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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리엔은 크루거가 마차에 실려 가는 것을 재판대 위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리엔을 주시하고 있는 눈이 있었다.
바로 크루거에게 날벼락을 선사한 그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천사 미카엘이었다. 그는 앞서 리엔과도 인연을 맺었던 그 인물이었다.
“이거 곤란하게 됐군. 하필 저 여자의 오라비가 악질 영주였다니.”
천사 미카엘은 신을 대신해서 지상에 강림했다. 때문에 그의 약속은 곧 신의 약속과 같았다. 이 일이 끝나면 미카엘은 리엔을 찾아서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 일은 신께 상의드려야겠군.”
스르르르!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남자의 모습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구도 그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천사 미카엘이 사라지고 나자 넋을 놓고 있던 리엔이 정신을 차리고 영주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리엔의 곁에는 베그다와 테베스가 함께했다.
영주관으로 실려 간 크루거는 즉시 그의 방으로 옮겨졌다.
“비키시오!”
영주의 전속 치료사인 해리슨이 크루거의 상태를 살폈다. 크루거의 상태는 재판대 위에서보다 훨씬 더 나빠져 있었다. 리엔이 짚었을 때 희미하게나마 뛰고 있었던 크루거의 맥이 해리슨이 살폈을 때는 거의 잡히지도 않았다.
해리슨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틀렸습니다.”
해리슨의 말에 총관 게르만이 눈빛을 빛내며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 그러나 게르만은 그것이 표나지 않게 금방 지우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서 영주님을 살려 내라.”
“최선을 다하겠지만 다시 깨어나시기는 힘드실 것 같습니다.”
해리스는 급한 대로 내상에 특효약을 크루거의 입에 넣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고 리엔이 크루거의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오라버니!”
리엔이 목청껏 소리쳤지만 크루거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해리슨 님. 오라버니는요?”
리엔의 물음에 해리슨이 곤욕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상약을 먹였으니 좀 기다려 보자꾸나.”
해리슨이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리엔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안 돼요. 오라버니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요.”
리엔이 크루거를 진찰했다. 하지만 크루거의 몸은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오라버니!”
리엔의 애절한 목소리가 크루거의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리엔, 나다. 오빠 여기 있다.
리엔의 목소리를 듣고 크루거는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그때 찬란한 빛무리가 크루거의 몸을 감쌌다.
그 빛에 감긴 크루거의 몸에서 그의 영혼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 돼!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어떻게 오른 소드 마스터의 경지인데!
크루거는 어떻게든 다시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다시 그 몸 안으로 들어가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제 다 되었는데… 조금만 더 내게 시간을…….
우우우웅!
강렬한 빛줄기가 크루거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하늘 위로 끌어 올렸다.
―안 돼!
크루거가 악을 쓰며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크루거의 영혼은 풍선처럼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온통 어둠 일색의 공간
크루거는 맨 정신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지만 주위 모든 것이 어둠에 먹혀 있다 보니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죽고 만 것인가?”
크루거의 허탈한 목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잠시 후 크루거가 다시 입을 뗐다.
“여기가 지옥인가?”
크루거도 양심은 있었다. 자신의 손에 죽은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는 무고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약육강식!
크루거는 강자로써 자신의 누릴 권리를 다 누렸을 뿐 그들의 죽음에 대해 전혀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았다. 동화에 나오는 악한 자들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고 했다. 그 악한 자들과 자신을 비교했을 때 크루거는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지옥이면 좋겠나?
갑작스레 그의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크루거는 크게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화악!
순간 주위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크윽!”
눈이 부셨던 크루거가 잠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쓴 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누, 누구냐?”
크루거의 고함에 그 후드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자가 말했다.
―그냥 천사라고 해 두지.”
“천사? 확실히 내가 죽긴 죽었군.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 보아하니 지옥은 아닌 것 같은데.”
눈치 빠른 크루거의 말에 자신을 천사라고 소개한 검은 로브의 남자가 말했다.
―맞아. 지옥은 아니야. 여긴 천국과 지옥의 경계야. 흔히들 연옥이라고 부르는 곳이지.
“연옥?”
―뭐 이곳이 어딘가가 중요한 건 아니야. 중요한 것은 널 다시 살려 주겠다는 거지.
검은 로브 남자의 말에 크루거는 바로 귀가 솔깃해졌다.
“나를 살려 준다고?”
―그래. 하지만 크루거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게 될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게 되다니?”
―신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니까.
“신과의 약속?
검은 로브의 남자는 도무지 크루거가 모를 소리만 해 댔다.
―빨리 가라. 이곳에서의 1초는 지상의 열흘과 같으니.
검은 로브의 남자의 말이 끝나자 다시 주위가 어둠에 집어 먹혔다. 자신을 천사라고 소개한 의문의 존재 역시 홀연히 어둠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때 크루거의 발밑이 허전했다.
“헉!”
경악과 함께 크루거의 몸이 아래로 쑤욱 꺼졌다.
“으아아악!”
크루거는 끝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비명과 함께 크루거는 몽롱하니 의식을 잃었다.


7. 영지 관리 벤자민Ⅰ



의식의 끈이 이어지면서 몸의 감각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번쩍!
크루거가 눈을 떴다. 파도 심한 배에 탄 듯 시야가 출렁거렸지만 천장이 보이고 붉은 벽돌 벽이 보였다. 그때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크윽!”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면서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몸의 기능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꽁꽁 묶인 듯 크루거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팠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 따윈 당장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크루거는 견딜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며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투통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몸의 기능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이 움직여졌다. 그의 지시에 손가락도 움직였다.
아직까지 시야가 초점이 잡히지 않아 뚜렷하게 주위를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크루거가 있는 곳은 적어도 그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크루거에게 여기가 어딘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자신이 죽은 것이나 연옥이란 곳에 간 것, 그리고 그곳에서 천사를 만났던 것 모두 다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크루거의 최대 장점은 절대 좌절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살아났으니 예전처럼 열심히 살면 그뿐이었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크루거가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뚜벅뚜벅 걸어서 크루거가 누워 있는 곳까지 걸어 들어온 사람이 말했다.
“정신이 들었구나!”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려 크루거의 귀를 자극했다. 크루거가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직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상대의 얼굴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키가 상당히 크고 덩치도 좋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크루거가 자신을 쳐다보자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까?”
“이게 지금 괜찮아 보이나? 그런데 여긴 어디지?”
크루거가 말을 하자 그 남자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죽다니 누가 죽어? 그리고 당신이라니?”
“아, 미안합니다. 말실수를 했습니다.”
덩치 큰 남자가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과하자 크루거가 화를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여긴 어디야?”
“여기는 제 집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연설 도중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지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크루거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을 때 그 짜릿했던 기억이 새삼 크루거의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였다.
꼬르르르!
크루거의 배가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이런, 배가 고프신 모양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자는 서둘러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덩치 큰 남자가 나무 그릇에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스프를 담아서 크루거에게 내밀었다.
“여기, 급하게 만들다 보니 맛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크루거는 거의 시력이 다 회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크루거는 워낙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쳐다보지도 않고, 그 남자가 건넨 스프가 담긴 나무 그릇을 빼앗듯 챙겨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건넨 나무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스프를 먹었다. 스프는 고소한 향과 함께 버섯의 향이 섞여서 묘한 맛을 만들어 냈다. 너무 배가 고팠던 크루거는 스프를 박박 긁어 먹었다.
스프를 다 먹고 난 크루거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남자가 육포를 건넸다.
“이거라도 더 드시겠습니까?”
남자가 건네는 육포를 받으며 그제야 크루거가 남자의 얼굴을 봤다. 순간 크루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너는…….”
크루거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리자 남자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크루거는 눈을 부비고 자세히 남자의 얼굴을 봤다.
‘테베스는 아니다.’
덩치 큰 남자는 크루거도 아는 농노인 테베스와 많이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베스는 아니었다. 남자는 테베스에 비해 훨씬 젊었다.
그때였다.
덜컹!
다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새로 온 관리는 어떻게… 음, 괜찮아 보이는군.”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크루거가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나이 든 테베스가 문밖에 서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때 크루거의 눈에 그의 희멀건 손이 보였다. 기사 출신 크루거의 손이 이렇게 하얗고 가늘 리 없었다. 크루거의 눈이 자연스럽게 손에서 팔로 옮겨 갔다.
‘이런 밋밋한 팔이라니?’
근육질의 그의 팔이 여자처럼 매끈했다. 크루거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각진 강인한 인상의 그의 얼굴과는 달랐다.
“거울, 거울이 어디 있느냐?”
크루거가 소리치자 젊고 늙은 테베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크루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늙은 테베스가 젊은 테베스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새로온 관리 이름이 벤자민이라고 했던가? 저자가 왜 저러는 거냐?”
“조금 전까지 제가 준 스프도 잘 먹었는데. 아무래도 날벼락으로 머리에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두 사람이 속닥거리고 있을 때 크루거는 연신 방 안을 둘러보며 거울을 찾았지만 거울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