였다. 소림의 고승 중에 누군가가 장거운에게 몰래 전수를 했거나, 아니면 떠돌이 땡초가 순박한 장거운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문제는 장거운의 말만 들어 보면 사기를 당한 것 같은데, 또 혈인마 구충을 죽일 정도의 실력을 지닌 것을 보면 반대로 전자의 경우라고 봐야 했다.
당영기가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의 법명이 어떻게 되시냐?”
“그, 그게…… 정말 죄송한데,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장거운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당영기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묻는 것은 알지만, 할아버지의 법명을 모르기에 어떻게 말을 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영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흠, 그래. 원래가 무림이라는 곳이 기인이사들이 많은 법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라. 한데 역근과 세수를 익혔는데 내기를 뿜을 수 없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나.”
“우리 할아버지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뭐 말코 할아버지는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고 하셨지만 말이에요.”
장거운의 말에 당영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말코란 말은 아무에게나 쓰는 말이 아니었다. 도가의 진인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인 것이다. 장거운이 말하는 일승일도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쉽게 그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일승일도라고 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인물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배제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런 자리에서 감히 거론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당영기가 넌지시 물음을 건넸다.
“말코 할아버지라…… 혹시 태극권도 익혔느냐?”
“예, 어떻게 아세요?”
“그야, 태극권이 도사들의 무공으로 가장 흔한 것이 아니냐? 그러면 발경도 배웠겠구나.”
“예, 그야 뭐 당연히 배웠죠.”
“그래, 발경은 되냐?”
“그게, 된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안 된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애매해요. 발경을 쓰면 주먹을 내지를 때 파괴력은 크게 강해지는데 기가 뿜어지지는 않거든요.”
장거운의 말에 당영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태극권을 익혔냐고 물은 것은 아무래도 소림의 고승과 무당의 도장들이 친하기 때문에 장거운이 말한 말코 할아버지가 무당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태극권의 발경법이 내기를 뿜어내는 가장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발경이 된다고 하면 신체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장거운의 대답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영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흠,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나. 내가 진맥을 해 봐도 되겠느냐?”
“예, 저야 당주님 같은 명의께서 봐주신다고 하면 감사하죠.”
사실 당영기에게 수면독이 발린 암기 몇 개를 얻으려는 생각에 점혈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에 호기심을 느낀 당영기가 진맥을 해 보자고 나선 것이다. 장거운은 순간적으로 망설이기는 했지만, 의술이 뛰어난 당영기인 만큼 진맥을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손목을 내밀었다.
“이 녀석이 입에 발린 소리는…….”
장거운이 손목을 내밀자 당영기는 실소를 흘리며 진맥을 하기 시작했다.
“흐음.”
일다경이 넘도록 진맥을 해 보던 당영기가 나직하게 신음을 흘리며 장거운의 손목을 놓았다.
장거운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요? 제가 뭐 이상한가요?”
“그게 그러니까…… 이상하기는 이상하구나.”
이상하다는 말에 장거운은 치기 어린 웃음을 띠며 물었다.
“설마 제가 뭐 불치병 같은 것에 걸린 건 아니죠?”
“불치병이 맞다.”
“에예? 저, 정말요? 그럼 전 얼마나 살 수 있는데요?”
“글쎄다. 딱히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말은 못하겠구나.”
“그게, 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농담처럼 던진 물음에 당영기가 정색을 하고 대답하자 점점 불안해지는 장거운이었다.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장거운을 보며 당영기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그래도 할 일은 다 하고 가지 싶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불치병이라면서요?”
“그래, 불치병은 맞다. 다만 치료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 죽는다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
당영기의 말에 장거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찌 된 연유인지 너는 기맥이 비정상적으로 넓다. 게다가 믿기지 않지만 세맥까지 타통되어 있구나.”
“그래서요?”
“원래가 무인들은 내공이 강해지면 그에 따라 기맥도 튼튼해지고 넓어진다. 한꺼번에 많은 내기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의 경우는 기맥은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정작 내공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음, 말코 할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던데…….”
당영기의 설명을 들은 장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맥이 넓은 것에 관해서는 이미 할아버지에게 들어서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당영기가 진중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너의 세맥들이 문제다. 세맥들은 내기가 순환하는 통로인 기경팔맥과 달리 스스로 내기를 머금고 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네가 축기한 기운들을 가져가서는 단전으로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 세맥들이 나쁜 놈들이네요.”
“세맥이 타통된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지. 세맥이 발달하면 전신의 감각이 발달하게 되고 순간적인 움직임에 있어서도 엄청난 속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근육의 피로를 끊임없이 회복시켜 주어 강인한 지구력을 가지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 보니 네 녀석이 말이 필요 없는 놈이 된 것도 그와 같이 세맥이 발달하여서 그렇구나.”
장거운은 당영기의 설명에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다시 활짝 펴면서 물었다.
“그럼 세맥이 발달한 게 좋은 거네요?”
“당연히 좋지! 절정을 넘어 절대의 무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맥을 타통시켜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너의 경우는 그게 좀 문제가 있구나.”
당영기의 대답에 장거운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문제라니요?”
“쉽게 말하면, 내기를 뿜는다는 것은 단전에 있는 내기를 기맥을 통하여 신체의 말단까지 이동시켜 마지막 순간에 밖으로 뿜어내는 것인데, 너의 경우는 단전의 기가 기맥을 지나 말단으로 가는 과정에서 세맥들이 너의 내기를 모두 가져가 버리고 정작 말단에 이르게 되면 밖으로 뿜어낼 기가 없다는 것이지.”
“헉! 그러면……?”
“그래, 아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세맥이 타통되지 않았다면 문제가 아닌데, 너는 세맥이 발달했기 때문에 세맥이 이동하는 내기를 빼앗아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내기로 꽉 채워져 있어야만 내기를 제대로 밖으로 뿜을 수 있다는 말이다. 대개 절대 고수들은 내공이 넘쳐 나는 충만한 상태에서 세맥을 타통시킴과 동시에 세맥을 내기로 채워 버리기 때문에 너와 같은 현상을 보이지도 않는 것이지.”
당영기의 설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장거운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내공이 무지 많아야 한다는 말이네요.”
“뭐, 간단하게 말하면 그렇지.”
당영기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장거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장거운이 말하는 할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장거운의 몸을 보면 어쩌면 자신이 떠올린 그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장거운의 나이로 보아 결국 그의 세맥이 타통된 것은 어릴 적 개정대법과 벌모세수를 통해 누군가가 강제로 그의 세맥을 뚫어 주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 정도의 능력자는 아무리 강호에 기인이사가 많다고 해도 결코 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라면 자신의 제자인 장거운의 단전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연유로 장거운이 저 상태로 출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장거운이 그분들의 제자라면,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 강호무림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장거운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세맥을 다 채울 정도로 내공을 기르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딱히 얼마가 걸린다고는 예상할 수가 없지 않겠냐?”
“그건 그러네요. 저기 세맥을 막을 수는 없나요?”
“기연이라고 할 수도 있는 세맥의 타통을 다시 막는다는 것도 우습지만, 막고 싶어도 막을 방법은 없다. 내가 달리 불치병이라고 했겠느냐?”
당영기의 반문에 장거운은 낙담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다른 건 몰라도 점혈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장거운의 투정에 당영기가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왜 점혈이 안 되니 불편한 게 많더냐?”
“그렇죠. 아무래도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팔다리를 분질러 놓아야 하니까.”
“점혈은 반드시 내기점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네가 이미 보여 주었지 않냐?”
당영기의 말에 장거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영기의 표정을 보아하니 원하던 대로 수면독이 발린 암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거운이 당영기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기 그 수면독이 발린 암기 몇 개만 주실 수 있어요?”
“그보다는 이것은 줄 수 있다.”
“침(鍼)?”
당영기가 내민 것은 구침지희를 할 때 쓰던 가느다란 침이었다.
당영기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침도 일정한 깊이로 상대의 혈도에 박아 넣으면 원하는 시간만큼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지.”
“그,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장거운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당영기가 수련하고 있던 구침지희를 보더라도, 침이야말로 조금만 연습하면 점혈법을 대신할 가장 좋은 도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암기와 달리 침은 세밀하게 혈도를 막을 수 있어 내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연습만 하면 할아버지가 던진 솔잎처럼 허공을 격하고 점혈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영기가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사는 뭘. 줄 수 있다고 했지, 누가 준대냐?”
“에이, 왜 그러세요? 어차피 주시려고 말씀하신 거잖아요.”
“이 녀석이! 단, 조건이 있다. 침도 내기와 마찬가지로 과하게 찌르면 단박에 상대를 죽일 수도 있는 만큼 침의 깊이를 조절하여 찌르는 법과 허공을 격하고 침을 날리는 법을 나한테 배워야 한다.”
“가르쳐 주신다면야 저야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지요.”
당영기의 말에 장거운은 벌떡 일어나서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을 뱉었다.
“갑자기 웬 문자 타령이야? 사공한이 놈하고 다니더니 너도 그 녀석한테 물들었냐?”
“예! 헤헤.”
실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는 장거운을 바라보는 당영기의 시선에는 묘한 흥분이 어려 있었다. 그는 한 마리의 유룡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여의주를 품지 못했지만, 만약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장거운이라는 유룡이 여의주를 품는 날이 오면 천하는 강호를 떨쳐 울리는 청룡을 보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