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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제6장 백호당(白虎堂)
백가장의 일로 인해 긴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열리고 있는 무림맹의 의사청은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의 가문이자 북경 하가상단의 지부인 하가장과 관군이 개입한 것 같다는 남궁천호의 말에 크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남궁천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 자! 다들 조용히 해 주시오. 이제까지 이번 백가장의 사건에 대한 개요를 들었으니, 순찰당주가 의견을 말해 보시오.”
맹주인 매화검군 화중혁이 소란스러워진 좌중을 진정시키며 순찰당주인 만리신풍 노웅에게 말을 건넸다.
노웅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실 하가장은 이번 백가장의 사건뿐만 아니라, 흉악한 간살범으로 유명한 오죽색마의 사건과도 연관이 있어 저희 순찰당에서 집중적으로 감시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특별히 수상한 점을 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들 아시겠지만, 남궁 당주가 언급한 벽파쌍검 적우기라는 자는 일개 호장무사대의 대주로 있을 만한 자가 아니어서, 그자가 하가장에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캐고 있는 중입니다.”
“흠, 적우기라면 광동에서 흑두삼마를 베었다고 하던 해남 출신의 그자 말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적우기입니다.”
노웅의 말에 화중혁이 살짝 의아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긴 하군. 아무리 하가장이라지만, 그 정도의 고수가 일개 호장무사대를 맡고 있다니 말이오. 그 점 말고 다른 것은 뭐 없소?”
“예, 현재로써는 하가장의 움직임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화중혁은 노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백가장을 습격한 것으로 보이는 관군들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소?”
“그것이…… 도지휘사사에 알아본 결과 조금 애매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애매한 대답이라니?”
“어젯밤에 청룡당의 전언을 받고 도지휘사사에 물어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덕청현으로 이동한 병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그 마운곡의 분지에서 봤다는 흑호군이라는 부대와 위지웅이라는 정천호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오늘 아침에 도지휘사사에 갔는데, 흑호군이라는 부대가 있으며 모종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영내를 벗어나 있어 그들의 이동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위지웅이라는 장수의 신분도 확인을 해 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마운곡의 그자들이 관군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애매하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노웅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을 했다. 그로서도 확언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외당 당주인 황보명이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을 뱉었다.
“도지휘사사에 무슨 비밀 부대가 있다는 거요?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남해에서 왜구 놈들하고 노닥거릴 일이지, 막간산에서 뭘 한다는 말이오?”
“그걸 낸들 알겠나?”
노웅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자,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일단 하가장에 혐의를 둔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군요. 첫째는, 하가장이 자신들의 수하를 관군으로 위장하여 백가장을 습격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가장이 흑호군이라는 관군의 비밀 부대를 움직여 백가장을 습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지휘사사에서 말 바꾸기를 한 것은 하가장의 압력이라면 충분히 설명이 되는 일입니다.”
“하가장의 압력으로 도지휘사사가 말을 바꿀 수 있다는 제갈 당주님의 말씀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지금 절강 도지휘사인 소병용은 하진문의 처남입니다. 하가상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도지휘사가 된 자이지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노웅의 말에 화중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진문이라면 그를 움직일 수 있겠지. 그렇다면 결국 하가장과 도지휘사사가 손을 잡고 벌인 일이라는 말인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겠군.”
“하하하! 모두들 너무 사건의 결과에만 집착을 하시는군요.”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연 사람은 백호당의 당주를 맡고 있는 운룡검 백리문이었다.
그는 약간은 마른 듯이 보이는 체격에 하얗고 섬세한 여성적인 얼굴을 가졌으며 목소리까지 여자처럼 가늘지만, 성격은 오히려 대단히 호방하여 대내외적으로 발이 넓어 두루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특히 오대세가의 일원인 백리세가의 소가주이자 청성파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청룡당주인 창천검룡 남궁천호와 더불어 오가쌍룡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백리문의 말에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화중혁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흠, 백리 당주의 말은 무슨 뜻인가?”
“예, 제 말은 먼저 누가 무슨 이유로 백가장을 멸문시켰나 하는 것을 짚어 보자는 말입니다. 오죽색마인가 뭔가 하는 놈이야 제 꼴리는 대로 사건을 저지르고 다니겠지만, 백가장의 사건은 기분 나쁘다고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그럼 자네는 흉수들이 무엇을 노렸다고 보는가?”
“흉수들의 목적이야 당연히 백가장의 검고에 있는 검들이겠지요. 다만, 저는 많은 분들이 흉수로 지목하고 있는 하가장이 백가장의 검을 노리고 도지휘사까지 움직여 가며 일을 벌일 이유가 있나 하는 것이 의문스럽다는 말입니다.”
백리문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하가장이 무엇을 노리고 백가장을 습격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군색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가장은 백가장보다 더 큰 규모의 검장가인 만검장의 실질적인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백가장의 검이 질이 좋고 고가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만검장 역시 얼마든지 질 좋은 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곳이었다. 굳이 하가장이 백가장의 검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황보명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말을 뱉었다.
“혹시, 그거 만검장이 부탁한 것 아닐까요? 경쟁자인 백가장을 없애 달라고 말이오. 아니면 하가장이 검의 판매를 독점하기 위해서 백가장을 사려고 했는데, 백가장주가 거부를 하는 바람에 해치운 것 아니겠소?”
“재밌는 추리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네. 만검장은 지금도 절강성에서 검의 판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그리고 하가장에서 백가장에 눈독을 들였다면, 이미 만검장을 설립하는 단계에서 사들이지 왜 갑자기 이제 와서 백가장을 사들이겠다고 나섰겠나?”
“그야 뭐, 갑자기 당길 수도 있지 않나? 우리가 만날 돼지고기만 먹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잘 안 먹던 쇠고기가 당기는 것처럼 말이야.”
“흠흠! 황보 당주, 그 비유는 조금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 그럼 백리 당주는 하가장이 백가장을 칠 이유가 없어서 혐의를 둘 수 없다는 말이오?”
화중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백리문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하가장에 혐의를 둘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혐의를 두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가장은 원래가 상인 가문입니다. 상인이라는 자들의 특성은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고 믿지요.”
백리문의 말에 이제껏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의 말은 하가장이 사주를 한 것이 아니고 돈을 받고 협조를 하였다는 말인가?”
“그렇지! 역시 자넨 바로 알아듣는군.”
백리문의 말에 제갈후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말을 뱉었다.
“그럼 누가 하가장에 돈을 들이밀고 백가장의 검을 원했단 말인가?”
“제 생각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해남파입니다. 알다시피 해남파는 검파이기는 하지만 섬에 고립되어 양질의 검을 많이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곳입니다. 백가장의 검들을 욕심낼 만하지요. 게다가 해남파의 제자인 적우기가 계속 거론되고 있는 점도 수상하지요.”
“흠, 정파로 알려진 해남파가 그런 짓을 했다……. 다른 가능성은?”
화중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묻자 백리문의 대답이 이어졌다.
“물론 아무래도 정파인 해남파가 그런 짓을 벌였다고 보기에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요. 하지만 언제나 골칫덩어리들인 사황련과 마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황련과 마교라고?”
말을 뱉은 화중혁뿐만 아니라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리문이 지난 십 년 동안 잠잠했던 사황련과 마교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서서히 움직일 시기가 된 것도 같아 사람들이 더욱 놀라고 있는 것이다.
백리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좋은 검과 뛰어난 장인을 원하는 자들이지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화중혁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듣고 보니 백리 당주의 말대로 사황련과 마교가 하가장에 청탁을 넣어 관군으로 위장한 것일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니 그놈들이 아니면 갑자기 청룡당과 맞설 정도로 실력 있는 무사들이 어디서 떼거지로 몰려 나왔겠는가?”
“맹주님! 단지 추측일 뿐입니다.”
화중혁이 백가장의 사건을 사황련이나 마교가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는 백리문의 말에 크게 공감을 하는 듯하자, 남궁천호가 강하게 항변을 했다. 자칫하면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흐려질 수 있었다.
백리문이 다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원래가 범인을 잡는 것이든 악적을 때려잡는 것이든 모두 다 추측에서 시작되는 법이지 않은가? 어쨌든 범인이 해남파가 되었건 아니면 사황련이나 마교가 되었건 간에, 이번 백가장 사건은 청룡당이 아니라 우리 백호당에서 맡아야 할 것 같군.”
“백리문! 무슨 소리냐? 이번 일에 우리 청룡당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아느냐?”
남궁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그러나 백리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아아, 물론 청룡당의 보위사들이 열 명이나 죽었더군. 그 점은 애석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각자가 서로 맡은 일이 있으니 어쩌겠나. 분명히 이번 사건은 우리 백호당에서 맡을 일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까, 맹주님?”
“흠, 그게…… 아무래도 청룡당은 지금 오죽색마의 일도 있고 하니 백가장의 사건은 백호당에서 맡고, 청룡당은 오죽색마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맹주님!”
남궁천호가 소리를 치며 화중혁을 쳐다보았지만, 화중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 당주의 입장에서는 물론 부하들도 많이 잃었고 하니 끝까지 해결하고 싶겠지만, 그게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오죽색마를 잡는 일에 전념해 주게.”
“…….”
남궁천호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백리문은 남궁천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중혁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나중에 제가 직접 백호당의 무사들을 이끌고 마운곡으로 가서 그곳에 있다는 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사황련이나 마교의 놈들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 놈들이 아무리 관군으로 위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다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번 사건은 백호당에서 맡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원래 맹의 규정에도 무림의 십오대문파나 사황련, 혹은 마교로 의심되는 자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조사는 백호당에서 맡게 되어 있습니다. 해남파도 십오대문파에 속하며, 물론 사황련이나, 마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말을 하고 나선 사람은 이제껏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감찰당의 당주인 복마삼절 유운생이었다. 그는 공동파의 출신으로 무림맹의 당주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다.
매우 중립적인 인물로 알려진 유운생의 말이 결정적이었는지 화중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백가장의 사건은 백호당이 맡는 것으로 하고, 일단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
화중혁이 말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청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각 당의 당주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지만 남궁천호는 멍하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우같은 백리문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것이다.
남궁천호의 옆을 지나가던 백리문이 배시시 미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청룡당에서 보호하고 있는 백가 남매와 백가장 사건에 관한 자료들은 최대한 빨리 넘겨주고 자넨 열심히 색마나 따라다니라고. 하하하!”
“이익!”
남궁천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았지만, 이미 결정 난 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영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그만 가세. 진화루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그래, 어차피 하가장과 엮여서 골치 아픈 일인데 잘됐네, 뭐.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황보명이 거들고 나섰다.
“…….”
그러나 남궁천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앉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 * *
“거운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청룡고 앞을 서성거리던 장거운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곽호가 손을 흔들며 빙긋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거운이 급히 다가가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어! 형님! 오늘 쉬는 날이세요?”
“그래, 모처럼 쉬는 날이다.”
“에이, 쉬는 날은 형수님이랑 같이 보내시지 않고 맹에는 뭐하러 오셨어요.”
“만날 보는 여편네 얼굴 보고 있으면, 그게 어디 쉬는 날이냐?”
곽호가 푸념조로 말을 뱉자, 장거운이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흠, 발언 수위가 조금 위험한데요. 오늘따라 형수님이 만들어 주셨던 동파육이 팍팍 당기네. 흐흐흐.”
“어허! 큰일 날 소리. 오늘은 내가 동파육보다 더 맛난 것을 주마.”
곽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건네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대바구니를 풀었다.
장거운이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그게 뭔데요?”
“옜다. 이거 받아라.”
“이게 뭔데요?”
엉겁결에 곽호가 건넨 대바구니를 받아 든 장거운이 바구니의 뚜껑을 열어 보며 말을 건넸다.
“뭐긴, 육포다. 거 왜 푸줏간 하는 장씨 놈 있잖냐?”
“참, 그분은 어떻게 지내세요?”
오죽색마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서럽게 울던 장육의 모습을 떠올리며 장거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자, 곽호가 조금은 처연한 어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긴, 늘어진 소불알처럼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 매가리 없이 빌빌거리고 살지. 안 그래도 그 인간 어찌 사는가 싶어서 가 봤더니, 장가 놈이 너랑 두 분 당주님 갖다 드리라고 육포를 싸 주더라.”
“에이, 그럼 형님이 사 오신 게 아니네요.”
“아니긴! 그래도 내가 그냥 받아 가지고 올 수야 있냐? 화주라도 한 사발 사 먹으라고 좀 찔러 주고 왔지.”
“역시! 잘하셨어요, 헤헤.”
장거운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거운의 칭찬에 곽호는 조금은 머쓱한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그래도 이 형님이 그 정도 기본은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근데 또 당직이냐?”
“예, 열흘 동안 벌 당직이에요.”
“헐, 혼자서?”
“아뇨, 쩝, 얼음귀신이랑요.”
“그러냐? 쯧, 청룡고 당직이 벌이 아니라 얼음귀신이랑 같이 열흘 동안 당직을 서는 게 진짜 벌이구나.”
곽호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자, 장거운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에이, 아니에요. 그래도 그 귀신이 요즘은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도 황칠이가 어제 고생을 많이 해서 더러워졌다고 목욕시키러 갔는걸요. 예전 같았으면 그 도도한 얼음귀신이 똥개 목욕 같은 걸 시키겠어요?”
“흠흠, 그게…….”
다시 말을 건네려던 곽호는 냉가혜가 청룡각으로 통하는 출입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입을 닫았다.
월월! 크르렁!
황칠이 쫄랑쫄랑 뛰어와서는 마치 장거운이 자신을 똥개라고 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몸을 낮추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 대고 있었다.
장거운은 그런 황칠의 모습이 귀여운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을 걸었다.
“어? 황칠이 너 이 자식, 목욕하다 도망 나왔냐? 그래도 깨끗한 걸 보니 다 씻고 도망친 모양이네. 얼음귀신은 어디 갔냐?”
“거, 거운아!”
냉가혜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것을 본 곽호가 다급하게 장거운을 불렀다.
어느새 다가온 냉가혜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얼음귀신 여기 있는데 왜 찾냐?”
“어, 어? 왔냐? 일찍 끝났네. 유, 육포 먹을래?”
갑작스런 냉가혜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장거운이 손에 들고 있던 육포 바구니를 내밀며 말을 건넸다.
웡! 웡!
대답은 육포 냄새를 맡고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황칠이 하고 있었다.
장거운이 황칠을 보면서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아니, 황칠이 너 말고…….”
“그래, 줘 봐!”
“어, 여, 여기.”
“뭐야? 이것밖에 안 줘? 한 보따리 있구먼, 치사하게.”
냉가혜는 장거운이 바구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서 건네자 입을 내밀며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거운은 낯선 냉가혜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바구니째로 건네고 있었다.
“어? 그, 그래. 더 먹어. 너 먹고 싶은 만큼 다 가져가.”
“정말? 그럼 나 다 가져간다.”
냉가혜가 치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냉큼 바구니를 받아 들자 곽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 거운아, 당주님 드릴 건 남겨 둬야지.”
“참! 가혜야, 그거 조금만 돌려주면 안 될까? 당주님도 드려야 하는데.”
“뭐야, 치사하게 줬다가 뺏네. 그렇지, 황칠아? 자, 이거 먹어라.”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건네자, 냉가혜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며 다시 바구니를 장거운에게 던지듯이 건네고는 육포 한 조각을 황칠에게 건넸다.
웡웡!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육포를 씹고 있는 황칠을 보고 있던 냉가혜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곽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곽 위사님. 인사가 늦었네요.”
“예? 아이고! 죄송합니다, 냉 무사님! 제가 경황이 없어서…….”
갑작스러운 냉가혜의 인사에 곽호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자, 냉가혜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마세요.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동생 친구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그래도 그게…….”
“에이, 괜찮아요. 제가 나이도 한참 어린데, 그렇게 불편해하시면 저도 불편하잖아요. 그냥 거운이한테 하듯이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그럴까? 하하, 이거 참…….”
냉가혜에게서 진정이 느껴지자 곽호는 조금 용기를 내어 어색하게 말을 놓아 보았지만, 좀처럼 쉽게 적응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색한 곽호의 표정과는 달리 냉가혜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세요. 호호호.”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냉가혜의 얼굴을 보자 장거운은 묘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는 왜 사람들이 그녀를 천하 삼대미인의 한 명으로 칭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녀가 곽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던 장거운은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냉가혜를 쳐다보았다.
냉가혜는 장거운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약간은 쑥스러운 모양인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말을 뱉었다.
“왜? 왜 이상하게 사람을 쳐다봐?”
장거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흠, 너 혹시 황칠이 먹을 약 뺏어 먹었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는 네가 하고 있잖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던데, 너 갑자기 왜 이러냐?”
“너야말로 진짜 죽어 볼래?”
냉가혜가 살짝 눈을 치켜뜬 채 검파에 손을 가져가며 말을 뱉자, 장거운이 턱에 손을 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 말하는 거 보면 정상인데…….”
“흐, 이 판국에 니들은 노닥거리고 놀 힘이 있어 보이니 좋구나.”
장거운과 냉가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사공한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는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부대주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래, 무슨 일이 아니라 무서운 일이 있다. 에효, 비자상유승자(飛者上有乘者)라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구나.”
사공한이 낙심한 표정으로 이상한 문자를 섞어 가며 중얼거리자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곽호가 장거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물었다.
“저게 무슨 말이냐?”
“그냥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그런 말이에요.”
장거운이 곽호에게 대답을 해 주는 사이 냉가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사공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에둘러 말하지 말고 바로 좀 말해 봐요.”
장거운과 냉가혜의 고개가 갑자기 우측으로 돌아갔다. 수십 명이 말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무림맹의 정문 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백호당?’
달려가고 있는 무리들이 백호당임을 알아보고는 장거운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리자, 냉가혜도 무리들 속에 사형인 청풍일검 영호군과 언충기 등이 섞여 있음을 보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백호당이네. 백호당이 웬일로 출동을 다하네.”
백호당이 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사공한이 기막히다는 듯이 혼잣말을 뱉고 있었다.
“허! 담호호지(談虎虎至)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놈들이 딱 그 꼴이네.”
사공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거운이 멀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백호당이 뭘 어쨌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저놈들이 백가장 사건을 맡았다니깐!”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호당이 백가장 사건을 맡다니요?”
“낸들 알겠냐? 갑자기 당주님이 회의 마치고 오시더니 백가 남매와 백가장 사건에 관한 자료 일체를 백호당에 인계하라고 하시더라. 지금 청룡각 분위기는 때 이른 삭풍이 몰아치고 있구나.”
사공한의 말에 놀란 장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묻자 사공한이 퉁명스럽게 반문을 하고는 조금 전에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했다.
사공한의 말에 냉가혜가 펄쩍 뛰며 말을 뱉었다.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백호당이 사건을 뺏어 간다는 말이에요?”
사공한이 냉가혜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장거운이 다급하게 남궁천호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당주님은? 당주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글쎄다. 아까 외당의 황보 당주님이랑 의당의 당 당주님이랑 찾아오셔서 다들 함께 진화루에 간다고 하시는 것 같던데…….”
“대주님, 여기 잠깐만 봐주세요.”
사공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장거운이 다급하게 말을 건네고는 진화루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엉?”
사공한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사라져 가는 장거운을 쳐다보자, 냉가혜가 장거운을 향해 소리를 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어? 거운아! 나도 같이 가자꾸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곽호도 슬쩍 눈치를 보며 진화루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졸지에 혼자 남아서 청룡고의 당직을 떠맡게 된 사공한이 뒤늦게 버럭 소리를 쳤다.
“뭐야! 나만 남겨 두고 다 어딜 가는 겨?”
월월!
사공한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육포를 다 먹고 난 황칠의 짖는 소리뿐이었다.
사공한이 황칠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 그래도 너는 남아 있구나.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이라,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하더니, 날 버리고 가는 저놈들보다 내 옆에 있어 주는 말 못하는 짐승인 네가 진정한 내 편이구나.”
월월!
사공한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육포를 더 달라고 하는 것인지, 황칠은 그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짖고 있을 뿐이었다.
제6장 백호당(白虎堂)
백가장의 일로 인해 긴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열리고 있는 무림맹의 의사청은 제형안찰사인 하진문의 가문이자 북경 하가상단의 지부인 하가장과 관군이 개입한 것 같다는 남궁천호의 말에 크게 소란이 일고 있었다. 남궁천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 자! 다들 조용히 해 주시오. 이제까지 이번 백가장의 사건에 대한 개요를 들었으니, 순찰당주가 의견을 말해 보시오.”
맹주인 매화검군 화중혁이 소란스러워진 좌중을 진정시키며 순찰당주인 만리신풍 노웅에게 말을 건넸다.
노웅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실 하가장은 이번 백가장의 사건뿐만 아니라, 흉악한 간살범으로 유명한 오죽색마의 사건과도 연관이 있어 저희 순찰당에서 집중적으로 감시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특별히 수상한 점을 찾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들 아시겠지만, 남궁 당주가 언급한 벽파쌍검 적우기라는 자는 일개 호장무사대의 대주로 있을 만한 자가 아니어서, 그자가 하가장에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캐고 있는 중입니다.”
“흠, 적우기라면 광동에서 흑두삼마를 베었다고 하던 해남 출신의 그자 말이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적우기입니다.”
노웅의 말에 화중혁이 살짝 의아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긴 하군. 아무리 하가장이라지만, 그 정도의 고수가 일개 호장무사대를 맡고 있다니 말이오. 그 점 말고 다른 것은 뭐 없소?”
“예, 현재로써는 하가장의 움직임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화중혁은 노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백가장을 습격한 것으로 보이는 관군들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소?”
“그것이…… 도지휘사사에 알아본 결과 조금 애매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애매한 대답이라니?”
“어젯밤에 청룡당의 전언을 받고 도지휘사사에 물어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덕청현으로 이동한 병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그 마운곡의 분지에서 봤다는 흑호군이라는 부대와 위지웅이라는 정천호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오늘 아침에 도지휘사사에 갔는데, 흑호군이라는 부대가 있으며 모종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영내를 벗어나 있어 그들의 이동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위지웅이라는 장수의 신분도 확인을 해 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마운곡의 그자들이 관군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애매하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노웅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을 했다. 그로서도 확언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외당 당주인 황보명이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을 뱉었다.
“도지휘사사에 무슨 비밀 부대가 있다는 거요?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남해에서 왜구 놈들하고 노닥거릴 일이지, 막간산에서 뭘 한다는 말이오?”
“그걸 낸들 알겠나?”
노웅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자,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일단 하가장에 혐의를 둔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군요. 첫째는, 하가장이 자신들의 수하를 관군으로 위장하여 백가장을 습격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가장이 흑호군이라는 관군의 비밀 부대를 움직여 백가장을 습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지휘사사에서 말 바꾸기를 한 것은 하가장의 압력이라면 충분히 설명이 되는 일입니다.”
“하가장의 압력으로 도지휘사사가 말을 바꿀 수 있다는 제갈 당주님의 말씀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지금 절강 도지휘사인 소병용은 하진문의 처남입니다. 하가상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도지휘사가 된 자이지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노웅의 말에 화중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진문이라면 그를 움직일 수 있겠지. 그렇다면 결국 하가장과 도지휘사사가 손을 잡고 벌인 일이라는 말인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겠군.”
“하하하! 모두들 너무 사건의 결과에만 집착을 하시는군요.”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연 사람은 백호당의 당주를 맡고 있는 운룡검 백리문이었다.
그는 약간은 마른 듯이 보이는 체격에 하얗고 섬세한 여성적인 얼굴을 가졌으며 목소리까지 여자처럼 가늘지만, 성격은 오히려 대단히 호방하여 대내외적으로 발이 넓어 두루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특히 오대세가의 일원인 백리세가의 소가주이자 청성파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청룡당주인 창천검룡 남궁천호와 더불어 오가쌍룡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백리문의 말에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화중혁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흠, 백리 당주의 말은 무슨 뜻인가?”
“예, 제 말은 먼저 누가 무슨 이유로 백가장을 멸문시켰나 하는 것을 짚어 보자는 말입니다. 오죽색마인가 뭔가 하는 놈이야 제 꼴리는 대로 사건을 저지르고 다니겠지만, 백가장의 사건은 기분 나쁘다고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그럼 자네는 흉수들이 무엇을 노렸다고 보는가?”
“흉수들의 목적이야 당연히 백가장의 검고에 있는 검들이겠지요. 다만, 저는 많은 분들이 흉수로 지목하고 있는 하가장이 백가장의 검을 노리고 도지휘사까지 움직여 가며 일을 벌일 이유가 있나 하는 것이 의문스럽다는 말입니다.”
백리문의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과연 하가장이 무엇을 노리고 백가장을 습격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군색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가장은 백가장보다 더 큰 규모의 검장가인 만검장의 실질적인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백가장의 검이 질이 좋고 고가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만검장 역시 얼마든지 질 좋은 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곳이었다. 굳이 하가장이 백가장의 검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황보명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말을 뱉었다.
“혹시, 그거 만검장이 부탁한 것 아닐까요? 경쟁자인 백가장을 없애 달라고 말이오. 아니면 하가장이 검의 판매를 독점하기 위해서 백가장을 사려고 했는데, 백가장주가 거부를 하는 바람에 해치운 것 아니겠소?”
“재밌는 추리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네. 만검장은 지금도 절강성에서 검의 판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그리고 하가장에서 백가장에 눈독을 들였다면, 이미 만검장을 설립하는 단계에서 사들이지 왜 갑자기 이제 와서 백가장을 사들이겠다고 나섰겠나?”
“그야 뭐, 갑자기 당길 수도 있지 않나? 우리가 만날 돼지고기만 먹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잘 안 먹던 쇠고기가 당기는 것처럼 말이야.”
“흠흠! 황보 당주, 그 비유는 조금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 그럼 백리 당주는 하가장이 백가장을 칠 이유가 없어서 혐의를 둘 수 없다는 말이오?”
화중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백리문이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하가장에 혐의를 둘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혐의를 두고 싶다는 말입니다. 하가장은 원래가 상인 가문입니다. 상인이라는 자들의 특성은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고 믿지요.”
백리문의 말에 이제껏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천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의 말은 하가장이 사주를 한 것이 아니고 돈을 받고 협조를 하였다는 말인가?”
“그렇지! 역시 자넨 바로 알아듣는군.”
백리문의 말에 제갈후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말을 뱉었다.
“그럼 누가 하가장에 돈을 들이밀고 백가장의 검을 원했단 말인가?”
“제 생각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해남파입니다. 알다시피 해남파는 검파이기는 하지만 섬에 고립되어 양질의 검을 많이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곳입니다. 백가장의 검들을 욕심낼 만하지요. 게다가 해남파의 제자인 적우기가 계속 거론되고 있는 점도 수상하지요.”
“흠, 정파로 알려진 해남파가 그런 짓을 했다……. 다른 가능성은?”
화중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다시 묻자 백리문의 대답이 이어졌다.
“물론 아무래도 정파인 해남파가 그런 짓을 벌였다고 보기에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요. 하지만 언제나 골칫덩어리들인 사황련과 마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황련과 마교라고?”
말을 뱉은 화중혁뿐만 아니라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리문이 지난 십 년 동안 잠잠했던 사황련과 마교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서서히 움직일 시기가 된 것도 같아 사람들이 더욱 놀라고 있는 것이다.
백리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좋은 검과 뛰어난 장인을 원하는 자들이지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화중혁이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듣고 보니 백리 당주의 말대로 사황련과 마교가 하가장에 청탁을 넣어 관군으로 위장한 것일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니 그놈들이 아니면 갑자기 청룡당과 맞설 정도로 실력 있는 무사들이 어디서 떼거지로 몰려 나왔겠는가?”
“맹주님! 단지 추측일 뿐입니다.”
화중혁이 백가장의 사건을 사황련이나 마교가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는 백리문의 말에 크게 공감을 하는 듯하자, 남궁천호가 강하게 항변을 했다. 자칫하면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흐려질 수 있었다.
백리문이 다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원래가 범인을 잡는 것이든 악적을 때려잡는 것이든 모두 다 추측에서 시작되는 법이지 않은가? 어쨌든 범인이 해남파가 되었건 아니면 사황련이나 마교가 되었건 간에, 이번 백가장 사건은 청룡당이 아니라 우리 백호당에서 맡아야 할 것 같군.”
“백리문! 무슨 소리냐? 이번 일에 우리 청룡당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아느냐?”
남궁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그러나 백리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아아, 물론 청룡당의 보위사들이 열 명이나 죽었더군. 그 점은 애석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각자가 서로 맡은 일이 있으니 어쩌겠나. 분명히 이번 사건은 우리 백호당에서 맡을 일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까, 맹주님?”
“흠, 그게…… 아무래도 청룡당은 지금 오죽색마의 일도 있고 하니 백가장의 사건은 백호당에서 맡고, 청룡당은 오죽색마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맹주님!”
남궁천호가 소리를 치며 화중혁을 쳐다보았지만, 화중혁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 당주의 입장에서는 물론 부하들도 많이 잃었고 하니 끝까지 해결하고 싶겠지만, 그게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오죽색마를 잡는 일에 전념해 주게.”
“…….”
남궁천호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백리문은 남궁천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중혁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나중에 제가 직접 백호당의 무사들을 이끌고 마운곡으로 가서 그곳에 있다는 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사황련이나 마교의 놈들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 놈들이 아무리 관군으로 위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다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번 사건은 백호당에서 맡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원래 맹의 규정에도 무림의 십오대문파나 사황련, 혹은 마교로 의심되는 자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조사는 백호당에서 맡게 되어 있습니다. 해남파도 십오대문파에 속하며, 물론 사황련이나, 마교일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말을 하고 나선 사람은 이제껏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감찰당의 당주인 복마삼절 유운생이었다. 그는 공동파의 출신으로 무림맹의 당주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다.
매우 중립적인 인물로 알려진 유운생의 말이 결정적이었는지 화중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백가장의 사건은 백호당이 맡는 것으로 하고, 일단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
화중혁이 말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청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각 당의 당주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지만 남궁천호는 멍하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우같은 백리문에게 제대로 한 방 맞은 것이다.
남궁천호의 옆을 지나가던 백리문이 배시시 미소를 흘리며 말을 건넸다.
“청룡당에서 보호하고 있는 백가 남매와 백가장 사건에 관한 자료들은 최대한 빨리 넘겨주고 자넨 열심히 색마나 따라다니라고. 하하하!”
“이익!”
남궁천호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았지만, 이미 결정 난 사항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영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그만 가세. 진화루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그래, 어차피 하가장과 엮여서 골치 아픈 일인데 잘됐네, 뭐.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황보명이 거들고 나섰다.
“…….”
그러나 남궁천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앉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 * *
“거운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청룡고 앞을 서성거리던 장거운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곽호가 손을 흔들며 빙긋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거운이 급히 다가가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어! 형님! 오늘 쉬는 날이세요?”
“그래, 모처럼 쉬는 날이다.”
“에이, 쉬는 날은 형수님이랑 같이 보내시지 않고 맹에는 뭐하러 오셨어요.”
“만날 보는 여편네 얼굴 보고 있으면, 그게 어디 쉬는 날이냐?”
곽호가 푸념조로 말을 뱉자, 장거운이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뱉었다.
“흠, 발언 수위가 조금 위험한데요. 오늘따라 형수님이 만들어 주셨던 동파육이 팍팍 당기네. 흐흐흐.”
“어허! 큰일 날 소리. 오늘은 내가 동파육보다 더 맛난 것을 주마.”
곽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건네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대바구니를 풀었다.
장거운이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 그게 뭔데요?”
“옜다. 이거 받아라.”
“이게 뭔데요?”
엉겁결에 곽호가 건넨 대바구니를 받아 든 장거운이 바구니의 뚜껑을 열어 보며 말을 건넸다.
“뭐긴, 육포다. 거 왜 푸줏간 하는 장씨 놈 있잖냐?”
“참, 그분은 어떻게 지내세요?”
오죽색마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서럽게 울던 장육의 모습을 떠올리며 장거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자, 곽호가 조금은 처연한 어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어떻게 지내긴, 늘어진 소불알처럼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 매가리 없이 빌빌거리고 살지. 안 그래도 그 인간 어찌 사는가 싶어서 가 봤더니, 장가 놈이 너랑 두 분 당주님 갖다 드리라고 육포를 싸 주더라.”
“에이, 그럼 형님이 사 오신 게 아니네요.”
“아니긴! 그래도 내가 그냥 받아 가지고 올 수야 있냐? 화주라도 한 사발 사 먹으라고 좀 찔러 주고 왔지.”
“역시! 잘하셨어요, 헤헤.”
장거운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거운의 칭찬에 곽호는 조금은 머쓱한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그래도 이 형님이 그 정도 기본은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근데 또 당직이냐?”
“예, 열흘 동안 벌 당직이에요.”
“헐, 혼자서?”
“아뇨, 쩝, 얼음귀신이랑요.”
“그러냐? 쯧, 청룡고 당직이 벌이 아니라 얼음귀신이랑 같이 열흘 동안 당직을 서는 게 진짜 벌이구나.”
곽호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자, 장거운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에이, 아니에요. 그래도 그 귀신이 요즘은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도 황칠이가 어제 고생을 많이 해서 더러워졌다고 목욕시키러 갔는걸요. 예전 같았으면 그 도도한 얼음귀신이 똥개 목욕 같은 걸 시키겠어요?”
“흠흠, 그게…….”
다시 말을 건네려던 곽호는 냉가혜가 청룡각으로 통하는 출입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히 입을 닫았다.
월월! 크르렁!
황칠이 쫄랑쫄랑 뛰어와서는 마치 장거운이 자신을 똥개라고 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몸을 낮추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 대고 있었다.
장거운은 그런 황칠의 모습이 귀여운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을 걸었다.
“어? 황칠이 너 이 자식, 목욕하다 도망 나왔냐? 그래도 깨끗한 걸 보니 다 씻고 도망친 모양이네. 얼음귀신은 어디 갔냐?”
“거, 거운아!”
냉가혜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것을 본 곽호가 다급하게 장거운을 불렀다.
어느새 다가온 냉가혜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얼음귀신 여기 있는데 왜 찾냐?”
“어, 어? 왔냐? 일찍 끝났네. 유, 육포 먹을래?”
갑작스런 냉가혜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장거운이 손에 들고 있던 육포 바구니를 내밀며 말을 건넸다.
웡! 웡!
대답은 육포 냄새를 맡고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황칠이 하고 있었다.
장거운이 황칠을 보면서 손사래를 치며 말을 뱉었다.
“아니, 황칠이 너 말고…….”
“그래, 줘 봐!”
“어, 여, 여기.”
“뭐야? 이것밖에 안 줘? 한 보따리 있구먼, 치사하게.”
냉가혜는 장거운이 바구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서 건네자 입을 내밀며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거운은 낯선 냉가혜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바구니째로 건네고 있었다.
“어? 그, 그래. 더 먹어. 너 먹고 싶은 만큼 다 가져가.”
“정말? 그럼 나 다 가져간다.”
냉가혜가 치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냉큼 바구니를 받아 들자 곽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 거운아, 당주님 드릴 건 남겨 둬야지.”
“참! 가혜야, 그거 조금만 돌려주면 안 될까? 당주님도 드려야 하는데.”
“뭐야, 치사하게 줬다가 뺏네. 그렇지, 황칠아? 자, 이거 먹어라.”
장거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건네자, 냉가혜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며 다시 바구니를 장거운에게 던지듯이 건네고는 육포 한 조각을 황칠에게 건넸다.
웡웡!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육포를 씹고 있는 황칠을 보고 있던 냉가혜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곽호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곽 위사님. 인사가 늦었네요.”
“예? 아이고! 죄송합니다, 냉 무사님! 제가 경황이 없어서…….”
갑작스러운 냉가혜의 인사에 곽호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자, 냉가혜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마세요.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동생 친구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그래도 그게…….”
“에이, 괜찮아요. 제가 나이도 한참 어린데, 그렇게 불편해하시면 저도 불편하잖아요. 그냥 거운이한테 하듯이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그럴까? 하하, 이거 참…….”
냉가혜에게서 진정이 느껴지자 곽호는 조금 용기를 내어 어색하게 말을 놓아 보았지만, 좀처럼 쉽게 적응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색한 곽호의 표정과는 달리 냉가혜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세요. 호호호.”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냉가혜의 얼굴을 보자 장거운은 묘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는 왜 사람들이 그녀를 천하 삼대미인의 한 명으로 칭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녀가 곽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던 장거운은 고개를 이리저리 틀며 냉가혜를 쳐다보았다.
냉가혜는 장거운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약간은 쑥스러운 모양인지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말을 뱉었다.
“왜? 왜 이상하게 사람을 쳐다봐?”
장거운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흠, 너 혹시 황칠이 먹을 약 뺏어 먹었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는 네가 하고 있잖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던데, 너 갑자기 왜 이러냐?”
“너야말로 진짜 죽어 볼래?”
냉가혜가 살짝 눈을 치켜뜬 채 검파에 손을 가져가며 말을 뱉자, 장거운이 턱에 손을 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 말하는 거 보면 정상인데…….”
“흐, 이 판국에 니들은 노닥거리고 놀 힘이 있어 보이니 좋구나.”
장거운과 냉가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사공한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는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부대주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래, 무슨 일이 아니라 무서운 일이 있다. 에효, 비자상유승자(飛者上有乘者)라더니 우리가 딱 그 꼴이구나.”
사공한이 낙심한 표정으로 이상한 문자를 섞어 가며 중얼거리자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곽호가 장거운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물었다.
“저게 무슨 말이냐?”
“그냥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그런 말이에요.”
장거운이 곽호에게 대답을 해 주는 사이 냉가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사공한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에둘러 말하지 말고 바로 좀 말해 봐요.”
장거운과 냉가혜의 고개가 갑자기 우측으로 돌아갔다. 수십 명이 말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무림맹의 정문 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백호당?’
달려가고 있는 무리들이 백호당임을 알아보고는 장거운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리자, 냉가혜도 무리들 속에 사형인 청풍일검 영호군과 언충기 등이 섞여 있음을 보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백호당이네. 백호당이 웬일로 출동을 다하네.”
백호당이 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사공한이 기막히다는 듯이 혼잣말을 뱉고 있었다.
“허! 담호호지(談虎虎至)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놈들이 딱 그 꼴이네.”
사공한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거운이 멀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백호당이 뭘 어쨌는데요?”
“어쩌긴 뭘 어째, 저놈들이 백가장 사건을 맡았다니깐!”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호당이 백가장 사건을 맡다니요?”
“낸들 알겠냐? 갑자기 당주님이 회의 마치고 오시더니 백가 남매와 백가장 사건에 관한 자료 일체를 백호당에 인계하라고 하시더라. 지금 청룡각 분위기는 때 이른 삭풍이 몰아치고 있구나.”
사공한의 말에 놀란 장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묻자 사공한이 퉁명스럽게 반문을 하고는 조금 전에 벌어졌던 상황을 설명했다.
사공한의 말에 냉가혜가 펄쩍 뛰며 말을 뱉었다.
“말도 안 돼요!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백호당이 사건을 뺏어 간다는 말이에요?”
사공한이 냉가혜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장거운이 다급하게 남궁천호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당주님은? 당주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글쎄다. 아까 외당의 황보 당주님이랑 의당의 당 당주님이랑 찾아오셔서 다들 함께 진화루에 간다고 하시는 것 같던데…….”
“대주님, 여기 잠깐만 봐주세요.”
사공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장거운이 다급하게 말을 건네고는 진화루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엉?”
사공한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사라져 가는 장거운을 쳐다보자, 냉가혜가 장거운을 향해 소리를 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어? 거운아! 나도 같이 가자꾸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곽호도 슬쩍 눈치를 보며 진화루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졸지에 혼자 남아서 청룡고의 당직을 떠맡게 된 사공한이 뒤늦게 버럭 소리를 쳤다.
“뭐야! 나만 남겨 두고 다 어딜 가는 겨?”
월월!
사공한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육포를 다 먹고 난 황칠의 짖는 소리뿐이었다.
사공한이 황칠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 그래도 너는 남아 있구나.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이라,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하더니, 날 버리고 가는 저놈들보다 내 옆에 있어 주는 말 못하는 짐승인 네가 진정한 내 편이구나.”
월월!
사공한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육포를 더 달라고 하는 것인지, 황칠은 그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짖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