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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녀석도 제 주제는 아는지 영지 관리 자리가 물 건너 갔다고 생각하고 맥없이 돌아섰다. 뇌물을 바치지 못하면 영지 관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거지 새끼를 더스틴이 별 수 없이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쩔 수 없었다. 며칠 후에 이번 달 세금을 거둬야 했다. 이번에도 관리가 없어서 세리아 마을에서 세금을 걷지 못하면 더스틴은 정말 영주인 실리온 남작에게 목이 잘릴지 몰랐다.
어떻게든 관리를 보내서 세금을 거둬야 했다. 지금에 와서 그게 누가 되었든 더스틴은 상관없었다. 그래서 즉시 영지 관리 임명장에 벤자민의 이름을 적고 영주의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 임명장을 벤자민에게 내던졌다.
임명장을 보고 벤자민은 뛸 듯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더스틴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 바로 임지로 떠나라고 했다. 그랬더니 벤자민이 대뜸 데려갈 병사를 요구했다.
‘이 거지 새끼가.’
코가 막히고 기가 찼지만 영지법상 영지 관리는 부임지 병사를 대동하고 가야 했다. 하지만 어떤 미친 병사가 그곳에 가려 하겠는가?
‘어디서 그 얘긴 주워 들은 모양이군. 어쩐다?’
그때 더스틴의 뇌리에 떠오른 자들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 산적질을 하다가 잡힌 자들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더스틴은 알았다며 병사들을 준비해 줄 테니 벤자민에게 영주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젠장,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더스틴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영주관 지하에 있는 감옥이었다.

화르륵, 화르륵!
선홍빛 화롯불이 지하 석벽에 붉고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하 계단을 통해 감옥에 발을 내딛자 가장 먼저 기름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듯 풍겨져 왔다.
이어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악을 쓰며 욕하는 소리와 간수들의 고함 소리가 섞여 지하도에 메아리쳤다.
“어이구, 총관님.”
그때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대머리의 간수장이 달려와서 더스틴 앞에 머리를 숙였다. 더스틴은 감옥에서 죄수들을 고문하는 간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음습해 보인다고 할까?
“며칠 전 잡아 온 산적들 어디 있어?”
더스틴이 간수장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물었다.
“산적들 말씀이십니까? 그놈들은 왜?”
“설마 벌써 고문해서 죽인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이쪽으로.”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간수장이 앞장서며 더스틴을 감옥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간수장이 더스틴을 안내한 곳은 바로 고문실이었다. 다행이라면 그곳에서 간수들이 산적들을 상대로 막 고문을 자행하려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먼저 고문실로 들어간 간수장이 간수들에게 소리쳤다.
“멈춰! 그자들을 풀어 줘라, 당장.”
“네?”
의아해하던 간수들이 간수장 뒤에 나타난 총관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즉시 감옥 석벽에 매달려 있던 산적들을 풀어 주었다. 고문실 안의 산적들의 수는 전부 10명이었다.
“누가 두목이냐?”
더스틴의 말에 산발한 붉은 머리에 제법 덩치가 좋은 자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이리 끌고 와.”
더스틴의 명령에 간수가 쇠사슬에 묶인 산적 두목을 끌어다가 더스틴 앞에 대령했다.
“살고 싶나?”
“네?”
더스틴의 말에 산적 두목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물끄러미 더스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더스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기 싫은가 보군. 알았다.”
더스틴이 미련 없이 뒤돌아서자 산적 두목이 외쳤다.
“아, 아닙니다. 살려 주십시오. 뭐든 시키시는 대로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 부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산적 두목이 황급히 더스틴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더스틴의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서 엎드려 있는 산적 두목을 보고 말했다.
“뭐든 다 하겠다? 그래도 머리가 그리 나쁜 자는 아니로군.”
그렇게 말한 후 더스틴이 간수장에게 손짓을 보내고는 고문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붉은 머리의 산적 두목이 간수들의 안내를 받으며 간수장의 방에 들어섰다. 간수장의 방에는 간수장과 총관인 더스틴이 산적 두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적 두목의 이름은 웨슬러로 영지 자경대에서 병사로 있다가 영지전에 참전해서 크게 부상을 당했지만 기사회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그 후 용병 생활도 좀 하다가 도박으로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잃고 빚까지 지게 되었다.
결국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숨어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산적 무리에 합류하게 된 웨슬러는 힘도 좋고 과감한 결단력에 자치대에서 병사로 있었던 경험도 있어서 산적들을 잘 이끌었다.
그런 그를 산적들이 신임하게 되면서 웨슬러는 산적 두목이 되었다.
“앉게.”
더스틴이 죄수인 웨슬러에게 먼저 자리를 권했다. 웨슬러는 간수장과 간수들의 눈치를 살피며 총관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뭔가?”
웨슬러가 자리에 앉자마자 더스틴이 물었다.
“웨슬러입니다.”
간수장으로부터 죄수 목록을 받아 웨슬러란 이름을 찾던 더스틴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호. 전에 리브앙 영지에서 자경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군. 맞나?”
“네, 맞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더스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죄수 목록을 덮었다. 그리고 그 목록을 간수장에게 돌려준 후 웨슬러를 보고 말했다.
“살고 싶다는 그 생각은 변함이 없겠지?”
“네.”
웨슬러가 이번에는 주저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런 웨슬러를 보면서 더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네 수하들이 당장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자신만 사는 게 아니라 수하들까지 살 수 있다는 말에 웨슬러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총관인 더스틴이 그냥 자신들을 살려 줄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웨슬러가 잘 알았다.
또한 총관이 시킬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자신과 수하들이 살 길은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웨슬러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대답에는 더 이상 망설임 따윈 없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웨슬러를 보고 더스틴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너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살 수 있고 말고. 하하하!”
크게 웃고 난 더스틴이 간수장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간수장이 방안에 들어서 있던 간수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간수장과 간수들까지 모두 내보내고 나서 단둘만 남게 되자 더스틴이 웨슬러에게 말했다.
“네 경험을 살려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더스틴은 웨슬러와 산적들이 해 줘야 할 일을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고 웨슬러는 깜짝 놀랐다.
“지, 지금 저희 보고 병사가 되란 말입니까?”
“병사라기보다는 병사인 척해 주면 돼.”
“그러니까 병사로 위장해서 영지 관리와 같이 세리아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그 영지 관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영지 관리가 죽고 나면 영지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핑계로 그 마을을 나와서 자네와 자네 수하들은 그 길로 제 갈 길로 가게. 단 우리 영지 밖으로 나가 줘야 해.”
살 수만 있다면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게 뭐 대수겠는가? 하지만 일이 너무 쉬운 것이 영 꺼림칙한 웨슬러였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못하겠다고 말했다가는 다시 고문실로 끌려가서 죽게 생겼으니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웨슬러의 대답을 듣고 나서 더스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에 준비시켜 둘 테니 수하들과 같이 올라오게.”
그렇게 말한 후 더스틴은 지하 감옥을 나섰다.

고문을 당하기 직전에 총관이 나타나면서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 산적들은 그들의 두목인 웨슬러가 돌아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때 간수들이 와서 감옥 문을 열었다.
“나와!”
“네?”
어리둥절해하는 산적들을 보고 간수가 짜증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어서 기어 나오라고, 이 새끼들아!”
“네, 네!”
간수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산적들은 우르르 감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른 간수가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산적들은 간수가 가는 쪽으로 따라 걸었다. 그런데 간수가 감옥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감옥 밖으로 나간다는 소리였다.
‘뭐, 뭐지?’
산적질을 하다 걸리면 최소 사망이었다. 그나마 단두대나 교수형으로 처형이라도 당하면 편하게 죽는 것이었다.
대부분 산적 소굴이 어디 있으며 다른 산적들이 있는 곳을 밝히라며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죽기가 다반사였다.
산적들도 자신들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모두 고문을 받지 않고 죽고 싶었다. 적어도 감옥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공개 처형일 가능성이 높았다. 순간 산적들에게 죽음의 공포가 휘몰아쳤다.
‘이제 죽는구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산적들은 굳은 얼굴로 감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감옥 밖에 그들의 두목인 웨슬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병사 복장으로 말이다.
“어서 갈아입어.”
웨슬러가 바닥에 널려 있는 병사 옷을 가리키며 산적들에게 명령했다. 어리둥절해하던 산적들은 웨슬러가 시키는 대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병사 복으로 갈아입었다. 산적들이 모두 병사 복을 입고 나자 웨슬러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제부터 산적이 아니라 루실 영지의 영지성 자경대 병사들이다.”
“네에?”
웨슬러의 말에 그의 9명의 수하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총관이 보낸 관리가 웨슬러를 향해 외쳤다.
“다 됐으면 어서 이리 오게.”
“네, 갑니다.”
큰소리로 대답한 웨슬러가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입 꼭 다물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자세한 내용은 이따 알려 주겠다. 알겠나?”
“네, 두목님!”
“앞으로 나를 두목님이라 불러서도 안 된다. 그냥 ‘네’라고만 대답해라.”
“네!”
“가자.”
웨슬러는 병사로 거듭난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총관이 보낸 관리에게 뛰어갔다. 이때 영주관 밖에 있던 벤자민은 신이 나 자신과 같이 영지로 갈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이 사실을 가족들이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벤자민은 영지로 부임하면 제일 먼저 가족들과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떠돌이로 떠돌면서 그는 차마 가족들 앞에 설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영지 관리가 된 이상 이제 어머니와 나머지 가족들을 부임하는 세리아 마을로 불러들여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버지,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벤자민은 이게 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자신을 돌봐서 얻게 된 행운이라 여겼다. 그렇게 좋아 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다리고 있던 벤자민에게 한 관리와 10명의 병사들이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군.”
관리가 손짓으로 벤자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디어 왔구나!”
벤자민은 척 보고도 그 10명의 병사들이 자신과 같이 세리아 마을로 갈 루실 영지 병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을 데려온 관리가 벤자민에게 서류를 건네며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 서명하게.”
“아, 네.”
선배 관리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일 생각으로 벤자민은 최대한 정중하게 서류를 받아서 병사들을 인계받았음 확인해 주었다.
벤자민이 서류에 서명하자 관리는 아무 말도 없이 휑하니 영주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벤자민은 이제 자신의 병사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때 산적들은 왠 어리바리한 놈이 자신들을 보고 히죽거리며 웃자 상당히 기분들이 나빠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너희들을 이끌 루실 영지 관리인 벤자민이다.”
영지 관리란 말에 산적들이 흠칫 놀라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들의 두목인 웨슬러를 쳐다보았다.
웨슬러는 가만히 보니 벤자민이란 영지 관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임을 알고는 피식 웃었다.
‘저런 놈이라면.’
“반갑습니다. 저는 분대장 웨슬러입니다.”
웨슬러가 대표로 나서서 벤자민에게 인사를 했다.
“오오, 그대가 병사들의 우두머리로군. 앞으로 잘 지내 보세.”
벤자민이 먼저 웨슬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벤자민을 보면서 웨슬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벤자민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