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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베그다와 테베스가 리엔이 크루거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리엔이 악질 영주인 크루거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해맑은 여동생이란 점이었다.
리엔이 자신을 소개하며 베그다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베그다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베그다라 합니다. 곧 죽을 늙은이지요.”
베그다의 소개에 리엔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제가 보기에 아직 한참을 더 사실 것 같으신데.”
베그다는 왜소한 체격과 등이 약간 구부정한 것을 빼면 얼굴만큼은 꽤 동안이었다.
“허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리엔의 진심 어린 말에 베그다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 테베스가 자신을 소개했다.
“농노들의 밀집촌에 살고 있는 테베스라 합니다.”
테베스는 자신이 농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리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이 궁금했다. 용병 생활을 오래했던 테베스는 귀족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테베스가 아는 귀족의 모습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테베스는 제아무리 친절한 귀족 영애라도 상대가 농노라면 그 대우가 달라질 거라 여겼다. 하지만 리엔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어머, 그러세요. 해리슨 님께 그곳 사정은 들은 적이 있어요. 의료 환경이 열악하다지요?”
해리슨은 영주 전속 치료사이면서 가끔 치료사가 부족한 곳을 돌아다니며 몰래 봉사 활동을 했다. 몇 달 전 해리슨이 비밀리에 농노 밀집촌을 찾아서 사람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일을 두고 리엔이 하는 말 같았다.
“네. 영주님께 농노는 재산일 뿐이니 말입니다.”
테베스가 크루거 앞에서 서슴없이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베그다는 그런 테베스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크루거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크루거는 그저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며 훈제 오리 고기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세요.”
리엔의 말에 베그다가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테베스도 크루거가 그를 상대해 주지 않자 별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어제부터 오늘 저녁까지 식사를 하지 못한 베그다와 테베스는 허겁지겁 식탁 위 음식들을 먹었다.
배도 고팠지만 음식도 정말 맛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에 의해 식탁 위의 음식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열심히 주린 배를 채울 때 크루거와 리엔은 적당량의 식사를 마쳤다. 먼저 식사를 시작한 크루거는 자신이 좋아하는 오리 훈제 요리로 충분히 배를 채웠고, 리엔은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지 평소보다 적게 식사를 했다.
잠시 뒤 베그다와 테베스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탁 위의 음식들을 그들이 대부분 먹어 치운 것이다.
두 사람이 포만감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크루거가 불쑥 말했다.
“베그다는 영주관의 지하에 실험실을 만들어 줄 테니 그곳에서 계속 연구를 해.”
갑작스런 크루거의 말에 뭐라 말도 못하고 베그다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크루거가 테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계속 말했다.
“테베스.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은 오늘까지로 기억하는데. 그래 결정은 했나?”
크루거의 말에 하루 종일 그 문제로 고심했던 테베스는 베그다와 달리 바로 반응을 보였다.
“내가 거절하면 정말 나와 내 아들의 목을 성문 위에 내 거실 겁니까?”
“넌 엄연히 폭동의 주동자다. 내 사람이 되지 않겠다면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자신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라는 크루거의 명확한 말에 테베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을 모시도록 하지요. 하지만 제 아들은 놓아 주십시오.”
테베스의 유일한 약점은 그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놓아 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베스의 요구에 크루거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였다.
“5년, 5년 뒤에 너와 아들 모두 놓아 주도록 하지. 대신 그때까지 나의 충실한 개가 되어 주어야겠다.”
크루거는 5년 동안 테베스를 철저하게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5년이면 내가 중앙 정계에 진출해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이용할 만큼 이용해 먹고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그때 놓아 줄지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자.’
크루거는 5년이란 기간을 정했지만 테베스와 그 아들을 놓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테베스도 악질 영주 크루거가 정말 5년 뒤 자신과 아들을 놓아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크루거였다.
그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 내일 영지성 성문에 테베스와 그 아들 부르스의 머리가 나란히 내걸릴 판이었다.
“좋습니다. 5년 동안 충심을 다해 모시도록 하지요.”
테베스의 대답에 크루거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크루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루거가 식당을 나가고 나자 식사 내내 화사하게 웃고 있던 리엔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베그다와 테베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 혹시 농노 밀집촌에서 있는 폭동과 연관된 분들이신가요?”
리엔의 물음에 베그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베그다의 대답에 리엔이 두 사람을 향해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
“그곳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 저도 들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리엔의 갑작스런 사과에 베그다와 테베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리엔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폭동이 일어날 만하죠. 저라도 그랬을 테니 말이에요.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은데 얘기해 주시겠어요?”
리엔은 이미 기사를 통해 농노 밀집촌에서 있었던 소요 사태에 대해 대충 얘기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 피해자들의 입에서 직접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베그다와 테베스에게 당시 얘기를 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그건…….”
당시 참사는 머릿속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일인데 그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다니 베그다와 테베스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탁이에요. 전 오라버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꼭 듣고 싶어요.”
너무도 간절한 눈빛의 리엔을 보고 베그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베그다는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이 지켜본 농노들의 폭동과 크루거와 그 휘하 기사와 병사들이 어떤식으로 폭도들을 진압했는지 상세히 얘기했다.
“그랬군요. 역시 그래서 폭동이 일어난 거였군요. 정말 미안해요.”
리엔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니면서 농노들의 희생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죄스러워했다. 리엔과 대화를 나누면서 베그다와 테베스는 또다시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런 천사가 악질 영주와 같은 핏줄일 수 있단 말인가?’
베그다와 테베스는 너무나도 친절하고 마음씨 고운 리엔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후에도 리엔은 영주관을 방문한 그 어떤 귀족들보다 더 신경 써서 베그다와 테베스를 대했다. 그녀의 그런 세심한 배려에 베그다와 테베스는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크루거는 곧장 자신의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크루거는 매일 규칙적으로 아침마다 마나 수련을 하고, 영주로써 하루 일과를 끝낸 후, 저녁 식사까지 마치면 본격적인 검술 수련에 들어갔다.
그 규칙적인 생활을 크루거는 수련 기사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해 왔다. 영주의 일과 중, 시간이 날 때마다 크루거는 독서를 즐겼다. 크루거의 집무실에 있는 책만도 수천 권이 넘었다.
크루거는 벌써 그 책들을 다 읽었고 수시로 수도에서 새로운 책들을 사들여서 읽었다. 그가 읽은 책들은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다양했다.
크루거의 주군인 레오팔트 공작 역시 싸울 줄만 안다고 생각했던 크루거의 예상외의 박학다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크루거를 자신의 밑에 두려 했는데 크루거가 이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크루거는 겨우 제후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등골 빠지게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영주로 나가 어떻게든 재물을 끌어모아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출세하는 것이 그의 진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악질 영주의 대표 주자 크루거는 문무에 능한 다재다능한 실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 능력을 세상을 위해, 영지민들을 위해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휘리리릭!
대충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크루거가 검을 휘두르고 내지를 때마다 검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수련장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크루거는 평소처럼 무리하지 않고 기본적인 검술을 펼치며 10여 분간 몸을 풀었다.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검에 마나를 주입시켰다.
우우우웅!
화아악!
기괴한 소음과 함께 크루거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크루거는 마나가 맺힌 검을 들고 숙련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몸이 자연스레 따라 움직였다.
스르르르!
마치 물이 흐르듯 크루거의 움직임은 유연했다. 그러나 그가 휘두르는 검은 거칠고 격렬했다.
파츠츠츠!
수련장 내부가 크루거가 만들어 낸 검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울 때 크루거는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눈으로 그 발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
눈은 크루거의 발이 만들어 낸 잔상을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그 만큼 그의 발놀림은 빨랐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검은 수십 차례 변화를 일으키며 찌르고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검속이 대체 얼마나 빠르단 말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둔 최고의 실력을 갖춘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크루거가 움직임을 멈췄다.
검술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나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 크루거는 눈살을 찌푸렸다. 최후의 순간 뭔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 장벽이 나타나자 크루거는 가슴이 답답했다. 이 장벽이 바로 자신이 넘어야 할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란 것은 크루거도 잘 알았다.
‘이것만 부수면 되는데…….’
크루거는 성질 같아선 단숨에 그 장벽을 박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으면 진즉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크루거였다.
그때 장벽을 박살내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계속 그의 뇌리에 감돌았다. 그러면서 그의 눈앞에 갑자기 번쩍하고 섬광이 일었다.
그 섬광은 크루거가 연금술사 베그다와 같이 폭탄을 터트렸을 때 보았던 그 하얀 섬광과도 비슷했다. 그리고 불쑥 크루거의 뇌리에 폭탄이 화려하게 폭발하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마도 박살내고 싶다는 염원이 그의 뇌리에 폭탄이 폭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 듯 보였다.
‘폭발! 그래, 까짓 폭탄처럼 터트려 버리자!’
크루거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폭탄처럼 강력한 폭발로 부셔 버리자고 생각했다.
순간 크루거의 심장에 극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루거는 심장 아래 위치한 마나 홀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크루거는 즉시 모든 몸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일체 움직임을 멈춘 채 크루거는 천천히 자신의 몸 속 내부 마나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마나 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변화는 점차 걷잡을 수 없이 마나 홀 속의 마나량을 늘려 나갔다.
‘이, 이럴 수가…….’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로 이제 몇 달 후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크루거는 드디어 그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크루거가 폭탄의 폭발을 연상하면서 마나 홀의 마나가 정말 폭탄처럼 모든 장벽을 터트릴 기세로 응집하며 폭발적으로 그 양을 늘리고 있었다.
마나 홀의 그 막대한 양의 마나가 밀려 나온다면 막힌 둑이 무너지듯 크루거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흐흐흐. 폭탄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크루거는 감격에 겨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때 그의 뇌리에 처음 마나 수련법을 배울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나를 느끼고 그 마나를 몸속으로 빨아들여 마나 홀에 축적시킨 뒤, 일정한 법칙대로 몸속으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나 수련이다. 마나 수련이 빠를수록 마나를 다스리는 능력이 향상되는데, 이때 몸속에 도는 마나를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면 응축된 마나를 자연스럽게 검에 불어넣을 수 있다. 흔히 그 응축된 마나를 검력이라 부르며 그 검력을 폭발적인 힘으로 변화시키면 그것이 바로 오러 블레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