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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그때 웨슬러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했다. 술집 안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웨슬러의 목소리는 산적들에게만 겨우 들렸다.
“그 일로 고민해 봤는데 지금으로써 가장 최선은 멍청이를 따라서 세리아 마을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시자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서 탈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말을 한 후 웨슬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맥주잔을 들었다.
“자, 빨리 한 잔씩 더 마시고 여관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하자.”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허겁지겁 잔을 치켜들었다. 단숨에 맥주를 다 마신 웨슬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뒤이어서 그 수하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술집 밖으로 나갔다.
그때 웨슬러 일행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쓰고 있던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드를 벗었는데 놀랍게 그는 바로 벤자민이었다.
마구간에서 자신이 영지 관리가 된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해하며 고심에 잠겨 있던 벤자민의 귀에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벤자민이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가 그의 귀에 더 선명하게 들려 왔다.
“어디 간다고 했지?”
“세리아 마을.”
세리아 마을이란 말에 벤자민이 더 귀를 쫑긋 세웠다.
“가깝군. 그곳은 여전하지?”
“뭐 그렇지.”
“그곳에 관리는 아직 안 왔지?”
“올 턱이 있나? 어떤 미친놈이 그런 촌구석에 죽으러 오겠어?”
“하긴 그렇긴 해.”
‘이게 무슨 소리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벤자민은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 다 끝났어. 목도 칼칼한데 맥주 한 잔 하러 가자고.”
“그럴까?”
두 사람이 마구간을 나가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벤자민이 소리쳤다.
“이봐요, 잠깐! 잠깐만요!”
히히히힝!
그때 벤자민의 소리에 놀란 말들이 마구간 안에서 날뛰는 바람에 벤자민 잠시 동안 마구간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말들이 안정되자 마구간 밖으로 나온 벤자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마구간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맥주 한 잔 마신다고 했지?”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리며 벤자민은 근처 술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벤자민 일행이 머문 곳은 작은 마을로 여관과 술집은 한 곳뿐이었다.
벤자민이 막 술집 안으로 들어서려 했을 때 그의 눈에 술집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웨슬러와 병사들이 보였다.
‘저놈들이!’
자신은 마구간에 보내 놓고 자신이 준 돈으로 이 시간에 술을 처먹으러 오다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벤자민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어쩌지?’
잠시 고심하던 벤자민의 눈에 잡화점이 보였다. 벤자민은 일단 그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술집 안으로는 어쨌든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서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을 찾아서 물을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웨슬러와 병사들에게 들킬 것이 뻔했다. 뭐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그럴 경우 벤자민과 병사들 사이는 더 어색해질 터였다.
‘내일이면 목적지다. 굳이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지. 당분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말이야.’
일단 세리아 마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영지 관리로 자리 잡을 때까지 어쨌든 웨슬러와 병사들의 도움이 절실한 벤자민이었다. 아쉬운 쪽은 벤자민이니 당분간 그들을 자극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때 벤자민의 눈에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가 보였다. 벤자민은 그 검은 로브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뒤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벤자민은 최대한 웨슬러와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비교적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향에 등지고 앉은 벤자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두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벤자민은 일단 술집 안에서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술집 안에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직접 테이블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벤자민이 안타까워할 때였다.
우당탕!
웨슬러와 병사들이 있던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벤자민이 슬쩍 뒤돌아보니 웨슬러가 한 병사에게 주먹질을 한 모양이었다. 그때 벤자민이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었다.
벤자민은 사람이 얘기하는 입술만 보고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벤자민은 항상 그의 스승과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제에게 눈치를 받았다. 그렇다 보니 그 스승과 사제의 입 모양을 유심히 살피게 되었고 멀리서도 그들의 입만 보고도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벤자민의 스승과 사제는 항상 벤자민에게 멍청한 녀석이 눈치 하나를 빠르다고 했었다. 사실은 그들이 준 눈칫밥 때문에 벤자민이 그들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말이다.
소란이 일어났지만 술집 안의 사람들은 한 번 힐끗 웨슬러와 병사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때문에 웨슬러의 말은 벤자민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벤자민은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으며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벤자민은 웨슬러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웨슬러가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뭐, 뭐라고? 멍청한 관리가 죽고 나면 떠난다고?’
그 멍청한 관리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 좀 전 마구간에서 들었던 얘기와 웨슬러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세리아 마을로 가면 관리인 자신은 죽는다는 것 말이다.
그 뒤로 웨슬러와 병사들은 서로 심각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루크, 내일 세리아 마을로 떠난다며?”
그때 벤자민의 귀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곳에 오우거 가죽을 가지러 가야 해서.”
“하긴 빅맨들이 사는 세리아 마을이 아니고선 멀쩡한 오우거 가죽을 구할 곳이 없지.”
오우거를 사냥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지만 굳이 세리아 마을 같은 촌구석까지 가서 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오우거 가죽을 원한다면 세리아 마을로 가야 했다.
오우거는 거칠고 사나웠다. 때문에 사냥꾼이 한 번에 녀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녀석의 온전한 가죽은 비싼 가격에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자다.’
분명히 마구간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벤자민은 그 소리가 난 테이블로 움직였다. 그때 힐끗 웨슬러 일행들이 있는 쪽을 힐끗 돌아보던 벤자민은 웨슬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봤다.
벤자민은 즉시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었다.
‘감시자? 탈출?’
앞에 웨슬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웨슬러는 세리아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감시자의 눈을 피해 탈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벤자민은 그게 무슨 소린지 당장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술잔을 높이 들고 웨슬러와 병사들이 맥주를 마셨다. 단숨에 맥주잔을 비운 웨슬러가 움직였다. 그것을 보고 벤자민은 일단 근처 빈 테이블에 앉았다.
웨슬러와 병사들은 후드를 쓰고 있는 벤자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술집 밖으로 나갔다. 웨슬러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벤자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벤자민이 술집 종업원을 불렀다.
술자리에 누가 끼어드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벤자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공짜 술은 그런 화를 누그러트리는데 특효약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맥주 한 잔씩 돌려.”
벤자민의 외침에 종업원이 신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벤자민이 술을 한 잔 산다니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찌푸리고 있던 얼굴 표정을 풀었다.
“뭘 묻고 싶다는 거요?”
그중 한 사람이 벤자민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벤자민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빈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빼서는 그 테이블에 끼어들어 앉으며 말했다.
“하하하! 실은 내가 내일 세리아 마을에 가야 하는데 초행이라서 말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런, 세리아 마을에 무슨 일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좀 위험한 곳인데.”
“그러게 말이요. 가능하면 그곳에는 가지 않는 게 좋소.”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세리아 마을이란 말만 듣고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뭐 위험한 곳이긴 한데 그곳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순박하고 착합니다.”
바로 내일 세리아 마을로 간다고 했던 그 사람 목소리였다.
“예끼 이 사람아. 빅맨들을 보고 순박하고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네뿐일 거야. 객쩍은 소리 치우고 어서 술이나 마셔.”
옆에 있던 아까 마구간에서 들었던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이 술잔을 들었다. 잠시 뒤 벤자민이 시킨 술이 나오면서 술자리는 한층 활기를 띠었다. 그때 벤자민이 슬쩍 물었다.
“세리아 마을에 관리가 없다던데 그게 맞습니까?”
“당연하지요. 그곳에 부임한 관리 치고 한 달? 아니, 며칠을 견딘 관리가 없으니 말 다했지요.”
“네?”
어리둥절한 표정의 벤자민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들은 세리아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는 벤자민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
얼마 뒤 벤자민이 비틀거리며 술집은 나섰다. 하얗게 질려서는 잔뜩 겁먹은 그의 표정의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떠나야 해.”
벤자민은 웨슬러가 병사들이 묵고 있는 여관이 아닌 마을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을 마시러 갔던 웨슬러와 산적들은 묵고 있는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세리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표정들이 잔뜩 굳어 있었다.
“프레드. 마구간에 가서 멍청이가 잘 있는지 확인 해.”
여관 안으로 들어가며 웨슬러가 명령했다. 그러자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프레드가 여관 옆 마구간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프레드가 마구간에서 나와 여관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뭐? 멍청이가 없어?”
프레드의 말에 웨슬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마구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멍청이 녀석은 없었습니다.”
“애들 깨워서 어서 찾아!”
웨슬러의 명령에 프레드가 다른 방으로 가서 병사로 위장하고 있던 산적들을 깨웠다. 그때 옷을 챙겨 있고 여관 복도로 나온 웨슬러가 프레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마을 안을 뒤져라. 나는 마을 밖으로 나가 보겠다.”
혹시 벤자민이 달아났다면 일이 심각해졌다. 벤자민이 사라지면 감시자가 즉시 이 사실을 총관 더스틴에게 알릴 것이고 그럼 더스틴이 산적들을 어떻게 할지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다시 지하 감옥으로 잡혀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든지.’
웨슬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을 밖을 향해 뛰었다.
“헉헉!”
마을을 빠져나온 벤자민은 죽자고 뛰었다. 밤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여러 번. 까진 무릎에서 피가 흘렀지만 벤자민은 아픈지도 모르고 계속 뛰었다. 그렇게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난 후 벤자민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제일 먼저 길게 한숨이 나왔다.
“휘유, 그러면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그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수마는 곧 벤자민의 머리와 몸을 잠식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든 벤자민은 용감하게도 코까지 골았다.
“드르렁 드르렁.”
그 소리를 듣고 마을 밖을 뒤지던 웨슬러가 벤자민을 쉽게 찾아냈다. 길바닥에 잠든 벤자민을 보고 웨슬러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웨슬러는 간단히 벤자민을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음냐 음냐!”
그러거나 말거나 벤자민은 입에 침을 흘려 가며 잘도 잤다. 웨슬러가 벤자민을 들쳐 메고 마을에 나타났을 때 마을을 이 잡듯 뒤졌던 산적들이 빈손으로 초조하게 웨슬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웨슬러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했다. 술집 안은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웨슬러의 목소리는 산적들에게만 겨우 들렸다.
“그 일로 고민해 봤는데 지금으로써 가장 최선은 멍청이를 따라서 세리아 마을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시자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서 탈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말을 한 후 웨슬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맥주잔을 들었다.
“자, 빨리 한 잔씩 더 마시고 여관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하자.”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허겁지겁 잔을 치켜들었다. 단숨에 맥주를 다 마신 웨슬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뒤이어서 그 수하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서 술집 밖으로 나갔다.
그때 웨슬러 일행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검은 로브에 후드를 덮어쓰고 있던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드를 벗었는데 놀랍게 그는 바로 벤자민이었다.
마구간에서 자신이 영지 관리가 된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해하며 고심에 잠겨 있던 벤자민의 귀에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벤자민이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가 그의 귀에 더 선명하게 들려 왔다.
“어디 간다고 했지?”
“세리아 마을.”
세리아 마을이란 말에 벤자민이 더 귀를 쫑긋 세웠다.
“가깝군. 그곳은 여전하지?”
“뭐 그렇지.”
“그곳에 관리는 아직 안 왔지?”
“올 턱이 있나? 어떤 미친놈이 그런 촌구석에 죽으러 오겠어?”
“하긴 그렇긴 해.”
‘이게 무슨 소리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벤자민은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 다 끝났어. 목도 칼칼한데 맥주 한 잔 하러 가자고.”
“그럴까?”
두 사람이 마구간을 나가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벤자민이 소리쳤다.
“이봐요, 잠깐! 잠깐만요!”
히히히힝!
그때 벤자민의 소리에 놀란 말들이 마구간 안에서 날뛰는 바람에 벤자민 잠시 동안 마구간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말들이 안정되자 마구간 밖으로 나온 벤자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마구간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맥주 한 잔 마신다고 했지?”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리며 벤자민은 근처 술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벤자민 일행이 머문 곳은 작은 마을로 여관과 술집은 한 곳뿐이었다.
벤자민이 막 술집 안으로 들어서려 했을 때 그의 눈에 술집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웨슬러와 병사들이 보였다.
‘저놈들이!’
자신은 마구간에 보내 놓고 자신이 준 돈으로 이 시간에 술을 처먹으러 오다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벤자민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어쩌지?’
잠시 고심하던 벤자민의 눈에 잡화점이 보였다. 벤자민은 일단 그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술집 안으로는 어쨌든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서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을 찾아서 물을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웨슬러와 병사들에게 들킬 것이 뻔했다. 뭐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그럴 경우 벤자민과 병사들 사이는 더 어색해질 터였다.
‘내일이면 목적지다. 굳이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지. 당분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말이야.’
일단 세리아 마을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영지 관리로 자리 잡을 때까지 어쨌든 웨슬러와 병사들의 도움이 절실한 벤자민이었다. 아쉬운 쪽은 벤자민이니 당분간 그들을 자극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때 벤자민의 눈에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가 보였다. 벤자민은 그 검은 로브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뒤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벤자민은 최대한 웨슬러와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렇게 비교적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향에 등지고 앉은 벤자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두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벤자민은 일단 술집 안에서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술집 안에 두 사람만 앉아 있는 테이블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직접 테이블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벤자민이 안타까워할 때였다.
우당탕!
웨슬러와 병사들이 있던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벤자민이 슬쩍 뒤돌아보니 웨슬러가 한 병사에게 주먹질을 한 모양이었다. 그때 벤자민이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었다.
벤자민은 사람이 얘기하는 입술만 보고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벤자민은 항상 그의 스승과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제에게 눈치를 받았다. 그렇다 보니 그 스승과 사제의 입 모양을 유심히 살피게 되었고 멀리서도 그들의 입만 보고도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벤자민의 스승과 사제는 항상 벤자민에게 멍청한 녀석이 눈치 하나를 빠르다고 했었다. 사실은 그들이 준 눈칫밥 때문에 벤자민이 그들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말이다.
소란이 일어났지만 술집 안의 사람들은 한 번 힐끗 웨슬러와 병사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때문에 웨슬러의 말은 벤자민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벤자민은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으며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벤자민은 웨슬러의 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웨슬러가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뭐, 뭐라고? 멍청한 관리가 죽고 나면 떠난다고?’
그 멍청한 관리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 좀 전 마구간에서 들었던 얘기와 웨슬러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세리아 마을로 가면 관리인 자신은 죽는다는 것 말이다.
그 뒤로 웨슬러와 병사들은 서로 심각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루크, 내일 세리아 마을로 떠난다며?”
그때 벤자민의 귀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곳에 오우거 가죽을 가지러 가야 해서.”
“하긴 빅맨들이 사는 세리아 마을이 아니고선 멀쩡한 오우거 가죽을 구할 곳이 없지.”
오우거를 사냥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지만 굳이 세리아 마을 같은 촌구석까지 가서 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오우거 가죽을 원한다면 세리아 마을로 가야 했다.
오우거는 거칠고 사나웠다. 때문에 사냥꾼이 한 번에 녀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녀석의 온전한 가죽은 비싼 가격에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자다.’
분명히 마구간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벤자민은 그 소리가 난 테이블로 움직였다. 그때 힐끗 웨슬러 일행들이 있는 쪽을 힐끗 돌아보던 벤자민은 웨슬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봤다.
벤자민은 즉시 웨슬러의 입 모양을 읽었다.
‘감시자? 탈출?’
앞에 웨슬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웨슬러는 세리아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감시자의 눈을 피해 탈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벤자민은 그게 무슨 소린지 당장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술잔을 높이 들고 웨슬러와 병사들이 맥주를 마셨다. 단숨에 맥주잔을 비운 웨슬러가 움직였다. 그것을 보고 벤자민은 일단 근처 빈 테이블에 앉았다.
웨슬러와 병사들은 후드를 쓰고 있는 벤자민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술집 밖으로 나갔다. 웨슬러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벤자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마구간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 두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뭐 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벤자민이 술집 종업원을 불렀다.
술자리에 누가 끼어드는 것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벤자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공짜 술은 그런 화를 누그러트리는데 특효약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맥주 한 잔씩 돌려.”
벤자민의 외침에 종업원이 신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벤자민이 술을 한 잔 산다니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찌푸리고 있던 얼굴 표정을 풀었다.
“뭘 묻고 싶다는 거요?”
그중 한 사람이 벤자민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벤자민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빈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빼서는 그 테이블에 끼어들어 앉으며 말했다.
“하하하! 실은 내가 내일 세리아 마을에 가야 하는데 초행이라서 말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런, 세리아 마을에 무슨 일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좀 위험한 곳인데.”
“그러게 말이요. 가능하면 그곳에는 가지 않는 게 좋소.”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세리아 마을이란 말만 듣고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뭐 위험한 곳이긴 한데 그곳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순박하고 착합니다.”
바로 내일 세리아 마을로 간다고 했던 그 사람 목소리였다.
“예끼 이 사람아. 빅맨들을 보고 순박하고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네뿐일 거야. 객쩍은 소리 치우고 어서 술이나 마셔.”
옆에 있던 아까 마구간에서 들었던 또 다른 목소리의 주인이 술잔을 들었다. 잠시 뒤 벤자민이 시킨 술이 나오면서 술자리는 한층 활기를 띠었다. 그때 벤자민이 슬쩍 물었다.
“세리아 마을에 관리가 없다던데 그게 맞습니까?”
“당연하지요. 그곳에 부임한 관리 치고 한 달? 아니, 며칠을 견딘 관리가 없으니 말 다했지요.”
“네?”
어리둥절한 표정의 벤자민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들은 세리아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얘기를 듣는 벤자민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
얼마 뒤 벤자민이 비틀거리며 술집은 나섰다. 하얗게 질려서는 잔뜩 겁먹은 그의 표정의 벤자민이 중얼거렸다.
“떠나야 해.”
벤자민은 웨슬러가 병사들이 묵고 있는 여관이 아닌 마을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을 마시러 갔던 웨슬러와 산적들은 묵고 있는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세리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표정들이 잔뜩 굳어 있었다.
“프레드. 마구간에 가서 멍청이가 잘 있는지 확인 해.”
여관 안으로 들어가며 웨슬러가 명령했다. 그러자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프레드가 여관 옆 마구간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프레드가 마구간에서 나와 여관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뭐? 멍청이가 없어?”
프레드의 말에 웨슬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마구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멍청이 녀석은 없었습니다.”
“애들 깨워서 어서 찾아!”
웨슬러의 명령에 프레드가 다른 방으로 가서 병사로 위장하고 있던 산적들을 깨웠다. 그때 옷을 챙겨 있고 여관 복도로 나온 웨슬러가 프레드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마을 안을 뒤져라. 나는 마을 밖으로 나가 보겠다.”
혹시 벤자민이 달아났다면 일이 심각해졌다. 벤자민이 사라지면 감시자가 즉시 이 사실을 총관 더스틴에게 알릴 것이고 그럼 더스틴이 산적들을 어떻게 할지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다시 지하 감옥으로 잡혀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든지.’
웨슬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을 밖을 향해 뛰었다.
“헉헉!”
마을을 빠져나온 벤자민은 죽자고 뛰었다. 밤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여러 번. 까진 무릎에서 피가 흘렀지만 벤자민은 아픈지도 모르고 계속 뛰었다. 그렇게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난 후 벤자민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제일 먼저 길게 한숨이 나왔다.
“휘유, 그러면 그렇지. 내 주제에 무슨…….”
그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수마는 곧 벤자민의 머리와 몸을 잠식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든 벤자민은 용감하게도 코까지 골았다.
“드르렁 드르렁.”
그 소리를 듣고 마을 밖을 뒤지던 웨슬러가 벤자민을 쉽게 찾아냈다. 길바닥에 잠든 벤자민을 보고 웨슬러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웨슬러는 간단히 벤자민을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음냐 음냐!”
그러거나 말거나 벤자민은 입에 침을 흘려 가며 잘도 잤다. 웨슬러가 벤자민을 들쳐 메고 마을에 나타났을 때 마을을 이 잡듯 뒤졌던 산적들이 빈손으로 초조하게 웨슬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