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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장거운과 냉가혜가 진화루에 들어서자 점소이인 왕팔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옵…… 어? 거운이 형!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래, 잘 있었느냐? 혹시 우리 당주님 안 오셨냐?”
“어느 당주님요?”
“인석아! 어느 당주님이라니, 거운이가 우리 당주님이라고 하면 당연히 청룡당주님이시지.”
뒤늦게 진화루로 들어선 곽호가 말을 뱉었다.
곽호를 본 왕팔이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넸다.
“어? 곽 위사님도 오셨네. 오늘따라 당주님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하여튼 누군지는 잘 모르겠고, 이층에 올라가 보세요. 거기 무림맹의 당주님들이 아주 우글거려요.”
“뭔 소리냐, 당주님들이 우글거리다니? 아무튼 거운아, 이층에 있는 모양이다. 올라가 보자.”
곽호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말을 뱉고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층으로 올라온 장거운 등은 왕팔이 왜 당주님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층의 창가에는 남궁천호를 비롯해서 당영기와 황보명, 그리고 노웅 등 네 명의 무림맹 당주와 의당의 부당주인 당영영과 청룡이대주 악우진까지 같이 자리를 하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거운이 자리로 다가가자 직속상관인 악우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청룡고는 어찌하고 너희들이 여기 왔느냐?”
“부대주님이 대신 당직을 서 주시고 계십니다.”
“사공한이 왜 너희들 대신 당직을 선다는 말이냐?”
“그게…….”
악우진이 냉랭한 어조로 묻자 장거운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장거운을 쳐다본 당영영이 반색을 하며 말을 걸었다.
“어머! 우리 동생 왔네. 이리 와 앉아. 누가 서든 당직만 서고 있으면 됐지, 뭘 그래?”
“어, 그래그래, 어서들 와라. 곽 형도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앉으시오.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고 뭘 그리 어려워하시오.”
당영영의 말에 황보명이 얼른 일어나서 맞장구를 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곽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문난 공처가답게 당영영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최고의 순발력을 보이는 황보명이었다.
장거운 등이 모두 자리에 앉자, 노웅이 장거운에게 술을 권했다.
“괴물, 한 잔 해라. 네놈이 이번에 고생 좀 했다며?”
“고생은 뭘요. 저보다 황칠이가 고생을 많이 했죠.”
“흐, 그 녀석이 이젠 나보다 네놈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니만, 그냥 네놈이 데려다 기를래?”
“저야 뭐, 주시면 좋죠.”
장거운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을 하자 노웅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흥이다, 이놈아! 남들은 뭐 내가 복날에 잡아먹으려고 그놈을 기른다는 둥 헛소리를 해 대는데, 그놈 보통 개가 아니야. 그놈 아비가 황제폐하의 애견이었단 말이지.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 말을 알아듣도록 철저하게 교육도 받았고 말이야. 그런 놈을 그냥 달라고?”
“젠장, 개새끼가 무슨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그래요? 거 똥개 한 마리 가지고 어지간히 유세 떠시네.”
“뭐야, 니들이 개를 알아?”
황보명이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노웅이 버럭 고함을 쳤다.
“흥, 개는 몰라도 개 맛은 알죠.”
옆에서 듣고 있던 당영영이 냉랭하게 대꾸를 했다.
당영영의 대꾸에 노웅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남궁천호가 노웅을 만류하며 장거운에게 말을 걸었다.
“그만하십시오. 그래, 거운이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냐?”
“예, 조금 전 백호당이 출동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그렇게 되었다. 어찌하겠느냐? 명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남궁천호가 술잔을 비우며 대답을 하자 황보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명이 아니라 맹주님이 그 여우같은 백리문의 혓바닥에 넘어간 거잖아.”
“원래 그 인간은 옛날부터 재수가 없었어요.”
“그래, 맞아! 그 여우같은 자식이 젊었을 때 우리 영영이를 꼬셔 보려고 어지간히 따라다녔지.”
“흥, 누가 그딴 인간한테 넘어간대요? 어림도 없었어요.”
“그럼, 그럼! 당신은 절대로 그런 혀만 번드르르한 자식한테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당영영이 살짝 눈을 흘기며 말을 하자 황보명이 입을 헤벌쭉 벌리며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같은 오대세가 출신들인지라 백리세가 출신인 백리문과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어지간히 그를 싫어했던 모양이었다.
노웅이 죽이 척척 맞는 황보명과 당영영 부부를 실눈을 뜨고 째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참, 지랄도 쌍으로 하고 있네. 고만들 해라, 잉!”
“어머, 부러우면 노 당주님도 장가드세요.”
“염병! 염장 질러서 누구 보내고 싶냐?”
그렇게 노웅과 황보명 등이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냉가혜가 악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명분으로 백호당이 나선 거예요?”
“하가장은 백가장을 칠 명분이 없기 때문에 그 관군 놈들은 사황련이나 마교 놈들이 분명하니 저희들이 나서야 된다고 했다더군.”
악우진의 말을 들은 노웅이 언성을 높이며 격하게 말을 뱉어 냈다.
“그러니까 백리문 그 자식이 청룡당뿐만 아니라 우리 순찰당도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라니깐! 순찰당에는 전혀 보고가 없었는데, 뭐? 사황련이나 마교 놈들이 움직였다고? 그놈들이 대가리에 칼 맞았냐? 이제껏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찌그러져 있던 놈들이 맹의 코앞에서 그딴 짓을 벌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명분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다. 만검장이라고 하는 절강성 최대의 검장가를 가지고 있는 하가장이 무엇이 아쉬워서 백가장을 치겠냐고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는다니까 그러네. 원래 열 개를 가진 놈이 한 개를 더 가지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놈 등치는 게 세상의 이치고, 만날 고기 먹는 놈도 가끔은 풀이 먹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거든.”
남궁천호의 말에 황보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가장에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남궁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그럴 테지. 한데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 혹시 최근에 백가장과 관련되어 들어온 소식이 없습니까?”
“멸문 이전에 백가장에 관련된 소식은 한 건도 없었네.”
노웅은 남궁천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들 하가장이 백가장을 멸문시킨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장거운도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다가 문득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자룡창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백가장에서 최근에 보검 같은 것을 만들어 내었거나 입수한 것은 아닐까요?”
“그 점은 이미 생각해 보았다. 어제 옮겨 온 백가장의 검들 중에는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보검은 없었다.”
남궁천호의 대답에 장거운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여! 다들 여기서 뭐하는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들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유난히 눈매가 쳐진 중년인 하나가 막 이층에 오르고 있었다. 그를 본 일행들이 갑자기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청룡당의 전임 당주였던 천성검 관종호였다. 갑자기 그가 이곳에 나타나자 다들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멀뚱하게 관종호를 쳐다보고 있던 장거운은 관종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오르는 자를 알아보고는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관종호를 따라온 자는 바로 벽파쌍검 적우기였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나서 관종호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 오랜만이군. 이곳의 화주가 먹고 싶어서 들렀는데 자네들 목소리가 들리더군.”
남궁천호는 관종호의 뒤에 서 있는 적우기를 흘깃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하가장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자네 덕분에 편안하게 쉴 곳이 생긴 것이지.”
관종호가 웃으면서 대답을 하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룡당의 전임 당주인 관종호가 하가장과의 관계로 인해 사임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곳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하가장이 그리 편안한 곳은 못 될 텐데, 생각보다 잘 계신 모양이군요.”
“물론이네. 자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가장은 나 같은 사람이 머무르기에는 최고로 편안한 곳이지. 자네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자네 정도라면 대환영일 테니까 말이야.”
웃으면서 대꾸를 하고 있는 관종호를 보며 남궁천호는 평소 그의 모습과는 달리 차갑게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관종호를 밀어낸 당사자이기도 했지만, 과거 같이 청룡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부터 워낙에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었던 탓에 그런 모양이었다.
한편, 남궁천호가 관종호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다면, 장거운은 적우기를 향해 냉랭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남궁천호를 보고 있던 적우기도 장거운의 눈빛을 의식하였는지 고개를 돌려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적우기는 장거운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두 번이나 보았는데 모를 리가 없지요.”
장거운의 냉랭한 대꾸에 적우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흠, 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그때 오죽색마인가 하는 자를 쫓아왔던 청룡무사인가?”
“그렇소.”
적우기는 대답을 하는 장거운의 가슴에 새겨진 청룡을 보고는 뒤늦게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그렇군. 그때 어두워서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 눈빛은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인가?”
“내가 어제 본 사람이 당신이 맞는지, 다시 확인을 하고 있는 중이오.”
“흠, 어제라……. 어디서 날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 사람이 내가 맞는가?”
“확실히 당신이 맞소. 백가장을 습격한 흉수 놈들과 같이 군막 안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더군.”
적우기가 여유롭게 미소를 띠며 묻자, 장거운이 굳어진 얼굴로 대꾸를 했다.
“거운!”
남궁천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거운이 너무 경솔하게 말을 뱉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적우기가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말을 뱉고 있었다.
“어린놈이 말을 심하게 하는군.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모함을 하는 것이냐?”
“모함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당신이 백가장과 관도에서 우리를 습격한 그놈들과 같이 있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창! 창!
“놈! 죽고 싶으냐?”
장거운이 성난 얼굴로 외치자 쌍검을 뽑아 든 적우기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검을 뽑아 든 적우기는 절정고수답게 매서운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전혀 상대의 기세를 두려워함이 없이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뱉고 있었다.
“흥, 당신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소?”
장거운의 예기치 못한 도발에 장내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나 곧이어 그러한 긴장감은 적우기와 맞서고 있는 장거운에게로 중인들의 시선이 몰리면서 점차 묘한 호기심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청룡무사라고는 하나 이제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장거운의 기세가 절정고수로 이름을 떨쳐 온 적우기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장거운에게 멸시를 당해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적우기의 행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막상 쉽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장거운의 뒤에 버티고 선 무림맹의 당주들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장거운에게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을 적우기가 아니었다. 그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그의 출수를 말리고 있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 이거 청룡당에 대단한 신입이 들어왔군.”
팽팽한 대치를 깨고 말을 뱉은 관종호는 곧바로 장거운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우리 신입 청룡무사가 패기가 좋군. 그래, 이름이 뭔가?”
“장거운입니다.”
청룡무사인 장거운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관종호가 전임 당주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관종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뱉었다.
“장거운이라, 이름이 좋군. 패기는 더욱 좋고 말이야. 마치 검룡 자네의 신입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하하하!”
“…….”
관종호의 말에 남궁천호는 굳어진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관종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지금은 서로 간에 오해가 깊어서 풀기가 어려운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기회를 갖기로 하는 게 좋겠군. 적 대주, 자네도 그만 검을 거두고 나가세.”
관종호의 말에 적우기는 장거운을 한 번 노려보고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거운! 그만하라!”
그 모습에 다시 말을 뱉으려던 장거운은, 남궁천호의 전음이 귓속에 파고들자 이를 악다물고 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자, 자! 다들 나중에 다시 보세. 오늘 정말 만나서 유쾌했네. 하하하!”
관종호가 실실거리며 말을 뱉고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종호와 적우기가 아래층으로 사라지자 노웅이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하의 천성검 관종호가 하가장의 빈객으로 있다니, 저 인간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군.”
“이왕 똥물에 발을 담갔으니, 똥물에서 헤엄이라도 치려고 하는 모양이지요.”
황보명이 노웅의 말을 받아 대꾸를 하자 남궁천호가 제지를 하고 나섰다.
“이미 떠난 사람은 이야기해서 뭣하나? 그냥 술이나 마시지. 거운, 한 잔 받아라!”
“에? 예.”
“그놈 참, 보면 볼수록 꼴통이란 말이야!”
조금 전의 날카로운 기세는 사라지고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리바리하게 대답을 하며 잔을 내미는 장거운을 보며, 노웅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 *
“허! 이건 또 무슨 마공이냐? 둘이 쌩하고 달아나서 이 몸을 고독에 떨게 하더니, 이젠 술이 떡이 돼서 나타나서는 염장을 질러? 무슨 광한마공에 이은 아수라염장이냐?”
청룡고를 지키고 있던 사공한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냉가혜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장거운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냉가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이 멍충이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요.”
“혹시 너도 취했냐? 안 어울리게 미안하다는 말을 다하네.”
“아이, 그러지 마시고요 조금만 더 있어 주세요. 멍충이 금방 눕히고 올게요.”
“헐, 얼음귀신이 술을 마시면 저렇게 변하는구나.”
사공한은 얼음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냉가혜가 애교스러운 비음으로 부탁을 하고는 청룡각의 출입문으로 향하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룡각의 입구에 이른 장거운이 댓돌 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아서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 나는 괜찮아. 꺼억! 그러니…… 음냐…….”
“멍충아! 술도 잘 못 먹으면서 준다고 그걸 다 받아먹니?”
“음, 그러게 말이야. 헤, 나 한심하지?”
냉가혜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장거운이 고개를 들어 바보처럼 웃어 보이며 물었다.
냉가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멍충아. 너 한심해. 그러니까 자꾸 바보처럼 웃지 마. 보기 싫어!”
“헤,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해. 설레발은 혼자 다 치고, 정작 해결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됐어. 그만해. 넌 할 만큼 했어. 너니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밝혀낸 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장거운이 자책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냉가혜는 측은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며 장거운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엇! 왜 이래!”
냉가혜가 뾰족하게 소리를 쳤다. 장거운이 갑자기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 것이다.
냉가혜는 장거운의 팔을 뿌리쳐야 했지만, 이어지는 장거운의 중얼거림에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누나 가슴은 정말 따뜻하네. 처음이야, 이런 따뜻한 느낌……. 고마워, 누나. 곽호 형님한테 잘해 줘서 고맙고 나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
냉가혜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장거운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장거운이 모친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이 할아버지들의 손에 자랐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따뜻함을 처음 느껴 본다는 말에 장거운을 밀쳐 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성애를 가진 여자로서의 본능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그것이 사랑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어떠한 감정이든지 간에 냉가혜는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있었고, 그녀의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으며, 어느새 그녀의 손은 장거운의 어깨를 꼭 감싸고 있었다.
장거운이 갑자기 얼굴을 들고는 빤히 쳐다보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냉가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왜 그래?”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 무슨 소리?”
“검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데…… 어? 또!”
장거운이 혼잣말을 하며 벌떡 일어서서는 즉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야!”
갑작스러운 장거운의 행동을 보고 있던 냉가혜가 눈을 치켜뜨고는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장거운이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함을 지른 뒤 장거운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 빠르게 쫓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술에 취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 전의 두 사람은 몸이 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취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제7장 피납(被拉)
장거운이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도착한 곳은 백호당의 무사들이 막간산으로 출정을 떠나 버린 탓에 텅 비어 있는 백호각의 뒤편에 자리한 작은 별원이었다. 장거운이 막 별원 앞에 도착하는 순간 두 명의 흑의인들이 외곽의 담을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급해진 장거운이 그대로 달려가면서 주먹을 뻗자,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기운이 담을 넘어가던 흑의인을 향해 섬전처럼 몰려갔다. 장거운의 주먹에서 소림의 최고 절기 가운데 하나인 백보신권이 펼쳐진 것이다.
꽝!
간발의 차이로 흑의인이 넘어가고 난 다음 도착한 백보신권의 기운이 담장에 부딪히자 폭발음과 함께 담장이 그대로 터져 나가 버렸다.
셀 수도 없이 고련하여 완벽한 자세를 익히고는 있었지만, 내기를 뿜어낼 수가 없었기에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된 위력을 보지 못한 백보신권이었다. 장거운은 무시무시한 그 위력에 멍하니 자신의 주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뒤에서 냉가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차린 장거운은 급히 별원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별원의 입구에는 두 명의 백호당 위사들이 죽어 있었고, 마당에는 백연화가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 소저!”
“호아를…… 그들이 호아를 데려갔어요.”
장거운이 급히 다가가자 백연화는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뱉고는 다시 주저앉고 있었다.
“백 소저 좀 봐줘!”
장거운이 뒤따라온 냉가혜에게 다급하게 외치고는 달아난 흑의인들을 다시 쫓기 위해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가 담장을 넘었을 때는 이미 흑의인들이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장거운은 다시 담을 넘어 별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장거운이 돌아오자 냉가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상이 너무 심해 의당으로 옮겨야겠어. 빨리 당 당주님을 모셔 와!”
“어, 그래!”
장거운이 당영기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장거운에게 호통을 친 사람은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였다. 내당과 외당의 위사들과 함께 그도 장거운의 내뻗은 백보신권의 폭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흑의인들 두 명이 백가 남매를 습격하여 백 소저가 심하게 내상을 입었고 동생인 백연호가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장거운이 급히 대답을 하자 제갈후는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는 청룡무사 장거운입니다.”
냉가혜가 장거운을 대신해서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장거운보다는 제갈후와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그녀가 대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갈후가 냉가혜를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아! 냉 소저, 자네였군. 한데 어찌 된 일인가?”
“거운의 말대로예요. 저희들은 청룡각 앞에 있었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이 지경이 되어 있었어요.”
냉가혜의 말에 제갈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여기서 나는 소리를 청룡각에서 들었단 말인가?”
“예! 그보다 백 소저를 빨리 의당으로 옮겨야 합니다!”
장거운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치며 백연화를 안아 들고 의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제갈후가 장거운을 노려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게 서거라! 감히 일개 신입 청룡무사 따위가 나의 말을 무시하느냐?”
장거운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는 고개를 돌려 제갈후를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아함경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화살을 맞은 이가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어 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어 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된 것인지 대로 된 것인지를 알아야겠소’ 그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라고 하셨소. 당주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오?”
“뭐라?”
제갈후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자, 장거운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의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장거운은 순찰당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당영기와 당영영이 백연화의 상세를 살피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궁천호를 만나기 위해 백호각의 별원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웡! 웡!
범인의 정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던 장거운은 황칠이 짖는 소리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순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장거운이 다가가자 황칠이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철창을 열어 황칠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장거운은 황칠과 함께 백호각 옆의 별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에도 황칠에게 백연호의 체취를 맡게 한 뒤 뒤를 추적하려고 작정한 것이다.
장거운이 백호각 옆의 별원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외당과 내당의 위사들 몇 명만 지키고 있을 뿐 남궁천호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급히 회의를 하기 위해 모두들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장거운은 백연호가 묵었던 방을 찾아 황칠에게 체취를 맡게 한 후 그 냄새를 따라가게 하고는,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황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황칠은 별원의 담장 밑에서 몇 번 코를 킁킁대더니 장거운이 백보신권으로 무너뜨린 담장을 통하여 밖으로 나와서는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각 정도 용형보를 펼치며 황칠의 뒤를 따르고 있던 장거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황칠이 달려가고 있는 방향이 하가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제야 장거운은 담을 넘어 달아나던 흑의인들 중 한 명이 손에 쌍검을 들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적우기가 직접 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장거운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어져 갔다.
다시 이각 정도 달려 하가장 근처에 다다른 장거운은 급히 황칠을 붙잡아 옆에 두고는 찬찬히 하가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가장의 대문은 여전히 굳건하게 잠겨 있었고, 높다란 담벼락은 거대한 철옹성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장거운은 황칠의 귀에 대고 사람에게 말을 하듯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황칠아, 맹으로 돌아가서 가혜를 찾아. 가혜 알지? 낮에 너 목욕시켜 주고 육포도 주던 그 예쁜 누나 말이야. 그 누나한테 내가 여기 있다고 가르쳐 줘. 알았지?”
웡! 웡!
황칠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두어 번 짖고는 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황칠의 혈통이 예사롭지 않다는 노웅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황칠을 보내고 난 뒤 장거운은 굳은 표정으로 하가장의 담 아래로 다가갔다. 담을 넘어 하가장 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백연호를 찾아야 했다.
장거운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기를 열 손가락에 주입한 채 하가장의 담벼락을 찍었다. 담벼락에 손가락들이 푹 하고 박혔다. 원래 검지만으로 펼치는 일지선의 지법을 열 손가락에 응용하여 펼친 것이다. 생각대로 지법이 펼쳐지자 자신감을 얻은 장거운은 양손을 번갈아 박아 가며 재빠르게 하가장의 담벼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담장 위에 올라선 장거운이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니, 군데군데 번초들이 돌아다니기는 하였지만 장원 내부는 전체적으로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 번초들의 동태를 살펴보던 장거운은 재빨리 담을 넘어 하가장의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장거운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좌측의 전각을 향해 재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던 장거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각 안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계집아이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제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했으니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가장의 여식이 그렇게 검술이 뛰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하마터면 낭패를 당할 뻔했구나.”
“아무튼 사형,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사형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정말 죄스럽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차피 너 하나 잘되자고 벌인 일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사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임을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전각의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장거운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중 하나가 적우기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의 것도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들어 본 목소리였다.
예상했던 대로 적우기가 직접 백연호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장거운이 문을 박차고 들어서려는 순간, 적우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한데 그 철황비록이 무엇이기에 하 장주가 그토록 가지려고 하는 것이냐?”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무슨 절세신공을 기록한 비급이라도 되겠지요.”
“어리석은! 절세의 비급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천하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는 것인가?”
“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으니, 그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장거운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이 잠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우기와 또 한 명의 사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드르륵!
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뛰어들려던 장거운은 대경하여 허리를 튕겨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문을 여는 순간 시퍼런 검기를 머금은 두 개의 검이 각각 그의 미간과 하복부를 찔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장거운의 존재를 눈치 채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웬 놈이냐?”
장거운이 가까스로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자 적우기와 또 한 명의 사내가 호통을 치며 밖으로 나섰다. 그자는 바로 마운곡의 분지에서 정천호의 패를 보여 주었던 위지웅이었다.
적우기가 장거운을 알아보고는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바로 장거운, 네놈이었군.”
“마운곡에서 본 놈이 맞는군요.”
위지웅도 장거운을 알아보고 말을 내뱉었다.
장거운이 적우기를 노려보며 외쳤다.
“적우기! 백연호는 어디에 있소? 명색이 정파의 고수란 자가 어린아이를 납치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꽤나 시끄럽군. 왜? 이제는 뒤를 지켜 주는 당주들이 없으니 겁이 나느냐?”
적우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위지웅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급히 달려오고 있는 부하들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적우기의 기세는 진화루에서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장거운의 외침이 이어졌다.
“닥치고 백연호나 내놓으시오!”
“마침 마운곡에서 그냥 보낸 것이 계속 찝찝했는데 제 발로 와 주니 고맙군!”
위지웅이 조소 어린 표정으로 말을 뱉으며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장거운이 위지웅을 향해 호통을 쳤다.
“스스로 황상의 어명을 수행한다고 말하던 자가 부끄럽지 않소!”
“물론 부끄럽다네. 그러니 네가 죽어 줘야겠다!”
쐐액!
위지웅이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지르자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거운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자신의 목에 검이 닿으려는 순간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장거운과 냉가혜가 진화루에 들어서자 점소이인 왕팔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옵…… 어? 거운이 형!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래, 잘 있었느냐? 혹시 우리 당주님 안 오셨냐?”
“어느 당주님요?”
“인석아! 어느 당주님이라니, 거운이가 우리 당주님이라고 하면 당연히 청룡당주님이시지.”
뒤늦게 진화루로 들어선 곽호가 말을 뱉었다.
곽호를 본 왕팔이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넸다.
“어? 곽 위사님도 오셨네. 오늘따라 당주님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하여튼 누군지는 잘 모르겠고, 이층에 올라가 보세요. 거기 무림맹의 당주님들이 아주 우글거려요.”
“뭔 소리냐, 당주님들이 우글거리다니? 아무튼 거운아, 이층에 있는 모양이다. 올라가 보자.”
곽호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말을 뱉고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층으로 올라온 장거운 등은 왕팔이 왜 당주님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이층의 창가에는 남궁천호를 비롯해서 당영기와 황보명, 그리고 노웅 등 네 명의 무림맹 당주와 의당의 부당주인 당영영과 청룡이대주 악우진까지 같이 자리를 하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거운이 자리로 다가가자 직속상관인 악우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청룡고는 어찌하고 너희들이 여기 왔느냐?”
“부대주님이 대신 당직을 서 주시고 계십니다.”
“사공한이 왜 너희들 대신 당직을 선다는 말이냐?”
“그게…….”
악우진이 냉랭한 어조로 묻자 장거운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장거운을 쳐다본 당영영이 반색을 하며 말을 걸었다.
“어머! 우리 동생 왔네. 이리 와 앉아. 누가 서든 당직만 서고 있으면 됐지, 뭘 그래?”
“어, 그래그래, 어서들 와라. 곽 형도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앉으시오.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니고 뭘 그리 어려워하시오.”
당영영의 말에 황보명이 얼른 일어나서 맞장구를 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곽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문난 공처가답게 당영영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최고의 순발력을 보이는 황보명이었다.
장거운 등이 모두 자리에 앉자, 노웅이 장거운에게 술을 권했다.
“괴물, 한 잔 해라. 네놈이 이번에 고생 좀 했다며?”
“고생은 뭘요. 저보다 황칠이가 고생을 많이 했죠.”
“흐, 그 녀석이 이젠 나보다 네놈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니만, 그냥 네놈이 데려다 기를래?”
“저야 뭐, 주시면 좋죠.”
장거운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을 하자 노웅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흥이다, 이놈아! 남들은 뭐 내가 복날에 잡아먹으려고 그놈을 기른다는 둥 헛소리를 해 대는데, 그놈 보통 개가 아니야. 그놈 아비가 황제폐하의 애견이었단 말이지.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 말을 알아듣도록 철저하게 교육도 받았고 말이야. 그런 놈을 그냥 달라고?”
“젠장, 개새끼가 무슨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그래요? 거 똥개 한 마리 가지고 어지간히 유세 떠시네.”
“뭐야, 니들이 개를 알아?”
황보명이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노웅이 버럭 고함을 쳤다.
“흥, 개는 몰라도 개 맛은 알죠.”
옆에서 듣고 있던 당영영이 냉랭하게 대꾸를 했다.
당영영의 대꾸에 노웅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남궁천호가 노웅을 만류하며 장거운에게 말을 걸었다.
“그만하십시오. 그래, 거운이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냐?”
“예, 조금 전 백호당이 출동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그렇게 되었다. 어찌하겠느냐? 명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남궁천호가 술잔을 비우며 대답을 하자 황보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명이 아니라 맹주님이 그 여우같은 백리문의 혓바닥에 넘어간 거잖아.”
“원래 그 인간은 옛날부터 재수가 없었어요.”
“그래, 맞아! 그 여우같은 자식이 젊었을 때 우리 영영이를 꼬셔 보려고 어지간히 따라다녔지.”
“흥, 누가 그딴 인간한테 넘어간대요? 어림도 없었어요.”
“그럼, 그럼! 당신은 절대로 그런 혀만 번드르르한 자식한테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당영영이 살짝 눈을 흘기며 말을 하자 황보명이 입을 헤벌쭉 벌리며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같은 오대세가 출신들인지라 백리세가 출신인 백리문과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어지간히 그를 싫어했던 모양이었다.
노웅이 죽이 척척 맞는 황보명과 당영영 부부를 실눈을 뜨고 째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참, 지랄도 쌍으로 하고 있네. 고만들 해라, 잉!”
“어머, 부러우면 노 당주님도 장가드세요.”
“염병! 염장 질러서 누구 보내고 싶냐?”
그렇게 노웅과 황보명 등이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냉가혜가 악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명분으로 백호당이 나선 거예요?”
“하가장은 백가장을 칠 명분이 없기 때문에 그 관군 놈들은 사황련이나 마교 놈들이 분명하니 저희들이 나서야 된다고 했다더군.”
악우진의 말을 들은 노웅이 언성을 높이며 격하게 말을 뱉어 냈다.
“그러니까 백리문 그 자식이 청룡당뿐만 아니라 우리 순찰당도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라니깐! 순찰당에는 전혀 보고가 없었는데, 뭐? 사황련이나 마교 놈들이 움직였다고? 그놈들이 대가리에 칼 맞았냐? 이제껏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찌그러져 있던 놈들이 맹의 코앞에서 그딴 짓을 벌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거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남궁천호에게 말을 건넸다.
“명분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다. 만검장이라고 하는 절강성 최대의 검장가를 가지고 있는 하가장이 무엇이 아쉬워서 백가장을 치겠냐고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는다니까 그러네. 원래 열 개를 가진 놈이 한 개를 더 가지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놈 등치는 게 세상의 이치고, 만날 고기 먹는 놈도 가끔은 풀이 먹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거든.”
남궁천호의 말에 황보명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악우진이 침중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가장에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남궁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그럴 테지. 한데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 혹시 최근에 백가장과 관련되어 들어온 소식이 없습니까?”
“멸문 이전에 백가장에 관련된 소식은 한 건도 없었네.”
노웅은 남궁천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들 하가장이 백가장을 멸문시킨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장거운도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다가 문득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는 자룡창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백가장에서 최근에 보검 같은 것을 만들어 내었거나 입수한 것은 아닐까요?”
“그 점은 이미 생각해 보았다. 어제 옮겨 온 백가장의 검들 중에는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보검은 없었다.”
남궁천호의 대답에 장거운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여! 다들 여기서 뭐하는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들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유난히 눈매가 쳐진 중년인 하나가 막 이층에 오르고 있었다. 그를 본 일행들이 갑자기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청룡당의 전임 당주였던 천성검 관종호였다. 갑자기 그가 이곳에 나타나자 다들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멀뚱하게 관종호를 쳐다보고 있던 장거운은 관종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오르는 자를 알아보고는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관종호를 따라온 자는 바로 벽파쌍검 적우기였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나서 관종호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 오랜만이군. 이곳의 화주가 먹고 싶어서 들렀는데 자네들 목소리가 들리더군.”
남궁천호는 관종호의 뒤에 서 있는 적우기를 흘깃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하가장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자네 덕분에 편안하게 쉴 곳이 생긴 것이지.”
관종호가 웃으면서 대답을 하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룡당의 전임 당주인 관종호가 하가장과의 관계로 인해 사임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곳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남궁천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하가장이 그리 편안한 곳은 못 될 텐데, 생각보다 잘 계신 모양이군요.”
“물론이네. 자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가장은 나 같은 사람이 머무르기에는 최고로 편안한 곳이지. 자네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자네 정도라면 대환영일 테니까 말이야.”
웃으면서 대꾸를 하고 있는 관종호를 보며 남궁천호는 평소 그의 모습과는 달리 차갑게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관종호를 밀어낸 당사자이기도 했지만, 과거 같이 청룡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부터 워낙에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이었던 탓에 그런 모양이었다.
한편, 남궁천호가 관종호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다면, 장거운은 적우기를 향해 냉랭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남궁천호를 보고 있던 적우기도 장거운의 눈빛을 의식하였는지 고개를 돌려 장거운을 쳐다보았다.
적우기는 장거운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두 번이나 보았는데 모를 리가 없지요.”
장거운의 냉랭한 대꾸에 적우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흠, 난 기억이 없는데……. 혹시, 그때 오죽색마인가 하는 자를 쫓아왔던 청룡무사인가?”
“그렇소.”
적우기는 대답을 하는 장거운의 가슴에 새겨진 청룡을 보고는 뒤늦게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그렇군. 그때 어두워서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 눈빛은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왜 그렇게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것인가?”
“내가 어제 본 사람이 당신이 맞는지, 다시 확인을 하고 있는 중이오.”
“흠, 어제라……. 어디서 날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 사람이 내가 맞는가?”
“확실히 당신이 맞소. 백가장을 습격한 흉수 놈들과 같이 군막 안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더군.”
적우기가 여유롭게 미소를 띠며 묻자, 장거운이 굳어진 얼굴로 대꾸를 했다.
“거운!”
남궁천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거운이 너무 경솔하게 말을 뱉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적우기가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말을 뱉고 있었다.
“어린놈이 말을 심하게 하는군.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모함을 하는 것이냐?”
“모함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당신이 백가장과 관도에서 우리를 습격한 그놈들과 같이 있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창! 창!
“놈! 죽고 싶으냐?”
장거운이 성난 얼굴로 외치자 쌍검을 뽑아 든 적우기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검을 뽑아 든 적우기는 절정고수답게 매서운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운은 전혀 상대의 기세를 두려워함이 없이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뱉고 있었다.
“흥, 당신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소?”
장거운의 예기치 못한 도발에 장내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버렸다. 그러나 곧이어 그러한 긴장감은 적우기와 맞서고 있는 장거운에게로 중인들의 시선이 몰리면서 점차 묘한 호기심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리 청룡무사라고는 하나 이제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장거운의 기세가 절정고수로 이름을 떨쳐 온 적우기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장거운에게 멸시를 당해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적우기의 행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막상 쉽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장거운의 뒤에 버티고 선 무림맹의 당주들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장거운에게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을 적우기가 아니었다. 그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냉철한 이성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그의 출수를 말리고 있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 이거 청룡당에 대단한 신입이 들어왔군.”
팽팽한 대치를 깨고 말을 뱉은 관종호는 곧바로 장거운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우리 신입 청룡무사가 패기가 좋군. 그래, 이름이 뭔가?”
“장거운입니다.”
청룡무사인 장거운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관종호가 전임 당주였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관종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뱉었다.
“장거운이라, 이름이 좋군. 패기는 더욱 좋고 말이야. 마치 검룡 자네의 신입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군. 그렇지 않은가? 하하하!”
“…….”
관종호의 말에 남궁천호는 굳어진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관종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지금은 서로 간에 오해가 깊어서 풀기가 어려운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기회를 갖기로 하는 게 좋겠군. 적 대주, 자네도 그만 검을 거두고 나가세.”
관종호의 말에 적우기는 장거운을 한 번 노려보고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거운! 그만하라!”
그 모습에 다시 말을 뱉으려던 장거운은, 남궁천호의 전음이 귓속에 파고들자 이를 악다물고 뱉으려던 말을 삼켰다.
“자, 자! 다들 나중에 다시 보세. 오늘 정말 만나서 유쾌했네. 하하하!”
관종호가 실실거리며 말을 뱉고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종호와 적우기가 아래층으로 사라지자 노웅이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하의 천성검 관종호가 하가장의 빈객으로 있다니, 저 인간도 이제 갈 데까지 갔군.”
“이왕 똥물에 발을 담갔으니, 똥물에서 헤엄이라도 치려고 하는 모양이지요.”
황보명이 노웅의 말을 받아 대꾸를 하자 남궁천호가 제지를 하고 나섰다.
“이미 떠난 사람은 이야기해서 뭣하나? 그냥 술이나 마시지. 거운, 한 잔 받아라!”
“에? 예.”
“그놈 참, 보면 볼수록 꼴통이란 말이야!”
조금 전의 날카로운 기세는 사라지고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리바리하게 대답을 하며 잔을 내미는 장거운을 보며, 노웅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 *
“허! 이건 또 무슨 마공이냐? 둘이 쌩하고 달아나서 이 몸을 고독에 떨게 하더니, 이젠 술이 떡이 돼서 나타나서는 염장을 질러? 무슨 광한마공에 이은 아수라염장이냐?”
청룡고를 지키고 있던 사공한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냉가혜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장거운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냉가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건넸다.
“미안해요! 이 멍충이가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요.”
“혹시 너도 취했냐? 안 어울리게 미안하다는 말을 다하네.”
“아이, 그러지 마시고요 조금만 더 있어 주세요. 멍충이 금방 눕히고 올게요.”
“헐, 얼음귀신이 술을 마시면 저렇게 변하는구나.”
사공한은 얼음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냉가혜가 애교스러운 비음으로 부탁을 하고는 청룡각의 출입문으로 향하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룡각의 입구에 이른 장거운이 댓돌 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아서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 나는 괜찮아. 꺼억! 그러니…… 음냐…….”
“멍충아! 술도 잘 못 먹으면서 준다고 그걸 다 받아먹니?”
“음, 그러게 말이야. 헤, 나 한심하지?”
냉가혜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하자 장거운이 고개를 들어 바보처럼 웃어 보이며 물었다.
냉가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멍충아. 너 한심해. 그러니까 자꾸 바보처럼 웃지 마. 보기 싫어!”
“헤,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해. 설레발은 혼자 다 치고, 정작 해결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됐어. 그만해. 넌 할 만큼 했어. 너니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밝혀낸 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장거운이 자책을 하며 고개를 숙이자, 냉가혜는 측은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며 장거운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엇! 왜 이래!”
냉가혜가 뾰족하게 소리를 쳤다. 장거운이 갑자기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 것이다.
냉가혜는 장거운의 팔을 뿌리쳐야 했지만, 이어지는 장거운의 중얼거림에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누나 가슴은 정말 따뜻하네. 처음이야, 이런 따뜻한 느낌……. 고마워, 누나. 곽호 형님한테 잘해 줘서 고맙고 나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
냉가혜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장거운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장거운이 모친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이 할아버지들의 손에 자랐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서 따뜻함을 처음 느껴 본다는 말에 장거운을 밀쳐 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성애를 가진 여자로서의 본능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그것이 사랑의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어떠한 감정이든지 간에 냉가혜는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고 있었고, 그녀의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으며, 어느새 그녀의 손은 장거운의 어깨를 꼭 감싸고 있었다.
장거운이 갑자기 얼굴을 들고는 빤히 쳐다보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냉가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왜 그래?”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 무슨 소리?”
“검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데…… 어? 또!”
장거운이 혼잣말을 하며 벌떡 일어서서는 즉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야!”
갑작스러운 장거운의 행동을 보고 있던 냉가혜가 눈을 치켜뜨고는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장거운이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함을 지른 뒤 장거운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 빠르게 쫓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도 술에 취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 전의 두 사람은 몸이 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취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제7장 피납(被拉)
장거운이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도착한 곳은 백호당의 무사들이 막간산으로 출정을 떠나 버린 탓에 텅 비어 있는 백호각의 뒤편에 자리한 작은 별원이었다. 장거운이 막 별원 앞에 도착하는 순간 두 명의 흑의인들이 외곽의 담을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급해진 장거운이 그대로 달려가면서 주먹을 뻗자, 웅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기운이 담을 넘어가던 흑의인을 향해 섬전처럼 몰려갔다. 장거운의 주먹에서 소림의 최고 절기 가운데 하나인 백보신권이 펼쳐진 것이다.
꽝!
간발의 차이로 흑의인이 넘어가고 난 다음 도착한 백보신권의 기운이 담장에 부딪히자 폭발음과 함께 담장이 그대로 터져 나가 버렸다.
셀 수도 없이 고련하여 완벽한 자세를 익히고는 있었지만, 내기를 뿜어낼 수가 없었기에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된 위력을 보지 못한 백보신권이었다. 장거운은 무시무시한 그 위력에 멍하니 자신의 주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뒤에서 냉가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차린 장거운은 급히 별원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별원의 입구에는 두 명의 백호당 위사들이 죽어 있었고, 마당에는 백연화가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백 소저!”
“호아를…… 그들이 호아를 데려갔어요.”
장거운이 급히 다가가자 백연화는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뱉고는 다시 주저앉고 있었다.
“백 소저 좀 봐줘!”
장거운이 뒤따라온 냉가혜에게 다급하게 외치고는 달아난 흑의인들을 다시 쫓기 위해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가 담장을 넘었을 때는 이미 흑의인들이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장거운은 다시 담을 넘어 별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장거운이 돌아오자 냉가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상이 너무 심해 의당으로 옮겨야겠어. 빨리 당 당주님을 모셔 와!”
“어, 그래!”
장거운이 당영기를 찾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냐!”
장거운에게 호통을 친 사람은 내당 당주인 냉심비도 제갈후였다. 내당과 외당의 위사들과 함께 그도 장거운의 내뻗은 백보신권의 폭음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흑의인들 두 명이 백가 남매를 습격하여 백 소저가 심하게 내상을 입었고 동생인 백연호가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장거운이 급히 대답을 하자 제갈후는 눈에 이채를 띠며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는 청룡무사 장거운입니다.”
냉가혜가 장거운을 대신해서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장거운보다는 제갈후와 서로 얼굴을 알고 있는 그녀가 대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갈후가 냉가혜를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아! 냉 소저, 자네였군. 한데 어찌 된 일인가?”
“거운의 말대로예요. 저희들은 청룡각 앞에 있었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이곳으로 달려와 보니 이 지경이 되어 있었어요.”
냉가혜의 말에 제갈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여기서 나는 소리를 청룡각에서 들었단 말인가?”
“예! 그보다 백 소저를 빨리 의당으로 옮겨야 합니다!”
장거운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치며 백연화를 안아 들고 의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제갈후가 장거운을 노려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게 서거라! 감히 일개 신입 청룡무사 따위가 나의 말을 무시하느냐?”
장거운이 제자리에 우뚝 서서는 고개를 돌려 제갈후를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아함경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화살을 맞은 이가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어 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어 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된 것인지 대로 된 것인지를 알아야겠소’ 그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라고 하셨소. 당주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오?”
“뭐라?”
제갈후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자, 장거운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의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장거운은 순찰당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당영기와 당영영이 백연화의 상세를 살피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궁천호를 만나기 위해 백호각의 별원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웡! 웡!
범인의 정체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던 장거운은 황칠이 짖는 소리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순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장거운이 다가가자 황칠이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철창을 열어 황칠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장거운은 황칠과 함께 백호각 옆의 별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에도 황칠에게 백연호의 체취를 맡게 한 뒤 뒤를 추적하려고 작정한 것이다.
장거운이 백호각 옆의 별원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외당과 내당의 위사들 몇 명만 지키고 있을 뿐 남궁천호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급히 회의를 하기 위해 모두들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었다.
장거운은 백연호가 묵었던 방을 찾아 황칠에게 체취를 맡게 한 후 그 냄새를 따라가게 하고는,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황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황칠은 별원의 담장 밑에서 몇 번 코를 킁킁대더니 장거운이 백보신권으로 무너뜨린 담장을 통하여 밖으로 나와서는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각 정도 용형보를 펼치며 황칠의 뒤를 따르고 있던 장거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황칠이 달려가고 있는 방향이 하가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제야 장거운은 담을 넘어 달아나던 흑의인들 중 한 명이 손에 쌍검을 들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적우기가 직접 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장거운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어져 갔다.
다시 이각 정도 달려 하가장 근처에 다다른 장거운은 급히 황칠을 붙잡아 옆에 두고는 찬찬히 하가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가장의 대문은 여전히 굳건하게 잠겨 있었고, 높다란 담벼락은 거대한 철옹성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장거운은 황칠의 귀에 대고 사람에게 말을 하듯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황칠아, 맹으로 돌아가서 가혜를 찾아. 가혜 알지? 낮에 너 목욕시켜 주고 육포도 주던 그 예쁜 누나 말이야. 그 누나한테 내가 여기 있다고 가르쳐 줘. 알았지?”
웡! 웡!
황칠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두어 번 짖고는 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황칠의 혈통이 예사롭지 않다는 노웅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황칠을 보내고 난 뒤 장거운은 굳은 표정으로 하가장의 담 아래로 다가갔다. 담을 넘어 하가장 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백연호를 찾아야 했다.
장거운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기를 열 손가락에 주입한 채 하가장의 담벼락을 찍었다. 담벼락에 손가락들이 푹 하고 박혔다. 원래 검지만으로 펼치는 일지선의 지법을 열 손가락에 응용하여 펼친 것이다. 생각대로 지법이 펼쳐지자 자신감을 얻은 장거운은 양손을 번갈아 박아 가며 재빠르게 하가장의 담벼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담장 위에 올라선 장거운이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니, 군데군데 번초들이 돌아다니기는 하였지만 장원 내부는 전체적으로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한동안 번초들의 동태를 살펴보던 장거운은 재빨리 담을 넘어 하가장의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장거운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좌측의 전각을 향해 재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달려가던 장거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각 안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계집아이가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제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했으니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가장의 여식이 그렇게 검술이 뛰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하마터면 낭패를 당할 뻔했구나.”
“아무튼 사형,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사형을 끌어들인 것 같아서 정말 죄스럽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어차피 너 하나 잘되자고 벌인 일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사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임을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전각의 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장거운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중 하나가 적우기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의 것도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들어 본 목소리였다.
예상했던 대로 적우기가 직접 백연호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장거운이 문을 박차고 들어서려는 순간, 적우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한데 그 철황비록이 무엇이기에 하 장주가 그토록 가지려고 하는 것이냐?”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무슨 절세신공을 기록한 비급이라도 되겠지요.”
“어리석은! 절세의 비급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천하의 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는 것인가?”
“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으니, 그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장거운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이 잠들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우기와 또 한 명의 사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명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드르륵!
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으로 뛰어들려던 장거운은 대경하여 허리를 튕겨 뒤로 물러나야 했다. 문을 여는 순간 시퍼런 검기를 머금은 두 개의 검이 각각 그의 미간과 하복부를 찔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장거운의 존재를 눈치 채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웬 놈이냐?”
장거운이 가까스로 검을 피하며 뒤로 물러서자 적우기와 또 한 명의 사내가 호통을 치며 밖으로 나섰다. 그자는 바로 마운곡의 분지에서 정천호의 패를 보여 주었던 위지웅이었다.
적우기가 장거운을 알아보고는 냉랭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바로 장거운, 네놈이었군.”
“마운곡에서 본 놈이 맞는군요.”
위지웅도 장거운을 알아보고 말을 내뱉었다.
장거운이 적우기를 노려보며 외쳤다.
“적우기! 백연호는 어디에 있소? 명색이 정파의 고수란 자가 어린아이를 납치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꽤나 시끄럽군. 왜? 이제는 뒤를 지켜 주는 당주들이 없으니 겁이 나느냐?”
적우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위지웅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급히 달려오고 있는 부하들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적우기의 기세는 진화루에서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장거운의 외침이 이어졌다.
“닥치고 백연호나 내놓으시오!”
“마침 마운곡에서 그냥 보낸 것이 계속 찝찝했는데 제 발로 와 주니 고맙군!”
위지웅이 조소 어린 표정으로 말을 뱉으며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장거운이 위지웅을 향해 호통을 쳤다.
“스스로 황상의 어명을 수행한다고 말하던 자가 부끄럽지 않소!”
“물론 부끄럽다네. 그러니 네가 죽어 줘야겠다!”
쐐액!
위지웅이 말을 뱉으며 장거운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지르자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장거운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자신의 목에 검이 닿으려는 순간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