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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로드 1권
2화
루멘스 영지의 영주인 크루거의 휘하에는 20명의 기사와 300명의 병사가 있었다. 병사의 수는 여타 영지와 비슷했지만 기사의 수는 2배로 많았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일반 병사들이 모두 기병 훈련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루멘스 영지에는 다른 영지와 달리 500여 필의 말이 있었고, 기병 훈련을 받은 보병 병사들은 언제든 기병 부대로 전환이 가능했다.
크루거가 매일같이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지민들로부터 돈을 우려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영지민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졌지만 말이다.
최근 사라스 제국에서의 영지전의 양상은 크루거의 예상대로 기병 부대를 보유한 영주가 승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어떻게든 말을 구하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공작령 내에서 기병 부대를 보유한 크루거의 입지는 날로 높아졌다.
제후인 레오팔트 공작을 제외하고 대영지에서 크루거를 우습게 여기는 귀족이나 영주는 없었다.
두두두두!
루멘스 영지 영주의 행렬은 기병 부대를 연상시키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저기 보이는 언덕을 지나면 평지다. 그곳에서 기병 전술 훈련을 하겠다.”
크루거는 영지성을 나설 때마다 기사와 병사들을 교대로 데려갔다. 그래서 매번 그를 수행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바뀌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기사와 병사들의 기병 훈련 성과를 직접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막 언덕을 지나서 맨 앞에서 말을 몰던 크루거가 한 손을 들자, 그것을 보고 좌측의 기병들이 산개해서 흩어졌다.
두두두두!
여전히 말을 몰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고 나서 크루거가 팔을 머리 위로 크게 휘저은 후 손을 내렸다. 그러자 흩어졌던 기병들이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척!
그때 크루거가 다시 손을 들어 힘차게 전면을 향해 내뻗었다. 그러자 우측 기병들이 대형을 유지한 채 그대로 전면을 향해 빠르게 몰아 나갔다.
두두두두!
그들이 앞쪽으로 돌진해 나가자 산개해서 앞쪽을 휘젓고 다니던 기병들이 빠르게 좌측으로 선회해서 크루거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던 기병들 역시 우측으로 선회해서 크루거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크루거의 뒤로 돌아가서 질서 정연하게 대형을 갖춘 채 말을 몰고 있었다.
루멘스 영지 병사들의 기병 기동 훈련은 전부 말을 달리는 가운데 이뤄졌다.
그만큼 기병 부대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거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하면 기병끼리 부닥쳐서 대형 사고가 생길 위험이 높았다. 그러나 크루거의 병사들은 그런 사고 없이 깔끔하고 완벽하게 기병 기동 훈련을 선보였다.
크루거는 이동 중 수시로 휘하 병사와 기사들의 기병 훈련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을 시, 기사와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크루거를 수행하는 동안 기사와 병사들은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죽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총관 게르만이었다. 기사도 기병도 아닌 그는 매번 이뤄지는 크루거의 기병 훈련에 엉덩이와 허벅지가 다 짓무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점차 말 타는 데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이를 악물고 크루거의 그 휘하 기사와 기병들 뒤를 잘 쫓아갔다. 기병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뒤에 처져 있었지만 말이다.
*
*
*
루멘스 영지에는 악질 영주와 성녀가 같이 살았다. 악질 영주가 세금을 걷기 위해 떠나고 나면 성녀가 나타나서 악질 영주에게 고통받는 영지민들을 달래고 위로했다.
“아가씨, 영주님이 성 밖으로 나가셨어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하녀가 소리쳤다.
그러자 리엔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녀는 많진 않지만 매달 크루거로부터 용돈을 받았다. 리엔은 그 용돈을 자신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빈민가의 길거리는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 좁은 길 옆에는 도랑이 파져 있어 시궁창이 흐르고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는 병든 자, 굶주린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똑 같은 하늘 아래에 위치한 사람 사는 곳이었다.
리엔이 두 하녀와 같이 길거리에 나타나자 좁은 길에 한 가득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들은 연신 소리를 지르며 그녀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발… 사흘을 굶었습니다.”
“빵, 빵 좀 주십시오.”
리엔과 두 하녀들의 손에는 큰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호밀빵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빵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들이 사라졌다.
실망한 얼굴로 뒤돌아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서 리엔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일이 여기서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가자.”
그녀는 두 하녀와 함께 빈민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아픈 자가 없는지 살폈다.
리엔은 크루거 몰래 영주의 전속 치료사인 해리슨에게 치료술을 배웠다. 빈민촌에 사는 영지민들이 치료사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란 힘들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빈민들에게 값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그래서 별거 아닌 병에 걸려도 빈민들은 변변히 치료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리엔이 크루거의 눈치를 봐 가며 밤낮으로 치료술을 공부했던 것이다. 영특했던 리엔은 치료사 해리슨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치료술을 배웠고, 어느새 해리슨도 인정하는 실력 있는 치료사가 되었다. 물론 그 사실은 크루거에게는 절대 비밀이었다.
리엔과 두 하녀들은 복잡한 빈민촌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찾아내서 정성껏 치료했다.
“다신 그런 장난치면 안 돼. 알겠지?”
“네, 성녀님.”
리엔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녀라고 부를 때마다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신을 그렇게 불러 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리엔이 이렇게 치료를 해 주기 전 빈민촌에서는 단순히 골절만 입어도 그것을 고치지 못해서 평생 불구자 신세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쿨럭쿨럭!”
담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진 아이의 다리를 치료한 후, 그 집을 나서던 리엔과 두 하녀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성마른 기침 소리에 자연히 그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골목 안쪽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한 남자가 주저앉아서 연신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리엔은 곧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죠?”
“쿨럭쿨럭. 나, 나는 괜찮소.”
낮은 톤의 제법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후드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침을 할 때 입을 가렸던 그 사람의 로브 소맷자락에는 분명히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리엔이 그 피를 보고 흠칫 놀라자 그 남자는 황급히 팔을 등 뒤로 숨겼다.
그때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던 두 하녀 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겨, 결핵?”
결핵은 환자의 기침, 콧물, 가래로부터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전형적인 증상이 바로 섞인 가래를 동반한 기침과 오한, 식은땀이었다. 남자는 누가 보아도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결핵이라 확신한 두 하녀는 주춤거리며 그 남자의 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리엔은 달랐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소란 떨지 마라.”
리엔이 뒤돌아 두 하녀를 향해 다그친 후, 남자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결핵에 걸린 것이 맞다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죠?”
리엔이 차분하게 묻자,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어제 왔소.”
남자의 대답에 리엔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면 그사이 감염이 확산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행이네요. 일단 진료부터 해 보죠.”
리엔은 거침없이 남자의 손을 잡았다.
“헉! 아가씨!”
그것을 보고 두 하녀가 경악하며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남자의 맥을 짚어 보던 리엔이 말했다.
“얼굴을 보게 쓰고 있는 후드도 좀 벗어 주세요.”
리엔의 요구에 남자는 묵묵히 한 손으로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40대 중반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짙은 금발의 거친 머릿결을 가진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엔은 손으로 그 남자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갸웃 고개를 내저었다.
“열도 전혀 없고 식은땀 역시 흘린 것 같지 않군요.”
리엔은 남자를 진찰했지만 진찰할수록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남자는 어느새 기침도 하지 않고 멀뚱한 눈으로 리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꼬르르르!
남자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남자를 보고 리엔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당신은 전혀 아프지 않아요. 이상이 있다면 배가 고플 뿐이군요.”
리엔의 말을 듣고 남자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엉터리 치료사는 아닌 모양이요. 맞소, 난 단지 배가 고플 뿐이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남자가 다시 후드를 덮어썼다. 그런데 그때 그 남자의 소매에 묻어 있었던 피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성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그 남자의 말에 리엔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 성녀가 아니에요.”
“성자입네, 성녀네 하는 자들 중에 의외로 위선자가 많이 있다오. 결핵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나를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치료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요.”
결핵은 무서운 병이었다. 사람들은 결핵에 걸리면 다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리엔은 자신이 머리에 꽂고 있던 핀을 빼내서 그것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걸 팔면 한 끼 식사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머리핀을 받아들면서 남자가 살짝 눈빛을 빛내며 정중히 말했다.
“고맙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혹시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남자의 말에 리엔이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비루한 행색을 보아하니 떠돌이인 듯 보이는데…….’
리엔은 문득 오늘 아침에 오빠인 크루거와 말다툼을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내 소원이 있다면 오라버니께서 정말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리엔의 다소 엉뚱한 소원에 남자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의 오라버니는 좋은 동생을 두었구려.”
남자의 말에 리엔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어요. 제가 좋은 오라버니를 둔 거죠. 그럼 저는 이만……. 가자.”
리엔이 두 하녀를 데리고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후드 안쪽 남자의 얼굴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어렸다.
*
*
*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총관인 게르만이 기사나 기병만큼 말을 타는데 능숙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말을 타고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서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게르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펴졌다.
목적지인 농노들의 밀집촌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다 왔구나.’
언덕 아래는 평지였고 일직선으로 길이 나 있었다. 말로 달리면 10분 안에 밀집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끝이 뾰쪽한 통나무로 만든 방책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 관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땡땡땡!
그 관망대에서 영주 일행을 발견한 듯 종소리가 요란하게 주위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종소리는 말발굽 소리에 가려 정작 크루거와 그 일행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두두두!
수십여 기의 기마가 농노들의 밀집촌으로 들어가는 큰길 쪽에서 회백색 먼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빠르게 내달렸다. 그 연기는 마을 입구 앞 커다란 통나무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 그쳤다.
“어서 오십시오.”
크루거와 그 일행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황급히 뛰어나온 모습이 역력한 마을 관리가 크루거에게 머리를 숙였다.
2화
루멘스 영지의 영주인 크루거의 휘하에는 20명의 기사와 300명의 병사가 있었다. 병사의 수는 여타 영지와 비슷했지만 기사의 수는 2배로 많았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일반 병사들이 모두 기병 훈련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루멘스 영지에는 다른 영지와 달리 500여 필의 말이 있었고, 기병 훈련을 받은 보병 병사들은 언제든 기병 부대로 전환이 가능했다.
크루거가 매일같이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지민들로부터 돈을 우려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영지민들의 삶이 더욱 고달파졌지만 말이다.
최근 사라스 제국에서의 영지전의 양상은 크루거의 예상대로 기병 부대를 보유한 영주가 승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어떻게든 말을 구하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공작령 내에서 기병 부대를 보유한 크루거의 입지는 날로 높아졌다.
제후인 레오팔트 공작을 제외하고 대영지에서 크루거를 우습게 여기는 귀족이나 영주는 없었다.
두두두두!
루멘스 영지 영주의 행렬은 기병 부대를 연상시키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저기 보이는 언덕을 지나면 평지다. 그곳에서 기병 전술 훈련을 하겠다.”
크루거는 영지성을 나설 때마다 기사와 병사들을 교대로 데려갔다. 그래서 매번 그를 수행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바뀌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기사와 병사들의 기병 훈련 성과를 직접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막 언덕을 지나서 맨 앞에서 말을 몰던 크루거가 한 손을 들자, 그것을 보고 좌측의 기병들이 산개해서 흩어졌다.
두두두두!
여전히 말을 몰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고 나서 크루거가 팔을 머리 위로 크게 휘저은 후 손을 내렸다. 그러자 흩어졌던 기병들이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척!
그때 크루거가 다시 손을 들어 힘차게 전면을 향해 내뻗었다. 그러자 우측 기병들이 대형을 유지한 채 그대로 전면을 향해 빠르게 몰아 나갔다.
두두두두!
그들이 앞쪽으로 돌진해 나가자 산개해서 앞쪽을 휘젓고 다니던 기병들이 빠르게 좌측으로 선회해서 크루거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던 기병들 역시 우측으로 선회해서 크루거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크루거의 뒤로 돌아가서 질서 정연하게 대형을 갖춘 채 말을 몰고 있었다.
루멘스 영지 병사들의 기병 기동 훈련은 전부 말을 달리는 가운데 이뤄졌다.
그만큼 기병 부대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거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하면 기병끼리 부닥쳐서 대형 사고가 생길 위험이 높았다. 그러나 크루거의 병사들은 그런 사고 없이 깔끔하고 완벽하게 기병 기동 훈련을 선보였다.
크루거는 이동 중 수시로 휘하 병사와 기사들의 기병 훈련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을 시, 기사와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크루거를 수행하는 동안 기사와 병사들은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죽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총관 게르만이었다. 기사도 기병도 아닌 그는 매번 이뤄지는 크루거의 기병 훈련에 엉덩이와 허벅지가 다 짓무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점차 말 타는 데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이를 악물고 크루거의 그 휘하 기사와 기병들 뒤를 잘 쫓아갔다. 기병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뒤에 처져 있었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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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멘스 영지에는 악질 영주와 성녀가 같이 살았다. 악질 영주가 세금을 걷기 위해 떠나고 나면 성녀가 나타나서 악질 영주에게 고통받는 영지민들을 달래고 위로했다.
“아가씨, 영주님이 성 밖으로 나가셨어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하녀가 소리쳤다.
그러자 리엔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녀는 많진 않지만 매달 크루거로부터 용돈을 받았다. 리엔은 그 용돈을 자신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빈민가의 길거리는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했다. 좁은 길 옆에는 도랑이 파져 있어 시궁창이 흐르고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는 병든 자, 굶주린 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똑 같은 하늘 아래에 위치한 사람 사는 곳이었다.
리엔이 두 하녀와 같이 길거리에 나타나자 좁은 길에 한 가득 사람들로 넘쳐 났다. 그들은 연신 소리를 지르며 그녀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발… 사흘을 굶었습니다.”
“빵, 빵 좀 주십시오.”
리엔과 두 하녀들의 손에는 큰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호밀빵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빵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들이 사라졌다.
실망한 얼굴로 뒤돌아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서 리엔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일이 여기서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가자.”
그녀는 두 하녀와 함께 빈민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아픈 자가 없는지 살폈다.
리엔은 크루거 몰래 영주의 전속 치료사인 해리슨에게 치료술을 배웠다. 빈민촌에 사는 영지민들이 치료사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란 힘들었다.
당장 먹을 것도 없는 빈민들에게 값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그래서 별거 아닌 병에 걸려도 빈민들은 변변히 치료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리엔이 크루거의 눈치를 봐 가며 밤낮으로 치료술을 공부했던 것이다. 영특했던 리엔은 치료사 해리슨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치료술을 배웠고, 어느새 해리슨도 인정하는 실력 있는 치료사가 되었다. 물론 그 사실은 크루거에게는 절대 비밀이었다.
리엔과 두 하녀들은 복잡한 빈민촌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찾아내서 정성껏 치료했다.
“다신 그런 장난치면 안 돼. 알겠지?”
“네, 성녀님.”
리엔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녀라고 부를 때마다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신을 그렇게 불러 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리엔이 이렇게 치료를 해 주기 전 빈민촌에서는 단순히 골절만 입어도 그것을 고치지 못해서 평생 불구자 신세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쿨럭쿨럭!”
담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진 아이의 다리를 치료한 후, 그 집을 나서던 리엔과 두 하녀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성마른 기침 소리에 자연히 그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골목 안쪽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한 남자가 주저앉아서 연신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리엔은 곧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죠?”
“쿨럭쿨럭. 나, 나는 괜찮소.”
낮은 톤의 제법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후드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침을 할 때 입을 가렸던 그 사람의 로브 소맷자락에는 분명히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리엔이 그 피를 보고 흠칫 놀라자 그 남자는 황급히 팔을 등 뒤로 숨겼다.
그때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던 두 하녀 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겨, 결핵?”
결핵은 환자의 기침, 콧물, 가래로부터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전형적인 증상이 바로 섞인 가래를 동반한 기침과 오한, 식은땀이었다. 남자는 누가 보아도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결핵이라 확신한 두 하녀는 주춤거리며 그 남자의 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리엔은 달랐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소란 떨지 마라.”
리엔이 뒤돌아 두 하녀를 향해 다그친 후, 남자에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결핵에 걸린 것이 맞다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죠?”
리엔이 차분하게 묻자,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어제 왔소.”
남자의 대답에 리엔이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면 그사이 감염이 확산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행이네요. 일단 진료부터 해 보죠.”
리엔은 거침없이 남자의 손을 잡았다.
“헉! 아가씨!”
그것을 보고 두 하녀가 경악하며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남자의 맥을 짚어 보던 리엔이 말했다.
“얼굴을 보게 쓰고 있는 후드도 좀 벗어 주세요.”
리엔의 요구에 남자는 묵묵히 한 손으로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40대 중반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짙은 금발의 거친 머릿결을 가진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엔은 손으로 그 남자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갸웃 고개를 내저었다.
“열도 전혀 없고 식은땀 역시 흘린 것 같지 않군요.”
리엔은 남자를 진찰했지만 진찰할수록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남자는 어느새 기침도 하지 않고 멀뚱한 눈으로 리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꼬르르르!
남자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 남자를 보고 리엔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당신은 전혀 아프지 않아요. 이상이 있다면 배가 고플 뿐이군요.”
리엔의 말을 듣고 남자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엉터리 치료사는 아닌 모양이요. 맞소, 난 단지 배가 고플 뿐이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남자가 다시 후드를 덮어썼다. 그런데 그때 그 남자의 소매에 묻어 있었던 피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성녀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그 남자의 말에 리엔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 성녀가 아니에요.”
“성자입네, 성녀네 하는 자들 중에 의외로 위선자가 많이 있다오. 결핵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나를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치료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요.”
결핵은 무서운 병이었다. 사람들은 결핵에 걸리면 다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리엔은 자신이 머리에 꽂고 있던 핀을 빼내서 그것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걸 팔면 한 끼 식사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머리핀을 받아들면서 남자가 살짝 눈빛을 빛내며 정중히 말했다.
“고맙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혹시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남자의 말에 리엔이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비루한 행색을 보아하니 떠돌이인 듯 보이는데…….’
리엔은 문득 오늘 아침에 오빠인 크루거와 말다툼을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내 소원이 있다면 오라버니께서 정말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리엔의 다소 엉뚱한 소원에 남자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의 오라버니는 좋은 동생을 두었구려.”
남자의 말에 리엔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어요. 제가 좋은 오라버니를 둔 거죠. 그럼 저는 이만……. 가자.”
리엔이 두 하녀를 데리고 골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후드 안쪽 남자의 얼굴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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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총관인 게르만이 기사나 기병만큼 말을 타는데 능숙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말을 타고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서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게르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펴졌다.
목적지인 농노들의 밀집촌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다 왔구나.’
언덕 아래는 평지였고 일직선으로 길이 나 있었다. 말로 달리면 10분 안에 밀집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끝이 뾰쪽한 통나무로 만든 방책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 관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땡땡땡!
그 관망대에서 영주 일행을 발견한 듯 종소리가 요란하게 주위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종소리는 말발굽 소리에 가려 정작 크루거와 그 일행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두두두두!
수십여 기의 기마가 농노들의 밀집촌으로 들어가는 큰길 쪽에서 회백색 먼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빠르게 내달렸다. 그 연기는 마을 입구 앞 커다란 통나무 문 앞에 도착하고 나서 그쳤다.
“어서 오십시오.”
크루거와 그 일행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황급히 뛰어나온 모습이 역력한 마을 관리가 크루거에게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