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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그때 웨슬러가 일부러 벤자민의 손을 ‘꽈악’ 쥐었다. 처음부터 벤자민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서 말이다.
“아악!”
손이 부서지는 줄 알고 벤자민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웨슬러가 황급히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손을 꽉 쥔 모양이군요?”
남자 체면이 있지 악수 때문에 아프다고 말은 못하겠고 벤자민이 웨슬러에게 궁색 맞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괜찮아. 내가 손을 좀 다쳐서 그래.”
“그러셨군요. 손이 아프신지도 모르고 제가 실수를.”
“괜찮다니까. 그보다 떠날 준비는 된 거야?”
벤자민의 물음에 웨슬러가 바로 대답했다.
“네. 저희는 지금 바로 여기를 떠날 수 있습니다.”
웨슬러의 말을 듣고 병사들로 변신해 있던 산적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제 살게 되었으니 그들이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잘됐군.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지.”
“네.”
영지 관리 벤자민의 명령에 대답한 후, 웨슬러가 뒤돌아서 자신의 수하들을 보고 외쳤다.
“지금 바로 영지성을 떠나도록 하겠다.”
웨슬러의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산적들이 환호성을 쳤다.
“와아아아!”
“살았다, 살았어.”
“하하하!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산적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벤자민 자신을 따라가는 것에 이렇게까지 기뻐해 주는 병사들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비록 손은 퉁퉁 부어 아팠지만 말이다.
‘좋은 병사들을 만났구나. 아버지, 고맙습니다.’
벤자민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속으로 외쳤다. 벤자민은 그가 데려갈 병사들이 산적들이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8. 영지 관리 벤자민Ⅱ
영지 관리인 벤자민 앞으로 말이 한 필 지원되었다. 그 말에 오른 벤자민이 앞장서서 성문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그 뒤로 10명의 병사들이 2열종대로 늘어서서 뒤따라 움직였다. 루실 영지의 영지성 정문에 도착한 벤자민은 제법 목에 힘을 줬다.
“멈추시오!”
항상 그렇듯 성문을 지키던 영지성 병사들이 벤자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벤자민은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증명하는 영지 관리 임명장을 그들 앞에 내보였다. 병사들이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말을 하기 전에 말이다.
“세리아 마을로 부임하는 영지 관리 벤자민이다.”
“아, 예!”
영지 관리란 말에 병사들이 먼저 고개부터 숙였다. 그리고 임명장을 확인한 후 병사가 말했다.
“통과하십시오.”
“커험! 그럼 수고들 하게.”
크게 헛기침을 한 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말을 몰며 벤자민이 성문을 통과했다. 이어서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성문 밖으로 나간 뒤 성문 경비를 서고 있던 한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물었다.
“어이, 누군데 저렇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거야?”
“몰라. 나도 오늘 처음 보는 관리야.”
“엔리코, 누구야?”
병사들이 궁금해하며 벤자민에게 직접 임명장을 확인한 병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병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버려 둬. 어차피 며칠 못 살 자니까.”
“며칠 못 살 자라니?”
“세리아 마을로 가는 관리야.”
“뭐? 세리아 마을이면 그 관리들의 무덤이라는…….”
“쳇. 나는 또,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가는 모양이로군.”
병사들이 안 됐다는 듯 이제 제법 멀리까지 움직인 벤자민과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병사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저 관리를 따라가는 병사들 말이야.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뭐가?”
“아니. 이상하게 안면이 있는 자가 몇 명 있어서.”
“영지성 병사들인데 당연한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저번 산적들을 소탕한 적이 있잖아?”
“그랬지. 산적 두목을 포함해서 10명을 잡았잖아.”
“그 산적 두목과 똑같이 생긴 자를 본 것 같아서 말이야.”
“에이, 설마. 잘못 봤겠지. 그 산적들이라면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잖아. 아마 지금쯤이면 고문으로 반송장이 되어 있을 걸.”
“그렇겠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당연하지. 어제 나 대신 야근을 해서 피곤한 모양인데 어서 들어가. 오늘 네 야근은 내가 서 줄 테니.”
“어, 그래.”
잠시 후 병사들이 교대를 했다. 그때 총관 더스틴의 명령으로 성곽에서 벤자민과 병사로 위장한 10명의 산적들이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영지 관리가 성곽 아래로 내려가서 곧장 영주관으로 움직였다.
“총관님. 놈이 세리아 마을로 떠났습니다.”
영지 관리의 말에 총관 더스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로군. 중간에 무슨 문제는 없었겠지?”
“네. 제가 계속 감시했지만 성을 나설 때까지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습니다.”
“됐어. 그 거지 새끼가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달에는 적자를 면할 수 있겠군.”
더스틴은 그저 벤자민이 세리아 마을에서 두 달만 버텨 주기를 바랐다.
“총관님,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아, 그래.”
영주를 만나러 가는 총관 더스틴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벤자민이란 존재가 깨끗하게 지워졌다.
무사히 루실 영지성을 빠져나온 산적들은 혹시나 몰라 긴장한 채 앞만 보고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두 시간 쯤 뒤, 이제 그들 뒤로 영지성도 보이지 않았다.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앞쪽에서 자기 혼자 말을 탄 채 뭐가 그리 좋은 일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벤자민뿐이었다.
“루루루루.”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산적들은 모두 어이가 없었다. 그때 산적 중 하나가 목소리를 죽인 채 그들의 두목인 웨슬러에게 물었다.
“두목님. 저 자식은 어쩔 겁니까?”
그 물음에 웨슬러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핫바지 같은 녀석쯤이야.”
웨슬러가 산적들에게 뭐라 조용히 지시를 했다.
“아악!”
잠시 뒤 벤자민은 뒤쪽에서 난 비명 소리에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한 병사가 길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가?”
벤자민의 물음에 병사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분대장님께서 발을 접질리신 것 같습니다.”
“뭐?”
‘허어. 하필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분대장이 다치다니!’
벤자민이 안타까워하며 말을 몰아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웨슬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웨슬러가 몸을 일으키자 벤자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하지만 웨슬러는 발을 짚고 서 있지도 못했다. 웨슬러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벤자민을 향해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많이 아픈가?”
벤자민이 자상하게 묻자 웨슬러가 더 면목이 없다는 듯 힘없이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더 이상 걷기가…….”
그때 주위 병사들이 일제히 벤자민과 그가 타고 있는 말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눈치 없는 벤자민도 병사들의 따가운 눈총에 그대로 말을 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 말이라도 타겠나?”
벤자민의 권유에 웨슬러가 바로 대답했다.
“역시 자상하시군요.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그리하여 영지 관리인 벤자민은 걷고 산적 두목인 웨슬러가 말에 올랐다. 그 후 세리아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벤자민은 찬밥 신세였다.
중간에 들르는 마을에서도 사정은 똑같았다. 산적 두목인 웨슬러가 영지 관리가 묵는 고급 방에 머물렀고, 그 방에서 내쫓긴 벤자민은 다른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이유는 역시 웨슬러의 갑작스런 발작 증세 때문이었다.
“그 참 말을 타고 갈 때는 멀쩡하던 자가 왜 여관에만 들어가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인지 모르겠군.”
내일이면 세리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상 세리아 마을로 가는 여정 중 마지막 밤에도 벤자민은 마구간 신세였다. 벤자민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웨슬러를 비롯해서 9명의 병사들이 같은 편이다 보니 벤자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영지로 가면 총관께 연락해서 병사들부터 바꿔 달라고 해야겠군.”
아무래도 10명의 병사들은 벤자민과 잘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더 이상 하늘을 우러러보는 일도 아버지께 고마워하는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그리고 자신이 루실 영지의 관리가 된 것에도 점차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방이 없는 관계로 벤자민을 여관에 딸린 마구간으로 가게 만든 산적들은 몰래 여관을 빠져나와 술집에 모여서 벤자민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하하! 벤자민이란 그자 말입니다. 두목님 말대로 정말 멍청한 녀석입니다.”
산적 중 하나가 제법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러자 웨슬러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그 산적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허! 두목이란 말은 쓰지 말라니까.”
“이 입이 또 방정을… 죄송합니다, 분대장님.”
“두, 아니, 분대장님. 그런데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정말 이대로 그 촌구석에 들어가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산적 수하의 말에 웨슬러가 들고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가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에이. 약속은 무슨… 산적이 약속을 지킨다니 지나가던 똥개가… 허억!”
퍽!
“커억!”
웨슬러의 주먹이 산적의 얼굴에 그대로 작렬했다. 비명과 동시에 병사 하나가 술집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게 아마 맞자마자 바로 기절한 모양이었다.
그 쓰러진 병사를 쳐다보며 웨슬러가 주위 병사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입조심하라고 했어 안 했어?”
“…….”
웨슬러가 화가 나면 무섭다는 것을 잘 아는 산적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눈을 내려 깔았다.
이때 웨슬러가 테이블 위에 있던 맥주잔들 중 하나를 들어서 그 쓰러진 병사에게 다가가서 그 얼굴에 차가운 맥주를 끼얹었다.
“어푸!”
기절했던 병사가 깜짝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병사를 내려다보며 웨슬러가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약속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누구냐를 떠나서 말이다. 알겠나?”
끄덕끄덕.
웨슬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병사가 재빨리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자신의 자리도 돌아가 앉은 웨슬러가 그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우린 약속대로 세리아 마을에서 병사들로 생활하다가 멍청한 관리가 죽고 나면 이곳을 떠나 다른 영지로 간다.”
웨슬러는 다시 로실 영지 병사들에게 잡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욱이 두 번 다시 그 악몽 같은 지하 감옥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총관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일이 끝나면 타 영지로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정말 그게 답니까?”
웨슬러 다음으로 산적들 중에서 강한 프레드가 불쑥 웨슬러에게 물었다.
“그게 다가 아니면?”
웨슬러가 프레드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프레드는 그런 웨슬러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말했다.
“총관과 무슨 얘기를 나눈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 총관과 만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도 알아야겠습니다.”
프레드의 말에 그 주위에 있던 산적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얘기해 주십시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들의 돌발 행동에 웨슬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프레드가 말했다.
“설마 우리 보고 멍청이 하나를 데리고 세리아 마을로 가면 총관이 순순히 우릴 풀어 줄 거란 그 말을 믿으란 말은 아니겠지요?”
“…….”
프레드의 말에 웨슬러는 할 말을 잊었다. 프레드의 말처럼 웨슬러도 사실 지금까지 그 진위를 의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웨슬러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휴우. 실은 나도 그 점이 걱정되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만약 총관이 무슨 의도가 있어서 우릴 저 멍청이와 함께 보낸 것이라면 우린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을 것이 아니냐?”
웨슬러의 말에 산적들이 일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술집 안에 있는 자들 중 누가 그들의 감시자인지 알 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