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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오랜만에 여자와 즐기려던 크루거의 생각은 리엔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침대로 돌아온 크루거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새벽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영주님. 아침입니다.”
해가 뜨자 총관 게르만이 크루거를 깨웠다. 크루거의 기상 시간은 항상 일정했다. 비록 늦게 잠이 들었지만 그가 깨어나는 시간은 똑같았다.
“아, 그래.”
크루거는 투정 한 번 없이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게르만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크루거가 세수할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크루거는 그 물에 세수를 하고 하인들이 가져다준 옷을 입었다.
그러자 게르만이 크루거에게 말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잡을까요?”
“오전에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 대한 재판을 할 것이다.”
“그 후 일정은?”
“재판은 한 시간이면 끝날 거다. 오늘 세금 거두러 갈 곳이 어디지?”
“영지 서쪽의 크렌 마을입니다.”
크렌 마을이라면 제법 먼 거리였다. 빨리 말을 몰면 대략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세금을 거둬서 돌아올 때 날이 질 수도 있었다. 수고스럽지만 세금을 걷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빠듯하겠군. 그래도 가야지. 재판 끝나면 바로 크렌 마을로 갈 테니 준비해 둬.”
“네, 영주님.”
현재 영지성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수는 어제 잡아 온 농노들과 합쳐서 100명이 넘었다. 그런데 그 죄수들을 한 시간 안에 재판하겠다니? 악질 영주 크루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피 꽤나 보겠군.’
크루거의 지시를 받고 물러나던 게르만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마도 크루거는 한 시간 안에 100명도 넘는 죄수들의 목을 죄다 벨 터였다.
재판 준비를 위해 게르만이 성문 쪽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크루거는 곧장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어제 저녁처럼 리엔과 베그다, 테베스가 먼저 와서 크루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루거는 별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리엔과 베그다, 테베스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총관이 급히 영주관을 나가던데 무슨 일이에요?”
리엔의 물음에 크루거가 대답했다.
“재판이 열릴 것이다.”
재판이란 말에 리엔을 비롯해서 베그다와 테베스 모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농노들에 대한 재판을 지금 할 거란 말인가요?”
리엔의 말에 크루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농노들을 재판할 거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크루거가 리엔을 쏘아보자 테베스가 나섰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테베스의 말에 크루거의 입술이 실룩였다.
“주제넘은 짓을 했군.”
“죄송합니다.”
테베스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크루거는 어제 자신이 식당을 나가고 나서 베그다와 테베스가 리엔에게 농노 밀집촌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을 거라 생각했다. 리엔은 크루거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혐오했다.
하지만 크루거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착취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약자가 강자에게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은 리엔이 싫다고 말린다고 해서 바꿀 크루거가 아니었다.

크루거는 아침은 비교적 간단히 스프와 호밀 빵, 그리고 갓 짠 신선한 우유로 해결했다. 때문에 식사에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먼저 식사를 끝낸 크루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베그다와 테베스를 보고 말했다.
“아이들은 데려오라고 했다.”
아이들이란 베그다와 테베스를 협박할 인질들을 말했다. 크루거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나자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농노 마을의 아이 둘과 테베스의 아들 부르스가 영주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그다 님!”
베그다 때문에 인질로 끌려온 농노 마을 두 아이가 베그다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르스 역시 말없이 조용히 부친인 테베스를 껴안았다. 아이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긴 영지성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대부분 크루거의 재판을 받고 목이 잘렸으니 겁을 낼 만도 했다.
“흑흑흑.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집에 가고 싶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그래. 이제는 괜찮다. 괜찮아.”
베그다는 우는 두 아이를 달래기 급급했다.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어요. 정말 그 사람들 다 죽는 거예요?”
“…….”
부르스가 테베스에게 물었다. 테베스는 자기 입으로 차마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폭동에 가담했던 농노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자신은 버젓이 크루거의 기사로 살아남게 되었으니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때 아이들과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던 리엔이 말했다.
“어떻게든 농노들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막아야 해요.”
하지만 영지 재판은 고유한 영주의 권한이었다. 크루거가 농노들을 처형시키기로 마음먹었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일단 재판장으로 가요.”
리엔은 즉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크루거는 혼자서 잘도 갑옷을 착용하고는 자신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영주관 밖에 준비된 그의 말에 올랐다.
“가자.”
크루거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과 같이 재판이 열리는 성문 쪽으로 말을 몰았다. 크루거가 재판장에 나타나기 전까지 가장 바쁜 사람은 총관 게르만이었다.
“단두대의 날은 준비되었겠지?”
“네. 예비로 하나 더 준비해 뒀습니다.”
“시체 치울 병사들은?”
“성곽을 지키던 병사들 십여 명을 여기로 불렀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100명도 넘는 사람을 한 시간에 다 목을 베려면 단두대의 날이 무뎌서는 곤란했다. 그 이외에도 게르만은 시체들을 처리할 거적들을 챙기고 시체를 치울 병사들까지 빠짐없이 챙겼다.
게르만은 정작 재판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늘 죽을 죄수들 뒤처리로 정신이 없었다. 게르만이 거의 준비를 마쳤을 무렵 크루거가 기사들과 같이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 재판은 크루거가 재판장의 판사 자리에 착석하는 순간 시작되었다. 크루거가 판결을 알리는 법봉을 쥐는 순간 재판은 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영주님께서 오셨다. 어서 준비해라.”
게르만의 외침에 병사들이 감옥에서 끌어낸 죄수들을 일렬로 세웠다. 순서에 따라서 크루거가 판결을 내릴 것이고 그럼 죄수들은 유무죄에 따라서 다시 감옥으로 가거나 풀려 날 터였다.
하지만 그건 다른 영지 재판장의 경우고 루멘스 영지의 경우는 재판 후 바로 재판대 옆에 있는 단두대로 끌려갈 확률이 100%였다.
크루거를 태운 말이 재판장에 막 도착했다. 재판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총관 게르만이 영주의 말고삐를 잡자 크루거가 말에서 내렸다. 크루거가 말에서 내리자 게르만은 잡고 있던 말고삐를 병사에게 건네고 크루거 옆으로 다가섰다.
“준비는?”
크루거의 물음에 게르만이 바로 대답했다.
“다 끝났습니다. 재판장에 오르시지요.”
게르만의 말에 크루거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일렬로 길게 늘어선 죄수들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 전부다 끌어냈겠지?”
“물론입니다.”
“줄이 꽤 길어 보이는군. 서둘러야겠어.”
크루거는 그 말을 한 후 곧장 재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재판대의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 재판장 주위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저기, 저기 있어요. 흑흑흑!”
영지성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죄수들의 가족들은 이제 곧 목이 잘려 죽을 가족을 보고 오열했다.
“아이고, 내 새끼가 저기 있네! 내 아들 좀 살려 주소!”
한 노파가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자 시끄럽다며 병사들이 그 노파를 끌고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잠시 후 돌아온 병사들이 들고 있는 방망이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그런 서슬 퍼런 눈빛의 병사들을 보고 죄수의 가족들은 큰소리로 울 수도 없었다. 크루거는 재판대로 올라가서 곧장 판사석에 앉았다.
그리고 법봉을 잡은 크루거는 큰소리가 나게 일부러 세게 법봉을 두드렸다.
탕탕!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크루거의 외침과 함께 맨 앞에 선 죄수가 재판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죄수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재판대에 서지 않으려 발악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병사들이 아니었다.
퍼퍼퍼퍽!
“아아악! 제발 그만…….”
병사들의 손에 들린 방망이가 사정없이 죄수를 때렸고 죄수는 맞지 않기 위해서 재판대에 서야 했다.
죄인이 재판대 아래 서자 바로 그 옆에 마련된 책상에 앉은 영지성의 영지법을 담당하던 법무관이 죄인의 이름과 죄명을 큰소리로 외쳤다.
“톰슨,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관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루거가 법봉을 내려쳤다.
탕탕!
“사형! 목을 베라.”
어떤 조사도 심문도 없이 일방적인 판결이었다. 무엇보다 죄인에게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헉!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죄수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려서 옆에 마련된 단두대로 옮겨진 죄수는 비명과 함께 목이 잘렸다.
“아악!”
뎅강!
데구르르!
잘린 죄수의 목이 단두대 아래 굴러다니고 있을 때 단두대 위의 병사들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꿈틀거리는 시체를 짐짝처럼 옆으로 치웠다. 그 모습을 보고 루멘스 영지 사람들이 모두 치를 떨었다.
이때 영지 사람들의 뇌리에는 모두 다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어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쳐서 저 악질 영주를 처벌해 주었으면…….’
바로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둘러쓴 사람이 나타났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신전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었는데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신은 그 인간의 소원을 반드시 들어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영지 사람들의 염원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그 소원이 신에까지 전달 된 것일까?
주신 오딘의 명으로 지상에 강림한 천사 미카엘은 모든 사람들의 너무도 간절한 염원을 받아들여 악질 영주 크루거에게 천벌을 내리려 했다.
“마른하늘에 날 벼락이라!”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맑았다.
첫 번째 죄수가 처형되고 나자 바로 두 번째 죄수가 재판대 앞으로 끌려 나왔다. 죄수가 재판대에 서기도 전에 관리가 외쳤다.
“레이크, 세금을 두 달째 내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말에 크루거의 눈매가 매섭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크루거에게 눈앞의 죄인은 살인죄를 저지른 자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
‘저런 쳐 죽일 놈! 감히 내 돈을!’
크루거가 들고 있는 법봉이 거침없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크루거가 막 법봉을 내려치면서 사형을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릉!
번쩍!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쳤다. 그런데 그 번개가 공교롭게 크루거가 들고 있던 법봉에 내려 꽂혔다.
부르르르!
법봉을 들고 크루거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서고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눈알이 뒤집어진 크루거는 맥없이 뒤로 쓰러졌다.
쿵!
“영주님!”
총관 게르만과 기사들이 우르르 판사석으로 뛰어올라 갔다. 그때였다. 어떻게든 농노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을 막아 보겠다며 재판장으로 달려온 리엔이 크루거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경악하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크루거는 악질 영주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존재였지만 리엔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며, 세상에 유일한 그녀의 가족이었다. 리엔이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재판대 위로 뛰어갔다.
“영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총관 게르만이 쓰러진 크루거를 부축해서 정신을 차리게 몸을 흔들었지만 크루거는 몸을 축 늘어트리고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 되겠다. 영주님을 영주관으로 모셔야겠다. 웨든 경. 어서 영주님 마차를 가져오게. 그리고 영주관으로 치료사도 데려오고.”
“네.”
총관 게르만의 신속한 명령에 기사 웨든이 황급히 움직였다. 그때 리엔이 기사들을 비집고 쓰러진 크루거 앞에 나타났다.
치료사인 리엔은 서둘러 크루거의 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그런데 크루거의 맥이 너무도 희미했다.
“아가씨. 영주님을 영주관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그때 게르만이 크루거의 손을 잡고 있는 리엔을 보고 말했다. 크루거는 번개로 인해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리엔으로써 당장 할 수 있는 치료는 없었다. 그래서 리엔은 서둘러 크루거를 영주관으로 데려갈 수 있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어서 모시세요.”
리엔이 크루거의 손을 놓자 두 기사가 크루거를 부축해서 영주의 마차로 옮겼다. 잠시 후 크루거를 태운 마차가 다급히 영주관으로 출발했다.
“재판은 취소다. 죄수들을 다시 감옥에 가둬라.”
총관 크루거의 명령에 병사들이 죄수들을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갔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죄수들은 죽다가 살아나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하늘을 향해 연신 기도를 했다. 개중에는 신을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