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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크윽!”
크루거는 신음과 함께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다리에 몸무게를 싣자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쿵!
바닥에 넘어진 크루거는 눈앞에 물통이 보이자 그쪽으로 기어 갔다. 그리고 다행히 물통은 깨끗한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루거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물통의 수면을 쳐다보았다.
“헉!”
둥실한 얼굴에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검은색 머리카락. 수면에 비친 얼굴은 크루거가 아니었다.
“너, 너는 누구냐?”
크루거가 수면에 비친 얼굴을 보고 물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놀란 표정 그대로 크루거만 쏘아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벤자민은 마법사다.
그가 처음 마나 홀에 마나 고리를 만들고 1서클의 마법을 시전했을 때 그의 가족들은 모두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2살이었다.
그리고 지금 30살의 벤자민은 1서클 마스터다. 18년의 세월 동안 벤자민은 열심히 마법을 배우고 수련했다. 하지만 12살 이후 벤자민은 아무런 진전을 거두지 못했다.
그를 거둬들였던 영지의 마법사 스승은 그가 20살 되던 해 그를 파문시켰다. 그보다 5년 늦게 들어온 그보다 2살 어린 사제가 3서클을 마스터하던 순간 그는 그의 스승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것이다.
스승은 잘난 사제를 데리고 수도 루펜으로 떠났고 벤자민은 버림받았다.
“넌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스승은 떠나면서 모질게 8년 동안 이어 온 사제지간의 연을 끊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 동안 벤자민은 떠돌이로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그는 마법사라고 불리기고 뭐한 1서클의 마법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절망이 사무쳐서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거다.”
인생에 있어서 3번의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벤자민이 제국 북서 지역을 전전하고 있을 때였다. 레오팔트 공작령의 한 변방 영지에서 벤자민은 영지성의 게시판에 붙은 벽보를 보고 이제 살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영지에서 일할 참신한 인재를 구함.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로 준귀족 이상의 신분이면 지원이 가능.
벤자민은 즉시 영주관으로 향했다.
“누구냐?”
영주관의 입구에서 병사들이 그를 제지했다.
“게시판에 붙은 벽보를 보고 왔소.”
“벽보?”
“어이, 왜 거기 있잖아?”
“아! 거기. 쯧쯧. 어서 들어가시오.”
병사들이 즉시 벤자민을 영주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영주관 안에 들어가자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벤자민에게 무슨 용무로 왔는지 물었다. 벤자민은 역시 벽보를 보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하인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벤자민을 보더니 말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인은 벤자민을 영지의 총관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허허허. 어서 오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벤자민을 총관이 웃는 얼굴로 맞았다.
“그래 게시판의 벽보를 보고 왔다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읽고 쓸 줄 알고 준귀족 신분이란 소리군.”
여기서 준귀족이란 부친이 귀족이거나 평민으로 관리 시험에 합격해서 준귀족의 지위를 획득한 자를 말했다.
벤자민의 아버지는 영지의 관리였다가 그 영지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폭도들에 의해 죽었다. 그때 부친은 제후에게 바칠 중요한 물건을 목숨으로 지켜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제후가 그의 부친을 준남작의 작위와 함께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려 주었다.
하지만 죽은 뒤 귀족이 되면 뭐하겠는가? 당시 벤자민은 귀족 따윈 원치 않으니 아버지를 살려 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죽은 아버지 때문에 벤자민은 영지 관리가 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네. 저희 부친께서는…….”
벤자민의 얘기를 듣고 영지 총관은 즉시 신분 조회를 위한 서류 양식을 벤자민에게 건넸다. 그 서류를 보고 벤자민은 꼼꼼하게 자신의 신상을 기록했다. 그것을 보고 벤자민의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확인한 총관이 벤자민이 작성한 서류를 받아 들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곧 귀족 명부에서 자네 신분을 확인할 것이니.”
신분 조회는 마법 통신을 통해서 수도 루펜의 귀족 의회에서 직접 했다. 귀족 의회에서 승인되지 않은 자는 귀족이나 준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십여 분 뒤 신분 조회 결과가 나왔다.
“허허허. 신분은 확실하군.”
총관은 사람 좋은 얼굴로 벤자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그럼 이제 제가 영지 관리가 된 것입니까?”
벤자민의 물음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그머니 먼 산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왜 있지 않은가?”
“있다니요? 뭐가 말입니까?”
벤자민의 말에 총관이 답답하다는 듯 힐끗 벤자민을 보면서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벤자민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빌어먹을 어째 관리되기 쉽다 싶더라니.’
총관이 요구하는 것은 뇌물이었다. 당연히 알거지인 벤자민이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관리가 아무나 되나.’
“죄송합니다. 저와 이곳 영지는 인연이 아닌 듯싶습니다.”
벤자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힘없이 몸을 돌릴 때였다.
덥석!
총관이 다급히 벤자민의 팔을 잡았다.
“이보게. 그렇다고 그냥 가면 어쩌나?”
총관의 만류에 벤자민이 몸을 돌려 총관을 보며 똑바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가 가진 거라고는 이 몸뚱이뿐이라서…….”
벤자민의 말에 총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한 푼도 없는 건가?”
벤자민은 보란 듯이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호주머니 안에서는 펄펄 먼지밖에 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총관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벤자민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이만…….”
다 틀렸다고 생각한 벤자민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집무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이봐, 됐어. 돈 안 줘도 되니 이리 와 봐.”
총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놀란 벤자민이 총관을 돌아보자 총관이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서류 한 장을 벤자민을 향해 홱 던졌다.
“가져가.”
벤자민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서 그 내용을 살폈다.
“헉! 이건…….”
서류는 바로 벤자민을 영지 관리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이었다. 임명장에는 벤자민의 이름과 영주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총관 어른.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벤자민이 감격 어린 얼굴로 총관을 쳐다보자 총관이 홱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사흘 안에 마을로 부임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데려갈 병사들은?”
영지 관리가 자신이 맡은 마을로 부임할 때는 보통 10여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갔다. 벤자민의 부친이 영지 관리였던 터라 벤자민은 비교적 영지 관리 일에 대해 잘 알았다.
벤자민의 말에 영지 총관이 도끼눈으로 벤자민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알았네. 영주관 밖에서 기다리면 자네를 수행할 병사들이 올 거야. 그들을 데리고 가게.”
“고맙습니다, 총관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아무쪼록 오래 살아만 있어 주게.”
“네?”
그게 무슨 말이냐며 벤자민이 총관을 쳐다보자 총관이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어서 가 봐. 갈 길도 먼데.”
“네. 그럼 이만…….”
아리송한 총관의 말에 의아해하며 벤자민은 임명장을 들고 신난 얼굴로 영주관 밖으로 나갔다.
벤자민이 총관의 집무실을 나가고 나자 루실 영지의 총관인 더스틴은 책상 위의 잉크병을 집어들어 냅다 벤자민이 나간 방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
“빌어먹을! 재수 없게 어디서 저런 거지 새끼가!”
영지법에는 영지 관리가 없는 영지는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어째든 관리를 보내야 그곳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루실 영지는 레오팔트 공작령의 12곳의 영지 중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가장 작은 영지였다.
영지의 영주는 실리온 남작으로 올해 55살인 실리온 남작은 영지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주의 관심은 오직 젊고 싱싱한 여자와 돈뿐이었다.
그래서 영지 일은 총관 더스틴이 일괄 관리했다. 즉, 루실 영지에서는 총관인 더스틴이 곧 영주인 셈이었다.
하지만 총관인 더스틴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매번 실리온 남작이 만족할 만한 여자를 구해 바치고, 매달 빠짐없이 세금을 거둬서 실리온 남작에게 상납하는 일이었다.
만약 그 두 가지 일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날이 더스틴의 머리가 성문에 내걸리는 날이 될 터였다. 실리온 남작은 그만큼 무서운 늙은이였다. 더스틴은 영주를 대신해서 영지를 통치하는 것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지 관리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 루실 영지는 모두 22개 마을이 있었는데 다른 마을은 아무런 문제가 없건만 유독 한 곳만 문제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빅맨이라 불리는 소수민족 그룬족이 사는 세리아 마을이었다.
그룬족은 빅맨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전사 수업을 받고 자라서 그들은 가히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마을에 사는 성인 남자들이 모두 기사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고 보면 됐다. 세리아 마을에 사는 그룬족 성인 남자의 수는 300여 명. 그러니 기사 300명이 가정을 이루고 한 마을에 모여 산다고 보면 됐다.
그런 마을에서 세금을 걷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기보다 말을 잘 알아들었다.
영지에 속한 영지민으로 그들은 당연히 납세의 의무를 다하겠고 자발적으로 세금을 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에 부임한 관리들에게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 그곳에 가는 관리는 길게는 세 달 짧게는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그 마을에 관리로 가겠다는 자가 없었다.
하긴 그곳의 관리로 부임하면 죽는데 누가 그런 마을의 관리로 가려 하겠는가? 마지막으로 간 관리가 의문사한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세리아 마을의 6개월치 세금은 총관인 더스틴이 냈다. 루실 영지에서 한 달에 걷는 세금은 일정했다. 정확히 3,565골드였다. 그중에서 세리아 마을에서 거둬야 할 세금은 275골드였다.
무려 6개월 동안 더스틴은 매달 275골드를 대신 냈다. 영지 관리들이 매달 더스틴에게 상납하는 돈은 고작 70여 골드였다. 그동안 더스틴이 번 돈을 고스란히 게워내야 했다.
만약 매달 영주에게 바치는 세금에서 1골드라도 모자라는 날엔 더스틴은 죽은 목숨이었다.
저번 달에는 돈이 모자라서 집까지 판 더스틴이었다. 더 이상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세리아 마을로 관리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 가겠다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더스틴은 영지 관리의 요건을 크게 완화시켰다.
그 결과 몇 명이 찾아왔지만 사실을 알고서는 밤에 몰래 도망을 쳤다. 그렇게 이번 달 세금을 거둬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찾아온 자가 벤자민이었다. 다행히 벤자민은 준귀족으로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해당됐다.
영주는 준귀족 이상의 귀족에게 영지 관리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다. 영주 대행인 더스틴의 손에 영주의 인장이 있는 한 더스틴을 영지 관리로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더스틴은 한눈에 벤자민이 타지에서 온 자임을 알아봤다. 그렇다면 세리아 마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모르니 무조건 오늘 안에 세리아 마을로 보내야겠군.’
괜히 영지성에 내버려 뒀다가 혹시나 소문이라도 듣는다면 일이 또 틀어질지 몰랐다.
세리아 마을로 인해 궁핍해진 더스틴은 그래도 몇 푼이나 건져 볼까 하고 벤자민에게 슬쩍 뇌물을 요구했다.
‘어차피 거기 가서 뒈질 테니 나한테 적선하는 셈치고 돈 있는 거 다 내놔라.’
혹시나 하고 꺼낸 얘긴데 녀석이 돈이 없다며 아예 영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한 푼도 없으려고.’
다문 1골드라도 아쉬웠던 더스틴이 확인 차 그를 붙잡고 다시 묻자, 녀석은 호주머니까지 뒤집어 보여 주었다. 정말 호주머니 속에는 먼지밖에 없었다. 완전 거지 새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