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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웨슬러는 어깨에 메고 있던 벤자민을 수하들에게 넘기며 명했다.
“마구간에 도로 넣고 돌아가며 감시해.”
“네.”
벤자민은 다시 마구간으로 갔고 그곳 짚을 쌓아 둔 곳에 누워 계속 잤다.
“헉!”
벤자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그리고 벤자민은 곧 자신이 어제 그 마구간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때였다. 마구간의 문이 열리고 웨슬러와 병사들이 나타났다.
“자, 어서 떠나시지요.”
웨슬러의 말에 벤자민은 어제 길바닥에서 잠든 자신을 저들이 다시 마구간으로 데려왔음을 직감했다.
“하하하! 내가 몽유병이 좀 있어서.”
벤자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그런 벤자민을 산적들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벤자민은 10명의 병사들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하고 세리아 마을로 움직였다.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한 결과 드디어 목적지인 세리아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다. 벤자민도 웨슬러와 산적들도 그 입구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웨슬러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먼저 영지 관리인 벤자민에게 말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아! 그, 그래.”
아침부터 웨슬러는 벤자민에게 말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벤자민은 일행 중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편해야 할 말 위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다그닥 다그닥.
벤자민이 앞서 말을 몰아 세리아 마을 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대략 100여 가구의 집들이 군데군데 떨어진 가운데 십여 가구에서 수십여 가구씩 모여 있었다.
마을 가까이 다가가자 제일 먼저 커다란 목책이 눈에 띄었다. 그 목책들 사이로 대문이 있었는데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대문 안을 통과하자 드디어 세리아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때 구슬치기와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창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아이들이나 하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벤자민은 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여기가 세리아 마을이 맞나?”
벤자민의 물음에도 사람들은 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벤자민의 뒤쪽에 있던 웨슬러가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영지 관리께서 오셨거늘!”
웨슬러의 외침에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놀이를 멈추고 일어섰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너무 젊어 보였다. 그때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아저씨들 누구세요?”
“아저씨?”
그때였다.
“루이스!”
덩치 큰 중년의 아주머니가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리고 경계심 어린 얼굴로 아이들 앞을 가로막아 서며 말했다.
“당신들 누구지?”
중년의 아주머니는 벤자민의 일행 중 가장 덩치가 좋은 웨슬러와 비교해도 될 만큼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그때 벤자민이 말 위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새로 부임한 영지 관리다.”
벤자민의 말을 듣고 중년의 아주머니의 얼굴에 경계심이 사라졌다.
“영지 관리라고요? 드디어 오셨군요. 얘들아, 어서 이 사실을 어른들께 알려라.”
중년 아주머니가 뒤돌아서 아이들처럼 놀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맙소사. 그럼 저들이 이곳 마을 아이들?’
아이들이 웬만한 영지 어른들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마을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잠시 후 거인들이 나타났다. 세리아 마을에 성인 남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허억!”
그들을 보고 벤자민과 산적들은 목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후 덩치 큰 거인들 중 비교적 젊어 보이는 남자가 벤자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중히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이곳 촌장의 아들인 부르스입니다. 일단 마을 회관으로 가시지요.”
부르스란 자를 따라 벤자민과 웨슬러, 그리고 병사로 위장한 산적들이 마을 회관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였다.
‘세리아 마을에 빅맨들이 산다더니 이래서 그랬군.’
마을 회관으로 가는 동안 벤자민은 마을 사람들의 덩치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을 회관에는 관리인 벤자민이 지낼 방과 병사들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지 관리의 사무실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가 불편하시면 마을에 따로 집을 마련하셔도 됩니다. 저희가 언제든지 도와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마을 촌장의 아들이라는 부르스의 말에 벤자민은 알았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집 지어 주겠다고 모여서 나를 없애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벤자민은 영지 관리를 해치는 범인들을 마을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웨슬러와 산적들도 세리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을에서 탈출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러다가 거인들의 손에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고 판단들 한 것이다.
산적들은 원망 어린 눈으로 자신들을 거인들의 소굴로 끌고 들어온 그들의 두목인 웨슬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웨슬러도 세리아 마을이 이런 위험천만한 곳인지는 몰랐다. 그러니 그 역시 다른 산적들처럼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럼 마을 사람들은 언제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부르스가 벤자민에게 물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며 벤자민이 부르스를 올려다보자 부르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영지 관리께서 오셨으니 마을 사람들을 만나셔야지요.”
“아, 그래야지.”
“촌장이신 아버지께서는 사냥을 나가신 터라 그동안 제가 마을의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 시간 뒤, 마을 회관 앞에 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부르스가 마을 회관을 나섰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한숨 소리 중에는 벤자민의 한숨 소리도 섞여 있었다.
마치 사지에라도 들어온 듯 벤자민과 10명의 산적들의 얼굴은 굳어 있을 대로 굳어 있었다. 다행히 산적 두목인 웨슬러가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영지 관리인 벤자민에게 말했다.
“관리님. 일단 마을 회관 주위에 경계부터 서겠습니다.”
“그, 그렇게 하게.”
그나마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웨슬러가 정신을 차린 듯 보이자 벤자민도 서서히 마을 사람들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가자.”
웨슬러는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마을 회관 밖으로 나갔다. 산적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그런 산적들에게 웨슬러가 말했다.
“겁먹을 것 없다. 지금까지 영지 관리는 죽어도 병사가 죽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웨슬러의 그 말에 산적들의 얼굴이 펴졌다. 그런 산적들을 웨슬러는 마을 회관의 입구와 주위에 보초를 세웠다. 문제는 웨슬러가 외친 그 소리를 마을 회관 안에 있던 벤자민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헉! 나는 죽어도 지들은 안 죽는단 말이지? 이, 이제 어쩌지?”
결국 죽는 것은 벤자민이었다. 이제 며칠 못 살고 죽는다는 생각에 벤자민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벤자민은 죽음의 공포에 빠져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암, 죽을 수 없고 말고.”
계속해서 바르르 몸을 떠는 벤자민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리아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을 회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대략 500명은 되었다.
얼추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아서 부르스가 영지 관리가 있는 마을 회관 안으로 걸어갔다.
척!
그러자 병사들이 부르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르스가 그런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관리님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전해 주시오.”
그 말을 듣고 웨슬러가 직접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님. 준비가…….”
그때 벤자민은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죽기 싫어.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헛소리까지 주절대는 벤자민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웨슬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멍청한 새끼! 완전히 겁먹었군. 어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웨슬러가 뭔가 결심을 한 듯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뜸 벤자민의 멱살을 잡아서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쿵!
“아이고! 사람 죽네!”
허리를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벤자민을 웨슬러가 다시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곧 죽일 듯 사나운 눈으로 벤자민을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지금 내 손에 맞아 죽을래? 아니면 며칠 더 살다가 죽을래?”
잠시 후 벤자민이 웨슬러와 같이 마을 회관 밖으로 나왔다. 벤자민은 여전히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로 웨슬러에 떠밀려서 마을 회관 앞에 그를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단상에 올라선 벤자민은 생각보다 순진해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덩치가 크다 보니 그의 눈에도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반갑다. 나는 이번에 새로 이곳 세리아 마을에 부임한 영지 관리인 벤자민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 마을을 이끌어 가는데…….”
콰르르릉!
번쩍!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쳤다. 그 번개는 공교롭게 마을 회관 앞 단상에 내려 꽂혔다.
부르르르!
단상에 홀로 서 있던 벤자민이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서고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눈알이 뒤집어진 벤자민은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관리님!”
부르스와 웨슬러가 황급히 단상으로 올라갔다.


9. 돌아온 크루거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쓰러진 벤자민을 보고 웨슬러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여기서 이자가 죽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웨슬러가 총관 더스틴과 한 약속은 영지 관리가 죽으면 루실 영지를 떠나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대로라면 벤자민이 이렇게 하루라도 빨리 죽어 주는 것이 산적들에게 나았다.
‘그래. 이건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라.’
웨슬러는 벤자민이 이대로 죽으면 오늘 중에 세리아 마을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뭐하는 겁니까? 어서 관리님을 챙기지 않고?”
상관이 쓰러져 있는데 멍하니 생각만에 빠져 있는 웨슬러를 보고 부르스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웨슬러가 머리와 몸에서 풀풀 연기가 피어오르는 벤자민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죽었소.”
그렇게 말하고 단상 아래로 무정하게 내려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기가 차 하던 부르스가 벤자민의 가슴에 한쪽 귀를 갖다 댔다.
콩닥콩닥!
미세하게나마 심장은 뛰고 있었다. 부르스는 벤자민을 들쳐 멨다. 영지 관리가 쓰러지자 세리아 마을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번개가 번쩍하더니 관리가 쓰려졌잖아.”
“허어. 벌건 대낮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부르스는 쓰러진 벤자민을 어깨에 메고는 침착하게 마을 회관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자, 모두들 물러가십시오. 별일 아니니 걱정들 마시고. 관리관이 깨어나면 다시 보면 되니까 이만 돌아들 가십시오.”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부르스는 그의 어깨 위에 시체마냥 축 늘어진 벤자민을 메고 마을 회관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회관 입구에서 웨슬러와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체를 마을 회관 안에 들일 수 없다.”
웨슬러의 말을 듣고 부르스가 다급히 말했다.
“관리님은 아직 죽지 않았소.”
“아니, 죽었다.”
웨슬러와 병사들은 마치 벤자민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 말은 부르스에게 벤자민이 죽어야 한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웨슬러와 병사들은 모두 영지 관리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알겠소.”
병사들과 이렇게 싸울 시간은 없었다. 벤자민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던 것이다. 부르스는 벤자민을 들쳐 멘 채 자신의 집으로 뛰었다.
불과 5년 전까지 자신이 모셨던 주인에게서 체계적인 치료사 수업까지 받았던 부르스는 세리아 마을의 유일한 치료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집에는 다양한 약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부르스는 그중에서 심장과 혈액 순환에 좋은 약들과 기력을 돋워 주는 약을 죄다 벤자민의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