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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제5장 마운곡(磨雲谷)
잠시 후 전장 정리가 끝나자 청룡당 일행들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남궁천호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추관인 신규진, 백가 남매 등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용현이 남궁천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당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음,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그리고 무림맹까지 인솔은 자네가 하게.”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좀 더 알아보고 가야 할 것 같네. 그리고 악 대주와 거운이는 나와 같이 갈 테니 맹에 도착하는 즉시 순찰당주에게 관의 움직임을 살펴보라고 전해 주게.”
“혹시 흉수들을 추적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 놈들이 달아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고 보니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저 황칠이도 데려가면 되겠군.”
모용현의 물음에 남궁천호는 담담하게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황칠을 쳐다보았다.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경황이 없어 추적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적들을 추적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모용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악 대주의 말대로라면 놈들은 적어도 서른 명 이상입니다. 오히려 놈들의 매복에 빠져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모용현의 말에 남궁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달아난 자들이 영리한 놈들이라면, 추적을 예상하고 매복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이대로 추적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놈들이 제법 실력들이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추적을 하기가 힘들 것 같지 않은가? 세 사람이면 몸을 빼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맹까지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게.”
“그게……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모용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그 또한 지금 쫓아가지 않으면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는 남궁천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현이 일행들을 인솔하기 위해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냉가혜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당주님! 저도 같이 가겠어요.”
“한 명 정도는 더 가는 것도 괜찮겠지.”
남궁천호는 잠시 냉가혜를 쳐다보다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남궁천호가 냉가혜를 보며 미소를 지은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그녀가 적극적으로 자원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남궁천호는 청룡무사가 된 이후에 그녀의 냉정한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모용현이 청룡당 일행들을 인솔하고 무림맹을 향해 떠나고 나자 추적조로 남은 장거운 등은 즉시 황칠을 데리고 놈들이 달아난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주한 흔적은 덕청현으로 이어져 있었다.
장거운 일행이 덕청현에 도착하여 탐문을 하자 놈들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을 상당히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추적을 시작한 것은 좀 늦었지만, 다행히 밝은 대낮이었고 달아난 자들의 복장이 관군의 복장이어서 생각보다 목격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달아난 자들이 백가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동을 하고 있는 장거운 일행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덕청현에서 백가장에 이르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지라 놈들이 모용현의 말대로 매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백가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려하던 매복은 없었다. 문제는 백가장이었다. 매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놈들이 이곳까지는 고의로 흔적을 남겨 유인을 했을 가능성도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거운 일행은 내심으로는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만약 놈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한두 명의 꼬리가 붙을 것으로 생각하고 적은 수의 매복을 남겨 두었다면, 오히려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백가장 안으로 들어선 장거운 일행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백가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장거운 일행을 힘이 빠지게 하는 것은 놈들의 흔적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백가장에서부터는 막간산을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놈들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백가장으로 들어선 뒤 한동안 화재로 폐허가 되어 버린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남궁천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처참하군. 제법 운치가 있게 꾸며진 곳이었는데.”
“백가장 식솔들의 시체는 저곳에 모두 묻었습니다.”
악우진이 백연화 등이 시체들을 묻은 곳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그런가? 정말이지 끔찍하군. 참으로 인자하고 대인의 풍모를 지녔던 분이셨는데, 어쩌다 이 지경을 당했는지.”
“죽은 백 장주와는 아는 사이였습니까?”
“본가에서도 이곳에서 검을 많이 구입했지.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몇 번 왔다가 뵌 적이 있네.”
악우진의 물음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본가인 남궁세가 역시 검의 명가로 손꼽히는 만큼 검장지가로 유명한 이곳 백가장과는 거래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궁천호가 옛일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폐허가 된 백가장의 모습을 둘러보는 사이, 검고로 통하는 지하 통로를 살펴보기 위해 입구 쪽으로 다가간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기 전에 화재에 타다 남은 서까래 등으로 촘촘하게 막아 놓았던 입구가 군데군데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운은 즉시 입구를 막고 있는 것들을 모두 걷어 내고는 천천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실로 들어선 장거운이 통로를 지나 검들이 보관되어 있던 석실까지 살펴보았으나 지하는 텅 비어 있을 뿐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위로 올라온 장거운이 남궁천호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지하 검고의 출입구도 누군가가 건드렸어요. 지하실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분명히 놈들이 이곳에 왔다 간 것 같아요.”
장거운의 말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곳까지 온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부터 추적을 하는 것이 문제구나. 놈들이 산 쪽으로 달아났다면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데, 날까지 어두워지니 말이다.”
남궁천호의 중얼거림에 장거운과 악우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냉가혜만이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놈들을 추적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냉가혜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냄새! 적어도 삼십 명 정도가 달아났으니 놈들이 산 쪽으로 달아났다면 시간이 좀 지났지만 아직은 사람의 체취가 많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렇군, 냄새를 따라가면 되겠군.”
“근데 이 녀석이 그자들의 냄새를 알 수 있을지…….”
악우진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황칠을 보며 중얼거리자 장거운이 황칠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황칠아, 사람 냄새 알지? 짐승 말고 사람 냄새 말이야. 너도 사람들 많이 물어 봤으니까 잘 알지?”
끄으응!
장거운의 말에 황칠은 납작하게 엎드려선 고개를 돌리며 끙끙대고만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 이제부터는 사람의 냄새를 쫓아가는 거다. 우리 말고 더럽고 고약한 다른 사람들 냄새 말이다. 잘할 수 있지?”
웡! 웡!
황칠이 씩씩하게 짖어 대고는 잠시 코를 킁킁대며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황칠의 뒤를 따라 이제는 완연하게 어둠에 잠긴 막간산의 산길을 한 시진가량 달려온 장거운이 갑자기 길옆으로 신형을 날리며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장거운을 따라 남궁천호 등도 재빨리 신형을 감추고 있었다.
곧바로 앞쪽에서 황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늑대야?”
“생긴 건 사자 같은데?”
“지랄하네! 사자가 왜 여기 있어?”
“그런가? 그럼 뭐지?”
“흠, 사자를 닮기 했는데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그냥 개새끼네!”
“뭐? 개새끼라고? 이야, 이거 웬 재수야?”
“왜? 잡아먹자고?”
“그럼 안 먹을 거야?”
“당기긴 하는데, 조장이 알아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음? 날도 추워지는데 몸보신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그냥 삶고 나서 조장은 뒷다리나 하나 먹으라고 부르면 되지.”
“하긴, 날 잡아 잡수시라고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냥 보내긴 그렇군. 흐흐! 이리 온, 개새끼야.”
크르릉!
말을 주고받던 사내 둘이 다가서자 황칠은 몸을 낮추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숲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은 황칠이 사내들에게 잡힐 것 같아서 마음을 졸였지만, 뛰쳐나가거나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적의 정체나 규모를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거운으로서는 단지 황칠이 재빠르게 도망가기만을 바라며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황칠아! 도망가!’
간절한 장거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황칠이 갑자기 몸을 돌려 후닥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사내가 재빨리 몸을 날려 뒤를 쫓았지만, 황칠이 용케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고 냅다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의 귀로 남궁천호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앞으로 이동해!”
장거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바로 옆으로 남궁천호와 악우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장거운은 냉가혜와 함께 재빨리 그들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앞에 드러난 것은 굴의 입구와도 같은 좁은 통로였는데, 그곳에는 횃불이 두 개 밝혀져 있었다. 아마도 황칠을 쫓아간 두 사내는 그곳에서 번초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행이 입구를 통과하여 보니 그곳에는 제법 널따란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나타난 의외의 풍경에 잠시 멈칫하던 일행들은 재빨리 우측의 키가 작은 관목 숲으로 뛰어들어서는 몸을 낮추고 분지 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지는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부터 관목과 갈대로 이루어진 언덕길을 따라 오십 장 정도 내려간 지점에서부터 평평한 지형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곳에는 크고 작은 군막들이 십여 채가 세워져 있었다. 군막의 주변에 곳곳에 불이 피워져 있고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우진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것은 군막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군기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럼 진짜 관군들이란 말인가?”
남궁천호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듣고 있던 냉가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낮에 맞닥뜨린 자들은 분명히 관군이 아니었어요. 관군들이 청룡당을 상대로 싸울 무위를 지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요. 특히 저와 싸운 그자는 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절정고수였어요.”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냉가혜의 말을 받았다.
다시 남궁천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악 대주, 이곳의 이름을 아는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백가장에서 온 거리를 봐서는 마운곡이란 곳인 것 같습니다.”
남궁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뱉었다.
“흠, 마운곡이라……. 관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어쨌든 돌아가서 도지휘사사에 병력의 이동을 확인해 봐야겠다.”
“이대로 돌아가잔 말이에요?”
장거운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악우진의 대꾸가 이어졌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지금 움직이는 자들만 해도 수십 명이다. 게다가 군막 안에 머물고 있을 자들까지 염두에 둔다면 어림잡아 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저들을 우리 넷이서 치기라도 하자는 말이냐?”
“그래도 관도에서 우리를 습격한 놈들이 맞는지는 확인을 해 봐야 하잖아요.”
그러자 남궁천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서자. 지금 이곳에 군막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만, 맹으로 돌아가서 확인을 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다.”
“그래야 합니다. 관도에서 싸운 것은 어떻게든 무마시킬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진짜 관군이라면 맹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악우진이 동조를 하고 나서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달아난 자들이 매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관군이 아니라 도적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추적을 생각해서 매복은 아니라도 감시자라도 남겨 두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매복이나 감시자가 없었다는 것은 맹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어서 대응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남궁천호는 쉽게 처리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뱉었다.
“그러니 더욱 확인을 해야 하잖아요. 확실한 증거를 잡으면 저들이 진짜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맹의 입장에서는 저들을 칠 명분이 생기는 것이잖아요.”
“네 말은 진짜 관군이 백가장을 습격하였을 수도 있다는 말이냐?”
장거운의 말에 남궁천호가 눈에 이채를 띠며 묻자 장거운의 대답이 이어졌다.
“물론 저들의 무위를 생각하면 진짜 관군은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왠지 저들이 관군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럴 수…….”
장거운의 말에 대꾸를 하던 남궁천호가 급히 입을 닫고는 몸을 낮추었다. 황칠을 잡으러 갔던 자들이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이 시발! 개새끼가 더럽게 빠르네!”
“쩝! 그러게. 시발, 번초만 아니었어도 그놈의 개새끼를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먹는 건데. 젠장!”
황칠을 놓쳤는지 두 사내는 욕설을 해 대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도망간 황칠을 걱정하던 장거운은 두 사내의 말에 다소 안심을 하며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두 사내들 역시 관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일반적인 관군들과는 달리 창이 아닌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잠시 두 사내를 살펴보던 장거운이 갑자기 신형을 날려 번초를 서는 두 사내의 뒤쪽에 신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거운의 귓속으로 다급한 전음들이 날아들었다.
“거운!”
“뭐하는 짓이냐?”
“멍충이! 너 미쳤어?”
장거운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남궁천호에게 전음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이들을 유인할 테니 먼저 빠져나가세요. 곧 따라 나갈게요. 제가 몸 하난 튼튼하잖아요.”
창! 창!
“누구냐?”
장거운의 기척을 발견한 두 사내가 검을 뽑아 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장거운이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무림맹 청룡당의 청룡무사 장거운이오. 지금 수상한 무리들을 쫓고 있었소.”
“청룡무사…….”
두 사내는 장거운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의 말이 이어졌다.
“흠, 관군으로 보이는데 소속이 어디시오?”
“우, 우리는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흑호군이다.”
“흑호군? 처음 듣는 부대인데, 지휘관이 어느 분이시오?”
“지, 지휘관은…….”
“닥쳐라! 감히 군의 기밀을 묻는 것이냐?”
장거운의 물음에 우측에 선 사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좌측에 선 사내가 황급히 호통을 질렀다.
장거운이 입가에 살짝 조소를 띠며 다시 말을 건넸다.
“군의 기밀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당신들 지휘관을 좀 만나 봐야겠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차피 내가 이곳에 들어온 사실을 알려야 할 것 아니오?”
장거운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고는 군막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두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급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장거운과 번초를 서던 사내들이 저 아래로 내려가자, 숨어 있던 남궁천호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멀어져 가는 장거운의 등을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장거운을 쳐다보던 냉가혜가 갑자기 신형을 날리려 하자 남궁천호가 그녀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일을 망치고 싶은 것이냐? 거운이는 제 놈 말대로 남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으니 몸 하나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지켜보도록 하자.”
말을 마친 남궁천호는 분지의 군막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팔짱을 끼고 서서 아래로 내려가는 장거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가혜와 악우진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서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무슨 일이냐?”
장거운과 두 사내가 군막이 있는 곳 근처에 이르자 갑주를 갖춰 입은 팔자수염을 기른 뚱뚱한 체구의 장수 하나가 매섭게 소리를 쳤다.
장거운의 왼쪽 뒤에 서 있던 자가 읍을 하며 말을 건넸다.
“수상한 자가 기웃거리기에 잡아 왔습니다.”
“나는 수상한 자가 아니라 청룡무사인 장거운이오. 오늘 낮에 관군으로 위장한 도적 떼가 본 청룡당을 습격하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소. 나는 바로 그 달아난 놈들을 쫓고 있는 중이오. 혹시 근방에서 수상한 자들을 보지는 못하였소?”
말을 하면서도 장거운의 눈은 갑주를 갖추고 있는 자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장거운의 말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팔자수염을 기른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훗, 청룡무사? 우리는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흑호군으로 이곳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모종의 임무라……. 그 임무가 무엇이오?”
장거운은 다시 말을 건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장거운의 출현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군사들 가운데, 낮에 관도에서 본 자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낯익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다시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어이! 애송이 청룡무사 나리!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꺼지시지!”
“말이 심하군. 당신 직책과 이름이 뭐요? 뒤룩뒤룩 살이 쪄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한다는 건지…….”
창!
“이 자식이! 뒈지고 싶으냐?”
장거운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중얼거리자 상대는 격분하여 검을 뽑아 들고 호통을 질렀다.
장거운이 처음 자신을 보고는 그냥 가라고 말하는 장수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자들은 진짜 관군이라는 것이다. 관군으로 위장한 도적의 무리라면, 그냥 자신을 베어 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관군이라면 이들은 자신이 청룡무사라는 사실을 알기에 쉽게 검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장거운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뚱뚱한 체격의 장수도 자신의 말에 격분을 하여 검을 뽑기는 하였지만 노려만 볼 뿐 쉽게 검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거운은 자신이 찾고 있는 지휘관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좀 더 도발을 해서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거운이 다시 거칠게 말을 뱉었다.
“돼지 같은 놈이 생긴 것처럼 겁이 많군.”
“이 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대는 검을 휘둘러 장거운의 팔을 베어 오고 있었다. 팔 하나쯤은 날려 버릴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장거운은 상대의 검이 막 자신의 팔을 베려는 순간, 발을 박차며 전광석화처럼 파고들면서 상대의 어깨를 짚고 뛰어올라 머리를 타고 넘어가서는 뒷발로 슬쩍 상대의 등을 밀어 버렸다. 다람쥐 같은 재빠른 장거운의 공격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밀려난 뚱뚱한 체구의 장수는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비아냥거리는 말을 뱉었다.
“돼지 같은 놈, 확실히 느려 터졌군!”
“크왁!”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괴성을 터뜨리며 폭풍처럼 검을 휘둘러 왔다.
상대의 기세가 너무 흉흉하여 장거운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다급하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물러서면서 가까스로 검을 피하고 있던 장거운은 군막들 중간에 이르자, 가장 큰 군막을 흘깃 쳐다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군막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은 소란의 와중에도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만 볼 뿐 군막의 입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군막 안에는 이자들의 지휘관이 있음이 분명했다.
연신 뒤로 물러서던 장거운이 돌부리에 걸렸는지 살짝 비틀거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장거운의 목을 베어 갔다. 그러나 장거운은 두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볼 뿐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단단한 신체를 믿고 좀 더 크게 소란을 피워 볼 심산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의 검이 장거운의 목을 베려는 순간 재빨리 손목을 돌려 검면으로 장거운의 뺨을 두들겨 버렸다. 역시 장거운의 생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도 차마 청룡무사를 죽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컥!”
장거운이 신음을 내뱉으며 붕 떠서 이 장 가까이 날아가 제일 큰 군막의 입구에 처박혔다.
장거운이 일부러 당한 척하며 노린 것은 바로 그 군막 안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막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막아서는 바람에 계획대로 군막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다만 입구에 쓰러진 장거운은 안에서 한 명이 휘장을 걷고 나오는 틈을 이용하여 살짝 안을 엿볼 수는 있었다.
군막 안에는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두 명은 바로 장거운이 찾던, 바로 그 악우진에게 부상을 입은 젊은 장수와 자신에게 당해 어깨에 상처를 입은 지휘관으로 보이던 장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을 보는 순간 장거운은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장거운의 표정을 얼어붙게 만든 자는 다름 아닌 하가장에서 보았던 벽파쌍검 적우기였던 것이다.
“뭐하는 짓들이냐?”
가장 큰 군막에서 휘장을 걷고 나왔던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버럭 호통을 치자,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청룡무사라고 하는 자가 찾아와서…….”
“청룡무사…….”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는 성난 표정으로 말을 뱉다가 입을 닫고선 장거운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안의 누군가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분지의 입구에 서 있는 남궁천호 등의 그림자를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 장거운을 향했다.
“끙!”
장거운이 신음을 흘리며 힘들게 일어나자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불쑥 목패를 하나 내밀었다. 목패는 그가 정천호의 신분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목패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옥새가 새겨져 있어, 제아무리 미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위조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아, 위지웅 장군이시군요.”
“알았으면 당장 돌아가라!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킨다면, 황상폐하의 어명을 받고 있는 군영을 어지럽힌 죄를 물어 즉결에 처하겠다.”
“흠, 뜻이 그러시다면 가야지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장거운은 순순히 물러나고 있었다. 이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내었기 때문에 장거운으로서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분지로 통하는 동굴 입구로 올라오자 남궁천호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본 장거운이 눈에 이채를 띠고는 고개를 돌려 아래의 군막을 쳐다보았다. 위지웅이라고 자신을 밝혔던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여전히 그와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장거운은 위지웅이라는 자가 자신을 그냥 보내 준 것은 남궁천호 등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자는 자신을 해치면 청룡당이 공격할 빌미를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놓아준 것이었다.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거운이 다가오자 악우진의 입에서 노기를 띤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거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대주님. 일단 나가요.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자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여기서 나가도록 하지. 어째 네 녀석은 갈수록 교활해지는 것 같구나.”
남궁천호는 상대가 진짜 관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험을 한 장거운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궁천호의 말에 장거운은 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예? 쩝! 교활하다는 말은 좀 그런데…….”
“멍충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가.”
장거운은 냉가혜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웡! 웡!
일행이 산을 내려와 잠시 쉬어 가기 위해 백가장에 들어서자 황칠이 반갑게 짖으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장거운이 황칠을 끌어안으며 말을 뱉었다.
“이 녀석,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잘했다.”
월월월!
장거운과 냉가혜가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황칠도 신이 나는지 한껏 짖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반갑게 황칠과 해후를 하는 장거운과 냉가혜와는 달리 남궁천호와 악우진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분지에 있던 자들 중에 정천호의 패를 지닌 진짜 장수가 있었으며, 하가장의 수하인 벽파쌍검 적우기가 습격한 자들과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냉가혜와 함께 황칠을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장거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당주님, 장거운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정체라니? 거운이야, 그냥 장거운이지 무슨 정체가 있다는 말인가?”
남궁천호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악우진의 말을 이었다.
“혹시 소림의 무상곤법을 아십니까?”
“무상곤? 소림곤법의 정화라고 하는 곤법 말인가?”
“예. 낮에 관도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장거운이 무상곤을 펼쳤습니다.”
“거운이 무상곤을?”
남궁천호도 의외의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거운은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개 속가제자가 어찌 본산의 제자들도 제대로 익힌 자가 거의 없다는 무상곤을 알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흠, 정말 거운이가 무상곤을 펼친 것이 맞는가?”
“분명합니다. 무상곤의 수법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왔던 접니다.”
남궁천호는 잠시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악우진의 얼굴에는 두 가지를 확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는 장거운이 분명히 무상곤을 펼쳤다는 확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장거운이 특별한 관계일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남궁천호가 침중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거운이가 특별한 관계인 것은 아닐세. 그저 태원에서 돌아올 때 정주에서 잠시 거운과 말다툼이 있었고, 그때 거운이 남달리 협심이 강하다고 느꼈지. 그리고 거운을 다시 만난 것은 이곳 항주에서였네. 청룡무사가 되기 위해 무림맹을 찾아왔다고 하더군. 내가 거운이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 정도뿐이네. 그의 사문이 조림사라고 하는 것도 자네와 같이 면접을 보면서 알았다네. 그날 내가 그의 면접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은 이미 그에게 협심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를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네.”
“물론 저도 거운이가 가끔 대책 없이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유달리 협심이 강하고 순후한 녀석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알면 알수록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당주님도 보셨겠지만, 거운이가 지난번에 나한십팔세를 펼쳤을 때는 속가제자라도 칠십이절기의 한두 개 정도는 알 수도 있는 일이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무상곤은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남궁천호는 악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무상곤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사실 이상한 점이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하던 점혈도 능숙하게 하고, 조금 전에 당주님도 겪어 보셨듯이 이제는 전음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갑작스럽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흠,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거운이가 전음을 사용했군.”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뒤늦게 장거운이 전음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궁천호의 표정을 살피며 악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뭐, 장거운에 대해 나쁜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면들이 자꾸 보이니 의아해서 그런 것입니다.”
잠시 생각을 하고 있던 남궁천호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조만간 백우선사가 항주에 온다고 하더군.”
“백우선사라면, 그 나한당의 수좌이신 철포나한 백우선사 말입니까?”
“그래, 그분이시지. 그분이 얼마 전 안휘 본가에 들르셨는데, 마침 영은사에 불경을 전할 일이 있어 항주에 오시게 되었다는군. 아마도 그분이라면 거운이의 정체를 말해 줄 수 있겠지.”
남궁천호가 말한 백우선사는 그의 둘째 숙부로서 속명은 남궁협이었다. 어릴 적에 소림과 인연이 되어 남궁가를 떠나 소림의 속가제자가 되었으나, 후에 불경에 심취하여 스스로 출가를 해 버린 조금 괴짜 같은 숙부였다.
그는 철포나한이라고 불리며, 소림사를 대표하는 고수들 중의 한 명으로 현재 나한당을 맡고 있는 당주였다. 백우선사가 나한당의 당주이니만큼 장거운이 단순한 속가제자인지 아니면 본산에서 특별하게 키워진 제자인지 쉽게 알아낼 것이었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렇겠군요. 나한당의 수좌이시니 장거운을 알아볼 수 있으시겠네요.”
“그래, 그런데 그보다는 당장 분지에 있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이지 않은가?”
남궁천호가 다시 관군들의 처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악우진의 표정이 다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반문을 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거운이가 정천호의 패를 확인했다고 하는 위지웅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지.”
“한데 저들이 천호패를 내밀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계산이 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결국 자신들은 관군이니 너희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겠지. 실제로도 우리가 군부의 문제에 파고들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더구나 하가장과도 연계가 되어 있는 것 같으니 맹에서도 공격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겠지.”
남궁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악우진이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죽색마도 저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흠, 그놈이 하가장과 관계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저들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놈이 직접적으로 백가장의 일에 끼어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네. 벽파쌍검도 마찬가지고. 일단 내려가서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네.”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했다.
저들과 하가장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만약에 오죽색마가 백가장의 일에 직접적으로 가담을 했다면 확실한 명분을 가질 수 있어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을 들쑤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오죽색마의 경우에는 증거물도 확실하고 목격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죽색마가 서호에 나타난 시간으로 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백가장의 일에 가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단지 연관성이 의심된다는 것만으로 하가장과 군부를 들쑤시기에는 명분이 약한 것이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한데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소탕령을 결정 내려면 시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사이 저들이 숨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저들은 신분을 드러낸 이상, 당분간은 저곳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게야. 관군인 데다 하가장과 연계되어 있으니, 맹에서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일단 맹으로 복귀를 하도록 하지.”
남궁천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하자 악우진은 맹으로 복귀를 하기 위해 장거운과 냉가혜를 불렀다.
제5장 마운곡(磨雲谷)
잠시 후 전장 정리가 끝나자 청룡당 일행들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남궁천호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추관인 신규진, 백가 남매 등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용현이 남궁천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당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음,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그리고 무림맹까지 인솔은 자네가 하게.”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나는 좀 더 알아보고 가야 할 것 같네. 그리고 악 대주와 거운이는 나와 같이 갈 테니 맹에 도착하는 즉시 순찰당주에게 관의 움직임을 살펴보라고 전해 주게.”
“혹시 흉수들을 추적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 놈들이 달아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고 보니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저 황칠이도 데려가면 되겠군.”
모용현의 물음에 남궁천호는 담담하게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황칠을 쳐다보았다.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경황이 없어 추적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적들을 추적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모용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악 대주의 말대로라면 놈들은 적어도 서른 명 이상입니다. 오히려 놈들의 매복에 빠져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모용현의 말에 남궁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달아난 자들이 영리한 놈들이라면, 추적을 예상하고 매복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궁천호는 이대로 추적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놈들이 제법 실력들이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추적을 하기가 힘들 것 같지 않은가? 세 사람이면 몸을 빼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맹까지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게.”
“그게……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모용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그 또한 지금 쫓아가지 않으면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는 남궁천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현이 일행들을 인솔하기 위해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냉가혜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당주님! 저도 같이 가겠어요.”
“한 명 정도는 더 가는 것도 괜찮겠지.”
남궁천호는 잠시 냉가혜를 쳐다보다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남궁천호가 냉가혜를 보며 미소를 지은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일에 그녀가 적극적으로 자원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남궁천호는 청룡무사가 된 이후에 그녀의 냉정한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모용현이 청룡당 일행들을 인솔하고 무림맹을 향해 떠나고 나자 추적조로 남은 장거운 등은 즉시 황칠을 데리고 놈들이 달아난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주한 흔적은 덕청현으로 이어져 있었다.
장거운 일행이 덕청현에 도착하여 탐문을 하자 놈들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을 상당히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추적을 시작한 것은 좀 늦었지만, 다행히 밝은 대낮이었고 달아난 자들의 복장이 관군의 복장이어서 생각보다 목격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달아난 자들이 백가장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였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동을 하고 있는 장거운 일행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덕청현에서 백가장에 이르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지라 놈들이 모용현의 말대로 매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백가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려하던 매복은 없었다. 문제는 백가장이었다. 매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놈들이 이곳까지는 고의로 흔적을 남겨 유인을 했을 가능성도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거운 일행은 내심으로는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만약 놈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한두 명의 꼬리가 붙을 것으로 생각하고 적은 수의 매복을 남겨 두었다면, 오히려 놈들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백가장 안으로 들어선 장거운 일행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백가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장거운 일행을 힘이 빠지게 하는 것은 놈들의 흔적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것이다. 백가장에서부터는 막간산을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놈들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백가장으로 들어선 뒤 한동안 화재로 폐허가 되어 버린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남궁천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처참하군. 제법 운치가 있게 꾸며진 곳이었는데.”
“백가장 식솔들의 시체는 저곳에 모두 묻었습니다.”
악우진이 백연화 등이 시체들을 묻은 곳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그런가? 정말이지 끔찍하군. 참으로 인자하고 대인의 풍모를 지녔던 분이셨는데, 어쩌다 이 지경을 당했는지.”
“죽은 백 장주와는 아는 사이였습니까?”
“본가에서도 이곳에서 검을 많이 구입했지.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몇 번 왔다가 뵌 적이 있네.”
악우진의 물음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본가인 남궁세가 역시 검의 명가로 손꼽히는 만큼 검장지가로 유명한 이곳 백가장과는 거래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남궁천호가 옛일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폐허가 된 백가장의 모습을 둘러보는 사이, 검고로 통하는 지하 통로를 살펴보기 위해 입구 쪽으로 다가간 장거운의 눈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기 전에 화재에 타다 남은 서까래 등으로 촘촘하게 막아 놓았던 입구가 군데군데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운은 즉시 입구를 막고 있는 것들을 모두 걷어 내고는 천천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실로 들어선 장거운이 통로를 지나 검들이 보관되어 있던 석실까지 살펴보았으나 지하는 텅 비어 있을 뿐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위로 올라온 장거운이 남궁천호에게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지하 검고의 출입구도 누군가가 건드렸어요. 지하실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분명히 놈들이 이곳에 왔다 간 것 같아요.”
장거운의 말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곳까지 온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부터 추적을 하는 것이 문제구나. 놈들이 산 쪽으로 달아났다면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데, 날까지 어두워지니 말이다.”
남궁천호의 중얼거림에 장거운과 악우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냉가혜만이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놈들을 추적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냉가혜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냄새! 적어도 삼십 명 정도가 달아났으니 놈들이 산 쪽으로 달아났다면 시간이 좀 지났지만 아직은 사람의 체취가 많이 남아 있을 거예요.”
“그렇군, 냄새를 따라가면 되겠군.”
“근데 이 녀석이 그자들의 냄새를 알 수 있을지…….”
악우진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황칠을 보며 중얼거리자 장거운이 황칠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황칠아, 사람 냄새 알지? 짐승 말고 사람 냄새 말이야. 너도 사람들 많이 물어 봤으니까 잘 알지?”
끄으응!
장거운의 말에 황칠은 납작하게 엎드려선 고개를 돌리며 끙끙대고만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 이제부터는 사람의 냄새를 쫓아가는 거다. 우리 말고 더럽고 고약한 다른 사람들 냄새 말이다. 잘할 수 있지?”
웡! 웡!
황칠이 씩씩하게 짖어 대고는 잠시 코를 킁킁대며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황칠의 뒤를 따라 이제는 완연하게 어둠에 잠긴 막간산의 산길을 한 시진가량 달려온 장거운이 갑자기 길옆으로 신형을 날리며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장거운을 따라 남궁천호 등도 재빨리 신형을 감추고 있었다.
곧바로 앞쪽에서 황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늑대야?”
“생긴 건 사자 같은데?”
“지랄하네! 사자가 왜 여기 있어?”
“그런가? 그럼 뭐지?”
“흠, 사자를 닮기 했는데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그냥 개새끼네!”
“뭐? 개새끼라고? 이야, 이거 웬 재수야?”
“왜? 잡아먹자고?”
“그럼 안 먹을 거야?”
“당기긴 하는데, 조장이 알아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음? 날도 추워지는데 몸보신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그냥 삶고 나서 조장은 뒷다리나 하나 먹으라고 부르면 되지.”
“하긴, 날 잡아 잡수시라고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냥 보내긴 그렇군. 흐흐! 이리 온, 개새끼야.”
크르릉!
말을 주고받던 사내 둘이 다가서자 황칠은 몸을 낮추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숲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은 황칠이 사내들에게 잡힐 것 같아서 마음을 졸였지만, 뛰쳐나가거나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적의 정체나 규모를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거운으로서는 단지 황칠이 재빠르게 도망가기만을 바라며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황칠아! 도망가!’
간절한 장거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황칠이 갑자기 몸을 돌려 후닥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두 사내가 재빨리 몸을 날려 뒤를 쫓았지만, 황칠이 용케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고 냅다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장거운의 귀로 남궁천호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앞으로 이동해!”
장거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바로 옆으로 남궁천호와 악우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장거운은 냉가혜와 함께 재빨리 그들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앞에 드러난 것은 굴의 입구와도 같은 좁은 통로였는데, 그곳에는 횃불이 두 개 밝혀져 있었다. 아마도 황칠을 쫓아간 두 사내는 그곳에서 번초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행이 입구를 통과하여 보니 그곳에는 제법 널따란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나타난 의외의 풍경에 잠시 멈칫하던 일행들은 재빨리 우측의 키가 작은 관목 숲으로 뛰어들어서는 몸을 낮추고 분지 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지는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부터 관목과 갈대로 이루어진 언덕길을 따라 오십 장 정도 내려간 지점에서부터 평평한 지형이 시작되고 있는데, 그곳에는 크고 작은 군막들이 십여 채가 세워져 있었다. 군막의 주변에 곳곳에 불이 피워져 있고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악우진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것은 군막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군기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럼 진짜 관군들이란 말인가?”
남궁천호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듣고 있던 냉가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낮에 맞닥뜨린 자들은 분명히 관군이 아니었어요. 관군들이 청룡당을 상대로 싸울 무위를 지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요. 특히 저와 싸운 그자는 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절정고수였어요.”
장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냉가혜의 말을 받았다.
다시 남궁천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악 대주, 이곳의 이름을 아는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백가장에서 온 거리를 봐서는 마운곡이란 곳인 것 같습니다.”
남궁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뱉었다.
“흠, 마운곡이라……. 관군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어쨌든 돌아가서 도지휘사사에 병력의 이동을 확인해 봐야겠다.”
“이대로 돌아가잔 말이에요?”
장거운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을 하자 악우진의 대꾸가 이어졌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지금 움직이는 자들만 해도 수십 명이다. 게다가 군막 안에 머물고 있을 자들까지 염두에 둔다면 어림잡아 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저들을 우리 넷이서 치기라도 하자는 말이냐?”
“그래도 관도에서 우리를 습격한 놈들이 맞는지는 확인을 해 봐야 하잖아요.”
그러자 남궁천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서자. 지금 이곳에 군막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만, 맹으로 돌아가서 확인을 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다.”
“그래야 합니다. 관도에서 싸운 것은 어떻게든 무마시킬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진짜 관군이라면 맹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악우진이 동조를 하고 나서자,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달아난 자들이 매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관군이 아니라 도적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추적을 생각해서 매복은 아니라도 감시자라도 남겨 두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매복이나 감시자가 없었다는 것은 맹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어서 대응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남궁천호는 쉽게 처리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고 있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다시 말을 뱉었다.
“그러니 더욱 확인을 해야 하잖아요. 확실한 증거를 잡으면 저들이 진짜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맹의 입장에서는 저들을 칠 명분이 생기는 것이잖아요.”
“네 말은 진짜 관군이 백가장을 습격하였을 수도 있다는 말이냐?”
장거운의 말에 남궁천호가 눈에 이채를 띠며 묻자 장거운의 대답이 이어졌다.
“물론 저들의 무위를 생각하면 진짜 관군은 아닌 것 같지만, 저는 왠지 저들이 관군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럴 수…….”
장거운의 말에 대꾸를 하던 남궁천호가 급히 입을 닫고는 몸을 낮추었다. 황칠을 잡으러 갔던 자들이 돌아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이 시발! 개새끼가 더럽게 빠르네!”
“쩝! 그러게. 시발, 번초만 아니었어도 그놈의 개새끼를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먹는 건데. 젠장!”
황칠을 놓쳤는지 두 사내는 욕설을 해 대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도망간 황칠을 걱정하던 장거운은 두 사내의 말에 다소 안심을 하며 사내들을 살펴보았다. 두 사내들 역시 관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다만 일반적인 관군들과는 달리 창이 아닌 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잠시 두 사내를 살펴보던 장거운이 갑자기 신형을 날려 번초를 서는 두 사내의 뒤쪽에 신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거운의 귓속으로 다급한 전음들이 날아들었다.
“거운!”
“뭐하는 짓이냐?”
“멍충이! 너 미쳤어?”
장거운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남궁천호에게 전음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이들을 유인할 테니 먼저 빠져나가세요. 곧 따라 나갈게요. 제가 몸 하난 튼튼하잖아요.”
창! 창!
“누구냐?”
장거운의 기척을 발견한 두 사내가 검을 뽑아 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장거운이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무림맹 청룡당의 청룡무사 장거운이오. 지금 수상한 무리들을 쫓고 있었소.”
“청룡무사…….”
두 사내는 장거운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장거운의 말이 이어졌다.
“흠, 관군으로 보이는데 소속이 어디시오?”
“우, 우리는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흑호군이다.”
“흑호군? 처음 듣는 부대인데, 지휘관이 어느 분이시오?”
“지, 지휘관은…….”
“닥쳐라! 감히 군의 기밀을 묻는 것이냐?”
장거운의 물음에 우측에 선 사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좌측에 선 사내가 황급히 호통을 질렀다.
장거운이 입가에 살짝 조소를 띠며 다시 말을 건넸다.
“군의 기밀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당신들 지휘관을 좀 만나 봐야겠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차피 내가 이곳에 들어온 사실을 알려야 할 것 아니오?”
장거운이 담담하게 말을 내뱉고는 군막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두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급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시 후 장거운과 번초를 서던 사내들이 저 아래로 내려가자, 숨어 있던 남궁천호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멀어져 가는 장거운의 등을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장거운을 쳐다보던 냉가혜가 갑자기 신형을 날리려 하자 남궁천호가 그녀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일을 망치고 싶은 것이냐? 거운이는 제 놈 말대로 남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으니 몸 하나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지켜보도록 하자.”
말을 마친 남궁천호는 분지의 군막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팔짱을 끼고 서서 아래로 내려가는 장거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가혜와 악우진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서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무슨 일이냐?”
장거운과 두 사내가 군막이 있는 곳 근처에 이르자 갑주를 갖춰 입은 팔자수염을 기른 뚱뚱한 체구의 장수 하나가 매섭게 소리를 쳤다.
장거운의 왼쪽 뒤에 서 있던 자가 읍을 하며 말을 건넸다.
“수상한 자가 기웃거리기에 잡아 왔습니다.”
“나는 수상한 자가 아니라 청룡무사인 장거운이오. 오늘 낮에 관군으로 위장한 도적 떼가 본 청룡당을 습격하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소. 나는 바로 그 달아난 놈들을 쫓고 있는 중이오. 혹시 근방에서 수상한 자들을 보지는 못하였소?”
말을 하면서도 장거운의 눈은 갑주를 갖추고 있는 자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장거운의 말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팔자수염을 기른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을 뱉었다.
“훗, 청룡무사? 우리는 절강성 도지휘사사 예하의 흑호군으로 이곳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모종의 임무라……. 그 임무가 무엇이오?”
장거운은 다시 말을 건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장거운의 출현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군사들 가운데, 낮에 관도에서 본 자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낯익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다시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어이! 애송이 청룡무사 나리!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꺼지시지!”
“말이 심하군. 당신 직책과 이름이 뭐요? 뒤룩뒤룩 살이 쪄 가지고 어떻게 전투를 한다는 건지…….”
창!
“이 자식이! 뒈지고 싶으냐?”
장거운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중얼거리자 상대는 격분하여 검을 뽑아 들고 호통을 질렀다.
장거운이 처음 자신을 보고는 그냥 가라고 말하는 장수를 보며 떠오른 생각은 이자들은 진짜 관군이라는 것이다. 관군으로 위장한 도적의 무리라면, 그냥 자신을 베어 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관군이라면 이들은 자신이 청룡무사라는 사실을 알기에 쉽게 검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장거운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뚱뚱한 체격의 장수도 자신의 말에 격분을 하여 검을 뽑기는 하였지만 노려만 볼 뿐 쉽게 검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거운은 자신이 찾고 있는 지휘관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좀 더 도발을 해서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거운이 다시 거칠게 말을 뱉었다.
“돼지 같은 놈이 생긴 것처럼 겁이 많군.”
“이 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대는 검을 휘둘러 장거운의 팔을 베어 오고 있었다. 팔 하나쯤은 날려 버릴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장거운은 상대의 검이 막 자신의 팔을 베려는 순간, 발을 박차며 전광석화처럼 파고들면서 상대의 어깨를 짚고 뛰어올라 머리를 타고 넘어가서는 뒷발로 슬쩍 상대의 등을 밀어 버렸다. 다람쥐 같은 재빠른 장거운의 공격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밀려난 뚱뚱한 체구의 장수는 간신히 신형을 바로잡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장거운이 다시 비아냥거리는 말을 뱉었다.
“돼지 같은 놈, 확실히 느려 터졌군!”
“크왁!”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괴성을 터뜨리며 폭풍처럼 검을 휘둘러 왔다.
상대의 기세가 너무 흉흉하여 장거운은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다급하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물러서면서 가까스로 검을 피하고 있던 장거운은 군막들 중간에 이르자, 가장 큰 군막을 흘깃 쳐다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군막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은 소란의 와중에도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만 볼 뿐 군막의 입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군막 안에는 이자들의 지휘관이 있음이 분명했다.
연신 뒤로 물러서던 장거운이 돌부리에 걸렸는지 살짝 비틀거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장거운의 목을 베어 갔다. 그러나 장거운은 두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볼 뿐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단단한 신체를 믿고 좀 더 크게 소란을 피워 볼 심산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자신의 검이 장거운의 목을 베려는 순간 재빨리 손목을 돌려 검면으로 장거운의 뺨을 두들겨 버렸다. 역시 장거운의 생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도 차마 청룡무사를 죽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컥!”
장거운이 신음을 내뱉으며 붕 떠서 이 장 가까이 날아가 제일 큰 군막의 입구에 처박혔다.
장거운이 일부러 당한 척하며 노린 것은 바로 그 군막 안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막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막아서는 바람에 계획대로 군막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다만 입구에 쓰러진 장거운은 안에서 한 명이 휘장을 걷고 나오는 틈을 이용하여 살짝 안을 엿볼 수는 있었다.
군막 안에는 세 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두 명은 바로 장거운이 찾던, 바로 그 악우진에게 부상을 입은 젊은 장수와 자신에게 당해 어깨에 상처를 입은 지휘관으로 보이던 장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을 보는 순간 장거운은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장거운의 표정을 얼어붙게 만든 자는 다름 아닌 하가장에서 보았던 벽파쌍검 적우기였던 것이다.
“뭐하는 짓들이냐?”
가장 큰 군막에서 휘장을 걷고 나왔던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버럭 호통을 치자, 뚱뚱한 체구의 장수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청룡무사라고 하는 자가 찾아와서…….”
“청룡무사…….”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는 성난 표정으로 말을 뱉다가 입을 닫고선 장거운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안의 누군가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분지의 입구에 서 있는 남궁천호 등의 그림자를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 장거운을 향했다.
“끙!”
장거운이 신음을 흘리며 힘들게 일어나자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불쑥 목패를 하나 내밀었다. 목패는 그가 정천호의 신분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목패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옥새가 새겨져 있어, 제아무리 미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위조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거운이 천천히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아, 위지웅 장군이시군요.”
“알았으면 당장 돌아가라!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킨다면, 황상폐하의 어명을 받고 있는 군영을 어지럽힌 죄를 물어 즉결에 처하겠다.”
“흠, 뜻이 그러시다면 가야지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장거운은 순순히 물러나고 있었다. 이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내었기 때문에 장거운으로서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장거운이 분지로 통하는 동굴 입구로 올라오자 남궁천호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본 장거운이 눈에 이채를 띠고는 고개를 돌려 아래의 군막을 쳐다보았다. 위지웅이라고 자신을 밝혔던 붉은 갑주를 입은 장수가 여전히 그와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제야 장거운은 위지웅이라는 자가 자신을 그냥 보내 준 것은 남궁천호 등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자는 자신을 해치면 청룡당이 공격할 빌미를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놓아준 것이었다.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거운이 다가오자 악우진의 입에서 노기를 띤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거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대주님. 일단 나가요.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장거운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하자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여기서 나가도록 하지. 어째 네 녀석은 갈수록 교활해지는 것 같구나.”
남궁천호는 상대가 진짜 관군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험을 한 장거운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궁천호의 말에 장거운은 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예? 쩝! 교활하다는 말은 좀 그런데…….”
“멍충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가.”
장거운은 냉가혜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옮겼다.
웡! 웡!
일행이 산을 내려와 잠시 쉬어 가기 위해 백가장에 들어서자 황칠이 반갑게 짖으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장거운이 황칠을 끌어안으며 말을 뱉었다.
“이 녀석,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잘했다.”
월월월!
장거운과 냉가혜가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황칠도 신이 나는지 한껏 짖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반갑게 황칠과 해후를 하는 장거운과 냉가혜와는 달리 남궁천호와 악우진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분지에 있던 자들 중에 정천호의 패를 지닌 진짜 장수가 있었으며, 하가장의 수하인 벽파쌍검 적우기가 습격한 자들과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냉가혜와 함께 황칠을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장거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당주님, 장거운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정체라니? 거운이야, 그냥 장거운이지 무슨 정체가 있다는 말인가?”
남궁천호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반문을 했다.
악우진의 말을 이었다.
“혹시 소림의 무상곤법을 아십니까?”
“무상곤? 소림곤법의 정화라고 하는 곤법 말인가?”
“예. 낮에 관도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장거운이 무상곤을 펼쳤습니다.”
“거운이 무상곤을?”
남궁천호도 의외의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거운은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개 속가제자가 어찌 본산의 제자들도 제대로 익힌 자가 거의 없다는 무상곤을 알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흠, 정말 거운이가 무상곤을 펼친 것이 맞는가?”
“분명합니다. 무상곤의 수법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왔던 접니다.”
남궁천호는 잠시 악우진을 쳐다보았다. 악우진의 얼굴에는 두 가지를 확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는 장거운이 분명히 무상곤을 펼쳤다는 확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장거운이 특별한 관계일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남궁천호가 침중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사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거운이가 특별한 관계인 것은 아닐세. 그저 태원에서 돌아올 때 정주에서 잠시 거운과 말다툼이 있었고, 그때 거운이 남달리 협심이 강하다고 느꼈지. 그리고 거운을 다시 만난 것은 이곳 항주에서였네. 청룡무사가 되기 위해 무림맹을 찾아왔다고 하더군. 내가 거운이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 정도뿐이네. 그의 사문이 조림사라고 하는 것도 자네와 같이 면접을 보면서 알았다네. 그날 내가 그의 면접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은 이미 그에게 협심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를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네.”
“물론 저도 거운이가 가끔 대책 없이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유달리 협심이 강하고 순후한 녀석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알면 알수록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당주님도 보셨겠지만, 거운이가 지난번에 나한십팔세를 펼쳤을 때는 속가제자라도 칠십이절기의 한두 개 정도는 알 수도 있는 일이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무상곤은 그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남궁천호는 악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무상곤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사실 이상한 점이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할 수 없다고 하던 점혈도 능숙하게 하고, 조금 전에 당주님도 겪어 보셨듯이 이제는 전음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갑작스럽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흠,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거운이가 전음을 사용했군.”
악우진의 말에 남궁천호는 뒤늦게 장거운이 전음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궁천호의 표정을 살피며 악우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뭐, 장거운에 대해 나쁜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면들이 자꾸 보이니 의아해서 그런 것입니다.”
잠시 생각을 하고 있던 남궁천호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조만간 백우선사가 항주에 온다고 하더군.”
“백우선사라면, 그 나한당의 수좌이신 철포나한 백우선사 말입니까?”
“그래, 그분이시지. 그분이 얼마 전 안휘 본가에 들르셨는데, 마침 영은사에 불경을 전할 일이 있어 항주에 오시게 되었다는군. 아마도 그분이라면 거운이의 정체를 말해 줄 수 있겠지.”
남궁천호가 말한 백우선사는 그의 둘째 숙부로서 속명은 남궁협이었다. 어릴 적에 소림과 인연이 되어 남궁가를 떠나 소림의 속가제자가 되었으나, 후에 불경에 심취하여 스스로 출가를 해 버린 조금 괴짜 같은 숙부였다.
그는 철포나한이라고 불리며, 소림사를 대표하는 고수들 중의 한 명으로 현재 나한당을 맡고 있는 당주였다. 백우선사가 나한당의 당주이니만큼 장거운이 단순한 속가제자인지 아니면 본산에서 특별하게 키워진 제자인지 쉽게 알아낼 것이었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렇겠군요. 나한당의 수좌이시니 장거운을 알아볼 수 있으시겠네요.”
“그래, 그런데 그보다는 당장 분지에 있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이지 않은가?”
남궁천호가 다시 관군들의 처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악우진의 표정이 다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반문을 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거운이가 정천호의 패를 확인했다고 하는 위지웅이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지.”
“한데 저들이 천호패를 내밀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계산이 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결국 자신들은 관군이니 너희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이겠지. 실제로도 우리가 군부의 문제에 파고들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더구나 하가장과도 연계가 되어 있는 것 같으니 맹에서도 공격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겠지.”
남궁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악우진이 갑자기 눈빛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죽색마도 저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흠, 그놈이 하가장과 관계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저들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놈이 직접적으로 백가장의 일에 끼어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네. 벽파쌍검도 마찬가지고. 일단 내려가서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네.”
남궁천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했다.
저들과 하가장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만약에 오죽색마가 백가장의 일에 직접적으로 가담을 했다면 확실한 명분을 가질 수 있어 관군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을 들쑤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오죽색마의 경우에는 증거물도 확실하고 목격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죽색마가 서호에 나타난 시간으로 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백가장의 일에 가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단지 연관성이 의심된다는 것만으로 하가장과 군부를 들쑤시기에는 명분이 약한 것이다.
악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한데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소탕령을 결정 내려면 시일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사이 저들이 숨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저들은 신분을 드러낸 이상, 당분간은 저곳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 게야. 관군인 데다 하가장과 연계되어 있으니, 맹에서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일단 맹으로 복귀를 하도록 하지.”
남궁천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하자 악우진은 맹으로 복귀를 하기 위해 장거운과 냉가혜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