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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아이고, 장 무사님!”
무림맹에서 나온 무사가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집무실 밖을 나서던 항주부의 추관 신규진은 찾아온 사람이 장거운임을 알고 반색을 했다.
장거운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신 추관님, 잘 지내시죠?”
“저야 늘 그렇지요. 참, 지난번에는 정말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예? 아, 뇌봉산 사건요? 그건 아무렇게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한 건데…….”
장거운은 신규진이 말한 도움이 뇌봉산의 사건에 대해 말한 자신의 추측임을 알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규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 아무렇게 던진 말씀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추관님과 포두님들이 수고한 탓이겠지요.”
“이거 겸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하!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예, 그게…… 다른 것이 아니라, 며칠 전 북우촌에서 목을 매서 자결을 한 사건이 있었다지요?”
장거운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북우촌이라…… 아,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홀로 사는 여인이 목을 매서 자결을 한 일이었지요.”
“예, 혹시 그 부인을 검시한 검장(檢狀)을 제가 좀 볼 수 있겠습니까?”
“검장을 말입니까?”
“예, 궁금한 것이 좀 있어서요.”
“흠, 검장이라면 검험관들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이보게, 호천! 나 좀 보세.”
장거운의 말에 난색을 표하며 자신의 팔자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신규진은 때마침 월동문 사이로 검험관인 반호천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자 황급히 불러 세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온 반호천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물었다.
“대인, 부르셨소이까?”
“아, 다른 게 아니고 이분 청룡당의 장 무사님이 검장을 하나 볼 수 있냐고 하시는군.”
“검장을 말입니까?”
신규진의 말에 반호천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장거운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혹시 저 아시겠어요?”
“아, 장 소협!”
“예, 일전에 남궁 당주님과 함께 뵈었지요.”
반호천이 자신을 알아보고 반색을 하자, 장거운이 웃는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반호천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요. 이런, 청룡무사가 되셨구려!”
“예, 어쩌다 보니. 헤헤.”
신규진이 끼어들었다.
“서로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군.”
“예, 일전에 말씀드린 그 오죽색마의 사건 때, 남궁당주와 장 소협을 뵈었지요.”
“장육의 처가 색마에게 살해당한 그 사건 말이군.”
“예, 그때 무림맹 의당 당주님의 검시를 남궁 당주와 함께 장 소협, 아니 장 무사님이 도우셨습니다. 한데 검장을 보고 싶으시다고요?”
반호천은 신규진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는 장거운에게 다시 물었다.
장거운이 말했다.
“예, 며칠 전에 북우촌에서 일어났던 자결 사건에 대해서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북우촌의 자결 사건이라면 마침 제가 검험관으로 나갔던 일입니다. 뭐 이상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반호천이 자신이 직접 검시를 했다고 하자 장거운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 그래요? 저기 그게, 아이들이 청룡고를 울렸습니다.”
“그 아이들이 청룡고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이들 말로는 자결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흠,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믿더니, 결국 청룡고까지 울렸나 보군요.”
반호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거운은 반호천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럼 자결이 확실한 것입니까?”
“예, 안 그래도 그날 아이들이 누군가를 봤다고 하기에 제가 샅샅이 흔적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죽색마의 일도 있고 해서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할까 봐 취생파(取生婆)를 불러 음부와 산문까지 철저히 살펴보았습니다.”
“혹시라도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예. 확실히 자결이 분명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어미는 긴 무명천으로 활투두(活套頭, 조르고 늦출 수 있도록 만든 올가미)를 만들어 대들보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액흔(縊痕, 목을 졸린 자국)이 목에 난 상흔(傷痕)과 일치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늑살을 당했다면, 목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액흔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분명히 액흔은 하나밖에 없었지요. 물론 신체에 다른 상흔도 없었고 말입니다.”
“그래요…….”
장거운은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반호천은 지난번 오죽색마에게 간살을 당한 장육의 처를 제대로 검시하지 못했다고 당영기에게 질책을 당한 일이 있어 이번에는 무척 꼼꼼하게 검시를 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타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결이 분명해 보였다.
장거운이 다소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보이자 반호천이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혹…… 아실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상흔이 숨통 아래에 나 있는 경우, 시체는 입이 벌어져 혀가 두 푼 혹은 세 푼가량 나와 있고, 입술이나 가슴 앞에 거품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과 두 발끝이 바로 뻗어 있는 데다 넓적다리에는 불로 뜸질하여 생긴 흔적과 같은 피 맺힌 자국이 생기는데 그 여인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자액(自縊,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요.”
“예…… 알겠습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반호천의 설명에 장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규진이 말을 건넸다.
“혹시, 그 사건이 수배 중인 오죽색마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여인이고, 아이들이 제 어미의 방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을 봤다고 하기에, 혹시나 싶어서 알아보려던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반호천이 장거운의 말을 받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너무 흉측한 일을 당하다 보니 놀란 나머지 그렇게 착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죽은 여인이 오래전부터 광증을 앓아 왔다고 합니다.”
“광증을 말입니까?”
장거운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반호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죽은 여인은 젊었을 때 기루의 기녀로 있다가 아이들의 아비 되는 자를 만나 북우촌으로 들어왔는데, 오 년 전인가 표사 일을 하던 남편이 표행에서 비명횡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뒤부터 가끔씩 광증을 보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광증이 더욱 심해져서 아이들을 구타하는 일까지 자주 있었답니다.”
이번에는 신규진이 물었다.
“그럼 광증이 심해져서 자결을 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광증을 앓고부터는 사람이 점점 이상해져서 쾌활하게 웃고 떠들며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혼자 술에 취해 멍하니 마을을 돌아다니는 일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흠, 그 증상이 심해지면 자살을 할 수도 있는 것인가?”
“예, 조울증을 앓던 이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하는 일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흠, 그렇군.”
반호천의 설명에 신규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던 장거운은 신규진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반호천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예, 말씀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럼 장 무사님, 수고하십시오.”
장거운은 반호천이 물러나자 신규진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혹, 오죽색마에 관한 소식은 들어온 것이 없는지요?”
“예, 아직까지는 놈을 닮은 자를 봤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소이다. 아무래도 놈이 항주부를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만…….”
신규진이 대답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장거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말을 건넸다.
“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감사했습니다.”
“감사랄 게 무어 있겠습니까? 본시 저희가 해야 할 일을 장 무사님이 대신 하시는 것인데, 저로서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언제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오십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신규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장거운은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장거운은 자신의 판단이 성급했음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말을 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공우의 말에 적극 동의를 표한 것은 분명히 자신의 실수였다. 좀 더 냉정했다면, 아이들에게 기대감을 주지 않고도 조사를 해 볼 수가 있었다. 그랬다면 아이들이 또다시 어른들에게 실망하는 일은 생기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장거운은 자신이 어미를 죽인 흉수를 찾아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문득 장거운의 뇌리에는 어쭙잖은 동정심이 청룡당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고 호통을 치던 악우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장거운은 자신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은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악우진의 호통이 더욱더 살을 에는 차가운 북풍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 *

“여! 우리 장 무사님, 어디 갔다 오시는가?”
장거운이 고개를 들어 보니 곽호가 싱글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무림맹의 정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항주부에 다녀왔어요.”
장거운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곽호가 살짝 안색을 바꾸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왜 그리 힘이 없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형님, 말 놓으세요. 제가 불편하잖아요.”
장거운의 말에 곽호는 주위의 위사들 눈치를 슬쩍 보고는 한 발 앞으로 다가와 장거운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흠흠, 그래도 근무 중인데 그럴 수야 있나. 근데 솔직히 말해 봐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좀 전에 얼음귀신이 너 찾아다니더라. 무슨 일이냐?”
“야!”
“헉! 아니, 그게 아니고…….”
날카로운 냉가혜의 외침에 곽호가 화들짝 놀라며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얼음귀신이라고 한 것을 냉가혜가 듣고는 자신에게 고함을 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냉가혜는 곽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장거운을 노려보며 물었다.
“멍충이,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미안, 이제 내가 당직 설 테니까 그거 주라.”
장거운이 목패가 든 목함을 건네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냉가혜는 장거운에게 목함을 내던지듯 건네주며 다시 말을 뱉었다.
“지금 이깟 당직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어떻게 할 거야? 악 대주가 가만히 둘 것 같아?”
곽호가 장거운을 보며 물었다.
“잉? 악 대주님이 가만히 두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 일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장거운은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곽호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냉가혜가 다시 말을 뱉고 있었다.
“뭐가 아무 일도 아니야? 너 그러다가 진짜 옷 벗게 될지도 몰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해라!”
냉가혜를 보며 말을 뱉는 장거운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흥! 멍청한 자식!”
잠시 장거운을 노려보던 냉가혜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내뱉고는 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냉가혜의 모습에 곽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것이냐?”
“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좀 달라서 그런 것이에요. 형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장거운이 여전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을 하자 곽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나직하게 호통을 쳤다.
“거운이, 너 이 녀석! 이 형님이 위사나 하고 있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내가 그렇게 능력이 없어 보이냐? 그래도 내가 이 생활만 이십 년이야!”
“에이, 그런 것 아니에요. 진짜 무슨 일이 있다면 제가 당장에 형님보고 도와 달라고 했지요. 별거 아니니까 형님 신경 쓰시지 말라고 그러는 거잖아요.”
장거운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곽호의 팔을 잡고는 달래는 투로 말을 건넸다.
곽호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흠흠, 진짜냐?”
“그럼요! 제가 형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알죠?”
“그럼그럼, 알지!”
장거운이 막내 동생처럼 아양을 떨자 곽호는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입을 헤벌쭉 벌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거운이 평소처럼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을 했다.
“헤헤, 저 청룡고에 가 봐야 해요. 나중에 진화루에서 화주나 한잔 사 주세요.”
“그래,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근데 술은 나보다 녹봉을 더 받는 네가 사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럼 제가 살게요. 헤헤. 형님, 나중에 봐요.”
“그래. 수고혀!”
장거운이 인사를 건네고 청룡고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곽호가 한 입 가득 웃음을 베어 물고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그러나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살짝 근심이 어려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무림맹에서 이십 년 가까이 지내 온 곽호였다. 장거운과 악우진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찰로 인한 피해는 장거운이 훨씬 더 많이 입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곽호였다.
악우진은 청룡당의 이대주인 데다 산동악가를 배경으로 업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이제 신입 무사에 지나지 않은 장거운으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곽호는 아무래도 근무를 마치고 남궁천호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장거운은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항주의 북쪽에 자리한 북우촌의 한 기와집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만두 한 소쿠리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청룡고의 근무를 마치고 공우와 공호 형제를 만나러 북우촌으로 찾아온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초로의 중년인에게 물어 찾아온 공우의 집은 생각보다 좋았다. 아마도 공우의 부친이 표사였기 때문에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죽은 공우의 모친이 광증을 앓고 있어서 형제의 행색이 그렇게 꾀죄죄했던 모양이었다.
공우와 공호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방에 등불이 꺼져 있었다. 장거운은 문을 두드리려다가 아이들을 깨울까 봐 조용히 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한쪽 편에는 권법을 수련할 때 쓰는 목인이 달빛을 받으며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마도 표사였던 공우의 부친이 수련을 할 때 썼던 모양이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선 장거운은 아이들의 방으로 보이는 우측의 방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거운이 빠끔 문을 열어 보니 봉창을 통해 흘러들어 온 달빛이 비추고 있는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좌측의 방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대어 보니, 역시 그 방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장거운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측방과는 달리 봉창이 없는지 방 안은 캄캄했다.
장거운은 소매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등에 불을 켰다. 좌측 방도 맞은편 방과 마찬가지로 침상은 비어 있었고 방에는 지분 냄새가 풍겨 왔다. 한쪽 면에 놓인 목갑 위에는 제법 커다란 동경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죽은 아이들의 모친이 쓰던 방인 것 같았다.
장거운은 들고 있던 만두를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가로지른 대들보가 눈에 들어왔다. 공우 형제의 모친이 목을 맨 대들보였다. 아마도 죽은 아이들의 모친은 침상 위에 올라서서 무명천을 대들보에 묶고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건 다음 침상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였다.
장거운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자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흠칫 몸을 떨며 한기를 떨쳐 버린 장거운은 침상 위로 올라섰다. 육 척에 가까운 장거운인지라 침상 위에 올라서자 대들보가 눈앞에 바로 보였다.
장거운은 다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인 뒤 대들보 위를 비추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들보 위에는 생각보다 먼지가 많이 쌓여 있지 않았다. 장거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들보의 한쪽에 먼지가 깨끗하게 쓸린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목을 맬 때 쓴 무명천을 묶었던 자리였다.
다시 시선을 옮기던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발자국이었다. 희미하지만 대들보에 쌓인 먼지가 살짝 눌린 모양이 사람의 발자국을 닮아 있었다. 대들보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공우의 말처럼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목을 맨 무명천을 풀기 위해 사람들이 대들보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장거운의 눈이 다시 차갑게 번뜩였다. 밖에서 기척이 들려온 것이다. 아이들의 기척은 분명히 아니었다. 한 사람의 기척인 데다 공우 형제들로 보기에는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분명히 무공을 익힌 자였다. 장거운은 대들보 위로 뛰어올랐다.
잠시 후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장거운은 숨을 죽이고 소매에서 점혈법을 대신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침을 세 개 꺼내 들었다. 조금씩 열리던 문이 움직임을 멈추고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사내 하나가 소리 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자 장거운은 숨이 콱 막혀 왔다. 문틈으로 보이는 사내의 오른쪽 눈 밑에 사마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공우가 봤다고 하던 그자였다. 장거운은 꿈틀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억눌렀다. 사람의 얼굴에 있는 주요혈은 독맥을 따라 얼굴 한가운데에 분포해 있기 때문에 침을 던지기에는 아직 이른 것이다.
갑자기 사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장거운이 내려놓은 만두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장거운의 손가락에서는 세 개의 침이 잇달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장거운은 대들보를 박차며 벼락처럼 문을 향해 뛰어내렸다.



제8장 북우촌(北右村)


장거운이 마당으로 뛰쳐나왔을 때 검은 야행복을 입은 사내의 그림자는 이미 담장을 넘고 있었다. 장거운이 재빠르게 담장 위를 뛰어오르자 공우의 집 앞에 있는 커다란 오동나무 가지를 밟고 몸을 날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장거운의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사내의 경공이 지나치게 뛰어났던 것이다. 담장에서 오동나무 가지까지는 족히 칠팔 장은 되어 보였다. 무림맹의 무사를 뽑는 일관의 심사 기준이 오 장에 지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칠팔 장을 단숨에 날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절정고수들도 힘든 일이었다.
장거운은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은 사내의 경공에 놀라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공우의 모친을 살해한 흉수를 눈앞에서 놓쳐 버릴 수가 있었다. 담장 위에서 뛰어내린 장거운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용형보를 펼쳐 전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북우촌을 벗어난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사내의 눈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장거운이 거리를 점점 좁히며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을 날아가는 재주는 없지만, 땅 위를 달리는 것이라면 장거운의 용형보는 속도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잠시 후 항주에서 덕청(德淸)으로 향하는 관도로 접어든 사내의 얼굴은 이제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북우촌을 벗어나 길이 잘 정비된 관도로 접어들자마자 장거운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뒤를 바싹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지친 기색도 없이 미친 듯이 따라붙고 있는 장거운의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앞서 달려가던 사내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꿔 관도 옆의 숲 속으로 신형을 날리자 장거운의 눈에 초조함이 어렸다. 사내를 거의 다 따라잡았지만, 사내가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닌다면 또다시 거리가 벌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입을 악다문 장거운은 사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예측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달려가던 탄력과 땅을 박찬 힘이 합쳐져서 장거운의 신형이 먹이를 향해 날아드는 매처럼 사내를 향해 파고들었다.
찌이익!
“큭!”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입에서 신음을 흘리며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장거운의 신형이 사내와 허공에서 교차하듯 스치며, 손으로 사내의 옷자락을 찢어 버린 것이다.
쓰러졌던 사내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사내는 갑작스럽게 무릎이 푹 꺾이면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옷자락을 찢어 낸 장거운의 손에 이어 그의 어깨가 둔부를 스쳤는데,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사내가 느끼기에는 장거운의 어깨가 무쇠보다도 더 단단한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나서 달아나려던 사내는 뜨끔하는 느낌과 함께 온몸이 마비가 되어 버리면서 맥없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새 장거운이 침을 날려 사내의 양 무릎 뒤쪽인 오금 중간에 있는 위중혈(委中穴)에 두 개의 침을 박아 넣어 버린 것이다.
장거운이 천천히 사내 곁으로 다가갔다. 양다리가 마비된 사내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이 사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허리를 숙여 사내의 어깨를 잡아 가는 순간 갑작스럽게 사내가 팔꿈치를 뒤로 젖히면서 장거운의 미간을 노리고 찍어 왔다.
빡!
“아악!”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뭍에 던져진 생선처럼 파닥거렸다. 그 반면에 장거운은 손으로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가 팔꿈치로 안면을 공격해 오자 장거운이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이마로 사내의 팔꿈치를 받아 버린 것이다.
잠시 후 사내가 조금 진정된 것을 보고는 장거운이 사내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사내의 발뒤꿈치를 냅다 차 버렸다. 그러자 사내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지며 얼굴을 드러내었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눈 밑의 사마귀를 빼고는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사내는 고통이 심한지 장거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달빛에 드러난 장거운의 가슴에 새겨진 청룡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눈빛이 바뀌고 있었다.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룡무사인가?”
“청룡당의 장거운이오. 왜 아이들의 모친을 죽인 것이오?”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
“말해 보시오! 당신과 같은 무림인이 왜 그녀를 죽인 것이오?”
사내가 묵묵부답 침묵을 하자 장거운이 약간 노기가 어린 어조로 다시 묻고 있었다.
잠시 장거운의 눈을 말없이 쳐다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정직한 눈이군. 장거운이라고 하였나? 많이 어려 보이니 내가 말을 놓겠네. 나는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네.”
“그 아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죽은 아이들의 모친, 그 아이의 이름이 숙현이라네. 양숙현이지.”
“양숙현…….”
장거운은 흠칫 놀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검장의 기록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공우 모친의 이름이 양숙현인 것은 확실했다.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양충원이라고 하네. 죽은 숙현이의 오라비가 되는 사람이지.”
“당신이 아이들의 외숙이란 말이오? 그런데 어찌 공우가 당신을 몰라본 것이오? 분명히 공우는 그날 밤 모친의 방에서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소. 그 아이는 당신의 눈 밑에 있는 사마귀까지 똑똑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소.”
장거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이름이 양충원이라고 밝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날 밤 그 아이가 나를 보았지. 그래서 난 놀란 나머지 황급히 달아났던 것이고.”
“그걸 인정하면서도 발뺌을 하려는 것이오?”
“분명히 나는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네. 내가 갔을 땐 이미 자결을 하여 숨이 끊어지고 난 뒤였지.”
“닥치시오! 그게 말이 된다고 하는 소리요? 당신이 진짜 아이들의 외숙이라면, 그리고 당신의 말대로 아이들의 모친이 이미 자결을 했다면 도망을 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다독거리고 수습을 해야 할 것이 아니오?”
장거운이 노기를 드러내며 호통을 쳤다.
양충원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자신이 아이들의 모친인 양숙현의 오라비라면, 자결한 여동생의 시체를 두고 조카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도망을 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장거운의 호통에도 양충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네. 아이들은 나의 존재를 몰랐으니깐 말일세. 자네라면 생판 처음 보는 이가 갑자기 자네 숙부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흥! 요사한 말로 나를 현혹시키려 하는군.”
양충원의 말에 일시 말문이 막혔던 장거운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뱉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양충원은 자신이 어린 데다 약간 어수룩하게 보이니 교묘하게 말을 꾸며 속이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거운은 차갑게 굳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장거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양충원이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 입장에서는 내 말을 쉽게 믿지 못하겠지. 어쩌면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이들은 당신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내 어깨에 보면 연화문이 새겨져 있네. 죽은 숙현이의 어깨에도 똑같은 연화문이 새겨져 있지. 내가 아홉 살, 그리고 숙현이가 다섯 살 때 부친께서 손수 새겨 주신 것이지. 혹시 아이들이 숙현이의 어깨에 새겨진 연화문을 봤다면 내 말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장거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양충원을 쳐다보았다. 그를 쳐다보는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양충원의 눈빛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표정만 보면 전혀 거짓이 없어 보였다.
장거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 채었는지 양충원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시 말을 건넸다.
“아이들을 찾아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닌가?”
“그 아이들이 모른다고 하면 어찌할 것이오?”
“그 또한 운명이겠지. 아이들이 연화문을 모른다면 자네의 처분을 달게 받겠네.”
장거운의 반문에 양충원은 처연한 표정으로 지어 보이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장거운은 양충원의 눈을 다시 한 번 보고는 결심을 한 듯 말을 뱉었다.
“좋소! 만에 하나라도 내가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고 거짓으로 나를 속이려 든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겠소.”
“물론이네! 아이들을 찾으러 가세!”
양충원이 확신을 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으며 일어나자 장거운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양충원을 쳐다보았다.
양충원이 점혈로 마비된 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양충원은 자신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 이미 침들을 모두 뽑은 것이다.
장거운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양충원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장거운이 위중혈에 박아 넣었던 두 개의 침이 놓여 있었다. 그는 경공만큼이나 손이 빠른 모양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양충원이 침을 장거운에게 건네주면서 말을 했다.
“청룡무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군.”
“그, 그건 사실이지만…… 허튼수작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자신의 미숙함이 탄로 나자 장거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침을 건네받고는 짐짓 정색을 하며 다짐이라도 하는 듯이 양충원에게 경고의 말을 뱉었다.
양충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속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달아났겠지.”
“……?”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양충원을 쳐다보던 장거운이 황급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장거운은 양충원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충원의 눈빛이 아무리 정직했어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장거운이었지만, 서서히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했다면, 그가 보여 준 경공 실력으로 보아 이미 달아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고 봐야 했다. 무엇보다도 장거운은 양충원이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있었다.
장거운은 자신의 이마에 받혀서 퉁퉁 부어 있는 왼 팔꿈치를 오른손으로 붙든 채 신법을 펼치고 있는 양충원의 등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속도는 조금 전 달아날 때보다 훨씬 못하지만, 두 팔을 고정시키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확실히 그의 경공 실력만큼은 대단해 보였다.

양충원과 함께 공우 형제의 집으로 돌아온 장거운은 양충원을 침상에 앉히고는 아예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도록 등 쪽의 명문혈(命門穴)과 배 쪽의 중완혈(中脘穴) 두 곳에 침을 박아 버렸다. 명문혈과 중완혈은 각기 독맥과 임맥의 가장 중요한 요혈이어서 이 두 곳을 막아 버리면 내기를 전혀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사지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양충원을 점혈한 뒤 장거운은 그의 왼쪽 어깨에 새겨진 연화문을 확인하고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문을 나서려다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한 번 양충원을 쳐다보았다. 장거운은 자신의 행동에 양충원이 순순히 따라 주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양충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온 장거운은 이웃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여 공우와 공호 형제를 찾았다. 아이들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인 곽씨 부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이들끼리 빈집에 남겨 둘 수 없어 곽씨 부인이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곽씨 부인의 집 대청에서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장거운은 곽씨 부인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보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이들은 제법 밤이 늦었는데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울고 있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장거운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공우가 장거운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청룡고에서 본…….”
“그래, 청룡고에서 만난 그 형이다.”
“형! 어떻게 되었어요? 나쁜 놈 잡았어요?”
공우가 바짝 다가서며 다그치듯 묻자, 장거운은 공우의 자그마한 어깨를 붙잡고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일단 그 이야기는 조금 이따 하기로 하고, 이 형이 먼저 물어볼 게 하나 있구나.”
“예? 뭔데요?”
“혹시 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어깨에 꽃 모양의 그림이 있는 것 본 적이 있니?”
“아이고, 그건 나도 봤어요. 내가 양씨 동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염을 했는데, 그 어깨에 아주 예쁜 연꽃이 피었기에 부처님이 극락으로 데려가려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장거운의 말을 받은 사람은 옆에 서 있던 곽씨 부인이었다. 평범한 촌부로 보이는 곽씨 부인은 생전에 아이들의 모친과 교분이 깊었는지 직접 염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공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꽃, 나도 있는데? 그럼 나도 극락 가요?”
공호의 말에 장거운이 눈빛을 빛내며 공우를 향해 물었다.
“정말이냐? 그럼 공우도 있니?”
“네, 그거 엄니가 얼마 전에 동생이랑 저한테 그려 줬어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어른이 되어서라도 같은 꽃 그림을 새기고 있는 사람을 보면 꼭 엄니 이름을 말해 주라고 했어요.”
공우의 말에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양충원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이 형이 한번 볼 수 있니?”
“네, 여기 있어요.”
공우가 장거운이 잡고 있는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옷을 벗겨 보니 확실히 공우의 왼쪽 어깨에도 양충원과 같이 연화문이 새겨져 있었다. 두 연화문은 꼭 닮아 있었다. 단지 차이라면 양충원의 그림이 훨씬 정밀하였을 뿐이었다.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음. 그렇구나. 혹시 어머니가 그 사람이 누구라고는 말을 안 해 주었니?”
“엄니 오빠라고 했어요. 아주 어릴 때 엄니랑 헤어진 오빠인데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고 했어요.”
“그래, 외숙이시구나.”
“근데 이 꽃 그림은 왜 물으세요?”
공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장거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너희 외숙이 나를 찾아오셨더구나. 너희들을 찾고 있었다.”
“정말요?”
공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장거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외숙부가 나타난 것이다.
장거운이 공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을 해 주고는 다시 곽씨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집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아이들 외숙이 이번에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이고, 그럼요. 피붙이가 없어서 걱정을 했는데 정말 잘되었네요.”
“예, 그럼. 공우야, 공호랑 같이 가자꾸나.”
곽씨 부인이 반색을 하고 대답하자, 장거운은 곽씨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멀뚱히 서 있는 공호의 손을 잡고 공우와 같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