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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차차차착!
눈 깜짝할 사이에 크루거의 병사들이 밀집 보병으로 변신했다. 보병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밀집 보병은 지금처럼 지휘 체계 없이 무턱대고 돌진해 오는 적을 상대할 때 그 파괴력이 가장 컸다.
반면 농노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와아아아!”
그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들의 무장 상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넝마 같은 옷에 신발이 없는 자가 절반이 넘었다. 손에 들린 무기 역시 나무를 깎아 만든 방망이와 농기구와 도끼를 갈아서 날을 세운 무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지휘자도 없었다.
크루거를 잡겠다고 돌진한 50여 명의 농노들은 말 그대로 폭도들에 불과했다.
질서정연하게 포개진 원형의 방패들의 장벽을 향해 농노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
쿠쾅쾅쾅!
농노들이 먼저 들고 있던 무기로 전방의 방패들을 두들겼다. 하지만 빈틈없는 밀집대형에 가로막혀 그들의 공격은 크루거의 병사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때 밀집대형 뒤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이 보 전진.”
“하나둘!”
차착!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방패를 내세우고 힘으로 밀어붙이며, 두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힘에서 밀린 농노들은 격분해서 재차 방패를 향해 달려들었다.
슈슈슉!
그때 방패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튀어나왔다.
푸푸푸푹!
창들은 일제히 방패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려던 농노들의 목과 가슴,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억!”
창에 찔린 농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저리치며 몸부림을 쳤다. 창은 금방 뽑혔고, 상처를 입은 농노들은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순식간에 십여 명의 농노들이 쓰러지자 다른 농노들이 흠칫 놀랐다.
“뭐, 뭐야?”
그때 밀집대형이 풀렸다.
차차차락!
그리고 방패 뒤에 창을 들고 서 있던 병사들이 농노들을 향해 투창을 시작했다.
슈슈슝!
워낙 근거리에 있었고 농노들의 수중에는 투창 공격을 막을 어떤 방어구도 없었다.
퍼퍼퍼퍽!
“크아아악!”
날아간 창은 농노들의 몸통에 꽂혔다. 창에 박힌 농노들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병사들의 투창 공격에 서 있던 절반 이상의 농노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앞쪽에 밀집대형을 갖추고 있던 방패를 든 병사들이 어느새 살아남은 농노들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뒈져!”
퍽!
그들은 들고 있던 원형 방패로 반쯤 넋이 나간 농노들의 머리를 박살냈다.
“크아아악!”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의 절반 정도 되는 중간 길이의 검을 꺼내서 아직 죽지 않은 농노들의 목을 베고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푹! 푹!
“커어억!”
순식간에 50여 명의 농노들이 전부 죽었다.
앞서 데우스와 병사들을 쫓았던 50여 명의 농노들의 뒤에서 다시 농노들이 나타났다.
“허억!”
“저, 저게 뭐야?”
그들은 참혹하게 죽어 있는 동료 농노들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크루거의 병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로 물러나서 다시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후 무장한 100여 명의 농노들이 크루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앞선 농노들과 달리 대놓고 크루거를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대형을 갖춰라. 훈련받은 대로 움직여. 어서!”
“공격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라.”
농노들 사이에 체계적인 명령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크루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테베스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벽난로 뒤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일 년 넘게 그가 살아온 보금자리였는데 이제는 떠나야 할지 몰랐다. 폭동을 일으키고 계속 이 마을에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
그때 그의 아들인 부르스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부르스는 15살이지만 덩치는 웬만한 성인보다 더 컸다.
“저도 싸울게요.”
부르스의 말에 테베스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이건 어른들의 싸움이다.”
“저도 내년이면 성인이라고요.”
“그러니 내년에 싸워라. 넌 아직 싸울 자격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넌 마을 아이들을 챙겨라.”
테베스가 농노들 중 성인 남자들의 우두머리라면 부르스는 아이들의 우상이었다.
“알겠어요. 대신 꼭 이기셔야 해요.”
부르스의 걱정스런 눈빛에 테베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 아비는 반드시 살아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내 고향 세리아로 말이다.”
테베스가 말한 세리아는 레오팔트 공작령의 12곳의 영지 중 최북단에 위치한 루실 영지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누구나 저마다 사정이 있지만 테베스에게도 말 못할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테베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덜컹!
테베스 옆집에 사는 농노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대장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죠!”
“아! 알았소.”
상념에 빠졌던 테베스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부르스에게 다가가서 그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테베스가 농노들이 모이기로 한 장소에 나타났을 때 50여 명의 농노들이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요? 이런… 갑시다.”
자신의 명령도 없이 50여 명의 농노들이 성급하게 데우스와 마을 병사들을 잡으러 갔다는 말에 테베스는 즉시 모여 있던 100여 명의 농노들을 이끌고 데우스의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 눈앞에는 처참하게 죽어 있는 50여 구의 시체들밖에 없었다. 동료 농노들을 보고 농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피를 보고 더 흥분해서 당장 영주와 기사, 병사들을 쳐 죽이자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자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그들의 지휘자인 테베스에게 말이다.
테베스는 크루거의 병사들이 취하고 있는 전투 대형과 그들의 무장상태를 보고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거나 절망스런 얼굴 표정은 지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에 졌던 그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전투 대형을 갖춰라.”
테베스의 입에서 결전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일갈에는 힘이 넘쳤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흥분한 농노들은 더욱더 흥분했고 겁에 질려 있던 농노들은 두려움을 떨쳐 냈다.
“와아아아!”
농노들이 함성을 지르며 테베스에게 배운 대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눈앞에 죽어 있는 동료들을 보시오. 저들이 누구에게 죽었습니까?”
테베스의 말에 농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참혹히 죽어 있는 농노들을 보며 분노를 키워 나갔다.
분노는 전장에서 가장 큰 힘이었다. 농노들은 병사들에 비해서 훈련도 잘 받지 못했고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다.
그런 농노들이 병사들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분노에 미쳐서 날뛰는 것이었다. 테베스는 그것을 잘 알았고, 그것을 어떻게 끌어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저들은 조금 전까지 우리와 함께 땀 흘리고 일하던 이웃이며 형제들이었습니다. 저들이 왜 저렇게 죽어야 합니까?”
“저놈들을 죽이자!”
“다 죽여라!”
“영주를 죽이고 영주의 개들도 다 죽이자!”
테베스의 말에 호응해서 농노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때 테베스가 검을 빼 들었다.
“이 테베스가 앞장설 것입니다.”
테베스가 앞으로 나서자 농노들이 더욱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테베스! 테베스!”
테베스는 대형을 갖춘 농노들보다 대여섯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곧 농노들이 공격해 올 것으로 여긴 크루거의 병사들이 밀집대형을 갖췄다. 그것을 보고 테베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밀집대형이 무섭긴 하지. 하지만…….’
다시 뒤돌아선 테베스가 농노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격전의 시간입니다. 두려움은 잠시 발아래 내려 두고 저만 따르십시오.”
테베스는 강렬한 눈빛으로 농노들을 훑어본 뒤 대형 바깥쪽에 서 있는 연금술사 베그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뒤돌아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공격!”
테베스의 입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과 함께 테베스가 가장 먼저 크루거의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
그 뒤를 100여 명의 농노들이 뒤따랐다. 농노들 중 성인 남자 농노의 수는 200여 명이었다. 하지만 그중 50여 명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50여 명은 겁을 집어먹고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농노들은 뼛속까지 농노들이었고 주인인 영주에게 항거한다는 것은 그들의 가치 기준에 있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에 숨어서 폭도로 돌변한 농노들과 병사들 간의 싸움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데우스는 게르만의 말처럼 영주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50여 명의 폭도들을 죽여 버리는 것을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다시 100여 명의 폭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게르만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게르만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폭도들을 쳐다보고 혀를 찼다.
“쯧쯧. 한심한 놈들.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지.”
크루거를 대신해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 웨든은 폭도들 앞으로 웬 덩치 큰 남자가 검을 빼 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폭도들이 곧 공격해 올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밀집대형을 갖출 것을 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폭도들이 병사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기사 웨든도 병사들도 차분히 방패를 내세우고 전면을 주시하며 폭도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갑자기 밀집대형 한가운데 폭발이 일었다.
“크아아아악!”
수십 명의 병사들이 흙무더기와 함께 폭발에 휩쓸려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한 번의 폭발로 견고하던 병사들의 밀집대형은 깨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폭도들 맨 앞의 테베스가 가장 먼저 병사들에게 도착했다.
부웅!
테베스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서걱!
폭발로 정신이 없었던 병사는 방패를 내리고 있었고, 테베스의 검은 여지없이 병사의 목을 갈랐다. 절반쯤 목이 잘린 병사는 채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피를 내뿜으며 힘없이 쓰러졌다.
“와아아아!”
뒤이어 농노들이 일제히 폭발로 인해 반쯤 혼이 빠져나간 병사들을 덮쳤다.
폭발에 이은 공격까지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테베스를 제외하고 농노들은 제대로 병사들을 공략하지 못했다.
실전의 차이였다.
농사만 짓던 농노들이 하루아침에 사람을 죽이는 병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농노들은 병사들을 죽일 수 있는 순간 머뭇거리기 일쑤였다. 노련한 병사들은 그것을 눈치채고 위기의 순간 재빨리 몸을 사렸다.
“후퇴하라!”
그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 웨든이 명령을 내렸다. 반면 병사들은 과연 정예병들다웠다.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방패로 농노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그들은 죽거나 다친 동료 병사들까지 챙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농노들은 마음만 급해서 무턱대고 공격을 가했지만 막상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사상자는 즉각 지휘관인 기사 웨든에게 보고되었다. 병사들이 물러나자 자연스럽게 흥분한 농노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그들을 쫓았다.
“와아아아!”
그때 테베스가 소리쳤다.
“쫓지 마시오. 멈춰요, 멈춰!”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주위 농노들의 함성에 묻혀서 병사들을 쫓는 앞쪽 농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또 하나의 참사를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