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뒤에 물러 나 있던 크루거는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어 온 최고의 야전 지휘관이었다. 폭발이 일어나자 그는 바로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
“기사들이 나가라.”
크루거의 명령에 병사들의 지휘를 기사 웨든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 나 있던 4명의 기사들이 바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은 뛰는 와중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병사들이 무너진 대형을 다시 갖추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비켜라!”
기사들은 지체 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 앞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병사들을 뒤쫓아 달려드는 농노들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번쩍!
푸르스름한 빛이 번뜩이는 순간 농노들의 몸이 들고 있던 무기와 함께 쪼개졌다.
“컥!”
털썩!
츄아아악!
농노들이 비명과 함께 그 몸에 바닥에 널브러지고 나서야 핏줄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기사들의 검은 예리했다. 기사들은 마나가 맺힌 검을 횡으로 휘둘러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어냈다.
4명의 기사가 순식간에 20명도 넘는 농노들을 벴다.
“헉!”
인명 피해보다 심각한 것은 눈앞에 토막 나서 죽은 동료 농노들을 지켜보았던 나머지 농노들의 정신적 공황이었다.
겁에 질린 농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은 쫓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더 덤비는 농노들이 없자 기사들도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제길!”
테베스가 잠깐 사이 벌어진 참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는 그사이 병사들이 꽤나 빠르게 후퇴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벌써 50미터는 뒤로 물러난 병사들을 보고 테베스가 다급히 농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대형을 갖추시오! 저들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됩니다!”
테베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농노들은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전투 대형을 갖췄다.
3. 농노들의 봉기Ⅱ
크루거는 비록 자신이 익히고 있는 마나 수련법은 아니지만 비교적 뛰어나다고 알려진 마나 수련법을 구해서 자신의 기사들에게 가르쳤다. 그 결과 기사들 모두가 마나를 사용할 줄 알았다.
비록 그 수준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와 그렇지 못한 기사의 차이는 컸다. 특히 전장에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의 가치는 대단했다.
그 효용 가치는 조금 전에도 여실히 증명되지 않았던가? 기사 네 명이서 농노들의 추격을 저지시켰으니 말이다.
기사들의 활약으로 병사들은 퇴각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크루거는 어떻게 농노들을 짓이겨 죽여 버릴지 생각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후방으로 물러난 기사 웨든이 크루거 앞으로 뛰어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사상자가 12명이나 됩니다. 패전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전장에서 패한 지휘관은 반드시 그 죄를 묻는 법이었다. 하지만 크루거가 판단하기에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벌써 그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 폭발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죽은 병사들에 대한 복수는 해 줘야겠지. 놈들은 잘근잘근 짓이겨 버려라.”
크루거의 명에 웨든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존명!”
웨든은 즉시 병사들에게 달려갔다. 그때 병사 몇 명이 마을 입구 마구간에 있던 말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말에 올라라.”
웨든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마구간에서 빠져나온 말들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보병들이 기병으로 변했다. 보병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기병들이 급조된 것이다.
흔히들 기병의 효용 중 가장 큰 장점으로 기동력을 뽑는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기병의 기동력보다 기병의 충돌이 더 효율적일 때가 많았다.
기병의 충돌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육중한 말에 인간의 무게까지 더해지면 그 충격은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없었다.
30여 명의 병사들이 모두 말에 오르는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사들이 모두 말에 오르자 기사 웨든이 앞으로 말을 몰며 소리쳤다.
“돌격!”
두두두두!
병사들이 일제히 전면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러면서 30여 기의 기마들이 곧 일사분란하게 돌격 대형을 만들어 냈다. 기병들은 50여 미터 앞에서 어설프게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는 농노들을 향해 빠르게 돌진해 들어갔다.
기병이 돌진해 오자 테베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아! 벌써…….”
이쪽은 채 전투 대형조차 갖추지 못했는데 저들은 후퇴 후, 바로 기병으로 변신해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 기병을 상대로 공격한답시고 달려드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테베스가 바로 소리쳤다.
“흩어지시오, 어서! 마을 안에서 놈들을 상대하도록 하겠소!”
테베스의 외침에 그 말을 알아들은 농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농노들은 훈련받는 정예 병사들은 아니었다. 절반가량의 농노들이 그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기병들이 바람처럼 빠르게 그들을 덮쳤다.
콰콰콰쾅!
둔중한 충돌음을 시발점으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낭자하게 번져 나갔다.
“아아아악!”
핏줄기가 뿜어지며 농노들 몸뚱이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농노들의 허술한 무기가 널려지며 그 위로 피가 뿌려졌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참상을 연출해 냈다.
퍼퍼퍽!
말에 부딪쳐서 한참을 날아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농노들의 시체는 처참할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다.
히히히힝!
무시무시한 기병의 충돌에 이어서 말들의 무자비한 발길질이 농노들을 덮쳤다. 기병들은 능숙하면서도 잔인하게 말발굽으로 농노들을 짓이겼다.
퍽!
빠깍!
“끄아악!”
말발굽에 짓이겨진 농노들이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토해냈다. 전투 대형에서 벗어나서 마을로 달아나지 못한 40여 명의 농노들이 그대로 기병들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주위 땅은 온통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테베스는 기병들에 짓밟혀 처절하게 죽어 가는 농노들을 보며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때 누가 그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테베스! 어서 움직이게! 남은 사람들마저 저 꼴로 만들 것인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연금술사 베그다가 사나운 눈총으로 테베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요.”
정신을 차린 테베스가 막 움직이려 할 때 베그다가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놈들은 내 집 앞으로 유인해 오게.”
그런 베그다를 돌아보며 테베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농노들과 같이 마을 안쪽으로 사라졌다. 테베스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베그다도 뒤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사, 살려… 컥!”
말에서 내린 기사와 병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피 웅덩이에서 신음하는 농노들의 목을 베고 가슴에 창과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이내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기사 웨든이 어느새 그들 뒤에 말을 타고 나타난 크루거에게 물었다.
“놈들이 마을 안으로 도망쳤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말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고 담벼락도 없이 바로 집들이 더덕더덕 붙은 채 늘어서 있었다. 게다가 지붕이 낮아서 말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머리를 숙이고 움직여야 했다.
한마디로 기병이 전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말은 다시 마구간에 집어넣고 놈들을 쫓는다. 저항하는 놈들은 가차 없이 죽여라.”
“항복하는 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잡아 와. 폭동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주위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을 테니.”
크루거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존명!”
기사 웨든은 즉시 병사들과 같이 말을 타고 마구간으로 달려가서 그곳에 말을 넣어 두고 다시 뛰어와서 전투 대형을 갖췄다. 그때 크루거가 뒤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총관!”
크루거의 외침에 총관 게르만이 허겁지겁 크루거 앞으로 달려왔다.
“영주님, 찾으셨습니까?”
말 아래 게르만이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그를 내려다보며 크루거가 물었다.
“그 폭발, 어떻게 된 것이냐?”
“안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곳 관리인 데우스에게 물었더니 데우스가 말하길 아무래도 그 연금술사의 짓 같다고 합니다.”
“연금술사라면 그 베그다란 늙은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데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 늙은이가 자주 폭발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뭐? 그런데 그 사실을 왜 진작 내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크루거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둘러대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총관 게르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최근에 아픈지 집밖으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곧 죽을 거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 늙은 이 때문에 죽은 내 병사가 7명에 다친 자가 5명이다. 그 빌어먹을 늙은이를 당장 잡으러 가야겠다. 내 직접 그 늙은이의 목을 비틀어 버려야 화가 풀리겠다. 데우스에게 당장 그곳으로 안내하라고 해라. 어서!”
크루거의 말에 총관은 즉시 데우스의 집으로 달려가서 데우스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러자 크루거가 자신을 지키고 있던 4명의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그러자 4명의 기사 중 한 명이 나섰다.
“제가 총관과 같이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영주님께서는 그냥 여기 계십시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뭐하느냐? 앞장서지 않고.”
크루거가 총관 옆에 서 있는 데우스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영주가 직접 자신에게 명하자 데우스가 흠칫 놀라며 일단 대답했다.
“아! 네네.”
데우스는 힐끗 총관의 눈치를 보면서 연금술사 베그다의 집으로 크루거를 안내했다. 크루거가 움직이자 4명의 기사들이 크루거의 주위를 에워싼 채 움직였다.
‘그냥 기사 보고 잡아 오라고 할 것이지 위험하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난리람.’
그런 그들 뒤를 걱정스런 표정의 총관이 뒤따랐다.
테베스는 살아남은 50여 명의 농노들과 합류해서 베그다의 집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저기 있다! 쫓아라!”
방패를 앞세우고 좁은 길을 따라 30여 명의 병사들이 테베스와 농노들을 뒤쫓았다.
베그다의 집 앞은 제법 넓은 공터가 있었다. 베그다는 주로 그곳에서 폭발 실험을 했다. 실험에는 화약을 작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 폭발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공터는 베그다가 실험하지 않을 때 농노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로 이용되었다. 베그다가 막 그 놀이터 바닥에 뭔가를 묻고 나자 테베스와 50여 명의 농노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됐습니까?”
테베스가 다급하게 베그다에게 물었다. 그러자 베그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다 됐네.”
베그다의 대답에 테베스의 경직된 얼굴이 눈 녹듯 풀렸다.
“잘됐습니다. 어서 움직여라.”
테베스가 베그다의 집을 가리키며 농노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농노들이 집 앞으로 뛰어갔고 일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시죠.”
테베스가 베그다와 같이 집 앞으로 움직였다. 그때 기사 웨든이 이끄는 병사들이 공터 입구 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다.”
좁은 길을 벗어난 병사들은 정예 병사들답게 바로 농노들을 향해 짓쳐들지 않았다. 그들이 공터 입구에 밀집 대형으로 전열을 갖추고 나자 지휘관인 기사 웨든이 조심스럽게 공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웨든은 넓은 공터를 끼고 있는 베그다의 집 앞에 굳은 얼굴로 늘어 서 있는 농노들을 보고 외쳤다.
“이놈들, 당장 그 무기를 버리지 못할까!”
웨든의 외침에 테베스가 바로 응대했다.
“웃기지 마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야 하는 건 영주의 개들인 너희들이다.”
테베스의 다소 도발적인 외침에 기사 웨든이 발끈했다.
“이놈들, 끝내 죽고 싶단 말이지? 잘 알았다.”
웨든뿐 아니라 자신들을 영주의 개라고 하자 병사들도 대부분 격분한 표정들이었다.
“포로 따윈 필요 없다. 자비도 모두 버려라. 다 죽여 버려!”
웨든의 명령이 떨어지자 밀집대형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베그다의 집 앞에 모여 있는 농노들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