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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제2장 검장지가(劍匠之家)
장거운은 노웅과 함께 의당에 들렀다가 청룡각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무장에 들렀다. 장거운이 들른 연무장은 청룡각의 뒤편에 있는 것으로 청룡무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청룡무사들 대부분이 개인 연무를 할 시간이 거의 없는 관계로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고, 하루 종일 다녀간 사람도 없는지 잔설이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흐음, 흐…….”
연무장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장거운은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랫배로 밀어 넣은 다음, 혀끝을 천장에 대고 길고 가늘게 숨을 밖으로 흘려 내었다. 달마역근경을 운공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가장 흔한 운기토납의 호흡법이지만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가 연무장에 들러 행공을 하려는 것은 당영기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웅의 골절이 생각보다 심하여 당영기는 장시간에 걸쳐 침을 놓아야 했다. 덕분에 장거운은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어 먼저 의당을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장거운의 신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달마역근경의 일식인 위타헌저를 펼쳐 코로 흡인한 외기를 전신으로 퍼뜨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식인 적성환두로 넘어가고 있었다. 장거운의 행공법은 일반적인 동공의 행공법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달마역근경의 행공법 역시 일반적인 행공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수련할 때에는 일식에 일각 정도의 시간으로 펼치게 되지만, 점차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시간을 늘려 급기야는 일식을 펼치는 데 최고 한 시진이 걸리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십팔식으로 된 달마역근경을 한 번 펼치는 데 꼬박 하루 반이 걸리는 것이다. 이른바 만련(晩練)을 하는 셈이다.
그와 같은 만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서히 행공의 시간을 줄여 나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속련(速練)이 시작되는 것이다. 속련은 만련을 통해 익힌 가장 올바른 자세로 달마역근경 십팔식의 행공을 한 호흡에 끝낼 때까지 계속된다.
한 호흡에 십팔식을 모두 행공하는 것은 코로 받아들인 외기를 단번에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거치게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몇 식에 걸쳐 호흡을 나누게 되면, 대부분의 외기는 손실되고 단전에 축기되는 양이 현저하게 줄게 된다.
결국 달마역근경이 소림사 최고의 내공심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익히지 못한 데에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달마역근경은 만련의 과정과 속련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축기를 할 수 있게 되는데, 무재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림사의 제자들이 익히는 나한공이나 금강반야공의 경우 대개 이십 년을 수련하면 평범한 무재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삼십 년 정도의 내공은 얻지만, 달마역근경은 오십 년을 수련해도 만련과 속련의 과정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과 오 년 정도의 내공밖에는 얻지 못한다. 따라서 평범한 무재를 가진 이들로서는 평생을 수련해도 삼류의 내공조차 쌓기가 힘든 것이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달마역근경으로 축기한 내기를 운용하여 전신의 기혈을 강화하는 세수경의 경우에는 역근경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역근경과 세수경이 소림사 최고의 심법이면서도 제대로 익힌 이가 극히 드문 이유였다.
물론 장거운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워낙에 탁기가 쌓이지 않은 갓난아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역근경을 익힌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장거운은 아기 때부터 미련할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났다. 하나의 자세를 가르쳐 주면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산만해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장거운은 점점 더 집중력이 강해졌다. 장거운이 역근경의 만련을 할 때는 하나의 식을 행공하는 데 삼 일이 넘게 걸린 일도 허다했다. 그런 무식할 정도의 집중력 덕에 장거운은 불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만련과 속련을 모두 마칠 수가 있었다.
이미 속련의 과정을 넘어선 지 오래인 장거운은 지금은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역근경 십팔식의 행공을 두 번이나 하고 있었다. 마치 동공의 행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초식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역근경의 행공을 몇 번 되풀이하여 단전에 내기가 제법 모이는 것을 느낀 장거운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세수경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장거운은 단전의 내기를 움직여 임맥(任脈)의 회음혈(會陰穴)로 밀어 넣은 뒤 독맥(督脈)의 장강혈(長强穴), 명문혈(命門穴) 등을 거쳐 태단혈(兌端穴)과 은교혈에 이르게 하고는, 다시 임맥의 승장혈(承奬穴)로 기운을 받아들여 임맥을 따라 단전에 이르게 하는 소주천을 몇 번이고 반복을 했다. 하지만 소주천을 하는 동안에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대주천이었다. 임맥과 독맥만을 순환하는 소주천과 달리 대주천은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전부 다 거쳐야 하는데, 이제까지는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내기가 사라져 버려 단전으로 돌아오는 내기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당영기의 말대로 낙맥을 통해 흘러나간 내기가 세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번의 소주천을 반복한 뒤 장거운은 충만해진 단전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아랫배의 충맥으로 밀어 넣었다. 충맥으로 들어간 내기는 기충혈(氣衝穴)에서 시작하여 거세게 치고 올라가 대맥과 음유맥으로 흘러들어 간 뒤, 양유맥과 음교맥, 그리고 양교맥으로 동시에 퍼져 나가며 각 맥의 마지막 혈에서 만나게 되는 십이경맥으로 다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장거운은 서서히 긴장을 했다. 이번에도 십이경맥으로 흘러들어 간 내기가 온전히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잠시 후 십이경맥에 이어 십오낙맥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전신을 훑어 내린 내기가 임맥과 독맥을 거쳐 단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제까지와는 달리 내기가 세맥들로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돌아오고 있었다. 오히려 내기의 양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게다가 한층 더 정순해졌는지 전신에 상쾌함이 느껴졌다.
장거운은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다시 한 번 대주천을 시행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전히 돌아온 정순한 내기가 단전을 뿌듯하게 채워 주었다. 다시 대주천이 반복되었다.
라다여, 만약 색(色)이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물이요,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색을 악마라 관(觀)하고, 방해물이라 관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고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라다여, 만약 수(受)가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자요, 교란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대주천을 반복하는 가운데 장거운은 무의식적으로 아함경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대주천을 하면서 아함경의 구절들을 떠올리는 것은 할아버지도 모르는 장거운의 버릇이자, 그가 자라면서 더욱 집중력이 강해진 이유였다.
장거운이 처음 세수경을 익힐 때에는 기의 움직임에 집중하여 정신의 산만함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나니 기의 움직임은 정해진 경로를 따르게 되고 여유가 생긴 마음에는 대주천을 하고 있는 가운데 쓸데없는 사념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러한 사념들이야말로 내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자칫 감정이 격해지면 내기의 흐름이 크게 틀어져 주화입마에 이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장거운은 우연한 기회에 그러한 사념이 들 때마다 아함경을 암송하면 신기하게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대주천을 할 때면 늘 아함경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함경은 운기의 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세수경과는 달리 석가세존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념을 지워 버리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장거운은 대주천을 할 때면, 몸은 세수경이 지배를 하고 정신은 아함경이 지배를 하는 방식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러한 방식을 취하면 곧바로 사념을 지우고 무아지경에 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장거운은 그러한 방식으로 무아지경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장거운의 신형이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바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온 내기가 외기와 반응하여 일으키는 부공삼매의 현상이었다. 이미 무아지경에 든 장거운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드디어 그의 내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잠시 후 장거운의 신형을 중심으로 폭풍 같은 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연무장에 소복하게 쌓여 있던 잔설들을 휘감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눈 기둥이 회전을 하고 있는 모양과 같았다. 그렇게 이각 정도가 흐른 뒤, 장거운의 신형이 서서히 회전을 멈춤과 동시에 잔설들도 그 자리에 다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장거운이 무아지경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의 주위에 높다란 담처럼 쌓여 있는 눈들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눈 더미가 그의 주변을 빙 둘러 허리 높이 가까이 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연무장 바닥의 눈을 쓸어 모아서 그의 주변에 쌓아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누가 왔다 갔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거운은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쌓여 있는 눈 더미를 뛰어넘어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닥에 착지하는 장거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몸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마치 새처럼 허공 저 높이라도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다.
장거운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선배 청룡무사인 유자명이었다.
유자명이 장거운을 향해 소리를 쳤다.
“야, 장거운! 지금 거기서 뭐하냐?”
“예?”
“지금 눈 치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와라!”
장거운이 빠르게 유자명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한참 찾았잖아! 쓸 시간도 없는 연무장 눈은 난데없이 왜 치우고 있냐? 빨리 가자! 출동이다.”
유자명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거운이 급히 뒤를 따르며 말을 건넸다.
“출동이라고요? 무슨 일입니까?”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자!”
유자명은 대답을 하면서 빠르게 청룡각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거운이 유자명과 같이 원행을 채비하여 청룡각 앞으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사공한과 냉가혜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대주인 악우진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거운을 본 사공한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야, 장거운! 어디 있었던 거야? 의당이랑 다 뒤져도 없더니만.”
“헉! 죄송해요. 연무장에 있었어요.”
장거운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을 했다.
사공한이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연무장! 끙, 아재부삼년수(兒在負三年搜)라더니 지척에 두고 헤맸네. 도대체 야심한 시각에 거기서 혼자 뭐했냐?”
“그게 저…….”
“눈 치우고 있던데요.”
장거운이 머뭇거리자 유자명이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사공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거운을 쳐다보며 탄식을 하듯이 말을 뱉었다.
“참 너도 할 일도 없다. 스스로 녹아 없어질 눈인데 뭐하러 삽질을 하냐?”
“삽질은 안 했는데요.”
“흥! 쓸 시간도 없는 연무장의 눈을 치웠다는 것 자체가 삽질이잖아!”
장거운의 말에 냉가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그런가? 헤, 근데 무슨 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건네던 장거운이 청룡각의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우진이 남궁천호와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끝내고 남궁천호가 다시 청룡각 안으로 들어가자, 악우진은 장거운 등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인 것인가?”
“예, 오늘 밤 당직을 맡은 애들 빼고는 다 모였습니다. 한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부대주인 사공한도 갑작스런 출동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악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덕청현(德淸縣)에 있는 백가장에 화재가 일어나 장원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항주부의 전갈이 왔다.”
“백가장이면 막간산 입구에 있는 검장지가(劍匠之家) 말입니까?”
“그렇다. 바로 그 백가장이다.”
유자명의 물음에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장거운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검장지가라고 부르는 백가장은 검을 만드는 장인의 가문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절강성에서 가장 많은 검을 생산하는 곳은 항주에 있는 만검장이었지만, 품질을 놓고 보자면 백가장에서 만든 검이 단연 최고였다.
백가장에서 만든 검은 고가에다 수량이 적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무사들 대부분이 갖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거운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다들 백가장을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일행들은 백가장의 화재 소식을 접한 남궁천호와 악우진이 굳은 얼굴로 출동을 지시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검을 만드는 장인의 가문인 백가장의 화재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면 무림인들의 소행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도 다수의 집단이 공격을 하였을 터였다. 그와 같이 무림인 집단의 습격으로 한 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일은 청룡당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사공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그렇게 불을 잘 다루는 집안에서 왜 화재가 났답니까?”
“그걸 알아보려고 지금 우리가 가려는 것 아닌가!”
“아, 그, 그렇군요. 흠흠, 불로써 흥한 자 불로써 망한 것인가?”
악우진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뱉자 사공한이 머쓱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악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사공 부대주는 당장 가서 보위사들 서른 명을 인솔해 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말을 준비하여 정확하게 일각 후에 출발할 수 있도록 하라.”
“아니, 대주님! 무슨 화재 조사에 보위사들을 서른 명이나 차출합니까?”
“도대체 이제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백가장이 화재에 소실되었다고 했잖아!”
악우진이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사공한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묻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화재를 조사하러 가는데 무슨 인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거냔 말이지요.”
사공한의 물음에 악우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만 있자 답답하다는 듯이 냉가혜가 입을 열었다.
“화재가 난 곳이 백가장이잖아요. 검장지가에서 화재가 나서 장원이 소실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무림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 그럼……?”
“혹시나 검이 남아 있나 싶어서 달려드는 무림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겠죠.”
“아! 그, 그렇군.”
사공한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가혜의 말대로 백가장의 일이 소문나면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백가장의 검을 노리고 달려들 무림인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럴 경우 소실된 백가장의 장원을 지키고 있을 덕청현의 포쾌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공격을 당해 사건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출동에 서른 명이나 되는 보위사들을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악우진이 다시 고함을 쳤다.
“알았으면 빨리 가서 보위사들을 인솔해 오지 않고 뭘 해!”
“예? 아, 예.”
사공한이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악우진이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거운!”
“예!”
갑작스럽게 악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장거운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지난번 공우 형제의 일로 언쟁을 벌인 이후로 아직까지도 악우진은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그가 자신을 부르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악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순찰당에 너와 친한 개가 한 마리 있다고 하더군.”
“예? 아, 황칠이 말입니까?”
“이름은 모르겠고, 아무튼 천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게 너와 닮았다고 하던데.”
“…….”
자신의 빈정거리는 말에 장거운이 아무런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악우진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뱉었다.
“어쨌든 가서 그 개새끼를 데리고 오도록!”
“예.”
나직하게 대답을 하고는 순찰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거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칠이를 빗대어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해 대는 악우진의 말에 분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장거운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냉가혜의 귀에 장거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또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다고 치자. 그는 증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다른 사람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아니냐?”
그것은 지금 장거운이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아함경의 한 구절이었다.
제2장 검장지가(劍匠之家)
장거운은 노웅과 함께 의당에 들렀다가 청룡각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무장에 들렀다. 장거운이 들른 연무장은 청룡각의 뒤편에 있는 것으로 청룡무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청룡무사들 대부분이 개인 연무를 할 시간이 거의 없는 관계로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고, 하루 종일 다녀간 사람도 없는지 잔설이 소복하게 남아 있었다.
“흐음, 흐…….”
연무장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장거운은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랫배로 밀어 넣은 다음, 혀끝을 천장에 대고 길고 가늘게 숨을 밖으로 흘려 내었다. 달마역근경을 운공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가장 흔한 운기토납의 호흡법이지만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가 연무장에 들러 행공을 하려는 것은 당영기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웅의 골절이 생각보다 심하여 당영기는 장시간에 걸쳐 침을 놓아야 했다. 덕분에 장거운은 괜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어 먼저 의당을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장거운의 신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달마역근경의 일식인 위타헌저를 펼쳐 코로 흡인한 외기를 전신으로 퍼뜨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이식인 적성환두로 넘어가고 있었다. 장거운의 행공법은 일반적인 동공의 행공법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달마역근경의 행공법 역시 일반적인 행공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수련할 때에는 일식에 일각 정도의 시간으로 펼치게 되지만, 점차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시간을 늘려 급기야는 일식을 펼치는 데 최고 한 시진이 걸리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십팔식으로 된 달마역근경을 한 번 펼치는 데 꼬박 하루 반이 걸리는 것이다. 이른바 만련(晩練)을 하는 셈이다.
그와 같은 만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서히 행공의 시간을 줄여 나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속련(速練)이 시작되는 것이다. 속련은 만련을 통해 익힌 가장 올바른 자세로 달마역근경 십팔식의 행공을 한 호흡에 끝낼 때까지 계속된다.
한 호흡에 십팔식을 모두 행공하는 것은 코로 받아들인 외기를 단번에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거치게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몇 식에 걸쳐 호흡을 나누게 되면, 대부분의 외기는 손실되고 단전에 축기되는 양이 현저하게 줄게 된다.
결국 달마역근경이 소림사 최고의 내공심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익히지 못한 데에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었다. 달마역근경은 만련의 과정과 속련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축기를 할 수 있게 되는데, 무재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림사의 제자들이 익히는 나한공이나 금강반야공의 경우 대개 이십 년을 수련하면 평범한 무재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삼십 년 정도의 내공은 얻지만, 달마역근경은 오십 년을 수련해도 만련과 속련의 과정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과 오 년 정도의 내공밖에는 얻지 못한다. 따라서 평범한 무재를 가진 이들로서는 평생을 수련해도 삼류의 내공조차 쌓기가 힘든 것이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달마역근경으로 축기한 내기를 운용하여 전신의 기혈을 강화하는 세수경의 경우에는 역근경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역근경과 세수경이 소림사 최고의 심법이면서도 제대로 익힌 이가 극히 드문 이유였다.
물론 장거운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다. 워낙에 탁기가 쌓이지 않은 갓난아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역근경을 익힌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장거운은 아기 때부터 미련할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났다. 하나의 자세를 가르쳐 주면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산만해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장거운은 점점 더 집중력이 강해졌다. 장거운이 역근경의 만련을 할 때는 하나의 식을 행공하는 데 삼 일이 넘게 걸린 일도 허다했다. 그런 무식할 정도의 집중력 덕에 장거운은 불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만련과 속련을 모두 마칠 수가 있었다.
이미 속련의 과정을 넘어선 지 오래인 장거운은 지금은 채 반 각도 되지 않아 역근경 십팔식의 행공을 두 번이나 하고 있었다. 마치 동공의 행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초식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역근경의 행공을 몇 번 되풀이하여 단전에 내기가 제법 모이는 것을 느낀 장거운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세수경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장거운은 단전의 내기를 움직여 임맥(任脈)의 회음혈(會陰穴)로 밀어 넣은 뒤 독맥(督脈)의 장강혈(長强穴), 명문혈(命門穴) 등을 거쳐 태단혈(兌端穴)과 은교혈에 이르게 하고는, 다시 임맥의 승장혈(承奬穴)로 기운을 받아들여 임맥을 따라 단전에 이르게 하는 소주천을 몇 번이고 반복을 했다. 하지만 소주천을 하는 동안에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문제는 대주천이었다. 임맥과 독맥만을 순환하는 소주천과 달리 대주천은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전부 다 거쳐야 하는데, 이제까지는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내기가 사라져 버려 단전으로 돌아오는 내기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당영기의 말대로 낙맥을 통해 흘러나간 내기가 세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번의 소주천을 반복한 뒤 장거운은 충만해진 단전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아랫배의 충맥으로 밀어 넣었다. 충맥으로 들어간 내기는 기충혈(氣衝穴)에서 시작하여 거세게 치고 올라가 대맥과 음유맥으로 흘러들어 간 뒤, 양유맥과 음교맥, 그리고 양교맥으로 동시에 퍼져 나가며 각 맥의 마지막 혈에서 만나게 되는 십이경맥으로 다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장거운은 서서히 긴장을 했다. 이번에도 십이경맥으로 흘러들어 간 내기가 온전히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잠시 후 십이경맥에 이어 십오낙맥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전신을 훑어 내린 내기가 임맥과 독맥을 거쳐 단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제까지와는 달리 내기가 세맥들로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돌아오고 있었다. 오히려 내기의 양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게다가 한층 더 정순해졌는지 전신에 상쾌함이 느껴졌다.
장거운은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다시 한 번 대주천을 시행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전히 돌아온 정순한 내기가 단전을 뿌듯하게 채워 주었다. 다시 대주천이 반복되었다.
라다여, 만약 색(色)이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물이요,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색을 악마라 관(觀)하고, 방해물이라 관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고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라다여, 만약 수(受)가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자요, 교란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대주천을 반복하는 가운데 장거운은 무의식적으로 아함경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대주천을 하면서 아함경의 구절들을 떠올리는 것은 할아버지도 모르는 장거운의 버릇이자, 그가 자라면서 더욱 집중력이 강해진 이유였다.
장거운이 처음 세수경을 익힐 때에는 기의 움직임에 집중하여 정신의 산만함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나니 기의 움직임은 정해진 경로를 따르게 되고 여유가 생긴 마음에는 대주천을 하고 있는 가운데 쓸데없는 사념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러한 사념들이야말로 내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자칫 감정이 격해지면 내기의 흐름이 크게 틀어져 주화입마에 이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장거운은 우연한 기회에 그러한 사념이 들 때마다 아함경을 암송하면 신기하게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대주천을 할 때면 늘 아함경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함경은 운기의 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세수경과는 달리 석가세존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념을 지워 버리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장거운은 대주천을 할 때면, 몸은 세수경이 지배를 하고 정신은 아함경이 지배를 하는 방식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러한 방식을 취하면 곧바로 사념을 지우고 무아지경에 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장거운은 그러한 방식으로 무아지경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장거운의 신형이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바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온 내기가 외기와 반응하여 일으키는 부공삼매의 현상이었다. 이미 무아지경에 든 장거운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드디어 그의 내기가 밖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잠시 후 장거운의 신형을 중심으로 폭풍 같은 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연무장에 소복하게 쌓여 있던 잔설들을 휘감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눈 기둥이 회전을 하고 있는 모양과 같았다. 그렇게 이각 정도가 흐른 뒤, 장거운의 신형이 서서히 회전을 멈춤과 동시에 잔설들도 그 자리에 다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장거운이 무아지경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의 주위에 높다란 담처럼 쌓여 있는 눈들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눈 더미가 그의 주변을 빙 둘러 허리 높이 가까이 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연무장 바닥의 눈을 쓸어 모아서 그의 주변에 쌓아 놓은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누가 왔다 갔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거운은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쌓여 있는 눈 더미를 뛰어넘어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닥에 착지하는 장거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몸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마치 새처럼 허공 저 높이라도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다.
장거운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선배 청룡무사인 유자명이었다.
유자명이 장거운을 향해 소리를 쳤다.
“야, 장거운! 지금 거기서 뭐하냐?”
“예?”
“지금 눈 치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와라!”
장거운이 빠르게 유자명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한참 찾았잖아! 쓸 시간도 없는 연무장 눈은 난데없이 왜 치우고 있냐? 빨리 가자! 출동이다.”
유자명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거운이 급히 뒤를 따르며 말을 건넸다.
“출동이라고요? 무슨 일입니까?”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자!”
유자명은 대답을 하면서 빠르게 청룡각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거운이 유자명과 같이 원행을 채비하여 청룡각 앞으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사공한과 냉가혜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대주인 악우진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거운을 본 사공한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야, 장거운! 어디 있었던 거야? 의당이랑 다 뒤져도 없더니만.”
“헉! 죄송해요. 연무장에 있었어요.”
장거운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을 했다.
사공한이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연무장! 끙, 아재부삼년수(兒在負三年搜)라더니 지척에 두고 헤맸네. 도대체 야심한 시각에 거기서 혼자 뭐했냐?”
“그게 저…….”
“눈 치우고 있던데요.”
장거운이 머뭇거리자 유자명이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사공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거운을 쳐다보며 탄식을 하듯이 말을 뱉었다.
“참 너도 할 일도 없다. 스스로 녹아 없어질 눈인데 뭐하러 삽질을 하냐?”
“삽질은 안 했는데요.”
“흥! 쓸 시간도 없는 연무장의 눈을 치웠다는 것 자체가 삽질이잖아!”
장거운의 말에 냉가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그런가? 헤, 근데 무슨 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건네던 장거운이 청룡각의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우진이 남궁천호와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끝내고 남궁천호가 다시 청룡각 안으로 들어가자, 악우진은 장거운 등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인 것인가?”
“예, 오늘 밤 당직을 맡은 애들 빼고는 다 모였습니다. 한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부대주인 사공한도 갑작스런 출동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악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덕청현(德淸縣)에 있는 백가장에 화재가 일어나 장원이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항주부의 전갈이 왔다.”
“백가장이면 막간산 입구에 있는 검장지가(劍匠之家) 말입니까?”
“그렇다. 바로 그 백가장이다.”
유자명의 물음에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장거운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검장지가라고 부르는 백가장은 검을 만드는 장인의 가문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절강성에서 가장 많은 검을 생산하는 곳은 항주에 있는 만검장이었지만, 품질을 놓고 보자면 백가장에서 만든 검이 단연 최고였다.
백가장에서 만든 검은 고가에다 수량이 적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무사들 대부분이 갖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거운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다들 백가장을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일행들은 백가장의 화재 소식을 접한 남궁천호와 악우진이 굳은 얼굴로 출동을 지시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검을 만드는 장인의 가문인 백가장의 화재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면 무림인들의 소행이 분명할 것이다. 그것도 다수의 집단이 공격을 하였을 터였다. 그와 같이 무림인 집단의 습격으로 한 가문이 멸문을 당하는 일은 청룡당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사공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그렇게 불을 잘 다루는 집안에서 왜 화재가 났답니까?”
“그걸 알아보려고 지금 우리가 가려는 것 아닌가!”
“아, 그, 그렇군요. 흠흠, 불로써 흥한 자 불로써 망한 것인가?”
악우진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뱉자 사공한이 머쓱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악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사공 부대주는 당장 가서 보위사들 서른 명을 인솔해 오도록 하고, 나머지는 말을 준비하여 정확하게 일각 후에 출발할 수 있도록 하라.”
“아니, 대주님! 무슨 화재 조사에 보위사들을 서른 명이나 차출합니까?”
“도대체 이제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백가장이 화재에 소실되었다고 했잖아!”
악우진이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사공한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묻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화재를 조사하러 가는데 무슨 인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거냔 말이지요.”
사공한의 물음에 악우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만 있자 답답하다는 듯이 냉가혜가 입을 열었다.
“화재가 난 곳이 백가장이잖아요. 검장지가에서 화재가 나서 장원이 소실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무림인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 그럼……?”
“혹시나 검이 남아 있나 싶어서 달려드는 무림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겠죠.”
“아! 그, 그렇군.”
사공한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가혜의 말대로 백가장의 일이 소문나면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백가장의 검을 노리고 달려들 무림인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럴 경우 소실된 백가장의 장원을 지키고 있을 덕청현의 포쾌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공격을 당해 사건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출동에 서른 명이나 되는 보위사들을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악우진이 다시 고함을 쳤다.
“알았으면 빨리 가서 보위사들을 인솔해 오지 않고 뭘 해!”
“예? 아, 예.”
사공한이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악우진이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거운!”
“예!”
갑작스럽게 악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장거운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지난번 공우 형제의 일로 언쟁을 벌인 이후로 아직까지도 악우진은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그가 자신을 부르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악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순찰당에 너와 친한 개가 한 마리 있다고 하더군.”
“예? 아, 황칠이 말입니까?”
“이름은 모르겠고, 아무튼 천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게 너와 닮았다고 하던데.”
“…….”
자신의 빈정거리는 말에 장거운이 아무런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자 악우진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뱉었다.
“어쨌든 가서 그 개새끼를 데리고 오도록!”
“예.”
나직하게 대답을 하고는 순찰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거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칠이를 빗대어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해 대는 악우진의 말에 분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장거운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냉가혜의 귀에 장거운의 전음이 들려왔다.
“또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다고 치자. 그는 증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다른 사람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아니냐?”
그것은 지금 장거운이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아함경의 한 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