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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아이들과 여자들을 제외하고 세리아 마을 사람들은 덩치 큰 웨슬러보다 머리 하나씩 더 컸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보다는 족히 머리 두 개는 더 크단 소리였다. 그들이 옆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병사들은 놀라 움찔거렸다.
하지만 10명이 뭉쳐 다니면 사정이 좀 나았다. 아무래도 하나보다는 10명이 든든한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웨슬러와 병사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덩치의 아이들에게 물어서 부르스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 있는 벤자민과 부르스가 보였다.
“관리님, 괜찮으십니까?”
웨슬러가 벤자민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자 벤자민이 힐끗 웨슬러를 쳐다보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네?”
“야, 이 새끼야. 나가 있으라는 말 안 들려?”
발끈하는 벤자민을 보고 웨슬러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웨슬러 뒤의 산적들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때 부르스가 나섰다.
“잠깐만요. 지금 관리님의 상태는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웨슬러가 부르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번개를 맞고 기억의 일부를 잃으신 것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
웨슬러가 여전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의 산적들은 그 말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기억이 서서히 돌아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시간은 무슨. 지금 당장 영지 관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관리님, 어서 세금부터 거두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기일 내 세금을 영지성으로 보내지 못하면 총관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웨슬러가 벤자민을 보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벤자민이 히죽 웃으며 웨슬러를 쳐다보았다.

크루거는 부르스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병사들이 집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자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것도 제일 중요한 그의 여동생 리엔에 대해 부르스에게 물으려 할 때 나타나서 방해를 했으니 단단히 화가 났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병사들이 그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대놓고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이 반응은?’
죽으려고 겁도 없이 크루거 앞에서 병사 따위가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눈앞의 병사들을 도륙해 버리고 싶었지만 크루거는 자신의 하얀 손과 밋밋한 팔뚝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부르스가 나서서 벤자민이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벤자민에게 어서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했다. 그 병사를 보고 크루거가 웃으며 말했다.
“돈 거둬.”
“네?”
“세금 거두라고.”
돈은 언제나 필요했다. 크루거일 때나 벤자민일 때가 돈은 중요했다. 크루거는 세금을 거둬야 한다고 말해 준 병사가 고마웠다.
“오늘까지 다 거둬. 세금 안 내는 자들은 다 잡아들이고. 내일 바로 재판할 테니.”
크루거의 명령에 웨슬러와 병사들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세금을 거두는 것을 그렇다 쳐도 세금을 안 내는 자들은 잡아들이라는 벤자민의 명령은 시행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사 10명이 덤비면 과연 거인 한 명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의문에 10명의 병사들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빅맨이라 불리는 소수 민족 그룬족은 모두들 전사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기를 다루는 것을 배우고 몬스터들을 사냥했다.
그런 그들은 소드 익스퍼트급 기사들과 싸워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병사 10명으로 소드 익스퍼트급 기사를 상대로 싸우면 1분도 되지 않아 병사들 모두 도륙당한다.
그러니 병사 10명으로 세리아 마을 장정 한 명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런데 세금을 내지 않은 그룬족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이라는 벤자민의 말은 한마디로 미친 소리였다.
“관리님. 지금 그 말은…….”
웨슬러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해 뭐라 반박하려 하자 벤자민이 딱 끊어서 얘기했다.
“난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가서 세금을 거둬라. 시간이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진 않군.”
벤자민이 힐끗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였고 몇 시간 후면 날이 질 터였다.
“이이…….”
웨슬러가 대놓고 이를 드러내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부르스를 힐끗 쳐다보고는 애써 화를 참으며 병사들과 같이 부르스의 집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부르스가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보아하니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흥! 기사도 아니고 병사 따위가 감히.”
그렇게 말했지만 크루거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르스의 집 밖으로 나온 웨슬러와 산적들은 벤자민의 명령을 수행하기는커녕 바로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웨슬러의 원래 계획은 벤자민을 내세워서 세금을 거두러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겨 벤자민이 이곳 마을 사람 손에 죽게 되면 그만이고, 또 세금을 거두면 거두는 대로 웨슬러와 산적들이 그것을 다 챙길 테니 그 또한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벤자민이 번개를 맞고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댔다. 당연히 그 명령을 따를 웨슬러가 아니었다. 애당초 루실 영지의 병사도 아닌 웨슬러와 산적들이 그의 명령을 따를 이유도 없었다.
“이 새끼 오기만 해 봐라.”
산적들 중 부두목 격인 프레드가 바득 이를 갈며 벤자민이 마을 회관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더군요. 오늘 아주 작살을 내 버리시지요?”
“맞습니다. 그냥 우리가 놈을 죽여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수하들의 의견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자신들의 손으로 벤자민을 고통 없이 죽여 주는 것도 웨슬러는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그날 벤자민은 그날 마을 회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적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벤자민은 그들이 나가고 나자, 부르스를 따라 세리아 마을의 촌장을 만나러 갔다.
가는 도중 부르스는 의아한 얼굴로 벤자민을 힐끗 쳐다봤다.
‘아버지 이름을 어떻게 저자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말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르스는 벤자민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5년 전에 자신과 부친을 봤다는 벤자민의 말도 좀 이상했다.
당시 테베스와 베그다, 그리고 부르스는 루멘스 영지에 있지 않았다. 리엔이 결혼을 해서 5년의 마지막 1년은 레오팔트 공작 성에서 살았던 것이다. 부르스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데도 크루거는 그냥 무시했다.
지금의 크루거는 힘없는 영지 관리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옛 힘을 되찾아야 하겠지만 그때까지 성질을 죽이고 살 필요가 있었다.
부르스가 크루거를 데리고 간 곳은 사냥에 나갔던 세리아 마을 사냥꾼들이 잡은 짐승과 몬스터들의 가죽을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아버지!”
그때 부르스가 사냥꾼들이 벗겨 낸 가죽을 차곡차곡 수레에 싣고 있던 테베스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부르스를 발견한 테베스가 가볍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다가 부르스 옆에 영지 관리를 발견하고 손을 내린 후 그쪽으로 걸어갔다.
“마을 촌장이신 제 아버님이십니다.”
부르스가 테베스를 크루거에게 소개했다.
‘나란 것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크루거는 자신이 누군지 테베스에게 밝힐까 하다가 일단 참았다.
‘너무 위험하다.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은 내가 예전의 힘을 되찾고 나서 하는 것이 좋겠어.’
악질 영주 소리를 듣던 크루거였다. 자신이 더 이상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확실히 올바른 선택은 아니었다. 그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테베스요.”
테베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두 배는 됨직한 테베스의 투박하면서도 큰 손을 쳐다보며 크루거는 자신의 하얀 손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상대가 청해 온 악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척!
“크루… 아니, 벤자민이다.”
악수 후 테베스가 크루거에게 말했다.
“아까 보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괜찮소?”
“괜찮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요?”
“뭐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다.”
“어허, 나 같은 놈에게 관리님께서 뭘 물으시려고 이러시나?”
크루거는 자신의 여동생인 리엔에 대해 테베스에게 물으려 했다. 크루거가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사로잡아 온 오우거가 사라졌습니다!”
그룬족 전사가 다급히 달려와서 촌장인 테베스에게 보고했다.
“뭐? 오우거가 사라져?”
테베스가 놀라며 주위 그룬족 사냥꾼들에게 외쳤다.
“어서 그놈을 찾아라!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발견하는 즉시 제거해.”
“네!”
그룬족 사냥꾼들이 우렁차게 대답한 후 사방으로 흩어졌다. 테베스와 부르스 역시 그들과 같이 움직였다.
“어이!”
크루거가 소리쳤지만 두 부자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이런 젠장!”
쫓아가려 해도 그의 부실한 다리로는 어림도 없었다.

사로잡은 오우거가 탈출했다는 소식은 곧 마을 회관의 비상종을 통해 마을 전체에 알려졌다.
땡! 땡! 땡!
“헉! 오우거라니!”
마을 회관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웨슬러와 산적들은 마을 회관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이때 크루거는 투덜거리며 부르스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크루거는 현재 이곳 세리아 마을에서 부르스의 집 이외는 아는 곳이 없었다. 그러니 일단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마을 외곽에서 산딸기를 따서 마을로 오던 그룬족 두 여자가 있었다. 비상종 소리를 듣고 황급히 마을로 뛰었지만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제법 많이 지체된 상태였다.
하지만 마을 근처까지 온 터라 두 여자는 열심히 딴 산딸기 바구니를 내려놓고 가뿐 호흡을 골랐다.
“헉헉! 세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제 곧 마을이야.”
“헥헥! 도대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비상종을 쳤지?”
“그야 가 보면 알겠지.”
그녀들이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산딸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다시 일어섰을 때였다.
크르르르!
풀숲에서 거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풀숲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실루엣 하나가 튀어나왔다.
3미터는 됨직한 키에 회색 털에 우람한 근육이 꿈틀대는 오우거가 바로 그 실루엣의 정체였다. 녀석의 머리통 옆으로 쫙 찢어진 입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 입이 컸다.
“아악!”
무섭게 생긴 오우거를 보고 두 여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오우거가 화가 난 듯 괴성을 터뜨렸다.
크어어어!
녀석의 핏발 선 눈에는 분노의 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자신을 사로잡은 인간들 때문에 제대로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위치가 크루거가 있는 곳 근처였다. 크루거는 여자의 비명 소리와 오우거의 괴성을 듣고 바로 그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직 자신이 크루거가 아닌 벤자민이란 사실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드 마스터였던 크루거에게 오우거는 별거 아닌 존재였다. 그러니 크루거는 일고의 망설임 없이 오우거가 괴성을 내지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