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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때 크루거는 베그다의 집 앞에 임시 단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런 크루거의 발아래는 단단히 결박당한 두 사람이 무릎 꿇려 있었다. 그 둘은 바로 연금술사 베그다와 용병 출신 농노 테베스였다.
“지금부터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 있겠다.”
크루거의 외침에 웨든을 비롯한 기사와 병사들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크루거는 항상 영지 내 문제는 영지성에서 처결해 왔다.
크루거는 누구나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떠벌렸다. 물론 그 재판 후 살아남은 자는 지금껏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루멘스 영지에서는 공평하게 재판받을 권리는 있어도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는 없었던 것이다.
크루거의 재판에서 유무죄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돈이 되느냐, 아니냐 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크루거가 판결한 모든 재판에서 죄인들은 전혀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 목이 잘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기준은 마찬가지였다. 폭도들이 돈이 된다면 크루거는 그들이 지은 죄쯤은 얼마든지 묵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금 낼 돈도 없는 농노들에게 크루거를 만족시킬 만한 돈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째든 지금 상황에서 모든 칼자루는 크루거가 쥐고 있었다. 크루거가 과연 어떤 결정을 할지는 전적으로 크루거에 달려 있었다.

크루거가 단상 아래 무릎 꿇려 있는 두 사람 중 베그다 쪽을 내려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마치 주위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말이다.
“연금술사 베그다여. 다시 묻겠다. 너 때문에 죽은 내 기사와 병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크루거의 외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악질 영주 크루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들의 죽음은 내가 여기서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는 대로 사죄토록 하겠소.”
자신의 지은 죄 값을 죽음으로 갚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크루거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베그다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크루거가 기사 웨든을 향해 소리쳤다. 역시 주위 사람들이 모두 들리게 큰소리로 말이다.
“웨든. 아이들을 끌고 와라.”
크루거의 명령에 웨든이 병사들에게 마을 아이들을 끌어내게 했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저, 저는 아무 죄가 없어요!”
“엄마, 무서워!”
어린 수십 명의 아이들이 병사들에 의해 단상 앞으로 내몰렸다. 그때 크루거가 아이들 중 남자 아이 하나를 손짓했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그 아이를 뒷덜미를 잡아서 크루거가 서 있는 단상 아래로 끌고 갔다.
“이거 놔요!”
아이가 저항을 했지만 병사의 억센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병사에 의해 끌려 온 아이가 베그다 옆까지 끌려 왔다. 아이와 연금술사 베그다는 자연스럽게 서로 눈이 마주쳤다.
“레니!”
베그다가 아이를 한눈에 알아봤다.
“베그다 님!”
아이 역시 베그다를 잘 아는 듯 보였다. 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크루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후후후. 여기 공터를 만든 것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더군. 아이들을 꽤나 좋아한 모양이지?”
그때 크루거가 비릿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베그다를 내려다보았다.
“무, 무슨 짓이요?”
악질 영주의 크루거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베그다가 불안한 눈으로 크루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크루거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이를 잡고 있던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아이를 죽여라.”
크루거의 입에서 참혹한 명령이 내려졌다. 아이를 잡고 있던 병사도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소!”
베그다가 소리쳤다.
“죄라면 그 아비가 지었지. 감히 영주의 병사를 죽이고 영주까지 죽이려 했으니 말이야.”
아이의 아비는 폭동에 가담했다가 기사와 병사들에 의해 참혹히 죽은 상태였다. 그로 인해 아이는 크루거와 그의 기사, 병사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그건…….”
크루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으니 베그다도 더 이상 아이를 변호하지도 못했다.
영지법에서 영주를 죽이려 한 죄는 대역죄와 같이 처벌되었다. 대역죄는 그 죄질에 따라서 삼대까지 처벌이 가능했다.
크루거가 아이를 잡고 있는 병사를 쳐다보았다.
크루거와 눈이 마주친 병사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크루거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의 목이 날아갈지 몰랐다. 농노의 아이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는 없었다.
병사가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의 검자루에 손을 갖다대자 베그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멈추시오. 원하는 게 뭡니까? 뭐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이만은…….”
뭐든 다 하겠다는 베그다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크루거가 검을 절반쯤 꺼낸 병사에게 멈추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단상 아래로 내려가서 무릎 꿇려 있는 베그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그 폭발 말이야. 정말 대단하더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내게 알려 줘야겠어.”
크루거의 말에 베그다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지, 지금 내게 폭약 제조술이라도 배우시겠다는 말씀이시오?”
“폭약이라? 후후후. 듣고 보니 이름부터 마음에 드는군.”
크루거가 베그다를 보고 히죽 웃어 보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폭약 말이야. 만들어 팔면 꽤 돈이 되겠지?”
폭약으로 돈을 벌겠다는 크루거를 보고 베그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베그다를 보며 크루거가 짧게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 늙은이.”
베그다가 폭약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크루거는 가차 없이 베그다의 목을 베어 버렸을 터였다.
베그다는 순전히 자신이 만든 폭탄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넌 어쩌지?”
크루거가 베그다 옆에 묶여 있는 테베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넌 이곳 마을 관리를 죽이고 내 기사를 죽였으며 병사들도 여럿 해쳤다. 재판할 것도 없이 이곳에서 즉결 처분해 버릴 수도 있다.”
크루거의 말을 듣고서 테베스는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비교적 담담한 얼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기사 하나가 크루거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뭐라고 속닥였다. 그러자 크루거가 그 기사에게 짧게 명했다.
“데려와.”
그리고 베그다 때와 마찬가지로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테베스를 쳐다보았다. 그 미소를 보고 테베스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잠시 후 기사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사람을 보고서 테베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헉!”
기사에게 잡혀 온 사람은 바로 테베스의 아들인 부르스였던 것이다. 어른만큼 큰 덩치의 부르스는 아직 어렸다. 처참한 몰골로 잡혀 있는 테베스를 발견하고 부르스가 소리쳤다.
“아버지!”
그 말에 테베스의 옆에 있던 베그다가 질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자신에 이어서 테베스마저 크루거의 손에 놀아나게 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크루거가 테베스를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의 비밀쯤은 간단히 불게 되어 있지.”
아마도 농노들 중 하나가 테베스에게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건장한 아들을 뒀군. 아들 이름이 뭐지?”
크루거의 물음에 테베스는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부르스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묻지 않았군.”
크루거는 농노들의 외침에서 테베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거는 테베스의 입을 통해서 그 이름을 직접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크루거의 말에 테베스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테베스요.”
“그래. 테베스. 난 말이야 오늘 충성스런 기사를 잃었다. 기사 한 명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만지 아나?”
기사 운운하는 크루거의 의도를 테베스는 곧 간파했다. 크루거는 테베스를 죽은 기사를 대신해서 자신의 기사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지금 나보고 당신의 개가 되라는 말이요?”
놀란 표정의 테베스의 말을 듣고 크루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들이 팔 하나쯤 없어도 상관없는 모양이군.”
크루거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달려들어서 부르스를 붙잡았다.
“놔! 이거 놓으라고!”
부르스가 거칠게 저항했지만 혼자서 여러 병사들을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부르스를 제압한 병사들이 그의 한 팔을 앞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바로 검을 뽑아서 부르스의 팔을 자르려 했다.
“잠깐!”
테베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크루거의 발아래 땅에 강하게 머리를 찧었다.
쿵!
용병 생활로 잔뼈가 굵은 테베스는 크루거가 어떤 인물인지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충성!
아들인 부르스의 팔이 잘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테베스는 얼마든지 그런 모습을 연기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영주님!”
그 모습을 보고 크루거가 히죽 웃었다.
테베스의 예상대로 크루거는 테베스의 아들인 부르스의 팔을 자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루거 역시 많은 전투를 통해 사람 보는 눈은 비교적 정확했다.
“연기는 훌륭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날 속일 수 있다는 착각은 말도록. 생각할 시간을 주도록 하지. 내일까지 결정해라. 진심으로 나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아들과 같이 나란히 머리가 성문에 내걸리든지 말이다.”
그렇게 말한 후 크루거는 다시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후 큰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볼일을 마친 크루거는 나머지 폭동에 가담한 농노에 대해서는 예전과 같이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폭동에 가담한 죄인들은 내일 전부 영지성으로 가서 그곳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다.”
크루거의 말에 공터의 농노들의 얼굴이 전부 곧 죽을 사람들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하긴 재판 후 죽을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마을 건너 서산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연금술사 베그다는 악질 영주 크루거의 집요함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처음 크루거가 폭약 제조술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베그다는 그게 다 크루거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 이려거니 생각했다.
당연히 베그다는 크루거의 돈벌이를 위해서 폭탄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설마 직접 배우겠다고 설칠 줄이야.’
“그러니까 폭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황과 숯, 그리고 초석이 필요하다 이 말이로군.”
날이 어두워지자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친 크루거는 베그다를 붙잡고 그의 집에서 폭약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 비법을 직접 전수받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황은 바로 이 황색의 무취한 결정체들을 말합니다.”
베그다가 마을 한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황 성분들을 모아 놓은 통을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노란색 황을 보여 주었다.
이어서 그 옆에 있던 통 속에서 숯을 보여 주었고 이어서 초석이 들어 있는 통도 열어 보여 주었다. 통 속에는 황과 숯은 아직 많았지만 초석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이들 세 성분이 잘 혼합되면 폭약이 됩니다.”
“초석이 부족해서 폭탄을 두 개밖에 만들지 못했나?”
거의 비어 있는 초석 통을 보며 크루거가 묻자 베그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초석이 더 있었다면 더 많은 폭탄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요.”
다분히 크루거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크루거는 그 말을 별로 대수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루거에게 관심은 폭탄을 만들어서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이지 늙은 베그다와 지루하게 말다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초석은 어떻게 구하지?”
크루거의 물음에 베그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 폭발에 있어서 숯이 연소 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만든다면 황은 낮은 온도에서도 발화해서 폭발력을 증대시킵니다. 여기서 초석은 다른 구성물들의 연소와 폭발을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초석은 지표, 암석, 동굴에서 피복상으로 조금씩 산출되며, 특정한 토양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저는 주로 케르기스 산맥에서 그것을 구해 쓰고 있습니다.”
베그다의 말에 크루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케르기스 산맥이면 로마네스 왕국에 있지 않나?”
크루거의 말에 베그다가 약간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배층인 귀족들이 유식할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달랐다.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 글은 알지만 그 뒤부터 대부분 공부 따윈 하지 않았다. 대신 검술을 익히고 전쟁에 혈안이 되어 살 뿐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악질 영주인 크루거였다. 그런데 베그다의 예상 밖으로 크루거는 제법 똑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