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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지 관리의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아 엉클어진 상태였고, 상의도 뒤집어 입고 있었다. 신고 있는 부츠 역시 끈을 묶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아랫도리는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던지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크루거가 그런 관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총관인 게르만이 나섰다.
“데우스. 어서 영주님께서 쉴 곳으로 안내해라. 그리고 시원한 물을 내어 오고.”
“아, 네. 이쪽으로.”
농노 밀집촌의 관리인 데우스는 총관인 게르만과 사촌 동생이었다. 한마디로 데우스가 농노 밀집촌의 관리가 된 것은 순전히 게르만 덕이었던 것이다.
영주인 크루거도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거에게는 누가 자신의 영지의 관리가 되든 어차피 상관없었다. 크루거에게 영지 내 마을 관리란 세금만 잘 걷으면 됐다.
데우스는 사촌 형인 게르만을 닮아서인지 모르지만 그 부분에서는 타고난 인물이었다. 데우스는 단 한 번도 세금 문제로 크루거를 신경 쓰이게 만든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데우스는 크루거에게 있어서 꽤 쓸 만한 영지 관리인 셈이었다.
데우스는 즉시 크루거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크루거가 도착했을 때 데우스의 집은 급하게 청소가 끝나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간 크루거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하녀가 급히 찬 물을 내어 왔다.
시간은 막 정오를 넘기고 있었다. 크루거를 비롯한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갑옷 차림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충분히 예열된 갑옷은 걸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게 만들었다.
크루거뿐만 아니라 기사와 병사들 모두 땀투성이였다. 그리고 모두들 목이 마른 상태였다. 하지만 크루거는 하녀가 건넨 물을 바로 마시지 않았다.
총관인 게르만이 품속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잔을 꺼냈다. 그 잔에 물을 부어 독이 들어 있지 않은지 확인한 후 크루거는 그 물을 마셨다.
기사와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그들은 물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에 마셨다.
크루거는 물을 마시고 그늘에서 달아오른 갑옷의 식혔다. 그때 총관인 게르만이 마을 관리인 데우스와 만나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게냐?”
게르만은 아직도 기가 죽지 않은 데우스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면서 화를 냈다. 그러자 데우스가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 죄송해요. 형, 하지만 이렇게 빨리 또 오실 줄 몰랐습니다.”
하긴 보름 전에 와서 이곳에 있는 돈이란 돈을 다 긁어 가지 않았던가? 데우스의 말처럼 다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돈을 뜯어 가려고 나타났으니 오히려 게르만이 사촌 동생이니 데우스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설마 또?”
데우스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게르만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게르만이 깨끗하게 안면몰수하고 데우스에게 물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야?”
“네? 가지고 있는 돈이라니요? 세금을 거두려면 아직 닷새는 더 남았잖습니까?”
세금은 한 달에 한 번씩 거뒀다. 크루거가 보름 전에 세금을 다 챙겨 갔으니 적어도 보름은 더 있다가 나타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번 달 세금을 걷기도 전에 나타나서 돈이 있냐는 총관의 물음에 데우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데우스를 보고 게르만이 벌컥 화를 냈다.
“이런, 멍청한 녀석! 도대체 너는 생각이란 것을 하고 살긴 사는 것이냐?”
게르만이 역정을 내자 데우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 이번 달에 영주님 생일이 있는 걸 몰랐단 말이냐?”
“헉! 그러고 보니 이번 달은 특별 세금이 부과되는 달이었군요.”
특별 세금이란 크루거가 정한 세금으로 그의 생일과 그의 여동생인 리엔의 생일, 그리고 그의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즉, 그 네 달 동안은 특별히 세금을 두 번에 걸쳐서 거둬들였던 것이다.
이런 특별 세금은 루멘스 영지에만 있었다. 그래서 요즘 루멘스 영지의 영지민들은 크루거가 결혼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그가 결혼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의 부인과 그 자식들의 생일날에도 특별 세금을 거둬들일 테니 말이다.
“당장 준비해.”
“헉! 알겠습니다!”
데우스는 부랴부랴 병사들을 이끌고 농노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그곳에 있던 물건과 가축들을 뺏았다.
“안 돼요! 그건 내일 파종할 씨들이란 말이에요!”
한 중년의 여자가 병사들의 다리를 잡고 애원을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무자비했다.
“이거 놔!”
퍽!
“아아악!”
병사의 주먹질에 여자는 입술이 터져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뒷간에서 볼 일을 보고 있다가 나타난 젊은 남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어머니!”
중년 여자의 아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쓰러진 여자에게 달려가서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젊은 남자는 피를 흘리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발끈했다.
“이 자식들이!”
“데니, 안 된다.”
중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를 만류했다. 그사이 그 집 안에 있던 쓸 만한 물건과 식량, 그리고 가축들을 깡그리 챙긴 병사들이 다른 집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중년 여자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젠 우린 어떻게 사니?”
고개 숙인 중년 여자의 발치로 굵은 눈물 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그런 희망을 잃은 어머니를 보고 있던 젊은 남자가 질끈 입술을 깨물고 집 뒤로 돌아서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젊은 남자가 달려간 곳은 농노들이 모여서 농사를 짓고 있는 방대한 논이었다. 밀집촌에 사는 농노들은 마을 뒤쪽 넓은 평야에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그 땅의 주인은 영주인 크루거였고 그곳에서 생산한 호밀은 전부 영주의 것이었다.
농노들은 단지 노역만 있을 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대충 일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관리가 매일같이 감시하고 또 수확량이 적을 경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농노는 크루거를 만나러 영지성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태껏 영지성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농노는 지금까지 없었다.
“테베스, 테베스!”
젊은 남자는 농노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백금발의 건장한 남자에게 달려갔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건장한 구릿빛 피부의 30대 중반의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젊은 남자가 그 남자 앞에 도착했다.
“헉헉! 테베스! 노, 놈들이 또…….”
“데니.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해라.”
테베스의 말에 데니는 크게 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테베스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데우스가 또 병사들과 같이 집을 뒤지고 집안의 물건과 식량, 가축들을 강탈해 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자들이 기어이!”
분노한 테베스가 논 밖으로 뛰어나왔다.
삐이이익!
그리고 잠시 후 평원 주위로 긴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논에서 일을 하던 남자들이 우르르 논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긴급 소집령이라도 내려진 듯 일제히 평원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일을 하다 말고 모여든 농노들은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단상 위를 쳐다보았다. 농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밀집촌의 관리인 데우스가 농노들에게 공지 사항을 알리는 곳이었다.
매일 데우스와 병사들만 올라가던 그 단상 위로 백금발의 건장한 체격의 한 농노가 올라섰다. 그를 보고 농노들의 눈에는 저마다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단상에 오르자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주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데우스가 또 우리의 보금자리를 침탈하고 우리 소유물을 뺏아 갔습니다. 나와 여러분은 저번에 분명히 데우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집과 우리 물건에 손을 대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기억하십니까?”
테베스의 물음에 농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네!”
군중의 대답에 테베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경고를 무시했으니 저들도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맞소! 이렇게는 더 살 수 없소!”
“어차피 여기서 살긴 틀렸소!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끝장을 봅시다!”
“참을 만큼 참았소! 이젠 우리의 분노를 놈들에게 보여 줍시다!”
농노들이 모두 테베스의 말에 호응하자 테베스가 소리쳤다.
“모두 준비한 무기를 챙겨서 다시 이곳에 모이시오!”
테베스의 외침에 농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아! 테베스 만세!”
“우린 테베스만 믿겠소. 테베스가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나?”
테베스에 대한 농노들의 믿음은 거의 절대적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잠깐!”
단상 위로 구부정하게 허리가 굽은 노인이 올라섰다.
그를 보고 농노들은 테베스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테베스를 볼 때와 달리 농노들의 눈에는 어떤 열망보다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노인은 단상에 올라서자 생각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농노들에게 외쳤다.
“너희들의 분노는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표출할 때가 아니다! 지금 이곳에 영주가 와 있단 말이다!”
“영주? 헉, 그럼 그 데라도스의 개가 와 있단 말인가?”
“영주가 왔다면 기사와 병사들도 많을 텐데?”
웅성웅성!
노인의 말은 농노들에게 바로 큰 파장을 가져왔다.
노인의 이름은 베그다로 그는 농노가 아니었다. 그는 연금술사로 오래 전부터 이곳 밀집촌에 살아 온 토박이였다.
크루거에 의해 땅을 뺏긴 다른 자영농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지만 그만은 계속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그는 농노들과 같이 살면서 무지한 농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진 수차와 방앗간을 만든 것도 베그다였다. 농노들에게 있어서 베그다는 없어서는 안 될 마을의 어른이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말이니 농노들도 그 말만큼은 허투루 듣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입니까?”
그때 단상 위의 테베스가 다시 나섰다.
“영주가 왔다니 더 잘됐군요.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테베스의 말에 농노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였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의 농노 아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황급히 단상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울면서 단상 위의 테베스와 베그다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흑흑흑! 엄마와 누나가 끌려갔어요!”
“뭐, 뭐라고?”
잠시 후 좀 더 큰 아이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영주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마을 젊은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저항하던 농노 수십 명이 놈들에게 맞았습니다!”
그 말에 테베스가 발끈하며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베그다를 보고 소리쳤다.
“베그다 님! 이래도 놈들을 그냥 두잔 말씀이십니까?”
“…….”
베그다는 길게 한숨을 내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테베스가 다시 무장을 갖춰 모이라는 말로 농노들을 선동했다. 그러자 잔뜩 흥분한 채 테베스에 호응한 농노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베그다는 단상을 내려가서 어디론가 향하는 테베스의 넓은 등을 쳐다보고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2. 농노들의 봉기Ⅰ
테베스가 농노 밀집촌에 온 것은 작년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테베스는 용병이었는데 실수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고, 그 죄로 노예로 살다가 도망쳐서 이곳 마을에서 농노로 살고 있다고 했다.
영지법에서 타 지역에서 넘어온 노예가 농노가 될 경우 그 영지 영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즉, 주인이 나타나도 그 영지 영주가 거부하면 노예를 데려갈 수 없었다.
이는 지방 영지의 영주들이 자신의 세수를 늘리기 위해서 취한 조치로 도망친 노예 주인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그 영지의 주인은 영주였다. 영주의 허락 없이 도망친 노예를 잡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영주 몰래 은밀히 노예를 잡아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농노가 되면 영지 관리의 관리 대상이 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농노 한 명이 줄면 그 만큼 영지 관리가 거둘 세금이 줄어들게 되니 영지 관리도 눈에 불을 켜고 농노들을 관리했던 것이다.
테베스가 이 마을에 오고 나서 주로 젊은 농노들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용맹하고 강해 보이는 테베스였다.
자연히 힘을 숭배하는 젊은 농노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는 그 젊은 농노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싸우는 방법을 몰래 가르쳤다. 그리고 무기도 은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