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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아이들과 함께 공우의 집 안으로 들어선 장거운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아이들을 대청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양충원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양충원은 여전히 침상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말을 건네던 장거운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양충원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양충원의 눈 밑에 있던 사마귀도 없어지고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양충원이 눈을 뜨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 놀라지 말게. 이게 내 본모습이니까. 내가 그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공우를 만나겠는가?”
“그럼 그 사마귀는?”
“원래 사람들은 얼굴을 기억할 때 얼굴에 강한 특징이 있으면 그것만 기억하게 되지.”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양충원이 혼잣말을 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장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충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사람들은 눈에 확 띄는 특징만을 기억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문득 장거운은 오죽색마의 용모파기를 떠올렸다. 그자 역시 몇 가지 특색이 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큰 코와 두껍고 짙은 눈썹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장거운은 양충원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물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얼굴을 바꾼 것이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조카아이들을 빨리 보고 싶다네.”
양충원이 담담하게 말을 뱉자 잠시 눈을 빛내며 노려보던 장거운은 그에게 다가가 명문혈과 중완혈에 박아 놓았던 침을 제거해 주었다. 점혈이 풀린 양충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마음을 가다듬는지 가볍게 몸을 풀어 보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우와 공호는 양충원이 나오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혈육 간에는 확실히 특별한 느낌이 있는지 점점 아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장거운의 눈에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바뀐 양충원과 아이들의 얼굴이 제법 많이 닮아 보였다.
양충원이 무릎을 숙이며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리들 오너라. 숙현이를 많이 닮았구나!”
“외숙부님……?”
“그래, 내가 너희들 어미의 못난 오라비구나. 미안하구나! 너무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하구나.”
공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양충원은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아이들을 와락 끌어안고는 흐느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장거운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장거운의 눈에 공우의 모친이 생전에 쓰던 커다란 동경이 보였다. 문득 장거운은 자신도 옷을 벗고 알몸을 동경에 비춰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도 그가 모르는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피붙이라는 말을 거의 떠올리지 않고 살아온 장거운이었다. 그러다가 지금 양충원과 공우 형제, 숙질간의 만남을 보니 새삼 피붙이라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그도 자신에게는 남들에게 있는 부모와 형제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할아버지와 말코 할아버지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두 분 할아버지는 그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만 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장거운은 뇌리에서 부모형제라는 말을 지워 버리려고 했다. 자신이 그 말을 꺼내면 두 분 할아버지들이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그저 두 분 할아버지들이 세상에서 가진 혈연의 전부였다.
“장 무사, 아이들을 재우고 올 테니 잠깐 기다려 주겠나? 술이나 한잔하세.”
갑자기 들려온 양충원의 목소리에 장거운이 상념을 깨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돌려보니, 양충원이 두 아이와 함께 아이들 방으로 가고 있었다. 장거운은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아이들을 재우러 갔던 양충원이 어디서 났는지 잔 두 개와 술병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양충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장거운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잔을 장거운에게 건넸다.
장거운이 잔을 받아 들자 양충원이 술을 따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침 숙현이가 생전에 마시던 술이 한 병 있더군. 자네가 사 온 만두를 안주 삼아 한잔하세.”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날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일단 한잔하세! 한잔 마시고 이야기하세.”
장거운이 공우 모친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지만 양충원은 그저 한잔하자는 말을 되풀이하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를 뿐이었다.
양충원은 잔을 채운 뒤 눈앞까지 들어 보이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장거운도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잔을 들어 입안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독한 주향이 알싸하게 장거운의 목을 훑고 내려갔다. 양충원은 다시 말없이 장거운의 잔을 채워 주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순배를 돌자 곧 술이 떨어져 버렸다.
양충원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의 부친께서는 신창양가(神槍楊家)의 후손이셨지. 물론 직계는 아니고 방계이셨지만, 양가창을 익힐 수 있어 군문에 계시다가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낙향을 하시어 작은 무관을 하였다네. 그 시절엔 참 행복했지. 지금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님께 양가창 삼십이식을 배우며 땀을 뻘뻘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네. 하지만 그 행복은 단 하나의 기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
“기물이라면?”
“바로 이놈이라네.”
양충원이 갑자기 말을 뱉으며 자신의 허리춤을 만지더니 하나의 혁대를 풀어 놓았다. 양충원이 풀어 놓은 혁대는 얼핏 보면 한 마리의 뱀 같아 보였다. 혁대는 자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끝에는 허리에 찰 수 있도록 둥근 이음새가 있었고 가죽띠는 잉어의 비늘과 같은 수많은 비늘들이 촘촘하게 덮고 있었다.
양충원의 말이 이어졌다.
“이놈은 그냥 보기엔 그저 혁대일 뿐이지만 이 이음새에 자룡창(紫龍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뭔가 특별한 용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네.”
“너무 짧아서 채찍으로 쓰기에도 그렇고…… 자룡창이라는 말은 그냥 그대로 혁대의 이름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한눈에 보아도 공을 들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만든 이가 그저 자신의 작품에 멋진 이름을 붙인 것 같은데요?”
자룡창을 살피며 말을 하는 장거운을 보며 양충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이름이 문제였지. 확실히 이놈은 나로서도 아무리 살펴봐도 그저 혁대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룡창이라는 이름이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네. 부친이 삼국시대의 전설적인 무장인 조자룡이 쓰던 자룡창이라는 천고의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지.”
“그럼 그 혁대를 보물로 착각을 했단 말입니까?”
“그러하네! 수많은 무림인들이 있지도 않은 보물을 차지하려고 야음을 틈타 수시로 난입해 들어왔지. 결국 어느 날인가 수십 명이 떼거리로 난입을 해서는 모든 식솔들과 무관의 제자들을 도륙하고는…….”
“…….”
말끝을 흐리는 양충원을 보며 장거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무지한 탐욕에 빠진 인간들이 그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말았으리라.
잠시 회한에 잠긴 듯 침묵하고 있던 양충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친께서 나와 숙현이를 지하실에 숨게 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 불과한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단지 탐욕에 찌든 세상을 원망할 뿐이었지.”
“그럼 동생 분과는 어떻게 헤어진 것입니까?”
장거운의 물음에 눈시울을 붉히며 잠시 멍하니 생각을 하던 양충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못난 내가 내 손으로 그 아이를 기루에 팔았네.”
“어찌…….”
장거운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주의 명화루에도 부모들이 돈을 받고 파는 바람에 기녀가 된 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거운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해도 어찌 자식을 돈을 받고 판단 말인가?
양충원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유랑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소주에 이르렀을 때 숙현이가 많이 아팠다네. 나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어느 호화로운 저택의 문을 두들기고는 제발 동생을 살려 달라고 하였지. 그때 그곳의 총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의원을 불러 숙현이를 치료하고는 내게 동생을 배불리 먹게 해 주겠다며 그곳에 머물게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난 그저 동생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별생각 없이 단박에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 말았네.”
“그곳에 같이 머물지는 않으셨습니까?”
장거운의 말에 양충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같이 있고는 싶었지만, 그 총관 말이 나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길로 나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네. 점소이부터 시작해서 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 그 와중에 숙현이가 있는 곳이 기루이고 동생을 찾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하루빨리 돈을 벌어서 숙현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일을 했다네. 결국 오 년 동안 약간의 돈을 모으게 되자 동생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갔지만, 숙현이는 이미 그곳에 없더군. 정말 미칠 것 같았네. 그래서 동생을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렸지만, 오히려 실컷 두들겨 맞고는 다리 밑에 버려지고 말았다네. 지나가던 사부님이 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때 이미 죽었겠지.”
“그나마 다행이었군요.”
양충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부님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지. 그 덕분에 탐욕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복수를 할 수 있었으니까.”
“흉수들을 찾으신 것입니까?”
장거운이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양충원은 약간 당황한 눈빛을 보이고는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니, 찾지는 못하였다네. 단지 다른 방법으로 복수를 한 것이지. 어쨌든 내가 숙현이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칠 년 전이었네. 우연찮게 주루에서 한 표사가 자신의 아내에게 있는 연화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숙현이의 남편임을 알게 되었네.”
“아이들의 부친이 표사였다고 하더니 그렇게 만나셨군요.”
양충원의 말을 듣고 눈가에 잠시 이채를 띠었던 장거운은 이내 담담해진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양충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진이라는 그 친구, 사람이 좋더군. 숙현이가 그 친구와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말에 정말 기뻤다네.”
“그럼 그때 동생 분을 만나셨던 것입니까?”
“그렇지. 하지만 숙현이는 나를 모른다고 하더군. 어린것이 오라비를 많이 원망했겠지. 하지만 난 그저 그 아이가 잘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네. 이후로 숙현이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하고는 아이들의 아비인 공진은 가끔 만났다네.”
“아이들의 부친이 오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그동안 찾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양충원의 말에 장거운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동생이 남편을 잃고 오 년 동안 광증을 앓았는데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양충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일이 좀 있었지. 조카아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네. 그 선물을 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어서 본의 아니게 멀리 피해 있어야 했네.”
“그럼 이번에 돌아오신 것입니까?”
장거운의 물음에 양충원의 눈에 살짝 이채가 스쳤다. 장거운의 말이 약간 의외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얘기를 듣고 도대체 그 선물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피해 있었냐며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거운은 선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자룡창을 보여 주었을 때도 장거운의 눈에는 전혀 탐욕의 빛이 없었다.
양충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네. 먼저 공진을 찾아갔지. 그때 그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네.”
“그러면 그 말을 듣고 바로 이곳으로 오신 것입니까?”
장거운의 물음에 양충원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그래, 자네 말대로 그 소식을 듣고 그날 밤 바로 이곳으로 찾아왔지. 숙현이가 여전히 나를 원망하고 있음을 알기에 아이들에게 줄 선물과 편지만 놓고 갈 요량으로 몰래 들어왔지.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땐 이미 숙현이, 그 아이가 자결을 하고 난 뒤더군.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네. 그 소리를 듣고 공우가 문을 열어 본 것이지.”
“그렇게 된 것이군요. 하지만 아이들의 말을 들어 보니 돌아가신 동생 분께서는 오라버니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더군요. 오히려 훗날 아이들이 외숙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연화문을 새겨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공우에게 오라버니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말도 했더군요. 그러고 보니 어쩌면 동생 분께서는 그때 이미 자결을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랬던가? 내가 너무 바보 같았군.”
장거운의 말에 양충원은 중얼거리며 멍하니 자신의 동생이 목을 맨 대들보를 쳐다보았다.
양충원의 시선을 따라 대들보를 쳐다보던 장거운은 자신이 본 발자국을 떠올리고는 뭔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양충원의 말대로라면 대들보 위에 찍혀 있던 희미한 발자국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저 대들보 위에 발자국은 설명이 안 되는…… 엇, 무슨 짓을…….”
장거운이 살짝 낯빛을 굳히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끼고는 양충원을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양충원은 묵묵히 그를 보고만 있을 뿐이다. 곧바로 장거운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어헉!”
장거운은 싸늘한 한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다. 장거운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거운의 시선에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흥! 멍충이 같은 게 이젠 별짓을 다 하네.”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뱉은 여자는 다름 아닌 냉가혜였다. 장거운이 눈을 비비고는 다시 주위를 쳐다보니 냉가혜뿐만 아니라, 남궁천호와 곽호의 얼굴도 보였다. 남궁천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고, 곽호는 물동이를 든 채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거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궁천호를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놈! 일을 하다 보면,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꼴이냐? 술에 취해 뻗어 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해결된단 말이냐?”
“예?”
장거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곽호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아이고! 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당주님이 너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그, 그게…….”
“뭐하느냐! 어서 정신 차리고 돌아가자!”
장거운이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자 남궁천호가 냉랭하게 말을 뱉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냉가혜가 따라나서며 눈을 흘기며 말을 뱉었다.
“멍충이!”
“저, 저게!”
가뜩이나 영문도 모르고 남궁천호에게 꾸지람을 듣고 졸지에 물까지 뒤집어쓴 장거운은 냉가혜의 빈정거림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곽호가 장거운을 만류하며 말을 걸었다.
“어허! 그러지 마라, 이 녀석아! 그래도 냉 무사님이 너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 보자고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어쩔 뻔했냐?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던 게야?”
“예? 아니, 술은 그냥 몇 잔밖에 안 마셨는데…….”
“하이고, 몇 잔은!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그딴 소리냐?”
“아니, 진짜라고요! 헉!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곽호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자 억울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던 장거운은 공우와 공호를 떠올리고는 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뭔 소리야? 아이들 떠난 게 언젠데! 이미 어제 아침에 아이들 숙부가 데려갔다고. 그럼! 너 그때부터 여태까지 술에 취해 뻗어 있었던 거냐? 어이구,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그러는 것이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반문을 하던 곽호는 장거운이 이틀이 지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물었다.
“숙부가 아이들을 데려갔다고요?”
“그래. 네가 아이들을 숙부에게 데려다 주겠다며 데리고 갔다며?”
“예? 에예, 그건 맞는데……. 잠깐 먼저 가세요. 가 볼 데가 있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자. 이미 그 곽씨 부인 만나서 이야기 다 들었다. 네가 밤에 아이들 데리고 간 다음날 아이들이 숙부와 같이 와서 떠나게 되었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다더라. 집이랑 뒷정리 좀 해 달라고 돈까지 두둑하게 주고 갔다고 하더니만. 그리고 네가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처지냐?”
곽호는 장거운이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하자 차근차근하게 설명을 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조금 되는지 장거운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이, 이틀이나 지났다고요?”
“그래! 빨리 가자! 당주님 화 많이 나셨다.”
“예? 아, 네.”
곽호가 손짓을 하며 밖으로 나가자 장거운이 쭈뼛거리며 따라나섰다.
마당에는 남궁천호와 냉가혜가 이미 말에 올라 장거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거운이 남궁천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근신을 하는 의미로 이레 동안 청룡고 당직을 맡는 것으로 끝내겠다. 하지만 차후에 또다시 이번처럼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청룡무복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청룡무사라면 반드시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이 말을 명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예. 죄송합니다.”
남궁천호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하자 장거운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가자!”
“멍충아! 너는 뛰어와라! 이 누난 먼저 간다. 호호호!”
냉가혜가 남궁천호의 뒤를 따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놀리고 가 버리자 장거운은 그녀를 보며 불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휴, 저게…….”
“어여 타! 안 갈 거야?”
“예? 아니, 형님 먼저 가세요. 전 그냥 뛰어갈게요. 옷이 젖어서 말 타고 달리다간 저 얼어붙어 버릴 거예요!”
곽호의 재촉에 장거운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고삐를 당겼다. 장거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옷이 젖은 채로 말을 타기엔 너무 쌀쌀한 날씨였다.
찬바람이 불자 장거운은 부르르 떨면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제대로 파악이 되고 있었다. 자신이 양충원이 건넨 술을 먹고 뻗는 바람에 이틀이나 보이지 않자, 남궁천호 등이 그를 찾아 나선 모양이었다. 아마도 냉가혜가 악우진과 청룡고에서 빚었던 마찰을 이야기하며 이곳 북우촌에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것이다.
장거운은 양충원을 떠올리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빈 술병만 뒹굴고 있을 뿐 잔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뻗어 버리고 난 뒤 양충원이 치운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곽씨 부인 댁에 한번 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나서던 장거운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허리춤을 만져 보았다. 겉옷 안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혁대가 느껴졌다. 혁대는 바로 양충원이 보여 주었던 ‘자룡창’이었다.
‘이게 어떻게 나한테 있지?’
장거운이 기이하게 생각하며 혁대를 풀자 둘둘 말아 놓은 서찰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장 무사! 본의 아니게 천일취를 써서 자네를 재운 것을 용서하시게. 자네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는, 그만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랬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서로 간에 불편하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니 이해해 주게. 많이 궁금하겠지만, 그저 자네 사문에 빚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게.
그리고 자네가 궁금해하는 대들보의 흔적은 내 것이 맞네. 숙현이가 죽고 난 뒤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줄곧 여기서 머물렀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눈을 피해 대들보에 올라갔던 것일세.
각설하고, 나는 이제 아이들과 함께 이 탐욕에 물든 강호를 떠날 것이네. 이미 세상에 복수를 할 만큼 하였으니 말일세.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하네.
아이들의 부친인 공진의 죽음을 내게 이야기해 준 표사의 말에 의하면, 당시 표행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더군. 나로서는 곧바로 숙현이의 일도 있었고, 더 이상 세상의 일에 얽히는 게 싫어 그냥 떠나네만, 청룡무사인 자네는 시간이 난다면 항주의 하가장과 금하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기 바라네.
끝으로 아이들과 나를 믿어 준 자네에게 감사의 의미로 ‘자룡창’을 남기네. 나에겐 정말 없애 버리고 싶은 기물이지만 어쩌면 자네에게는 쓸모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네.
솔직히 자룡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나도 모르네. 다만 교룡의 피(皮)로 만든 물건이 어찌 효용이 없겠는가? 자네가 행여 그 용법을 알아낸다면 청룡무사로서 행도를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네.
그리고 자네 사문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하는 뜻으로 자네가 잠든 사이에 내가 지니고 있던 몸에 좋은 보약을 복용시켰으니 모쪼록 건강하게 잘 지내시게!

장문으로 된 양충원의 서찰을 읽고 난 뒤 장거운은 손에 쥐고 있던 자룡창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에게는 여전히 혁대로 보일 뿐 그다지 이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워낙에 재질이 특이하고 모양이 좋아서 허리에 감자 장거운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양충원이 악의로 자신을 술에 취하게 한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가 악의를 가졌다면 자신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도 그와 같이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양충원이 자신의 사문을 어찌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도 그가 자신의 사문을 소림사로 알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추격할 때 마지막에 달려들면서 펼친 수법이 나한십팔세의 열두 번째 초식인 맹호박식이었기 때문이다.
장거운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휭 불어왔다. 앞으로 이레나 꼬박 청룡고의 당직을 설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있었다.
‘보약 먹였다더니 뭐 이래? 춥기만 하네. 진짜 보약 먹인 것 맞나? 쩝!’
장거운은 쌀쌀한 찬바람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무림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