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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오늘은 특별히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오리 훈제 구이가 좋겠어.”
리엔은 주방으로 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리엔은 크루거가 그녀 옆을 지나칠 때 크루거의 갑옷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어.”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의 리엔이었다. 리엔은 크루거를 수행했던 기사 하나를 불러서 왜 어제 오지 않고 하루 늦게 돌아왔는지 물었다.
기사는 대충 농노 밀집촌에서 있었던 폭동 얘기를 리엔에게 전했다. 그 얘기를 듣고 리엔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건가요?”
기사는 리엔이 영주의 수하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묻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사 한 명과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리엔에게 말했다.
“기사가 죽었다고요?”
“네. 기사 글루버가…….”
“글루버라면 웨든 경의 동생 분?”
“네, 맞습니다.”
“병사들이 수십 명씩 죽었으면 폭도들도 많이 죽었겠군요?”
“당연하지요.”
기사는 폭동을 일으킨 농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리엔에게 상세히 말해 주었다. 잠시 후 기사가 물러가자 리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크루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갑옷을 벗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크루거가 말했다.
“들어와.”
덜컹!
문이 열리고 기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님. 명하신 대로 그자들을 데려왔습니다.”
“포박을 풀어 줘. 그리고 웨든에게 그자들을 데리고 나를 찾으라고 전해.”
“네.”
기사가 나가자 크루거는 마저 갑옷을 다 벗고 곧장 자신의 방과 연결된 전용 욕탕으로 들어갔다.
크루거가 온다는 종소리가 울렸을 때 시녀장은 크루거의 목욕물을 데웠다. 그리고 크루거가 옷을 벗을 동안 욕탕에는 뜨거운 몰이 준비 되었다.
크루거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외출 후 그는 항상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피로도 풀고 생각도 정리했다.
“기사도 죽고 병사도 많이 잃었지만 폭탄만 만들어 낸다면 그 정도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지. 후후후.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크루거는 대영주 밑의 영주가 아닌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 정계의 막강한 권력자와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야 했다. 크루거는 그 연줄이 바로 돈이라고 생각했다.
“돈만 있으면 중앙 정계의 요직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만 띈다면 그때부터는…….”
제후들의 영향력이 커진 상태였지만 사라스 제국의 주인은 여전히 황제였다. 절대 권력자인 황제의 신임만 얻을 수 있다면 크루거가 권력을 쥐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크루거는 황제에게 접근만 할 수 있다면 황제의 신임을 얻어 낼 자신이 있었다.
올해, 늦어도 내년이면 크루거는 소드 마스터가 될 터였다. 현재 알려지기로 사라스 제국의 소드 마스터의 수는 채 10명이 되지 못했다.
사라스 제국의 전성기에는 소드 마스터의 수가 50명에 이르렀다. 그때와 비교한다면 현재 사라스 제국이 보유한 소드 마스터의 수는 너무 적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 시대의 전성기를 소드 마스터의 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도 했다. 그 말대로라면 현 사라스 제국은 전성기에 비해 그 힘이 1/5로 줄어든 상태라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젊은 소드 마스터의 등장은 분명히 황제나 중앙 권력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크루거는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 발만 내디딜 수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후후후. 내가 너무 앞서가고 있군. 크루거, 너는 지방 영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네가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는 날이 머지않았다.”
크루거는 자신에게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것은 지금껏 크루거가 성공해 오는데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크루거. 넌 할 수 있다.”
욕탕에서 넘칠 만큼 자신감을 불어넣은 뒤 크루거는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런 요리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크루거의 눈에 오리 훈제 구이가 보였다.
크루거가 특별히 좋아하는 요리로 아마도 그의 여동생인 리엔이 준비한 모양이었다. 크루거는 입안에 군침이 도는 것을 참으며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라버니!”
그때 화사한 분홍 드레스 차림의 리엔이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활짝 웃는 리엔을 보고 크루거도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리엔은 혼자가 아니었다.
“손님들이 있다고 왜 말 안 했어요?”
리엔이 두 사람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연금술사 베그다와 용병 테베스였다.

리엔은 주방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치료술을 배우기 전 리엔은 직접 크루거의 요리를 만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그녀의 특제 소스가 발린 훈제 요리는 크루거뿐 아니라 영주관의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리엔은 서둘러 자신만이 아는 그 특제 소스를 만들어서 요리사로 하여금 훈제 오리 구이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서둘러 저번 생일에 크루거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 너무 예뻐요.”
그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니던 두 하녀가 드레스를 입은 그녀에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끄러. 어서 가자. 오라버니께서 기다리시겠다.”
리엔이 다시 식당으로 갈 때였다. 막 현관에 들어선 흙먼지를 뒤집어쓴 초췌한 몰골의 두 사람이 리엔의 눈에 띄었다. 그들 뒤로 병사 두 명이 서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리엔은 호기심에 그쪽으로 향했다.
“누구죠?”
“…….”
리엔의 물음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리엔이 누구냐며 그들 뒤의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기사 웨든이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웨든 경!”
리엔이 웨든을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리엔을 발견한 웨든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리엔 아가씨.”
그러자 리엔이 금방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식은 들었어요. 동생이신 글루버 경을 잃으셨다고요?”
“폭도들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기사가 주군을 위해 싸우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런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웨든은 리엔에게 말을 하면서 그 눈으로 몰골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건장한 남자를 쏘아보았다.
“글루버 경의 장례식에 꼭 참석할게요.”
“고맙습니다. 아가씨.”
“그런데 이분들은 누구시죠?”
리엔이 두 몰골의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웨든에게 물었다. 그러자 웨든이 약간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들은 영주님의 손님들입니다.”
“어머, 그래요?”
리엔이 보기에 두 사람은 평민들이었다. 크루거가 평민 손님을 영주관에 데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들을 영주님께 데려가야 하는데 영주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웨든의 물음에 리엔이 바로 말했다.
“손님들은 제가 오라버님께 안내하도록 할게요. 그러니 웨든 경께서는 그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세요.”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저의 안전이 문제라면 저기 병사 분들도 있잖아요. 그러니 염려 마시고 어서 가세요.”
리엔이 몰골의 두 평민 손님들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까지 들먹이자 기사 웨든도 더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별수 없이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럼 저는 이만…….”
웨든이 뒤돌아서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리엔이 몰골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씻으셔야겠어요.”
리엔은 병사 두 명과 같이 두 사람을 하인들이 사용하는 공용 목욕탕으로 데려가서 그곳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하녀들로 하여금 남자 하인들 중 그들과 비슷한 덩치의 옷을 가져오게 했다.
리엔은 목욕을 마친 두 사람과 그들을 기다리던 병사 두 명을 데리고 크루거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크루거의 명으로 감옥으로 끌려가던 농노들과 헤어져서 영주관에 도착한 연금술사 베그다와 용병 테베스는 입구에서 크루거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저택으로 들어갔던 기사가 나와서 베그다와 테베스를 지키고 있던 두 병사에게 그들을 묶고 있던 밧줄을 모두 풀어 주라 명했다. 병사들이 베그다와 테베스의 밧줄을 풀어 주는 사이 그 기사가 웨든에게 무슨 말을 전했다.
“영주님께서 나보고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았다.”
웨든에게 있어서 테베스는 동생을 죽인 원수였다. 당장에라도 그 목을 쳐도 시원찮을 마당에 테베스를 데리고 크루거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웨든은 화가 치밀었다.
웨든도 크루거를 주군으로 곁에서 섬기면서 절로 눈치가 빨라졌다. 그는 크루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과 수십 명의 병사들을 죽인 베그다와 테베스의 결박을 풀어 주게 한 것을 봐도 웨든은 크루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베그다와 테베스를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시고 계시군.’
그들은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까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을 당장 죽여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웨든은 더없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안에 들여라. 나는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알겠습니다.”
기사는 웨든의 명령에 대답한 후 베그다와 테베스를 지키던 두 명의 병사에게 명령했다.
“이봐, 그자들 데리고 따라들 와.”
그리고 그들과 같이 먼저 영주관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통과한 후 기사는 두 명의 병사와 베그다, 테베스를 현관 안쪽에 세워 뒀다.
“여기서 기다려라.”
“네.”
두 병사와 베그다와 테베스를 두고 기사가 현관문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두 병사와 초라한 몰골의 베그다와 테베스만이 덩그러니 현관에 남겨졌다.
영주인 크루거에게 대죄를 지은 자신들을 결박도 짓지 않은 채, 버젓이 영주관에 들인 이유를 베그다와 테베스는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아리따운 귀족 영애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서 기사 웨든이 등장했다. 웨든은 귀족 영애에게 베그다와 테베스를 영주의 손님으로 소개했다.
귀족 영애는 베그다와 테베스를 직접 영주에게 데리고 가겠다고 했고 웨든은 그들을 그녀에게 맡기고 물러갔다.
“따라 오세요.”
귀족 영애는 베그다와 테베스를 목욕시키고 옷도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귀족 영애를 따라 그들이 향한 곳에 크루거가 있었다.
“앉으세요.”
귀족 영애에 이끌려 베그다와 테베스는 크루거가 앉아 있는 식탁에 같이 앉게 되었다. 모두 자리에 앉고 나자 귀족 영애가 화사하게 웃으며 크루거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 이분들이 누군지 내게 소개해 주세요. 오라버니.”
그러자 크루거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웨든은 어디 가고 네가 이자들을 데려온 것이냐?”
“웨든은 피곤할 것 같아 제가 돌려보냈어요. 영주관을 찾은 손님 접대 정도는 제가 해도 되니까요.”
“손님은 무슨…….”
크루거가 베그다와 테베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음식은 네 명이 먹기에 충분했고, 크루거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이외 문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크루거는 귀족이라고 평민과 같이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그런 고루한 신분제 사고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평민이 아니라 노예와도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크루거였다.
크루거가 냅킨을 펼치며 식사를 하려 하자 리엔이 베그다와 테베스에게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서 식사들 해요.”
크루거의 입장에서 베그다와 테베스는 사실 중요한 손님들이었다.
연금술사인 베그다는 크루거에게 폭탄을 만들어 줄 존재이고, 테베스는 죽은 기사 글루버를 대신해서 루멘스 영지 기사 전력의 공백을 메워 주고 더 나아가서 기사들의 실력 향상에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자였다.
둘 다 크루거에게 큰 도움이 될 자들이었다. 때문에 크루거는 그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저는 리엔이에요.”
먼저 리엔이 자신을 소개했다. 리엔이 크루거를 오라버니라고 하는 소리를 베그다와 테베스도 들었다.
‘영주의 여동생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