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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내 상대가 아니다.’
크루거를 마주한 순간부터 테베스는 자신이 크루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무기력할 줄은 몰랐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자괴감이 테베스를 괴롭혔다.
“크아아악!”
그때 처절한 농노들의 비명 소리가 테베스의 귀에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순간 테베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덜덜덜!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테베스는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참혹하게 죽어 가고 있는 농노들은 그를 믿고 따르던 자들이었다. 그들을 이대로 죽게 만들 수 없다는 그의 강렬한 신념이 크루거의 속박으로부터 그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크루거는 테베스가 자신이 펼친 속박술에도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신력이 대단한 놈이로군.’
크루거가 테베스에게 펼친 속박술은 소드 마스터가 자주 사용하는 능력 중 하나였다.
소드 마스터란 존재는 체내에 위압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흔히 살의라고 부르는데 그 근원은 바로 소드 마스터의 체내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마나 덩어리였다.
써도 마르지 않는 그 마나 덩어리는 소드 마스터의 살의만으로도 상대 몸을 꼼짝달싹 못하게 속박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소드 마스터들은 그것을 속박술이라 불렀다.
제후인 레오팔트 공작을 비롯해서 크루거가 아는 공작 휘하의 귀족들 모두 크루거가 상급 소드 익스퍼트의 기사로 알고 있었다.
크루거의 나이에 상급 소드 익스퍼트라면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크루거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기사들이 수두룩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옛날 이야기였다. 크루거는 자신의 실력을 철저히 숨겨 왔다. 그런 그는 최근 최상급 경지마저 넘어서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크루거 본인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크루거는 비록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자신이 소드 마스터의 능력 중 그 살의를 사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불과 한 달 전 수련장에 나타난 쥐를 보고 살의를 띠자, 쥐는 크루거의 손에 잡힐 때까지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크루거는 수련장 밖을 지키던 경비병과 기사에게도 그 살의를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수련장 밖의 두 경비병 모두 파랗게 질려서는 크루거의 살의에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크루거는 자신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소드 마스터의 속박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크루거는 가끔 이런 속박술을 사용했다.
비록 그것을 사용하게 된 것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크루거의 속박술을 벗어난 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농노 중 하나가 깨트린 것이다. 크루거의 눈이 놀람과 함께 순간 번쩍였다.
“타앗!”
이때 크루거의 속박술에서 벗어난 테베스가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크루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베스의 검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크루거를 향해 날아갔다.
부웅!
스륵!
크루거는 간단히 회피 동작을 취했다.
휘익!
크루거의 머리를 노리고 휘두른 테베스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큭!”
그 순간 테베스는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별 대수롭지 않게 테베스의 공격을 피해 낸 크루거가 번개같이 아직 검도 뽑지 않은 검을 검집째 뻗어 테베스의 복부에 박아 넣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일격이었다.
“맷집이 좋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테베스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엎어져서 며칠 전에 먹은 음식까지 다 게워 낼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테베스가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마나를 사용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처럼 서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베스마저 당한다면 이 마을은 끝장이었다.
“타아앗!”
괴성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테베스가 또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오른손에 들린 테베스의 검이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크루거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루거는 여전히 검을 뽑지 않고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테베스의 검을 피했다. 테베스의 검은 확실히 빠르고 위력적이었지만 크루거는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간단히 그 공격들을 피해 냈다.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공격을 피할 만큼만 몸을 움직이는 크루거의 몸놀림에 보고 공격하던 테베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사력을 다한 테베스의 공격을 절묘한 동작으로 피하기만 하던 크루거가 불쑥 뽑지도 않은 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커억!”
동시에 테베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루거가 검집째 휘두른 검이 크루거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비틀거리며 옆으로 몇 걸음 물러났던 테베스가 미친 듯 괴성을 지르며 크루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폭주한 듯 테베스는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붕! 붕!
하지만 크루거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여전히 자로 잰 듯, 정교한 동작으로 테베스의 공격을 피하며 허점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들고 있던 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쉬익!
“컥!”
검에 베여 피는 나지 않았지만 테베스의 몸은 점차 망가져 가고 있었다. 갈비뼈에 이어서 왼쪽 다리와 왼팔이 차례로 맞아 부러졌다.
“크으으윽!”
부러져 사용할 수 없어 축 늘어진 왼팔과 무릎이 박살 난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테베스가 악착같이 크루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성한 몸으로도 그 그림자조차 건드리지 못한 테베스가 크루거를 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루거는 테베스의 공격을 간단히 피한 뒤 여전히 뽑지도 않은 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그러나 그 공격도 너무 빨라서 테베스는 막아 내지 못했다.
탁!
크루거의 검이 테베스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윽!”
오른쪽 어깨뼈가 박살났는지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러진 왼팔에 이어서 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된 테베스는 이를 악물고 크루거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을 보고 크루거가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마치 미친 황소 같군.”
몸을 돌려 슬쩍 테베스를 피해 낸 크루거는 훤히 드러난 테베스의 머리를 들고 있던 검으로 내려쳤다.
퍽!
그것이 결정적인 일격인 듯 테베스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져서 혼절해 버렸다.

농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테베스가 악질 영주에게 패하는 모습은 농노들에게 절망을 안겨 주기 충분한 광경이었다.
툭!
기사와 병사들에게 거세게 저항하던 농노들이 하나둘씩 들고 있던 무기를 버렸다.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농노들은 바로 제압하고 밧줄로 줄줄이 묶었다.
그때 웨든은 동료 기사들과 같이 연금술사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늙고 초라한 모습의 베그다를 밖으로 끌어냈다.
퍽! 퍽!
그때 한쪽에서 총관인 게르만이 온몸을 밧줄로 칭칭 감고 있는 테베스의 얼굴을 두 발로 사정없이 밟아 댔다.
“이 개새끼! 너 따위가 감히 내 동생을!”
테베스의 얼굴은 곧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테베스의 입에서는 신음 소리 한 번 나오지 않았다.
묵묵히 맞고 있는 테베스에 화가 난 것일까? 총관이 테베스를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다가가서 그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어디 팔 하나가 잘려도 비명을 안 지르는지 두고 보자.”
게르만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뭐하는 거냐?”
귀에 익은 목소리에 게르만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악질 영주 크루거가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르만은 즉시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그, 그것이… 영주님. 저놈을 이 자리에서 제 손으로 죽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게르만이 제법 간절한 목소리로 크루거에게 부탁했다.
“데우스의 복수를 하고 싶은가 보군?”
“그렇습니다.”
“그건 안 돼!”
크루거가 단번에 거절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망각한 게르만이 발끈하며 말했다.
“왜 안 됩니까?”
그러자 크루거의 눈에서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퍽!
그리고 언제 움직였는지 크루거가 게르만 앞에 나타났고,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게르만의 몸이 뒤로 솟구쳤다. 게르만의 몸은 솟아 오른 만큼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크윽!”
게르만의 몸이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뒤, 가슴을 잡고 몸을 웅크린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안 되면 안 되는 거다. 한 번 더 내 말에 토를 달면 그땐 너의 몸이 아닌 네놈의 머리통이 날아갈 줄 알아라.”
크루거는 자신의 말에 어떤 식으로든 항변하는 것을 싫어했다. 크루거는 자기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수하가 필요했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수하 따윈 필요 없었다.
만약 상대가 총관이 게르만이 아니었다면 크루거는 그 자리에서 그자의 목을 날려 버렸을 터였다.
크루거에게 총관 게르만은 꼭 필요한 수하였다. 게르만이 없다면 크루거는 원만하게 영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러니 게르만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됐다. 적어도 그를 대신할 다른 총관을 뽑기 전까지는 말이다.
크루거에게 가슴을 걷어차인 게르만은 내상이 심해서 병사들이 부축해서 죽은 마을 관리 데우스의 집으로 데려갔다.
크루거는 얼굴이 온통 피칠갑이 되어 있는 테베스를 힐끗 쳐다보고 그를 지키던 기사에게 명했다.
“보기 흉하다. 얼굴이라도 씻겨라.”
“네, 영주님.”
기사가 병사들을 불러서 물을 떠 오라는 명령을 내릴 때 크루거는 기사 웨든에 의해 집 안에서 끌려 나온 연금술사 베그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집 안에서는 병사들이 베그다의 각종 실험 도구들과 재료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잔가?”
잡는 과정에서 때린 듯 베그다의 한쪽 눈과 볼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다소 초췌해 보이는 몰골의 늙은이를 내려다보며 크루거가 물었다.
“네. 이놈이 그 연금술사입니다.”
기사 웨든이 곧 죽일 듯 사나운 눈으로 베그다를 쏘아보며 대답했다.
“늙은이. 너 때문에 내 병사 수십 명이 죽었다. 이제 어쩔 테냐?”
“…….”
크루거의 물음에 베그다가 침묵했다.
“이 새끼가.”
그러자 웨든이 발끈하며 발로 베그다를 걷어찼다.
퍽!
왜소한 늙은이가 건장한 기사의 발길질을 견뎌 낼 리 없었다. 베그다는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달려들어 바로 쓰러진 베그다를 잡아 크루거 앞으로 끌어다 다시 무릎 꿇렸다.
그때 다시 웨든이 발로 베그다를 차려 하자 크루거가 말렸다.
“그만!”
“하지만…….”
“웨든, 너도 내 말이 우스운가 보구나?”
크루거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흠칫 놀란 웨든이 머리를 조아리며 바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루거의 관심은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출세하는 것 말이다.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했다.
크루거는 지금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보기에는 아끼던 자신의 기사와 병사를 잃어서 그런 것이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달랐다.
크루거에게 이미 죽은 기사와 병사들은 죽은 농노들만큼이나 전혀 쓸모없는 존재들이었다. 지금 크루거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입은 막대한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폭발이라? 그렇군. 흐흐흐.’
그때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크루거의 입술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크루거가 기사 웨든에게 명했다.
“웨든, 마을에 있는 자들은 모두 다 잡아와라. 늙은이, 여자, 아이 가릴 것 없이 전부 말이다.”
“네.”
웨든은 대답은 했지만 뭔가 잔뜩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크루거는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가자.”
웨든은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을 뒤졌다. 그리고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농노 남자들을 비롯해서 마을 안에 있던 노인과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전부 끌어내서 베그다의 집 앞 공터로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