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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청룡당 일행들이 덕청현에서 항주로 가는 관도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시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일행들은 세 대의 마차를 호위하는 듯이 대형을 유지한 채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백가장에서 복면인들의 공격을 겪었음에도 그다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일행들은 백연화에게 동의를 구한 뒤 지하의 검들을 모두 마차에 옮겨 싣고 무림맹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복면인들의 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한 채 길을 재촉했다. 특히 백가장에서 덕청현에 이르는 길은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적들이 습격을 하기에 적당한 지형이 많아 더욱 긴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행들이 우려하던 것과는 달리 덕청현에 이를 때까지도 적들이 습격을 해 오지 않자, 일행들은 다소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림맹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덕청현에서 항주까지의 관도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인 데다 완만한 평원을 따라 길이 나 있어서, 대낮에 기습을 해 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긴 장거운은 자신의 앞에서 말을 달리는 냉가혜를 쳐다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독 그녀만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어떻게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자신도 어느 정도는 내기를 뿜을 수 있게 되어 점혈이나 전음도 가능하지만, 그가 자신의 속내를 전음으로 그녀에게 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장거운은 냉가혜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바보야! 얼음귀신!’
“죽을래!”
냉가혜의 싸늘한 대꾸가 장거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이 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장거운이 이번에는 마차 건너편을 보았다. 밤을 샌 탓인지 사공한이 꾸벅꾸벅 졸면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장거운은 조는 와중에도 용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사공한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부대주님! 적입니다!’
“뭐! 적이라고? 어디야?”
사공한이 화들짝 놀라서는 고함을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덕분에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악우진을 비롯한 일행들까지 모두 갑작스럽게 멈추어 서서 경계의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장거운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당연히 냉가혜와는 달리 사공한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뜻밖에도 사공한이 정확하게 자신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결국 냉가혜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 자신의 생각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었다. 만약 장거운이 자신의 이상한 전음 수법을 조절할 수 없다면, 앞으로는 속으로 욕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장거운이 의외의 사실을 알고 당황해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사공한이 장거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야, 장거운! 아까 적이라고 하지 않았냐?”
“저, 그러니까, 그게…….”
장거운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악우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뭐란 말이냐? 도대체 어디에 적이 있다는 말이냐?”
사공한이 아니라 악우진이 다그치자 장거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냥 장난삼아 해 본 말에 사공한이 놀라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일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제가 적이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던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의 눈에 관도 저편에서 황급히 말을 달려오는 한 떼의 무리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운이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저들이 수상해 보여서 말입니다.”
장거운의 말에 전방을 쳐다본 일행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긴장감이 어리고 있었다. 장거운의 말처럼 한 떼의 인마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일행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반대편에 나타난 무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리가 되자 굳어졌던 악우진의 얼굴이 다시 펴지고 있었다. 일행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의 선두에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들과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부대임을 나타내는 군기를 곧추 세워 든 기수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나타난 무리가 백가장의 검을 노리는 흉수들이 아니라 도지휘사사의 병사들임을 알고는 크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쪽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 주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곧바로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병사들이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일행의 앞에 멈추어 선 것이다.
청룡당 일행들의 앞을 막아선 장수들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장수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앞으로 나서서 소리쳤다.
“책임자가 누구인가?”
“내가 책임자인데 왜 그러시오?”
말을 하며 나선 사람은 신규진이었다. 실질적으로 일행을 지휘하는 사람은 악우진이었지만 관군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아무래도 추관인 그가 나서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악우진이 전음으로 그에게 지시를 한 것이다.
젊은 장수의 말이 이어졌다.
“행색을 보아하니 항주부의 추관인 모양이군.”
“그렇소, 항주부의 추관인 신규진이라고 하오. 무슨 일로 그러시오?”
말을 하는 신규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착용하고 있는 갑옷으로 봐서는 백호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상대가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며 계속 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호가 품계상으로는 정칠품인 자신보다 위인 정육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향시에 급제를 하고 품계를 받은 정식 문관이었다. 항주부의 추관이 군관인 백호에게 하대를 받을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장수의 하대는 계속 이어졌다.
“지금 백가장에서 오는 길인가?”
“그렇소만, 그것을 왜 묻는 것이오?”
신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을 하였지만, 젊은 장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저 마차에 실린 것이 백가장의 검인가?”
“그러니까 왜 백가장의 일에 도지휘사사에서 관심을 가지냔 말이오?”
젊은 장수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화가 난 신규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소 거칠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젊은 장수는 신규진을 잠시 노려보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말을 돌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넬 뿐이었다. 철저히 신규진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와 이야기를 마친 젊은 장수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지금부터 백가장에서 나온 검들은 모두 도지휘사사에서 징발하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도지휘사사에서 무슨 권리로 백가장의 검들을 가져간단 말이오?”
젊은 장수의 일방적인 선언에 신규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펄쩍 뛰며 소리를 쳤다.
냉랭한 대꾸가 젊은 장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본시 주인 없는 사유재산은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 법이다. 그러니 백가장에서 나온 검들을 도지휘사사에서 징발을 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인 것이다.”
“그냥 듣고 있으려니 역겹군. 누가 백가장의 검이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하던가?”
한쪽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악우진이 앞으로 나서며 젊은 장수에게 말을 뱉었다.
젊은 장수가 날카롭게 안광을 빛내며 말을 뱉었다.
“너는 누구냐?”
“갈! 말조심하라! 나는 무림맹 청룡당 이대주인 섬창 악우진이다.”
“뭣이! 감히 무사 나부랭이가 황상폐하의 어명을 받드는 본관에게 말조심하라고 했느냐?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젊은 장수는 악우진이 직접적으로 신분을 밝혔음에도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악우진과 청룡당 일행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일개 도지휘사사의 백호가 청룡당을 너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악우진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가문인 산동악가는 전통적으로 군부의 요직을 차지한 많은 무장들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 역시도 지금 당장에라도 출사를 한다면 정천호 이상의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개 백호 따위가 자신에게 이놈 저놈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악우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당장에라도 출수를 하여 버릇없는 젊은 장수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군부의 장수인 것이다. 그로서는 말안장에 걸려 있는 자신의 단창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분노를 삭여야 했다.
악우진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단창을 만지작거리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뱉었다.
“우 백호 물러서라!”
“존명!”
우 백호라고 불린 젊은 장수가 황급히 읍을 하며 뒤로 물러서자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청룡당의 이대주라고 하였나?”
“그렇다.”
“흠, 그런데 백가장의 검에 주인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설마 무림맹이 검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이다.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으니 당연히 백가장의 검들은 그들의 소유이다.”
악우진의 냉랭한 대꾸에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다고? 그들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백가 남매가 바로 뒤쪽의 마차에 있다고 대답을 하려던 악우진의 귀에 장거운의 다급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대주님! 저자는 조금 전 백가장에서 본 자입니다.”
“무슨 소리냐? 도지휘사사의 장수가 백가장을 습격한 자란 말이냐?”
“틀림없습니다. 지하 입구에서 저와 싸웠던 자의 눈빛이 분명합니다.”
장거운이 확신에 찬 어조로 전음을 보내자, 악우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장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복색은 관군이 분명했다. 그자의 뒤에 눈을 빛내고 서 있는 오십여 명의 병사들 역시 관군의 복장이 틀림없어 보였다.
“장거운! 분명히 보아라. 자칫하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저자가 습격한 무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느냐?”
다시금 악우진의 전음이 들려오자 장거운은 눈을 빛내며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절정의 검술을 보이며 지하 통로 입구에서 자신과 싸웠던 그자의 눈빛이 틀림없었다.
장거운이 다시 악우진에게 전음을 날렸다.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관군이라지만 대주님과 저희들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악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거운이 확신을 보이고 있는 데다, 생각해 보니 장거운의 말대로 관군의 태도가 수상했다. 아무리 싸가지가 없는 관군이라고 하지만, 일개 백호가 추관인 신규진을 벌레 보듯이 하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우진이 결심을 한 듯 차갑게 눈을 빛내며 일행들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모두 준비를 하라! 장거운과 냉가혜는 백가 남매를 보호하고, 부대주와 자명은 검을 실은 마차를 지켜라. 공격이 시작되면 전속으로 돌파한다.”
“대주님! 무슨 소리입니까? 상대는 관군이라고요.”
사공한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지만, 악우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소. 그러니 길을 비키시오!”
“흠,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다면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으며 슬그머니 손을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집으로 가져갔다.
“지금!”
짤막한 외침과 함께 악우진이 전광석화처럼 단창을 내질렀다.
챙!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악우진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가볍게 검으로 악우진의 창을 흘려버리며 오히려 반격을 해 왔다. 그에 맞춰서 관군들 역시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신형을 날려 청룡당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미 악우진의 명을 받은 청룡당 일행들도 관군들의 공격에 차분하게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신규진과 포쾌들만이 다급하게 마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로서는 관군과 청룡당이 싸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가 남매가 타고 있는 마차의 지붕 위에 뛰어올라 달려드는 두 명의 관군들을 나한각과 관음십팔족으로 날려 버린 장거운이 반보 옆으로 비켜나며,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파고드는 장창을 십이금룡수로 낚아채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버리자 장창이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떡거리며 관군의 손에서 빠져 버렸다.
장거운은 마차를 방어하기에는 자신이 즐겨 펼치는 백타보다는 장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확실히 그의 생각이 맞았다. 장거운은 곧바로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드는 것을 느끼고는 창대의 가운데를 잡고 크게 회전을 시켰다.
웅!
장거운의 손에 들린 장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회전하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관군들의 검과 장창을 모조리 튕겨 내고 있었다. 장창을 돌려 일격에 다섯 명의 관군들을 튕겨 낸 장거운이 순간적으로 장창을 멈추고 앞쪽으로 급격하게 손을 내뻗자 날아가던 장창이 달려들던 관군의 얼굴 바로 앞에서 약간 밑으로 떨어지며 뾰족하게 날이 선 창두가 관군의 목젖으로 파고들었다.
“크악!”
신음 소리와 함께 목에 창두가 박혀 버린 관군이 창끝에 매달려 대롱거리자 장거운이 손목을 아래로 젖히면서 창을 뽑아내고는 다시 손목을 튕겨 장창의 자루 끝으로 뒤에서 달려드는 자의 아랫배를 찍어 버렸다.
순식간에 두 명의 적을 해치운 장거운은 마차의 우측 편에서 싸우고 있는 냉가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검을 쓰는 두 명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특히 순간적으로 사각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암향표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챙!
냉가혜와 싸우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그녀의 검에 막혀 튕겨 나온 검을 재빨리 되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장창을 잡고 있는 장거운의 손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뻗어졌다. 섬전처럼 파고든 장거운의 장창이 냉가혜를 향해 덤벼들던 상대의 어깨에 피 구멍을 내 버렸다.
“크억!”
“컥!”
두 마디의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처음의 신음은 장거운의 장창에 어깨가 꿰뚫린 자의 것이었고, 두 번째의 신음은 동료가 당한 것을 알고 잠시 흔들린 사이 냉가혜의 검에 가슴이 갈라진 자의 것이었다.
신형을 돌리며 검을 뽑아낸 냉가혜의 눈은 이채를 띤 채 장거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거운이 권각술에만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장창까지 잘 다루자 상당히 놀란 것이다.
실실거리고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던 냉가혜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뒤!”
장창을 꼬나 쥔 관군 하나가 장거운의 등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뒤쪽의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모양인지, 장거운은 별반 놀란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좌측으로 일 보 미끄러지며 장창을 뒤로 내질렀다.
쉬웅!
장거운의 뒤에서 달려들던 자는 장거운의 장창이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자 급작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마차의 한복판을 향해 장창을 내질러 버렸다.
콰직!
관군의 장창이 마차의 벽면을 사정없이 꿰뚫으며 박혀 버렸다. 상대는 처음부터 마차를 노렸던 것이다.
상대의 노림수에 당한 것을 알고는 당황한 장거운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장창을 마차에 박아 넣은 관군을 관음십팔족으로 날려 버리고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쉭!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시퍼런 검기를 머금은 검이 미간을 찔러 오자 장거운이 급격하게 머리를 틀어 가까스로 검을 피했다. 그러나 장거운의 재빠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밑머리가 한 움큼 잘려 나풀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검을 피한 장거운은 다급하게 외쳤다.
“나요! 괜찮아요?”
“예, 근데 괜찮으세요?”
백연화는 방금 자신이 공격한 사람이 장거운임을 알고는 놀란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다시 들이밀며 말을 건넸다.
“예, 난 괜찮소. 창 공격에 다쳤나 해서 말이오.”
장거운이 말을 하면서 빠르게 마차 안을 살펴보니 백연호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고, 백연화는 검을 뽑아 들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앞에는 잘려 나간 창대가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창대가 마차 안쪽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가 검으로 잘라 버린 모양이었다.
마차 안을 들여다본 장거운은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파고든 창대를 잘라 버린 솜씨나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하던 그녀의 검을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그녀의 무공이 높은 것 같아 장거운은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보위사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방호진을 펼쳐라!”
사공한의 고함 소리에 장거운이 다시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서자, 그곳에는 냉가혜가 서 있었다. 앞의 마차에도 사공한과 유자명이 지붕 위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적들이 방호진을 뛰어넘어 마차로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들 마차의 지붕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마차를 중심으로 방어진이 갖추어지자 적들은 좀처럼 마차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보위사들의 방호진을 뚫기가 쉽지 않은 데다 신형을 날려 마차의 지붕 위로 내려서는 것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마차를 방어하는 데 다소 여유가 생기자 장거운은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보위사들이 이루고 있는 방호진의 맨 앞에 서서 여전히 지휘자로 보이던 그자와 상대를 하고 있었다. 악우진이 쉽게 상대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상대의 무위가 대단한 것 같았다.
잠시 악우진의 싸움을 지켜보던 장거운이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적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의 우두머리를 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라는 것을 떠올린 장거운은 악우진을 도와 협공을 하기 위해서 신형을 날린 것이다.
장거운이 막 악우진의 뒤에 내려설 때, 상대는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악우진의 단창을 우측으로 한 발 미끄러지며 유령처럼 피하고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악우진의 목을 베어 가고 있었다. 장거운의 눈엔 상대의 검에 악우진의 목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슈욱!
다급해진 장거운이 내던지듯이 팔을 뻗자 예리한 소성과 함께 장거운의 장창이 상대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악우진의 단창을 흘리고 회심의 일격을 펼치는 순간에 갑작스럽게 악우진의 뒤에서 튀어나온 장창이 파고든 것이다. 그대로 검을 휘두르면 악우진의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자신 역시 장창에 목이 꿰뚫려 버릴 것 같았다.
악우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한 상대가 황급히 검을 거두며 신형을 뒤로 튕기며 물러서자, 여유가 생긴 악우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누가 위기의 순간에 장창으로 자신을 구해 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악우진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자신을 도운 사람이 장거운임을 알고는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악우진이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장거운! 뭐하는 짓이냐?”
“예? 전 그냥…… 적장을 잡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대주!”
악우진이 화를 내자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장거운이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악우진의 우측으로 한 자루의 도가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안하무인격으로 말을 해 대던 젊은 장수가 도를 휘둘러 악우진의 허리를 베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챙!
악우진이 재빠르게 단창으로 상대의 도를 튕겨 내고는 즉각 상대의 가슴에 단창을 박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장수 역시 녹록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도를 내밀어 악우진의 단창을 흘리고는 재차 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그렇게 악우진과 젊은 장수가 어울리는 것을 본 장거운은 뒤로 물러났던 지휘자로 보이던 장수를 찾았다. 상대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그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 상대를 노려보던 장거운이 앞으로 쭉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상대의 가슴을 노리고 장창을 내질렀다.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좌측으로 비켜서며 장거운의 장창을 흘려버리려던 상대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장거운의 장창이 어느새 그의 신형을 따라 움직이며 여전히 가슴을 노리고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재빠르게 다시 신형을 이동시켜 장거운의 창을 피해 보려고 하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만 계속 짙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보법을 밟으며 회피하려고 하여도 장거운의 장창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거운의 장창은 가만히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을 향해 찔러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자신이 비켜서면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장거운의 장창은 자신이 어디로 피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급해진 상대는 장거운의 장창을 베어 버리기 위해 검기를 뿜어내고 있는 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거운의 팔이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뻗어졌다.
스각!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다시금 뒤로 튕겨 난 상대는 피가 솟아나는 어깨를 왼손으로 눌러 지혈을 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검으로 장창을 베어 버리려고 하는 순간 장거운의 장창이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자, 그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은 피했던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뒤에서 악우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상곤! 어, 어떻게 무상곤을 익히고 있는 것이냐?”
장거운이 고개를 돌려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악우진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와 싸우던 젊은 장수는 악우진에게 부상을 입었는지 배를 움켜잡고 저만치 물러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악우진은 그자가 부상을 입고 뒤로 물러나자 장거운과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
장거운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악우진에게 해 줄 말이 별로 없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펼친 수법은 할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늑대와 같은 짐승들을 만나면 사용하라며 지게 작대기로 가르쳐 준 수법이었다. 무상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어야 할 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거운의 속내와는 달리 장거운의 수법을 보고 악우진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그가 보기에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는 상대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반격으로 나오려 할 때 섬전처럼 상대를 뚫어 버리는 수법은 분명히 무상곤이었다.
특히 악우진이 유달리 놀라는 것은, 자신의 조부인 창왕 악호군이 무상곤의 수법에 처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난 뒤 ‘무상곤이야말로 창과 곤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의 경지’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전날 장거운이 소림의 칠십이절기 가운데 하나인 나한십팔세를 펼친 적이 있어 놀란 적이 있었지만, 무상곤은 그냥 단순한 칠십이절기가 아니었다. 흔히 소림을 대표하는 곤법으로 오호곤이나 탕마곤을 들지만, 무상곤이야말로 소림곤법의 진정한 정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부인 창왕 악호군에게 듣기로는 무상곤은 아무나 익힐 수도 없고 또한 익히기도 어려워서, 현재 소림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사대금강이나 십팔나한들도 무상곤만큼은 입문조차 못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은 장거운이 소림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무상곤을 익히고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당주님이다!”
사공한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악우진이 전방을 쳐다보자 남궁천호가 일대주인 모용현과 함께 보위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악우진이 다시 주위를 돌아보니 남궁천호의 출현에 적들이 다급하게 흩어지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악우진이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방호진을 풀고 놈들을 섬멸하라!”
악우진의 외침에 따라 보위사들과 사공한 등 청룡무사들이 방호진을 풀고는 달아나는 적들을 쫓아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장거운 역시 자신에게 당하여 어깨에 부상을 입었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수를 급히 쫓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들은 그자를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장거운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결국 장거운은 자신을 막아선 세 명의 관군들을 점혈하여 사로잡는 것에 만족한 채 돌아서야 했다.
장거운이 돌아오자마자 도착한 남궁천호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이들은 관군이 아닌가? 어찌하다 관군과 싸우게 된 것인가?”
“이들은 백가장을 습격한 자들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관군이 백가장을 습격하다니?”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악우진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백가장을 떠나기 전에도 습격이 있었습니다……중략……결국 놈들이 관군으로 위장한 것 같습니다.”
“악 대주, 자네 제정신인가? 눈빛이 닮았다는 장거운, 저 녀석 말만 믿고 관군과 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말을 뱉은 사람은 청룡일대주인 모용현이었다.
악우진이 냉랭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결국 그의 말대로 관군이 아니라 놈들이 위장한 것으로 드러났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저들이 관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비록 저들이 백가장의 검에 욕심을 부렸다고 하더라도 진짜 관군이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철없는 아이의 말을 믿고 일을 벌였단 말인가?”
“장거운이 말한 그자가 저와 동수를 이루었습니다. 게다가 그자는 검기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런 자가 관군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악우진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모용현의 말을 받았다.
모용현의 대꾸가 이어졌다.
“관군이 섬창으로 불리는 자네와 동수를 이루었다는 것은 좀 의외긴 하지만, 관군들 가운데서도 실력자가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모용 대주!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악우진이 노기 띤 음성으로 말을 뱉고 있었다. 말을 하는 모용현의 얼굴에 살짝 조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본 탓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모용현의 조소는 마치 관군의 장수 하나 처리하지 못했냐고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남궁천호가 나섰다.
“그만들 하게! 어차피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청룡당임을 알고도 공격을 한 이상 단지 적일뿐이네. 그리고 악 대주의 말마따나 수상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군. 대부분의 병사들이 창이 아니라 검을 사용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남궁천호가 널브러져 있는 관군의 시체들을 둘러보며 말을 뱉자, 모용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장수도 아닌 병사들이 창이나 도가 아닌 검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시금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포로로 잡은 자들도 있는 것 같으니 저들을 취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일단은 관도 상에 시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 모두 마차에 옮겨 싣도록 하고, 빨리 전장을 정리하도록 하게.”
남궁천호의 지시가 떨어지자 청룡무사들과 청룡당의 보위사들은 재빠르게 전장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청룡당 일행들이 덕청현에서 항주로 가는 관도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미시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일행들은 세 대의 마차를 호위하는 듯이 대형을 유지한 채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백가장에서 복면인들의 공격을 겪었음에도 그다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일행들은 백연화에게 동의를 구한 뒤 지하의 검들을 모두 마차에 옮겨 싣고 무림맹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복면인들의 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잔뜩 긴장한 채 길을 재촉했다. 특히 백가장에서 덕청현에 이르는 길은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적들이 습격을 하기에 적당한 지형이 많아 더욱 긴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행들이 우려하던 것과는 달리 덕청현에 이를 때까지도 적들이 습격을 해 오지 않자, 일행들은 다소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림맹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덕청현에서 항주까지의 관도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인 데다 완만한 평원을 따라 길이 나 있어서, 대낮에 기습을 해 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긴 장거운은 자신의 앞에서 말을 달리는 냉가혜를 쳐다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독 그녀만이 어떻게 자신의 속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어떻게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자신도 어느 정도는 내기를 뿜을 수 있게 되어 점혈이나 전음도 가능하지만, 그가 자신의 속내를 전음으로 그녀에게 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장거운은 냉가혜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바보야! 얼음귀신!’
“죽을래!”
냉가혜의 싸늘한 대꾸가 장거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역시나 그녀는 자신이 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장거운이 이번에는 마차 건너편을 보았다. 밤을 샌 탓인지 사공한이 꾸벅꾸벅 졸면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장거운은 조는 와중에도 용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사공한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부대주님! 적입니다!’
“뭐! 적이라고? 어디야?”
사공한이 화들짝 놀라서는 고함을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덕분에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악우진을 비롯한 일행들까지 모두 갑작스럽게 멈추어 서서 경계의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장거운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당연히 냉가혜와는 달리 사공한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뜻밖에도 사공한이 정확하게 자신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결국 냉가혜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 자신의 생각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었다. 만약 장거운이 자신의 이상한 전음 수법을 조절할 수 없다면, 앞으로는 속으로 욕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장거운이 의외의 사실을 알고 당황해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사공한이 장거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야, 장거운! 아까 적이라고 하지 않았냐?”
“저, 그러니까, 그게…….”
장거운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악우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뭐란 말이냐? 도대체 어디에 적이 있다는 말이냐?”
사공한이 아니라 악우진이 다그치자 장거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냥 장난삼아 해 본 말에 사공한이 놀라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일이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제가 적이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던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의 눈에 관도 저편에서 황급히 말을 달려오는 한 떼의 무리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거운이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달려오고 있는 저들이 수상해 보여서 말입니다.”
장거운의 말에 전방을 쳐다본 일행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긴장감이 어리고 있었다. 장거운의 말처럼 한 떼의 인마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일행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반대편에 나타난 무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리가 되자 굳어졌던 악우진의 얼굴이 다시 펴지고 있었다. 일행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무리의 선두에는 갑옷을 착용한 장수들과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부대임을 나타내는 군기를 곧추 세워 든 기수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나타난 무리가 백가장의 검을 노리는 흉수들이 아니라 도지휘사사의 병사들임을 알고는 크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쪽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 주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곧바로 의아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병사들이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일행의 앞에 멈추어 선 것이다.
청룡당 일행들의 앞을 막아선 장수들 중에 가장 젊어 보이는 장수가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앞으로 나서서 소리쳤다.
“책임자가 누구인가?”
“내가 책임자인데 왜 그러시오?”
말을 하며 나선 사람은 신규진이었다. 실질적으로 일행을 지휘하는 사람은 악우진이었지만 관군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아무래도 추관인 그가 나서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악우진이 전음으로 그에게 지시를 한 것이다.
젊은 장수의 말이 이어졌다.
“행색을 보아하니 항주부의 추관인 모양이군.”
“그렇소, 항주부의 추관인 신규진이라고 하오. 무슨 일로 그러시오?”
말을 하는 신규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착용하고 있는 갑옷으로 봐서는 백호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상대가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며 계속 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호가 품계상으로는 정칠품인 자신보다 위인 정육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향시에 급제를 하고 품계를 받은 정식 문관이었다. 항주부의 추관이 군관인 백호에게 하대를 받을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장수의 하대는 계속 이어졌다.
“지금 백가장에서 오는 길인가?”
“그렇소만, 그것을 왜 묻는 것이오?”
신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을 하였지만, 젊은 장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저 마차에 실린 것이 백가장의 검인가?”
“그러니까 왜 백가장의 일에 도지휘사사에서 관심을 가지냔 말이오?”
젊은 장수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화가 난 신규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소 거칠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젊은 장수는 신규진을 잠시 노려보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말을 돌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넬 뿐이었다. 철저히 신규진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와 이야기를 마친 젊은 장수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지금부터 백가장에서 나온 검들은 모두 도지휘사사에서 징발하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도지휘사사에서 무슨 권리로 백가장의 검들을 가져간단 말이오?”
젊은 장수의 일방적인 선언에 신규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펄쩍 뛰며 소리를 쳤다.
냉랭한 대꾸가 젊은 장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본시 주인 없는 사유재산은 국고로 환수하는 것이 법이다. 그러니 백가장에서 나온 검들을 도지휘사사에서 징발을 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인 것이다.”
“그냥 듣고 있으려니 역겹군. 누가 백가장의 검이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하던가?”
한쪽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악우진이 앞으로 나서며 젊은 장수에게 말을 뱉었다.
젊은 장수가 날카롭게 안광을 빛내며 말을 뱉었다.
“너는 누구냐?”
“갈! 말조심하라! 나는 무림맹 청룡당 이대주인 섬창 악우진이다.”
“뭣이! 감히 무사 나부랭이가 황상폐하의 어명을 받드는 본관에게 말조심하라고 했느냐?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젊은 장수는 악우진이 직접적으로 신분을 밝혔음에도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악우진과 청룡당 일행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일개 도지휘사사의 백호가 청룡당을 너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악우진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가문인 산동악가는 전통적으로 군부의 요직을 차지한 많은 무장들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 역시도 지금 당장에라도 출사를 한다면 정천호 이상의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개 백호 따위가 자신에게 이놈 저놈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악우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당장에라도 출수를 하여 버릇없는 젊은 장수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군부의 장수인 것이다. 그로서는 말안장에 걸려 있는 자신의 단창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분노를 삭여야 했다.
악우진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단창을 만지작거리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뱉었다.
“우 백호 물러서라!”
“존명!”
우 백호라고 불린 젊은 장수가 황급히 읍을 하며 뒤로 물러서자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청룡당의 이대주라고 하였나?”
“그렇다.”
“흠, 그런데 백가장의 검에 주인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설마 무림맹이 검의 주인이라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이다.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으니 당연히 백가장의 검들은 그들의 소유이다.”
악우진의 냉랭한 대꾸에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다고? 그들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백가 남매가 바로 뒤쪽의 마차에 있다고 대답을 하려던 악우진의 귀에 장거운의 다급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대주님! 저자는 조금 전 백가장에서 본 자입니다.”
“무슨 소리냐? 도지휘사사의 장수가 백가장을 습격한 자란 말이냐?”
“틀림없습니다. 지하 입구에서 저와 싸웠던 자의 눈빛이 분명합니다.”
장거운이 확신에 찬 어조로 전음을 보내자, 악우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장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복색은 관군이 분명했다. 그자의 뒤에 눈을 빛내고 서 있는 오십여 명의 병사들 역시 관군의 복장이 틀림없어 보였다.
“장거운! 분명히 보아라. 자칫하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저자가 습격한 무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느냐?”
다시금 악우진의 전음이 들려오자 장거운은 눈을 빛내며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절정의 검술을 보이며 지하 통로 입구에서 자신과 싸웠던 그자의 눈빛이 틀림없었다.
장거운이 다시 악우진에게 전음을 날렸다.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관군이라지만 대주님과 저희들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악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거운이 확신을 보이고 있는 데다, 생각해 보니 장거운의 말대로 관군의 태도가 수상했다. 아무리 싸가지가 없는 관군이라고 하지만, 일개 백호가 추관인 신규진을 벌레 보듯이 하고 자신의 신분을 알고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우진이 결심을 한 듯 차갑게 눈을 빛내며 일행들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모두 준비를 하라! 장거운과 냉가혜는 백가 남매를 보호하고, 부대주와 자명은 검을 실은 마차를 지켜라. 공격이 시작되면 전속으로 돌파한다.”
“대주님! 무슨 소리입니까? 상대는 관군이라고요.”
사공한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지만, 악우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소. 그러니 길을 비키시오!”
“흠, 백가장의 후예가 살아 있다면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으며 슬그머니 손을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집으로 가져갔다.
“지금!”
짤막한 외침과 함께 악우진이 전광석화처럼 단창을 내질렀다.
챙!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는 악우진의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가볍게 검으로 악우진의 창을 흘려버리며 오히려 반격을 해 왔다. 그에 맞춰서 관군들 역시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신형을 날려 청룡당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진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이미 악우진의 명을 받은 청룡당 일행들도 관군들의 공격에 차분하게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신규진과 포쾌들만이 다급하게 마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로서는 관군과 청룡당이 싸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가 남매가 타고 있는 마차의 지붕 위에 뛰어올라 달려드는 두 명의 관군들을 나한각과 관음십팔족으로 날려 버린 장거운이 반보 옆으로 비켜나며,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파고드는 장창을 십이금룡수로 낚아채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버리자 장창이 살아 있는 잉어처럼 펄떡거리며 관군의 손에서 빠져 버렸다.
장거운은 마차를 방어하기에는 자신이 즐겨 펼치는 백타보다는 장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확실히 그의 생각이 맞았다. 장거운은 곧바로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드는 것을 느끼고는 창대의 가운데를 잡고 크게 회전을 시켰다.
웅!
장거운의 손에 들린 장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회전하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관군들의 검과 장창을 모조리 튕겨 내고 있었다. 장창을 돌려 일격에 다섯 명의 관군들을 튕겨 낸 장거운이 순간적으로 장창을 멈추고 앞쪽으로 급격하게 손을 내뻗자 날아가던 장창이 달려들던 관군의 얼굴 바로 앞에서 약간 밑으로 떨어지며 뾰족하게 날이 선 창두가 관군의 목젖으로 파고들었다.
“크악!”
신음 소리와 함께 목에 창두가 박혀 버린 관군이 창끝에 매달려 대롱거리자 장거운이 손목을 아래로 젖히면서 창을 뽑아내고는 다시 손목을 튕겨 장창의 자루 끝으로 뒤에서 달려드는 자의 아랫배를 찍어 버렸다.
순식간에 두 명의 적을 해치운 장거운은 마차의 우측 편에서 싸우고 있는 냉가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검을 쓰는 두 명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특히 순간적으로 사각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암향표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챙!
냉가혜와 싸우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그녀의 검에 막혀 튕겨 나온 검을 재빨리 되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장창을 잡고 있는 장거운의 손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전광석화처럼 앞으로 뻗어졌다. 섬전처럼 파고든 장거운의 장창이 냉가혜를 향해 덤벼들던 상대의 어깨에 피 구멍을 내 버렸다.
“크억!”
“컥!”
두 마디의 신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처음의 신음은 장거운의 장창에 어깨가 꿰뚫린 자의 것이었고, 두 번째의 신음은 동료가 당한 것을 알고 잠시 흔들린 사이 냉가혜의 검에 가슴이 갈라진 자의 것이었다.
신형을 돌리며 검을 뽑아낸 냉가혜의 눈은 이채를 띤 채 장거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거운이 권각술에만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장창까지 잘 다루자 상당히 놀란 것이다.
실실거리고 있는 장거운을 쳐다보던 냉가혜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뒤!”
장창을 꼬나 쥔 관군 하나가 장거운의 등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뒤쪽의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모양인지, 장거운은 별반 놀란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좌측으로 일 보 미끄러지며 장창을 뒤로 내질렀다.
쉬웅!
장거운의 뒤에서 달려들던 자는 장거운의 장창이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자 급작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마차의 한복판을 향해 장창을 내질러 버렸다.
콰직!
관군의 장창이 마차의 벽면을 사정없이 꿰뚫으며 박혀 버렸다. 상대는 처음부터 마차를 노렸던 것이다.
상대의 노림수에 당한 것을 알고는 당황한 장거운은 재빨리 신형을 날려 장창을 마차에 박아 넣은 관군을 관음십팔족으로 날려 버리고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쉭!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시퍼런 검기를 머금은 검이 미간을 찔러 오자 장거운이 급격하게 머리를 틀어 가까스로 검을 피했다. 그러나 장거운의 재빠른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밑머리가 한 움큼 잘려 나풀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으로서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검을 피한 장거운은 다급하게 외쳤다.
“나요! 괜찮아요?”
“예, 근데 괜찮으세요?”
백연화는 방금 자신이 공격한 사람이 장거운임을 알고는 놀란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다시 들이밀며 말을 건넸다.
“예, 난 괜찮소. 창 공격에 다쳤나 해서 말이오.”
장거운이 말을 하면서 빠르게 마차 안을 살펴보니 백연호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고, 백연화는 검을 뽑아 들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앞에는 잘려 나간 창대가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창대가 마차 안쪽으로 파고드는 순간 그녀가 검으로 잘라 버린 모양이었다.
마차 안을 들여다본 장거운은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파고든 창대를 잘라 버린 솜씨나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하던 그녀의 검을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 그녀의 무공이 높은 것 같아 장거운은 적잖게 안심이 되었다.
“보위사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방호진을 펼쳐라!”
사공한의 고함 소리에 장거운이 다시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서자, 그곳에는 냉가혜가 서 있었다. 앞의 마차에도 사공한과 유자명이 지붕 위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적들이 방호진을 뛰어넘어 마차로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들 마차의 지붕으로 올라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마차를 중심으로 방어진이 갖추어지자 적들은 좀처럼 마차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보위사들의 방호진을 뚫기가 쉽지 않은 데다 신형을 날려 마차의 지붕 위로 내려서는 것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마차를 방어하는 데 다소 여유가 생기자 장거운은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보위사들이 이루고 있는 방호진의 맨 앞에 서서 여전히 지휘자로 보이던 그자와 상대를 하고 있었다. 악우진이 쉽게 상대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상대의 무위가 대단한 것 같았다.
잠시 악우진의 싸움을 지켜보던 장거운이 그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적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의 우두머리를 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라는 것을 떠올린 장거운은 악우진을 도와 협공을 하기 위해서 신형을 날린 것이다.
장거운이 막 악우진의 뒤에 내려설 때, 상대는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악우진의 단창을 우측으로 한 발 미끄러지며 유령처럼 피하고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악우진의 목을 베어 가고 있었다. 장거운의 눈엔 상대의 검에 악우진의 목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슈욱!
다급해진 장거운이 내던지듯이 팔을 뻗자 예리한 소성과 함께 장거운의 장창이 상대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악우진의 단창을 흘리고 회심의 일격을 펼치는 순간에 갑작스럽게 악우진의 뒤에서 튀어나온 장창이 파고든 것이다. 그대로 검을 휘두르면 악우진의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자신 역시 장창에 목이 꿰뚫려 버릴 것 같았다.
악우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한 상대가 황급히 검을 거두며 신형을 뒤로 튕기며 물러서자, 여유가 생긴 악우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누가 위기의 순간에 장창으로 자신을 구해 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악우진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자신을 도운 사람이 장거운임을 알고는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악우진이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장거운! 뭐하는 짓이냐?”
“예? 전 그냥…… 적장을 잡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대주!”
악우진이 화를 내자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장거운이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악우진의 우측으로 한 자루의 도가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안하무인격으로 말을 해 대던 젊은 장수가 도를 휘둘러 악우진의 허리를 베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챙!
악우진이 재빠르게 단창으로 상대의 도를 튕겨 내고는 즉각 상대의 가슴에 단창을 박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장수 역시 녹록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도를 내밀어 악우진의 단창을 흘리고는 재차 공격을 가해 오고 있었다.
그렇게 악우진과 젊은 장수가 어울리는 것을 본 장거운은 뒤로 물러났던 지휘자로 보이던 장수를 찾았다. 상대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그도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 상대를 노려보던 장거운이 앞으로 쭉 미끄러지듯 다가서며 상대의 가슴을 노리고 장창을 내질렀다.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좌측으로 비켜서며 장거운의 장창을 흘려버리려던 상대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장거운의 장창이 어느새 그의 신형을 따라 움직이며 여전히 가슴을 노리고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재빠르게 다시 신형을 이동시켜 장거운의 창을 피해 보려고 하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만 계속 짙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보법을 밟으며 회피하려고 하여도 장거운의 장창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거운의 장창은 가만히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을 향해 찔러 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자신이 비켜서면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장거운의 장창은 자신이 어디로 피하더라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급해진 상대는 장거운의 장창을 베어 버리기 위해 검기를 뿜어내고 있는 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거운의 팔이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뻗어졌다.
스각!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다시금 뒤로 튕겨 난 상대는 피가 솟아나는 어깨를 왼손으로 눌러 지혈을 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장거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검으로 장창을 베어 버리려고 하는 순간 장거운의 장창이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자, 그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은 피했던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뒤에서 악우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상곤! 어, 어떻게 무상곤을 익히고 있는 것이냐?”
장거운이 고개를 돌려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악우진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와 싸우던 젊은 장수는 악우진에게 부상을 입었는지 배를 움켜잡고 저만치 물러나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악우진은 그자가 부상을 입고 뒤로 물러나자 장거운과 지휘자로 보이는 장수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
장거운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악우진에게 해 줄 말이 별로 없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펼친 수법은 할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늑대와 같은 짐승들을 만나면 사용하라며 지게 작대기로 가르쳐 준 수법이었다. 무상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어야 할 무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거운의 속내와는 달리 장거운의 수법을 보고 악우진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그가 보기에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는 상대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반격으로 나오려 할 때 섬전처럼 상대를 뚫어 버리는 수법은 분명히 무상곤이었다.
특히 악우진이 유달리 놀라는 것은, 자신의 조부인 창왕 악호군이 무상곤의 수법에 처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난 뒤 ‘무상곤이야말로 창과 곤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의 경지’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전날 장거운이 소림의 칠십이절기 가운데 하나인 나한십팔세를 펼친 적이 있어 놀란 적이 있었지만, 무상곤은 그냥 단순한 칠십이절기가 아니었다. 흔히 소림을 대표하는 곤법으로 오호곤이나 탕마곤을 들지만, 무상곤이야말로 소림곤법의 진정한 정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부인 창왕 악호군에게 듣기로는 무상곤은 아무나 익힐 수도 없고 또한 익히기도 어려워서, 현재 소림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사대금강이나 십팔나한들도 무상곤만큼은 입문조차 못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은 장거운이 소림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무상곤을 익히고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당주님이다!”
사공한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악우진이 전방을 쳐다보자 남궁천호가 일대주인 모용현과 함께 보위사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악우진이 다시 주위를 돌아보니 남궁천호의 출현에 적들이 다급하게 흩어지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악우진이 다급하게 고함을 쳤다.
“방호진을 풀고 놈들을 섬멸하라!”
악우진의 외침에 따라 보위사들과 사공한 등 청룡무사들이 방호진을 풀고는 달아나는 적들을 쫓아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장거운 역시 자신에게 당하여 어깨에 부상을 입었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수를 급히 쫓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들은 그자를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장거운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결국 장거운은 자신을 막아선 세 명의 관군들을 점혈하여 사로잡는 것에 만족한 채 돌아서야 했다.
장거운이 돌아오자마자 도착한 남궁천호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이들은 관군이 아닌가? 어찌하다 관군과 싸우게 된 것인가?”
“이들은 백가장을 습격한 자들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관군이 백가장을 습격하다니?”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고 있었다.
악우진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백가장을 떠나기 전에도 습격이 있었습니다……중략……결국 놈들이 관군으로 위장한 것 같습니다.”
“악 대주, 자네 제정신인가? 눈빛이 닮았다는 장거운, 저 녀석 말만 믿고 관군과 싸움을 벌였단 말인가?”
말을 뱉은 사람은 청룡일대주인 모용현이었다.
악우진이 냉랭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결국 그의 말대로 관군이 아니라 놈들이 위장한 것으로 드러났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저들이 관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비록 저들이 백가장의 검에 욕심을 부렸다고 하더라도 진짜 관군이라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철없는 아이의 말을 믿고 일을 벌였단 말인가?”
“장거운이 말한 그자가 저와 동수를 이루었습니다. 게다가 그자는 검기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런 자가 관군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악우진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모용현의 말을 받았다.
모용현의 대꾸가 이어졌다.
“관군이 섬창으로 불리는 자네와 동수를 이루었다는 것은 좀 의외긴 하지만, 관군들 가운데서도 실력자가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모용 대주!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악우진이 노기 띤 음성으로 말을 뱉고 있었다. 말을 하는 모용현의 얼굴에 살짝 조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본 탓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모용현의 조소는 마치 관군의 장수 하나 처리하지 못했냐고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남궁천호가 나섰다.
“그만들 하게! 어차피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청룡당임을 알고도 공격을 한 이상 단지 적일뿐이네. 그리고 악 대주의 말마따나 수상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군. 대부분의 병사들이 창이 아니라 검을 사용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남궁천호가 널브러져 있는 관군의 시체들을 둘러보며 말을 뱉자, 모용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장수도 아닌 병사들이 창이나 도가 아닌 검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시금 남궁천호의 말이 이어졌다.
“포로로 잡은 자들도 있는 것 같으니 저들을 취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일단은 관도 상에 시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으니 모두 마차에 옮겨 싣도록 하고, 빨리 전장을 정리하도록 하게.”
남궁천호의 지시가 떨어지자 청룡무사들과 청룡당의 보위사들은 재빠르게 전장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