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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다.”
약을 먹인 뒤 부르스는 벤자민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몸 상태를 수시로 살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훌쩍 흐르고 벤자민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극 정성으로 벤자민을 간호하던 부르스는 걱정스런 얼굴로 벤자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깨어날 때가 되었는데. 설마 뇌 손상을 입은 건가?”
치료사인 부르스도 아직 인간의 뇌 치료에는 자신이 없었다.
“부르스. 촌장님께서 오셨네.”
그때 옆집 아저씨가 사냥 나갔던 부친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네, 알겠습니다.”
부르스가 막 부친을 보러 나가려 할 때였다.
“으음…….”
의식을 잃은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벤자민이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부르스가 벤자민이 누운 침대로 뛰어갔다.
벤자민은 신음 소리에 이어서 몸을 움직였다. 그것을 보고 부르스는 즉시 정신을 차리는데 좋은 약재를 찾아서 벤자민에게 먹였다. 그런데 벤자민에게 먹이고 나니 그 약재가 바닥이 났다.
부르스는 벤자민에게 정신을 맑게 하는 약재가 더 필요할지 몰라서 약재 창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약재를 챙겨 집으로 들어서자 두 눈을 뜨고 누워 있는 벤자민이 보였다.

정신을 차린 벤자민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부르스는 일단 배가 고파 보이는 벤자민에게 스프를 끓여 주었다. 그 스프를 금방 먹어 치운 후 벤자민은 부르스를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지?’
왜 벤자민이 새삼스럽게 자신을 보고 놀라는지 부르스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세리아 마을의 촌장인 부친이 부르스의 집을 찾아왔다. 아들이 자신을 마중 나오지 않으니 그가 직접 부르스의 집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벤자민은 부르스의 부친인 세리아 마을 촌장을 보고서 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벤자민은 자신의 두 팔을 보고 갑자기 경악하더니 집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불쑥 거울을 찾았다. 거울은 비싸서 평민들이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연히 부르스의 집에 그런 고가의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방 안에 거울이 없자 억지로 무리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벤자민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뭘 발견했는지 갑자기 막 바닥을 기었다. 그렇게 물통으로 기어간 벤자민은 물통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고는 반쯤 넋이 나간 채 그대로 있었다.
부르스는 조심스럽게 벤자민에게 다가갔다. 그때 물통을 들여다보고 있던 벤자민이 부르스에게 물었다.
“이놈 누구야?”
“네?”
벤자민은 힘겹게 물통 옆에 앉으며 부르스를 쳐다보았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냐고?”
벤자민의 말에 부르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역시 번개에 맞고 뇌 손상을 입었구나. 여기가 어딘지 기억나지 않습니까?”
“몰라. 그러니 묻고 있잖아.”
벤자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부르스의 뒤쪽에서 세리아 마을 촌장인 부르스의 부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스. 그럼 수고해라. 나는 잡아 온 사냥감을 정리해야 해서 이만 가 보마.”
“네, 아버지. 이따 저녁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부친이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 부르스가 벤자민에게 말했다.
“바닥이 차가우니 침대로 가시지요.”
부르스의 말을 듣고 보니 바닥이 차갑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지.”
부르스가 벤자민을 부축해서 다시 침대에 앉혔다.
“잠시만요.”
부르스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약재를 섞어서 차를 끓였다. 그리고 그 차를 벤자민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는 세리아 마을입니다.”
“세리아 마을?”
잠시 생각하던 벤자민이 입을 열었다.
“혹시 레오팔트 공작령의 12곳의 영지 중 최북단에 위치한 루실 영지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마을 말인가?”
벤자민의 말을 듣고 부르스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기억이 나십니까?”
“아니.”
벤자민이 딱 끊어서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아는 것이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누군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벤자민의 말에 부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럼 상식적인 기억은 그대로인데 자신이 누군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군요. 부분적인 기억상실인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 그만하고 내가 누군지부터 말해.”
벤자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자 부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글쎄요. 저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사실 관리님은 어제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마을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시다가 쓰러지셨고 지금 깨어나신 겁니다. 제가 아는 것은 관리님의 이름이 벤자민이고 이곳 세리아 마을에 새로 부임한 영지 관리라는 사실뿐입니다.”
“벤자민? 영지 관리?”
부르스의 설명에 벤자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부르스에게 얘기를 들으며 크루거는 자신이 예전의 그의 몸이 아닌 벤자민이란 영지 관리의 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자신이 있는 곳이 사라스 제국에서도 레오팔트 공작령이란 점이었다. 비록 지금 있는 루실 영지가 크루거의 영지인 루멘스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리엔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동생 리엔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는 크루거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테베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크루거는 바로 부르스에게 물었다.
“테베스가 언제 여기에 왔지?”
“아버지와 저는 5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부르스의 대답에 크루거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뭐야? 그럼 내가 죽은 지 5년이 지났단 말인가?’
그때 크루거의 뇌리에 연옥인가에서 신비한 존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빨리 가라. 이곳에서의 1초는 지상의 열흘과 같으니.
‘빌어먹을!’
크루거의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부르스에게 계속 물었다.
“그럼 5년 전에 루멘스 영지에서 이곳으로 온 건가?”
“헉! 그것을 어떻게?”
부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자가 어떻게 그 사실을?’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부르스를 보고 크루거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5년 전에 영지 일로 루멘스 영지를 방문했을 때 너와 테베스를 본 거 같아서 묻는 거다.”
“아, 네.”
대답은 했지만 부르스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으로 크루거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혹시 그때 그곳의 영주가 나처럼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죽지 않았나?”
크루거의 물음에 부르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뭘 잘못 기억하고 계시군요. 날벼락을 맞아 죽은 루멘스 영지의 영주는 그보다 5년 전이었죠.”
‘5년 더 전? 그렇다면 내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단 말인가?’
크루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크루거가 다시 부르스에게 물었다.
“그럼 그 영주가 죽고 5년간 너와 너의 아비가 루멘스 영지에서 살았단 소린가?”
크루거의 물음에 부르스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왜 그곳에 5년씩이나 살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
크루거가 조심스럽게 부르스에게 물었다.
“그건 아버님의 약속 때문이셨습니다. 아버님께서 그곳 영주가 죽기 전에 5년간 그 영주를 모시기로 약속을 하셨다더군요.”
“뭐?”
그 말을 듣고 크루거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영주가 죽었으니 그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지 않나?”
“아버님도 베그다 님도 아가씨를 그대로 두고 떠나실 수 없었던 거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르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가씨?”
“네. 그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죽은 악질 영주에게 천사표 여동생이 있었거든요. 아버지는 죽은 영주를 대신해서 5년간 그분을 모신 거죠.”
“…….”
부르스의 말에 크루거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테베스 그자와 베그다가 리엔의 곁을 지켜 줬단 말인가? 하지만 나머지 5년은?’
크루거가 리엔에 대해 물으려 할 때였다.
덜컹!
부르스의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웨슬러와 9명의 산적들이었다.

웨슬러와 산적들은 마을 회관에서 멍청이 영지 관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벤자민이 죽었다는 말이 없었다.
웨슬러와 산적들은 이미 떠날 채비까지 다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죽었어야 할 영지 관리가 살아났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끄응. 목숨이 제법 질긴 녀석이군요.”
“그래 봐야 며칠 못 버틸 거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쩌긴,. 살아났으니 다시 여기로 데려와야지.”
웨슬러는 병사들을 이끌고 벤자민을 데리러 부르스의 집으로 향했다.
‘괜히 그놈에게 맡겼어.’
웨슬러는 당연히 벤자민이 죽을 줄 알고 부르스에게 그를 내어 주었다. 그런데 그자가 벤자민을 살려 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당시 쓰러진 벤자민을 자신이 챙겼다면 벤자민은 어제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 자명했다.
그럼 오늘 웨슬러와 산적들도 세리아 마을을 떠날 수 있었을 테고 말이다. 아쉬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었다. 벤자민을 다시 마을 회관으로 데려가서 영지 관리 일을 맡게 하는 수밖에 말이다.
그러면 어차피 이곳 마을 사람들에 의해 벤자민은 제거될 터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세금 거둘 때로군.’
실제 영지 병사 출신인 웨슬러는 영지 일에 대해 잘 알았다. 영지 관리와 같이 직접 세금을 거두러 다녔던 웨슬러였다. 그러니 누구보다 세금 거두는 시기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안 그래도 빈손으로 다른 영지로 가는 게 께름칙했는데 잘됐어.’
웨슬러는 벤자민을 이용해서 일단 이번 달 세금을 거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벤자민이 죽고 나면 그 돈을 들고 튈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 영지 관리인 벤자민이 더 필요했다.
웨슬러와 9명의 병사들은 항상 똘똘 뭉쳐서 다녔다. 안 그러면 거인들이 그들을 해칠까 겁이 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