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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무사 2
1화
제1장 하가장(河家莊)
“물러서라!”
호리호리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호통을 내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다른 무사들과 달리 쌍검을 등에 메고 있었는데 까무잡잡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장거운과 냉가혜를 막아섰던 호장무사들이 재빨리 검을 거두고 물러서자 사내가 눈빛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이곳 하가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호장대의 대주 벽파쌍검 적우기라고 하네.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적우기, 그가 하가장에 있었단 말인가?”
뒤에서 노웅이 눈에 이채를 띠며 중얼거렸다.
해남파 출신의 적우기는 노웅과 같은 연배로 쌍검을 사용하여 해남파 특유의 신랄한 쾌검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자였다. 게다가 그는 십 년 전 광동성에서 단신으로 사파의 절정고수인 흑두삼마를 벤 적이 있는 절정고수이기도 했다. 일개 장원의 호장무사로 있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자였던 것이다.
적우기는 노웅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뒤쪽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만리신풍?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주겠나?”
“쩝, 그게…….”
노웅이 머뭇거리자 장거운이 재빨리 말을 뱉었다.
“이번 일은 순찰당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러니 나에게 물으시오!”
“청룡무사인가?”
“그렇소. 청룡무사인 장거운이오. 오죽색마라고 하는 흉악범이 귀장에 숨어든 정황이 있어서 수색을 하고자 하오.”
적우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장거운은 당당하게 말을 뱉고 있었다. 그러한 장거운의 모습에 적우기의 눈에도 잠시 이채가 스쳤다. 스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장거운이 자신의 기세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적우기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오죽색마라는 자가 본 장으로 뛰어드는 것을 직접 보았는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정황이 있소.”
“정황?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도 아닌데 감히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가!”
“놈의 흔적을 쫓던 추적견이 이곳으로 왔소.”
적우기가 다소 언짢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묻자 장거운은 뒤쪽의 황칠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뱉었다.
적우기는 장거운의 시선에 따라 노웅의 옆에 있는 개를 쳐다보았다. 황칠은 노웅의 다리 밑에 엎드린 채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똥개의 모습이었다.
황칠을 본 적우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갈! 감히 저따위 잡종 개를 믿고 본 장을 능멸하는 것인가?”
크르렁!
잡종 개라고 하는 적우기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황칠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잡종 개라니, 말을 삼가시오! 본 맹의 순찰당에서 애지중지 훈련을 시킨 영물에 가까운 명견이오! 개의 후각이 사람보다 천 배는 더 뛰어나다는 것을 모르시오!”
장거운이 언성을 높여 대꾸를 하고 있었다.
웡! 웡!
장거운에 의해 졸지에 영물로 둔갑되어 버린 황칠이 우렁차게 짖어 댔다. 확실히 황칠은 장거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적우기의 호통이 이어졌다.
“닥쳐라! 일개 청룡무사 따위가 잡견을 내세워 본 장의 명예에 먹칠을 하려 드느냐? 어린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당신 말대로 나는 일개 청룡무사에 불과하지만, 죄인은 반드시 잡아야겠소.”
적우기의 호통에 장거운은 눈빛을 차갑게 굳히며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장 물러가라! 여긴 네놈 따위가 설칠 곳이 아니다.”
적우기는 자신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장거운이 침착하게 대꾸를 하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장거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뱉었다.
“나는 반드시 장원 안을 살펴봐야겠소!”
“건방진!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장거운이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적우기는 허리를 살짝 낮춤과 동시에 검파에 손을 올려놓았다. 쾌검을 쓰는 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발검과 동시에 장거운을 베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적우기가 자세를 낮추며 내기를 끌어올리자 절정고수답게 그의 기세가 한 자루의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적우기의 기세가 변하자 장거운도 살짝 왼 허리를 틀어 앞쪽으로 당기며 양발의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적우기의 쾌검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활의 시위를 당기듯이 전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적우기는 눈에 이채를 띠며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세에 전혀 흔들림 없이 맞서고 있는 장거운도 놀라운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냉가혜마저 차가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인 데다 장거운보다 더 어려 보이는 냉가혜가 검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청룡무사가 무림맹의 정예란 말이 결코 와전된 말이 아닌 것이다.
“판단을 잘하셔야 할 것이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보명이 정색을 한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뒷일이 걱정된다고 하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장거운과 냉가혜는 무림맹의 청룡무사였고, 특히 장거운의 경우 친우인 남궁천호와 당영기가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젠장! 저런 꼴통 놈을 도대체 누가 뽑은 거야?”
노웅도 투덜거리며 황보명의 뒤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그도 무림맹의 무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보명과 노웅까지 가세를 하자 적우기의 표정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장거운과 냉가혜만 해도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데 관망하고 있던 무림맹의 두 당주가 끼어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 또한 무림맹의 두 당주와 청룡무사를 상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입장이라는 데에 있었다. 애초에 적당히 호통을 쳐서 이들을 돌아가게 할 생각이었지만 장거운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이어진 팽팽한 침묵을 깬 것은 뜻밖에도 우측에서 들려온 말발굽 소리였다. 네 명의 사내가 말을 몰아 일행이 대치하고 있는 하가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앞에 이른 네 명의 사내가 말에서 내리자, 적우기는 얼른 기세를 풀고 사내들 가운데 화복을 입은 중년인에게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안찰사 대인을 뵙습니다.”
그가 바로 이곳 하가장의 장남이자 절강성의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이었던 것이다.
안찰사인 하진문은 둥그스름한 얼굴에 살집이 많아 보이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는지 태양혈은 밋밋했다. 전형적인 벼슬아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진문은 정광을 흘리는 무림인의 날카로운 눈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매부리코에 가까운 우뚝 솟은 코와 부리부리한 봉목을 지니고 있어 절강성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고관답게 자연스러운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하진문은 무림맹 일행들을 힐긋 쳐다보고는 적우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하진문의 물음에 적우기가 조심스럽게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오죽색마를 쫓아온 청룡무사들을 본 장의 무사들이 막았단 말인가?”
적우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하진문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질책을 하는 듯이 성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적우기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워낙에 늦은 시각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시각이 늦었다고 흉악범을 잡지 말란 말인가?”
“대, 대인! 잘 아시다시피 함부로 본 장에 외인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대답을 하고 있는 적우기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진문의 속뜻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평소에 하진문은 제형안찰사이기 때문에 본가인 하가장에 계속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하가장의 위엄을 강조하여 함부로 사람을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진문의 질책이 이어졌다.
“함부로? 청룡당의 행사에 협조를 하는 것이 함부로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찰사인 본관의 가문에서 청룡당의 행사에 적극 협조하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는 적우기를 무시한 채 하진문이 무림맹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본관이 하진문이오.”
“안찰사 대인을 뵙습니다.”
장거운을 비롯한 무림맹의 일행 가운데 제일 연장자인 노웅이 대표로 나서 하진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창천검룡이 신임 청룡당주가 되었다고 하더니 같이 오지는 않으신 모양이구려.”
“예, 지금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일 겁니다.”
하진문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는 노웅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미 하진문이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하여 움츠러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진문은 어떻게든 이번 일에 대해서 맹주에게 따지고 들 것이 분명했다. 결국 노웅은 무림맹 순찰당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남궁천호가 오고 있다는 말에 하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그렇소이까? 하하!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그래, 오죽색마를 쫓고 있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도주한 놈을 쫓고 있었는데, 놈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습니다.”
노웅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하진문은 잔뜩 노기 어린 표정으로 적우기와 호장무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저런 고약한 놈을 봤나! 지금 당장에 수상한 놈이 숨어들었는지 샅샅이 살펴보아라!”
“존명!”
적우기가 읍을 하고는 호장무사들을 데리고 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적우기는 하진문이 자신들에게 오죽색마를 찾아보라고 지시를 하자 그제야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하진문의 속내는 겉으로는 무림맹의 행사를 돕겠다고 하면서, 결국 장원의 무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무림맹의 무사들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결과나 듣고 가라는 뜻이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은 하진무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건넸다.
“안찰사 대인, 외람된 말이지만 저희들이 직접 수색을 하게 해 주십시오.”
“자네는?”
“청룡무사 장거운이옵니다.”
“그래, 장 무사는 본 장의 무사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놈은 변장술이 뛰어나서 수시로 얼굴이 바뀌기 때문에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 맹의 추적견이 놈의 체취를 알고 있으니 놈이 숨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진문이 정색을 하고 묻자 장거운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물론 장거운은 하가장의 무사들이 전혀 미덥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진문에게 하가장의 무사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하가장이 흉악범인 오죽색마를 감추려고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에게 당신도 오죽색마와 한패라고 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진문은 마치 장거운이 처한 난처한 입장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본 장의 무사들은 장원 내부를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알고 있으니 곧 놈을 찾아낼 것일세.”
“하지만…….”
“거운, 그만하고 물러서라!”
하가장의 무사들을 믿을 수 없는 장거운이 다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남궁천호의 목소리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다, 당주님!”
장거운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남궁천호와 사공한 등 청룡당 이대의 무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부르러 간 당영영은 보이지 않았다.
남궁천호가 하진문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창천검룡 남궁 대주가 아니오. 당주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건만 인사가 늦었소이다. 늦었지만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야심한 시각에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남궁천호의 정중한 태도에 하진문은 손사래까지 쳐 가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니오!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안찰사인 나로서는 오히려 청룡당의 무사들에게 감사를 해야지요. 아무튼 곧 기별이 올 것이니 들어가서 차나 한 잔 합시다.”
“말씀은 고맙지만 차를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인의 말씀대로 곧 연락이 오면 다시 놈을 추적하러 가야지요.”
“하하! 그렇소이까?”
남궁천호가 뼈 있는 말을 하며 자신의 청을 거절하였음에도 하진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그의 눈은 차갑게 식은 채 남궁천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궁천호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진문이 정오품의 첨사(僉事)였던 시절부터 사건을 처리하면서 남궁천호와는 자주 대립을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남궁천호가 청룡당의 전임 당주인 천성검 관종호와의 대립으로 정주로 좌천될 때에도 하가장이 뒤에서 힘을 썼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가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어색한 만남의 시간이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장원 안으로 사라졌던 적우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적우기는 하진문과 마주 보고 있는 남궁천호를 힐긋 쳐다보면서 하진문에게 다가갔다.
하진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는가?”
“예, 장원 그 어느 곳에도 외부인이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흠, 알겠네. 아마도 놈이 이 근처에서 다른 곳으로 도주한 모양이오.”
적우기의 말에 하진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호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장거운이 나서며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우리가……!”
“거운!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남궁천호가 호통을 쳐서 장거운의 말을 끊었다.
“흠흠, 젊어서 그런가? 패기가 좋군.”
하진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장거운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남궁천호가 얼른 하진문에게 말을 걸었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협조랄 게 무어 있겠소? 청룡당의 일에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그럼……. 가자!”
하진문이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자, 남궁천호는 읍을 하고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청룡당 일행과 황보명 등이 그 뒤를 따르자 장거운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아쉬움이 여전한지 몇 번이고 하가장을 뒤돌아보곤 했다.
* * *
남궁천호는 사공한에게 청룡당의 무사들을 인솔하여 맹으로 복귀하도록 지시를 하고는 장거운과 냉가혜를 데리고 진화루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황보명과 노웅도 동석을 했다.
남궁천호는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왕팔에게 술과 간단한 요리를 시키고는 자리를 잡아 앉은 뒤, 사건의 경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장거운과 냉가혜의 설명이 이어졌다. 남궁천호는 물론이고 황보명과 노웅도 사건의 발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몰랐는지라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장거운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노웅이 비어 있는 황보명의 잔에 술을 채워 주더니 눈짓으로 장거운을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저런 꼴통 같은 놈을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주워 오기는 누가 주워 와요? 제 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지.”
황보명은 장거운을 힐긋 쳐다보고 난 뒤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고는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잠시 후 남궁천호에게 설명을 끝낸 장거운은 노웅과 황보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멀뚱멀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노웅이 장거운의 잔에도 술을 채워 주며 말을 걸었다.
“아무튼 네놈 덕에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것 같다. 너 제형안찰사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지?”
“에이, 제가 명색이 청룡무사인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제형안찰사면 성의 형벌을 다스리는 수장이잖아요.”
“이 자식아! 그걸 아는 놈이 그렇게 엉겨 붙냐?”
“오죽색마를 쫓는 일이라면 안찰사가 아니라 황족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노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장거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임신한 아내의 주검을 바라보던 장육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웅은 장거운의 단호한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각 성에 형옥(刑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제형안찰사사의 수장인 안찰사는 정삼품의 고위 관리로서, 위로 종이품인 좌, 우포정사를 두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내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다.
특히 이곳 절강성의 안찰사인 하진문은 조정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가상단의 총수인 금왕 하은중의 조카로서, 절강성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진문은 무림맹주인 매화검군 화중혁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실세였던 것이다.
그런 자를 장거운이 흉악범과 한통속인 것처럼 취급을 하였으니 뒷일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장거운은 의심이 있다면 황족이라도 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최악의 꼴통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노웅은 그런 대책 없는 장거운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장거운은 노웅으로 하여금 과거 무림을 행도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잊어버렸던 무인의 호기를 떠올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노웅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이놈 이거 진짜 꼴통이네! 에효,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하세요. 야, 술이나 한 잔 하자!”
“그래, 그래, 술이나 마십시다! 뭐, 사내새끼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안 그래?”
황보명이 잔을 들어 올리면서 노웅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남궁천호를 쳐다보았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천호가 화들짝 놀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 그래.”
“아니,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 그만 생각해라. 아무리 너와는 앙숙이었던 하진문이라도 제 입으로 뱉은 말이 있는데 뒤통수를 까기야 하겠어? 게다가 너는 이젠 대주가 아니라 당주잖아. 제 놈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청룡당주를 건드릴 수는 없잖아.”
황보명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을 뱉었다.
물론 그가 생각해도 하진문은 양면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서 피곤하게 할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성내에서 일어나는 흉악범에 의한 사건의 칠팔 할을 청룡당에서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안찰사인 하진문으로서도 청룡당과의 협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진문이 능력을 인정받아 북경의 조정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청룡당의 활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하진문이란 악어로서는 마치 악어새와도 같은 존재인 청룡당의 당주 남궁천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가장과 오죽색마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글쎄, 딱히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는데……. 혹시 저놈의 똥개가 엉뚱한 곳에 찾아간 것이 아닐까?”
황보명은 곰곰이 생각해 봐도 하가장과 오죽색마의 관련성을 떠올릴 수가 없자 바닥에 엎드려 게걸스럽게 오리 구이를 뜯고 있는 황칠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웅이 발끈하였다.
“뭔 소리야! 저놈이 혈통은 진짜 좋다니까! 저게 최근에 웬 이상한 놈이 침을 찔러 대는 바람에 맛이 좀 가긴 했어도…… 흠, 그러고 보니 수상한데? 황칠이가 왜 꼴통 네놈한테 달려든 거지?”
노웅은 말을 하던 도중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장거운을 쳐다보며 추궁하듯이 물었다. 장거운이 남궁천호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침에 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그, 그게…… 개들이 저를 좋아해서 달려드는 것이죠. 제가 개들하고 진짜 친하거든요. 황칠아, 이리 온!”
갑작스런 노웅의 추궁에 장거운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황칠을 불렀다. 황칠이 먹고 있던 오리 구이를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와 장거운의 손을 핥았다.
장거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보란 듯이 외쳤다.
“봐요! 정말로 개들이 저를 잘 따른다니까요.”
“아냐, 수상해. 황칠이 저놈이 아무한테나 저렇게 순종적인 놈이 아닌데……. 똑바로 말해! 네놈이지?”
노웅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장거운을 추궁하였다. 사나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황칠이 장거운에게는 먹고 있던 먹이마저 내팽개칠 정도로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는 게 오히려 더 수상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제껏 말없이 앉아 있던 냉가혜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툭 던졌다.
“흥! 만날 개한테 침이나 찔러 대니 똑바로 점혈도 못하고 엉뚱한 사람한테 피해나 주지.”
노웅이 장거운에게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뭐야! 그럼 네놈이 우리 황칠이 데리고 점혈 연습을 했단 말이야?”
“그, 그게……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사람이나 잡고 연습할 수는 없잖아요.”
장거운은 냉가혜를 원망의 눈초리로 째려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옆에 앉은 냉가혜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실실거리고 있었다.
노웅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 자식아! 황칠이는 나한테는 사람만큼 소중해!”
“에이, 그만해요! 개새끼 한 마리 갖고 뭘 그러슈. 그러니까 자꾸 애들이 선배 성질이 괴팍해진다고 하잖아요. 개 말고 애들이나 좀 아껴 주시오. 저 개새끼 때문에 순찰당 애들은 힘들어 죽겠다고 다들 울상이더니만.”
황보명이 만류를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노웅은 웬일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화가 많이 풀린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황칠에 대한 순찰당 위사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개에게 정이 간다고 하더라도 부하들만큼 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거운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노웅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흠흠, 근데 꼴통 네놈은 왜 점혈을 침으로 하는 거냐?”
“우리 영영이가 그러는데, 저놈이 내기가 밖으로 안 뿜어진다고 그러네요.”
대답을 한 것은 황보명이었다. 그도 부인인 당영영에게 장거운의 상태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노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내기도 없는 놈이 조금 전에 반 시진이나 달리고 까딱없었단 말이야?”
“내기가 없는 게 아니라 밖으로 뿜어내질 못한다고요.”
“그게 그거잖아! 내기가 안 뿜어지면 어떻게 경공을 펼쳐?”
“이놈 별명이 말이 필요 없는 놈이에요. 그냥 뛰어도 말처럼 달릴 수 있는 놈이라고요. 선배, 그 이야기 몰라요? 이번 무사 시험에서 일관을 경공이 아니고 벼룩처럼 뛰어서 건넌 놈 말이오. 이놈이 그놈이잖수.”
“뭐야, 이놈이 그 벼룩 놈이야?”
황보명의 설명에 노웅이 신기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장거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 그렇게 보세요?”
“거참, 희한한 놈이네. 안 그래도 내가 조만간에 한번 찾아보려고 했더니만.”
“찾아서 뭐하시게요?”
“뭐하긴 이놈아, 내공도 없이 칠 장을 뛰는 놈은 도대체 다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네놈의 다리를 갈라 보려고 그랬지.”
“헉! 다, 다리를요?”
노웅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에 놀란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는 장거운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여 모두들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던 남궁천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거운, 확실히 놈의 얼굴은 보았느냐?”
“보기는 했는데 싸우느라 경황이 없어서……. 단, 저한테 선풍각을 맞아서 놈의 얼굴에 길게 자상이 생겼다는 것은 확실해요.”
장거운의 말이 끝나자 남궁천호는 다시 냉가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가혜는 놈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느냐?”
“예, 기존의 용모파기와는 달리 굉장한 미남자였어요.”
냉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순간 장거운의 중얼거림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흥! 그래서 희희낙락했나 보네.”
냉가혜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자식아! 그건 그놈이 사형을 사칭했기 때문에 수상해서 비위를 맞춰 준 거라고 했잖아!”
“아, 아니, 그래. 알았다고. 누가 뭐래?”
손사래까지 치며 다급하게 말을 뱉고 있는 장거운의 얼굴은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냉가혜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패악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냉가혜의 앙칼진 외침이 이어졌다.
“네가 금방 헛소리했잖아!”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냉가혜는 자신이 말을 했다고 하지만, 그는 결코 그와 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냉가혜가 자신의 표정을 보고는 지레짐작으로 난리를 치는 것 같았다.
장거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누가 뭐라 했다고 그래?”
“흥! 당주님들도 다들 들으셨거든!”
“엉? 뭔 소리?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냉가혜는 장거운의 말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들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황보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했고, 노웅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냉가혜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은 분명히 장거운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남들은 모두 못 들은 분위기였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그만! 조용히들 하여라. 당분간 직접적으로 하가장과는 마찰을 일으키지 마라. 거운, 알겠느냐?”
“……예.”
“그리고 선배님은 혹시 최근 몇 개월 사이에 하가장에 새로이 들어온 자가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시겠소?”
“그야 뭐…… 그렇게 하지.”
노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듣고 있던 황보명이 딴죽을 걸었다.
“근데 벽파쌍검 적우기가 하가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는데, 순찰당에서 그걸 알아낼 수 있겠수?”
“그거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뭐야, 본 방의 능력을 어떻게 보는 거야? 우리 개방이 마음만 먹으면 자네의 그 성질 더러운 마누라 속곳 색깔까지 다 알 수 있어!”
“거,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슈? 암튼 알았수. 내가 나중에 집에 가서 우리 영영이한테 선배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 드리리다.”
노웅이 사문인 개방까지 거론하며 자신 있다는 듯 고함을 치자 황보명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웅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당영영이 화가 나면 상대방이 얼마나 괴로워지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한 달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측간을 들락거려야 하는 수가 있었다. 당영영의 설사약 하독 솜씨는 워낙에 신출귀몰하여서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급해진 노웅의 말이 이어졌다.
“아, 아니,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나? 자, 자! 한 잔 하세!”
노웅이 황보명과 술잔을 비우고 나자, 다시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신경을 좀 써 주십시오. 아무래도 하가장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벽파쌍검 적우기 정도 되는 고수가 하가장에서 호장무사들을 맡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호장무사들 또한 수상합니다. 본격적으로 하가장을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노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남궁천호의 말대로 호장무사들의 태도도 수상하였다. 아무리 하가장의 무사들이라고는 하나, 청룡무사인 장거운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친 감이 있었던 것이다.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운이와 가혜는 중요한 수배범을 놓쳤으니 열흘 동안 둘이서 청룡고 당직을 맡도록 하라.”
“그건…….”
냉가혜는 뭔가 항변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장거운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벌 당직 선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일급 수배범을 놓치고도 아무런 문책 없이 넘어갈 줄 알았느냐?”
“쩝, 그게…… 아니에요. 할게요.”
남궁천호의 호통에 이내 고개를 숙이는 장거운이었다.
그로서는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당주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죽색마를 놓친 일은 분명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장거운의 귀에 냉가혜의 비아냥거리는 전음이 들려왔다.
“흥! 멍충이, 그러니까 놈을 먼저 쫓았어야지!”
‘어휴, 얼음귀신 같은 게……. 이걸 콱!’
냉가혜의 전음에 장거운은 어이가 없었지만 당주들과 함께한 자리인 탓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그녀를 노려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러자 냉가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뭐? 얼음귀신? 죽을래?”
갑작스런 냉가혜의 말에 황보명이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했다.
“넌 또 왜 난데없이 귀신 타령이냐? 어째 청룡당에만 들어가면 멀쩡하던 애들도 이상해지냐?”
“이놈들이……! 어른들 앞에서 사랑싸움하려면 전음으로 해! 끙, 요즘 애들은 어째 대놓고 애정질이야.”
호통을 친 노웅이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전음?’
장거운과 냉가혜는 거의 동시에 노웅의 입에서 나온 ‘전음’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장거운은 두 번이나 계속해서 자신이 속으로 생각한 말을 냉가혜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했고, 냉가혜는 왜 자신에게만 장거운의 말이 들리는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결론은 장거운이 저도 모르게 전음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이다.
“내 말이 들리냐?”
“너 전음이 되니?”
장거운과 냉가혜의 귀에 서로 다른 말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궁천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전혀 두 사람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냉가혜의 전음이 이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너 전음 못했잖아?”
“그게…… 나도 모르겠다. 갑자기 되네.”
장거운은 냉가혜의 물음에 답을 해 주고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양충원이 자신에게 먹였다는 약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날도 맹으로 뛰어오면서 전혀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양충원이 자신에게 먹인 약이 대단한 영단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운기조식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장거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실눈을 뜨고는 코끝을 바라보며 조용히 내부를 관조해 보기 시작했다. 단전은 여전히 허전했고 임맥과 독맥을 흐르는 내기의 흐름은 완만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를 가졌던 장거운으로서는 다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 이거 벌써 취했나, 몇 잔 마셨다고 조는 거야!”
갑자기 노웅이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는 장거운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며 아래로 눈을 깔자 취기가 올라 졸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빡!
“컥! 뭐, 뭐야? 이거 완전 돌대가리잖아!”
장거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던 노웅이 오히려 자신의 손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명이 실실거리며 말을 뱉었다.
“크크크. 선배, 그놈 별명 중 하나가 철두요. 돌대가리가 아니라 쇠대가린데 왜 하필 머리를 때리슈?”
“끙, 이 자식은 별명이 왜 이리 많아!”
노웅이 퉁퉁 부어오른 자신의 손을 붙잡고 짜증스럽게 외쳤다.
장거운이 급히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으면 네놈이 어쩔 건데? 젠장, 이놈아! 술이나 여기 부어 봐라.”
노웅은 짜증이 잔뜩 난 어조로 말을 뱉으며 자신의 부어오른 손을 내밀었다.
황보명이 입을 열었다.
“선배, 부어오른 자리에 술 부으면 가라앉는다는 그런 말, 다 근거 없는 소리니까 괜스레 아까운 술 버리지 말고 이리 내밀어 보시오. 한번 봅시다. 그래도 우리 마누라가 소문난 의원 아니오. 그냥 가볍게 쥐어박더니만, 뭘 그리 호들갑을 떠시오?”
“봐라! 내가 지금 호들갑 떨지 않게 생겼냐?”
“헉! 이거 왜 이래?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니, 애를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이 이 모양이오?”
노웅이 내민 손을 쳐다본 황보명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말을 뱉고 있었다.
노웅의 오른 주먹은 골절을 당한 것처럼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사실 황보명은 강호에서 손꼽히는 권법의 명가인 황보세가 출신이라서 주먹의 골절에 관해서는 웬만한 명의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노웅의 손은 마치 무쇠덩어리를 강하게 내려치다 다친 것 같아 보였다.
“세게는 무슨, 그냥 가볍게 쥐어박은 것뿐인데.”
황보명의 말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노웅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지며 차갑게 장거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전 그냥 가만있었어요.”
장거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노웅이 남궁천호를 쳐다보며 정색을 하고는 물었다.
“이 자식 진짜 정체가 뭐야?”
남궁천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거운이가 내기를 뿜지 못한다고 무공까지 약하다는 착각은 하지 마시오. 그래도 저놈이 혈인마 구충을 해치운 놈이니까 말입니다.”
“아냐, 그런 뜻이 아니라 분명히 반탄강기를 느낀 것 같은데…….”
노웅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보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농담도 작작하슈. 내기도 뿜지 못하는 놈이 무슨 반탄강기요? 아니, 반탄강기에 당했다면 선배 손이 그 정도일 리가 있어요? 아예 아작이 나 버렸겠지.”
“그건 그런데…… 분명히 알 수 없는 기운이 손을 쳐 내는 것 같았단 말이야.”
노웅이 장거운을 노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노웅의 말에 모두들 호기심을 가지고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장거운으로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아 오히려 답답한 지경이었다.
사실 장거운은 노웅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노웅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단단한 머리 때문에 그가 다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을 뿐이었다.
장거운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웅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모르는 기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인데, 만약 그의 말대로 자신의 머리에서 어떤 기가 일어나 그의 손을 다치게 했다면, 내부를 관조 중이었던 자신이 그러한 기의 움직임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의당의 당주인 당영기를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고 있었다. 갑자기 전음이 되는 것도 그렇거니와, 노웅의 일을 보더라도 양충원이 약을 먹인 이후에 뭔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장거운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남궁천호가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들 나지. 선배님은 거운이 네가 모시고 의당의 당 당주에게 가 보아라. 그리고 선배님, 다시 한 번 당부드리오. 하가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흠, 알겠네.”
남궁천호의 말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일행들은 차갑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가장이라는 막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1화
제1장 하가장(河家莊)
“물러서라!”
호리호리한 체구의 중년인 하나가 호통을 내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인은 다른 무사들과 달리 쌍검을 등에 메고 있었는데 까무잡잡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장거운과 냉가혜를 막아섰던 호장무사들이 재빨리 검을 거두고 물러서자 사내가 눈빛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이곳 하가장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호장대의 대주 벽파쌍검 적우기라고 하네.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적우기, 그가 하가장에 있었단 말인가?”
뒤에서 노웅이 눈에 이채를 띠며 중얼거렸다.
해남파 출신의 적우기는 노웅과 같은 연배로 쌍검을 사용하여 해남파 특유의 신랄한 쾌검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자였다. 게다가 그는 십 년 전 광동성에서 단신으로 사파의 절정고수인 흑두삼마를 벤 적이 있는 절정고수이기도 했다. 일개 장원의 호장무사로 있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자였던 것이다.
적우기는 노웅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뒤쪽을 쳐다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만리신풍?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주겠나?”
“쩝, 그게…….”
노웅이 머뭇거리자 장거운이 재빨리 말을 뱉었다.
“이번 일은 순찰당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러니 나에게 물으시오!”
“청룡무사인가?”
“그렇소. 청룡무사인 장거운이오. 오죽색마라고 하는 흉악범이 귀장에 숨어든 정황이 있어서 수색을 하고자 하오.”
적우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장거운은 당당하게 말을 뱉고 있었다. 그러한 장거운의 모습에 적우기의 눈에도 잠시 이채가 스쳤다. 스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장거운이 자신의 기세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적우기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오죽색마라는 자가 본 장으로 뛰어드는 것을 직접 보았는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정황이 있소.”
“정황?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도 아닌데 감히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가!”
“놈의 흔적을 쫓던 추적견이 이곳으로 왔소.”
적우기가 다소 언짢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묻자 장거운은 뒤쪽의 황칠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뱉었다.
적우기는 장거운의 시선에 따라 노웅의 옆에 있는 개를 쳐다보았다. 황칠은 노웅의 다리 밑에 엎드린 채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영락없는 똥개의 모습이었다.
황칠을 본 적우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호통을 내질렀다.
“갈! 감히 저따위 잡종 개를 믿고 본 장을 능멸하는 것인가?”
크르렁!
잡종 개라고 하는 적우기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황칠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잡종 개라니, 말을 삼가시오! 본 맹의 순찰당에서 애지중지 훈련을 시킨 영물에 가까운 명견이오! 개의 후각이 사람보다 천 배는 더 뛰어나다는 것을 모르시오!”
장거운이 언성을 높여 대꾸를 하고 있었다.
웡! 웡!
장거운에 의해 졸지에 영물로 둔갑되어 버린 황칠이 우렁차게 짖어 댔다. 확실히 황칠은 장거운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 같았다.
적우기의 호통이 이어졌다.
“닥쳐라! 일개 청룡무사 따위가 잡견을 내세워 본 장의 명예에 먹칠을 하려 드느냐? 어린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당신 말대로 나는 일개 청룡무사에 불과하지만, 죄인은 반드시 잡아야겠소.”
적우기의 호통에 장거운은 눈빛을 차갑게 굳히며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당장 물러가라! 여긴 네놈 따위가 설칠 곳이 아니다.”
적우기는 자신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장거운이 침착하게 대꾸를 하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장거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뱉었다.
“나는 반드시 장원 안을 살펴봐야겠소!”
“건방진!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장거운이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적우기는 허리를 살짝 낮춤과 동시에 검파에 손을 올려놓았다. 쾌검을 쓰는 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발검과 동시에 장거운을 베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적우기가 자세를 낮추며 내기를 끌어올리자 절정고수답게 그의 기세가 한 자루의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적우기의 기세가 변하자 장거운도 살짝 왼 허리를 틀어 앞쪽으로 당기며 양발의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적우기의 쾌검에 즉각 대응하기 위해 활의 시위를 당기듯이 전신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적우기는 눈에 이채를 띠며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세에 전혀 흔들림 없이 맞서고 있는 장거운도 놀라운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냉가혜마저 차가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인 데다 장거운보다 더 어려 보이는 냉가혜가 검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청룡무사가 무림맹의 정예란 말이 결코 와전된 말이 아닌 것이다.
“판단을 잘하셔야 할 것이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보명이 정색을 한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뒷일이 걱정된다고 하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장거운과 냉가혜는 무림맹의 청룡무사였고, 특히 장거운의 경우 친우인 남궁천호와 당영기가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젠장! 저런 꼴통 놈을 도대체 누가 뽑은 거야?”
노웅도 투덜거리며 황보명의 뒤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그도 무림맹의 무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황보명과 노웅까지 가세를 하자 적우기의 표정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장거운과 냉가혜만 해도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데 관망하고 있던 무림맹의 두 당주가 끼어든 것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 또한 무림맹의 두 당주와 청룡무사를 상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는 입장이라는 데에 있었다. 애초에 적당히 호통을 쳐서 이들을 돌아가게 할 생각이었지만 장거운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이어진 팽팽한 침묵을 깬 것은 뜻밖에도 우측에서 들려온 말발굽 소리였다. 네 명의 사내가 말을 몰아 일행이 대치하고 있는 하가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앞에 이른 네 명의 사내가 말에서 내리자, 적우기는 얼른 기세를 풀고 사내들 가운데 화복을 입은 중년인에게 다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건넸다.
“안찰사 대인을 뵙습니다.”
그가 바로 이곳 하가장의 장남이자 절강성의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이었던 것이다.
안찰사인 하진문은 둥그스름한 얼굴에 살집이 많아 보이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는지 태양혈은 밋밋했다. 전형적인 벼슬아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진문은 정광을 흘리는 무림인의 날카로운 눈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매부리코에 가까운 우뚝 솟은 코와 부리부리한 봉목을 지니고 있어 절강성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고관답게 자연스러운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하진문은 무림맹 일행들을 힐긋 쳐다보고는 적우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하진문의 물음에 적우기가 조심스럽게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오죽색마를 쫓아온 청룡무사들을 본 장의 무사들이 막았단 말인가?”
적우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하진문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질책을 하는 듯이 성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적우기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워낙에 늦은 시각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시각이 늦었다고 흉악범을 잡지 말란 말인가?”
“대, 대인! 잘 아시다시피 함부로 본 장에 외인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대답을 하고 있는 적우기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진문의 속뜻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평소에 하진문은 제형안찰사이기 때문에 본가인 하가장에 계속 머무르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하가장의 위엄을 강조하여 함부로 사람을 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진문의 질책이 이어졌다.
“함부로? 청룡당의 행사에 협조를 하는 것이 함부로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찰사인 본관의 가문에서 청룡당의 행사에 적극 협조하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는 적우기를 무시한 채 하진문이 무림맹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본관이 하진문이오.”
“안찰사 대인을 뵙습니다.”
장거운을 비롯한 무림맹의 일행 가운데 제일 연장자인 노웅이 대표로 나서 하진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창천검룡이 신임 청룡당주가 되었다고 하더니 같이 오지는 않으신 모양이구려.”
“예, 지금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일 겁니다.”
하진문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는 노웅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미 하진문이 상황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하여 움츠러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진문은 어떻게든 이번 일에 대해서 맹주에게 따지고 들 것이 분명했다. 결국 노웅은 무림맹 순찰당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남궁천호가 오고 있다는 말에 하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한 웃음과 함께 물었다.
“그렇소이까? 하하!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그래, 오죽색마를 쫓고 있다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도주한 놈을 쫓고 있었는데, 놈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습니다.”
노웅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자, 하진문은 잔뜩 노기 어린 표정으로 적우기와 호장무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저런 고약한 놈을 봤나! 지금 당장에 수상한 놈이 숨어들었는지 샅샅이 살펴보아라!”
“존명!”
적우기가 읍을 하고는 호장무사들을 데리고 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적우기는 하진문이 자신들에게 오죽색마를 찾아보라고 지시를 하자 그제야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하진문의 속내는 겉으로는 무림맹의 행사를 돕겠다고 하면서, 결국 장원의 무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무림맹의 무사들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결과나 듣고 가라는 뜻이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은 하진무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건넸다.
“안찰사 대인, 외람된 말이지만 저희들이 직접 수색을 하게 해 주십시오.”
“자네는?”
“청룡무사 장거운이옵니다.”
“그래, 장 무사는 본 장의 무사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놈은 변장술이 뛰어나서 수시로 얼굴이 바뀌기 때문에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 맹의 추적견이 놈의 체취를 알고 있으니 놈이 숨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진문이 정색을 하고 묻자 장거운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물론 장거운은 하가장의 무사들이 전혀 미덥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진문에게 하가장의 무사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못 믿겠다고 하는 것은 하가장이 흉악범인 오죽색마를 감추려고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에게 당신도 오죽색마와 한패라고 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진문은 마치 장거운이 처한 난처한 입장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본 장의 무사들은 장원 내부를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알고 있으니 곧 놈을 찾아낼 것일세.”
“하지만…….”
“거운, 그만하고 물러서라!”
하가장의 무사들을 믿을 수 없는 장거운이 다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남궁천호의 목소리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다, 당주님!”
장거운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서 남궁천호와 사공한 등 청룡당 이대의 무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부르러 간 당영영은 보이지 않았다.
남궁천호가 하진문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창천검룡 남궁 대주가 아니오. 당주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건만 인사가 늦었소이다. 늦었지만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야심한 시각에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남궁천호의 정중한 태도에 하진문은 손사래까지 쳐 가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니오!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안찰사인 나로서는 오히려 청룡당의 무사들에게 감사를 해야지요. 아무튼 곧 기별이 올 것이니 들어가서 차나 한 잔 합시다.”
“말씀은 고맙지만 차를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인의 말씀대로 곧 연락이 오면 다시 놈을 추적하러 가야지요.”
“하하! 그렇소이까?”
남궁천호가 뼈 있는 말을 하며 자신의 청을 거절하였음에도 하진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그의 눈은 차갑게 식은 채 남궁천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궁천호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진문이 정오품의 첨사(僉事)였던 시절부터 사건을 처리하면서 남궁천호와는 자주 대립을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남궁천호가 청룡당의 전임 당주인 천성검 관종호와의 대립으로 정주로 좌천될 때에도 하가장이 뒤에서 힘을 썼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가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어색한 만남의 시간이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장원 안으로 사라졌던 적우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적우기는 하진문과 마주 보고 있는 남궁천호를 힐긋 쳐다보면서 하진문에게 다가갔다.
하진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는가?”
“예, 장원 그 어느 곳에도 외부인이 들어온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흠, 알겠네. 아마도 놈이 이 근처에서 다른 곳으로 도주한 모양이오.”
적우기의 말에 하진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호를 쳐다보며 말을 건넸다.
그러자 장거운이 나서며 소리쳤다.
“믿을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우리가……!”
“거운!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남궁천호가 호통을 쳐서 장거운의 말을 끊었다.
“흠흠, 젊어서 그런가? 패기가 좋군.”
하진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장거운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남궁천호가 얼른 하진문에게 말을 걸었다.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협조랄 게 무어 있겠소? 청룡당의 일에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그럼……. 가자!”
하진문이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자, 남궁천호는 읍을 하고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청룡당 일행과 황보명 등이 그 뒤를 따르자 장거운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아쉬움이 여전한지 몇 번이고 하가장을 뒤돌아보곤 했다.
* * *
남궁천호는 사공한에게 청룡당의 무사들을 인솔하여 맹으로 복귀하도록 지시를 하고는 장거운과 냉가혜를 데리고 진화루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황보명과 노웅도 동석을 했다.
남궁천호는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왕팔에게 술과 간단한 요리를 시키고는 자리를 잡아 앉은 뒤, 사건의 경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장거운과 냉가혜의 설명이 이어졌다. 남궁천호는 물론이고 황보명과 노웅도 사건의 발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몰랐는지라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장거운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노웅이 비어 있는 황보명의 잔에 술을 채워 주더니 눈짓으로 장거운을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저런 꼴통 같은 놈을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주워 오기는 누가 주워 와요? 제 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지.”
황보명은 장거운을 힐긋 쳐다보고 난 뒤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고는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잠시 후 남궁천호에게 설명을 끝낸 장거운은 노웅과 황보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멀뚱멀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노웅이 장거운의 잔에도 술을 채워 주며 말을 걸었다.
“아무튼 네놈 덕에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것 같다. 너 제형안찰사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지?”
“에이, 제가 명색이 청룡무사인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제형안찰사면 성의 형벌을 다스리는 수장이잖아요.”
“이 자식아! 그걸 아는 놈이 그렇게 엉겨 붙냐?”
“오죽색마를 쫓는 일이라면 안찰사가 아니라 황족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노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장거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임신한 아내의 주검을 바라보던 장육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웅은 장거운의 단호한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각 성에 형옥(刑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제형안찰사사의 수장인 안찰사는 정삼품의 고위 관리로서, 위로 종이품인 좌, 우포정사를 두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내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다.
특히 이곳 절강성의 안찰사인 하진문은 조정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가상단의 총수인 금왕 하은중의 조카로서, 절강성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진문은 무림맹주인 매화검군 화중혁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실세였던 것이다.
그런 자를 장거운이 흉악범과 한통속인 것처럼 취급을 하였으니 뒷일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장거운은 의심이 있다면 황족이라도 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최악의 꼴통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노웅은 그런 대책 없는 장거운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장거운은 노웅으로 하여금 과거 무림을 행도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잊어버렸던 무인의 호기를 떠올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노웅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이놈 이거 진짜 꼴통이네! 에효,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하세요. 야, 술이나 한 잔 하자!”
“그래, 그래, 술이나 마십시다! 뭐, 사내새끼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안 그래?”
황보명이 잔을 들어 올리면서 노웅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는 남궁천호를 쳐다보았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천호가 화들짝 놀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 그래.”
“아니,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 그만 생각해라. 아무리 너와는 앙숙이었던 하진문이라도 제 입으로 뱉은 말이 있는데 뒤통수를 까기야 하겠어? 게다가 너는 이젠 대주가 아니라 당주잖아. 제 놈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청룡당주를 건드릴 수는 없잖아.”
황보명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을 뱉었다.
물론 그가 생각해도 하진문은 양면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서 피곤하게 할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성내에서 일어나는 흉악범에 의한 사건의 칠팔 할을 청룡당에서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안찰사인 하진문으로서도 청룡당과의 협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진문이 능력을 인정받아 북경의 조정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청룡당의 활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결국 하진문이란 악어로서는 마치 악어새와도 같은 존재인 청룡당의 당주 남궁천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가장과 오죽색마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글쎄, 딱히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는데……. 혹시 저놈의 똥개가 엉뚱한 곳에 찾아간 것이 아닐까?”
황보명은 곰곰이 생각해 봐도 하가장과 오죽색마의 관련성을 떠올릴 수가 없자 바닥에 엎드려 게걸스럽게 오리 구이를 뜯고 있는 황칠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웅이 발끈하였다.
“뭔 소리야! 저놈이 혈통은 진짜 좋다니까! 저게 최근에 웬 이상한 놈이 침을 찔러 대는 바람에 맛이 좀 가긴 했어도…… 흠, 그러고 보니 수상한데? 황칠이가 왜 꼴통 네놈한테 달려든 거지?”
노웅은 말을 하던 도중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장거운을 쳐다보며 추궁하듯이 물었다. 장거운이 남궁천호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침에 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그, 그게…… 개들이 저를 좋아해서 달려드는 것이죠. 제가 개들하고 진짜 친하거든요. 황칠아, 이리 온!”
갑작스런 노웅의 추궁에 장거운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황칠을 불렀다. 황칠이 먹고 있던 오리 구이를 내팽개치고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와 장거운의 손을 핥았다.
장거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보란 듯이 외쳤다.
“봐요! 정말로 개들이 저를 잘 따른다니까요.”
“아냐, 수상해. 황칠이 저놈이 아무한테나 저렇게 순종적인 놈이 아닌데……. 똑바로 말해! 네놈이지?”
노웅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장거운을 추궁하였다. 사나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황칠이 장거운에게는 먹고 있던 먹이마저 내팽개칠 정도로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는 게 오히려 더 수상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제껏 말없이 앉아 있던 냉가혜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툭 던졌다.
“흥! 만날 개한테 침이나 찔러 대니 똑바로 점혈도 못하고 엉뚱한 사람한테 피해나 주지.”
노웅이 장거운에게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뭐야! 그럼 네놈이 우리 황칠이 데리고 점혈 연습을 했단 말이야?”
“그, 그게……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사람이나 잡고 연습할 수는 없잖아요.”
장거운은 냉가혜를 원망의 눈초리로 째려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옆에 앉은 냉가혜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실실거리고 있었다.
노웅의 호통이 이어졌다.
“이 자식아! 황칠이는 나한테는 사람만큼 소중해!”
“에이, 그만해요! 개새끼 한 마리 갖고 뭘 그러슈. 그러니까 자꾸 애들이 선배 성질이 괴팍해진다고 하잖아요. 개 말고 애들이나 좀 아껴 주시오. 저 개새끼 때문에 순찰당 애들은 힘들어 죽겠다고 다들 울상이더니만.”
황보명이 만류를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노웅은 웬일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화가 많이 풀린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황칠에 대한 순찰당 위사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개에게 정이 간다고 하더라도 부하들만큼 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거운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은 것이다.
노웅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장거운에게 말을 건넸다.
“흠흠, 근데 꼴통 네놈은 왜 점혈을 침으로 하는 거냐?”
“우리 영영이가 그러는데, 저놈이 내기가 밖으로 안 뿜어진다고 그러네요.”
대답을 한 것은 황보명이었다. 그도 부인인 당영영에게 장거운의 상태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노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내기도 없는 놈이 조금 전에 반 시진이나 달리고 까딱없었단 말이야?”
“내기가 없는 게 아니라 밖으로 뿜어내질 못한다고요.”
“그게 그거잖아! 내기가 안 뿜어지면 어떻게 경공을 펼쳐?”
“이놈 별명이 말이 필요 없는 놈이에요. 그냥 뛰어도 말처럼 달릴 수 있는 놈이라고요. 선배, 그 이야기 몰라요? 이번 무사 시험에서 일관을 경공이 아니고 벼룩처럼 뛰어서 건넌 놈 말이오. 이놈이 그놈이잖수.”
“뭐야, 이놈이 그 벼룩 놈이야?”
황보명의 설명에 노웅이 신기한 동물이라도 본 것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장거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 그렇게 보세요?”
“거참, 희한한 놈이네. 안 그래도 내가 조만간에 한번 찾아보려고 했더니만.”
“찾아서 뭐하시게요?”
“뭐하긴 이놈아, 내공도 없이 칠 장을 뛰는 놈은 도대체 다리 속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네놈의 다리를 갈라 보려고 그랬지.”
“헉! 다, 다리를요?”
노웅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에 놀란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는 장거운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여 모두들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던 남궁천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거운, 확실히 놈의 얼굴은 보았느냐?”
“보기는 했는데 싸우느라 경황이 없어서……. 단, 저한테 선풍각을 맞아서 놈의 얼굴에 길게 자상이 생겼다는 것은 확실해요.”
장거운의 말이 끝나자 남궁천호는 다시 냉가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가혜는 놈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느냐?”
“예, 기존의 용모파기와는 달리 굉장한 미남자였어요.”
냉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순간 장거운의 중얼거림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흥! 그래서 희희낙락했나 보네.”
냉가혜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자식아! 그건 그놈이 사형을 사칭했기 때문에 수상해서 비위를 맞춰 준 거라고 했잖아!”
“아, 아니, 그래. 알았다고. 누가 뭐래?”
손사래까지 치며 다급하게 말을 뱉고 있는 장거운의 얼굴은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저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냉가혜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패악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냉가혜의 앙칼진 외침이 이어졌다.
“네가 금방 헛소리했잖아!”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냉가혜는 자신이 말을 했다고 하지만, 그는 결코 그와 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냉가혜가 자신의 표정을 보고는 지레짐작으로 난리를 치는 것 같았다.
장거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누가 뭐라 했다고 그래?”
“흥! 당주님들도 다들 들으셨거든!”
“엉? 뭔 소리?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냉가혜는 장거운의 말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들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황보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했고, 노웅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냉가혜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은 분명히 장거운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남들은 모두 못 들은 분위기였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그만! 조용히들 하여라. 당분간 직접적으로 하가장과는 마찰을 일으키지 마라. 거운, 알겠느냐?”
“……예.”
“그리고 선배님은 혹시 최근 몇 개월 사이에 하가장에 새로이 들어온 자가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시겠소?”
“그야 뭐…… 그렇게 하지.”
노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듣고 있던 황보명이 딴죽을 걸었다.
“근데 벽파쌍검 적우기가 하가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몰랐는데, 순찰당에서 그걸 알아낼 수 있겠수?”
“그거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뭐야, 본 방의 능력을 어떻게 보는 거야? 우리 개방이 마음만 먹으면 자네의 그 성질 더러운 마누라 속곳 색깔까지 다 알 수 있어!”
“거,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슈? 암튼 알았수. 내가 나중에 집에 가서 우리 영영이한테 선배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 드리리다.”
노웅이 사문인 개방까지 거론하며 자신 있다는 듯 고함을 치자 황보명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웅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당영영이 화가 나면 상대방이 얼마나 괴로워지는지를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한 달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측간을 들락거려야 하는 수가 있었다. 당영영의 설사약 하독 솜씨는 워낙에 신출귀몰하여서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급해진 노웅의 말이 이어졌다.
“아, 아니,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나? 자, 자! 한 잔 하세!”
노웅이 황보명과 술잔을 비우고 나자, 다시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신경을 좀 써 주십시오. 아무래도 하가장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벽파쌍검 적우기 정도 되는 고수가 하가장에서 호장무사들을 맡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호장무사들 또한 수상합니다. 본격적으로 하가장을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노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남궁천호의 말대로 호장무사들의 태도도 수상하였다. 아무리 하가장의 무사들이라고는 하나, 청룡무사인 장거운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친 감이 있었던 것이다.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거운이와 가혜는 중요한 수배범을 놓쳤으니 열흘 동안 둘이서 청룡고 당직을 맡도록 하라.”
“그건…….”
냉가혜는 뭔가 항변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장거운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벌 당직 선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일급 수배범을 놓치고도 아무런 문책 없이 넘어갈 줄 알았느냐?”
“쩝, 그게…… 아니에요. 할게요.”
남궁천호의 호통에 이내 고개를 숙이는 장거운이었다.
그로서는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당주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죽색마를 놓친 일은 분명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장거운의 귀에 냉가혜의 비아냥거리는 전음이 들려왔다.
“흥! 멍충이, 그러니까 놈을 먼저 쫓았어야지!”
‘어휴, 얼음귀신 같은 게……. 이걸 콱!’
냉가혜의 전음에 장거운은 어이가 없었지만 당주들과 함께한 자리인 탓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그녀를 노려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그러자 냉가혜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뭐? 얼음귀신? 죽을래?”
갑작스런 냉가혜의 말에 황보명이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했다.
“넌 또 왜 난데없이 귀신 타령이냐? 어째 청룡당에만 들어가면 멀쩡하던 애들도 이상해지냐?”
“이놈들이……! 어른들 앞에서 사랑싸움하려면 전음으로 해! 끙, 요즘 애들은 어째 대놓고 애정질이야.”
호통을 친 노웅이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전음?’
장거운과 냉가혜는 거의 동시에 노웅의 입에서 나온 ‘전음’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장거운은 두 번이나 계속해서 자신이 속으로 생각한 말을 냉가혜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했고, 냉가혜는 왜 자신에게만 장거운의 말이 들리는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결론은 장거운이 저도 모르게 전음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이다.
“내 말이 들리냐?”
“너 전음이 되니?”
장거운과 냉가혜의 귀에 서로 다른 말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궁천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전혀 두 사람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냉가혜의 전음이 이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너 전음 못했잖아?”
“그게…… 나도 모르겠다. 갑자기 되네.”
장거운은 냉가혜의 물음에 답을 해 주고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양충원이 자신에게 먹였다는 약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날도 맹으로 뛰어오면서 전혀 힘든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양충원이 자신에게 먹인 약이 대단한 영단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운기조식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장거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 실눈을 뜨고는 코끝을 바라보며 조용히 내부를 관조해 보기 시작했다. 단전은 여전히 허전했고 임맥과 독맥을 흐르는 내기의 흐름은 완만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를 가졌던 장거운으로서는 다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 이거 벌써 취했나, 몇 잔 마셨다고 조는 거야!”
갑자기 노웅이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는 장거운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며 아래로 눈을 깔자 취기가 올라 졸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빡!
“컥! 뭐, 뭐야? 이거 완전 돌대가리잖아!”
장거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던 노웅이 오히려 자신의 손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황보명이 실실거리며 말을 뱉었다.
“크크크. 선배, 그놈 별명 중 하나가 철두요. 돌대가리가 아니라 쇠대가린데 왜 하필 머리를 때리슈?”
“끙, 이 자식은 별명이 왜 이리 많아!”
노웅이 퉁퉁 부어오른 자신의 손을 붙잡고 짜증스럽게 외쳤다.
장거운이 급히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으면 네놈이 어쩔 건데? 젠장, 이놈아! 술이나 여기 부어 봐라.”
노웅은 짜증이 잔뜩 난 어조로 말을 뱉으며 자신의 부어오른 손을 내밀었다.
황보명이 입을 열었다.
“선배, 부어오른 자리에 술 부으면 가라앉는다는 그런 말, 다 근거 없는 소리니까 괜스레 아까운 술 버리지 말고 이리 내밀어 보시오. 한번 봅시다. 그래도 우리 마누라가 소문난 의원 아니오. 그냥 가볍게 쥐어박더니만, 뭘 그리 호들갑을 떠시오?”
“봐라! 내가 지금 호들갑 떨지 않게 생겼냐?”
“헉! 이거 왜 이래? 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 아니, 애를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손이 이 모양이오?”
노웅이 내민 손을 쳐다본 황보명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말을 뱉고 있었다.
노웅의 오른 주먹은 골절을 당한 것처럼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사실 황보명은 강호에서 손꼽히는 권법의 명가인 황보세가 출신이라서 주먹의 골절에 관해서는 웬만한 명의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노웅의 손은 마치 무쇠덩어리를 강하게 내려치다 다친 것 같아 보였다.
“세게는 무슨, 그냥 가볍게 쥐어박은 것뿐인데.”
황보명의 말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노웅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지며 차갑게 장거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전 그냥 가만있었어요.”
장거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노웅이 남궁천호를 쳐다보며 정색을 하고는 물었다.
“이 자식 진짜 정체가 뭐야?”
남궁천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거운이가 내기를 뿜지 못한다고 무공까지 약하다는 착각은 하지 마시오. 그래도 저놈이 혈인마 구충을 해치운 놈이니까 말입니다.”
“아냐, 그런 뜻이 아니라 분명히 반탄강기를 느낀 것 같은데…….”
노웅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보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농담도 작작하슈. 내기도 뿜지 못하는 놈이 무슨 반탄강기요? 아니, 반탄강기에 당했다면 선배 손이 그 정도일 리가 있어요? 아예 아작이 나 버렸겠지.”
“그건 그런데…… 분명히 알 수 없는 기운이 손을 쳐 내는 것 같았단 말이야.”
노웅이 장거운을 노려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노웅의 말에 모두들 호기심을 가지고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장거운으로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아 오히려 답답한 지경이었다.
사실 장거운은 노웅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노웅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단단한 머리 때문에 그가 다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을 뿐이었다.
장거운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웅의 말에 의하면 자신도 모르는 기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인데, 만약 그의 말대로 자신의 머리에서 어떤 기가 일어나 그의 손을 다치게 했다면, 내부를 관조 중이었던 자신이 그러한 기의 움직임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의당의 당주인 당영기를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고 있었다. 갑자기 전음이 되는 것도 그렇거니와, 노웅의 일을 보더라도 양충원이 약을 먹인 이후에 뭔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장거운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남궁천호가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들 나지. 선배님은 거운이 네가 모시고 의당의 당 당주에게 가 보아라. 그리고 선배님, 다시 한 번 당부드리오. 하가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흠, 알겠네.”
남궁천호의 말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일행들은 차갑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가장이라는 막강한 상대를 대상으로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