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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1화



1. 재회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여 찾아간 선임의 호프집에 도착한 시각은 이미 2시를 넘긴 새벽이었다. 건물 옆으로 난 골목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해 놓고, 가게로 들기 전 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폐 안에 든 연기를 한 숨 크게 뱉어 내고, 회색으로 탄 재를 바닥으로 털어 냈다.
문득 안쪽에서 인기척이 일며 벌컥 문이 열렸다. 성범은 무심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 옆에 밝혀 놓은 붉은 등 탓에 슬그머니 시려 오는 눈을 찡그렸을 때, 안에서 표준 체형의 남자가 나와 술 궤를 내놓는 것이 보였다.
웃차. 공병이 가득 찬 궤짝을 끌어다 문 옆으로 쌓아 놓은 남자는 탁탁 손을 털며 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다 태운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 낸 후 발밑 시멘트 바닥으로 내던졌다. 짧은 연기를 토해 내며 사그라지는 꽁초를 보던 시야에 문득 낯선 흰 운동화가 들어왔다. 얼마 전 세탁을 한 듯 깨끗했으나 꽤나 오랜 시간을 신은 것처럼 낡은 운동화였다. 그 위를 툭툭하게 덮은 바짓단 또한 단정했지만 오래되어 낡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추운 날씨 탓에 남자가 뱉은 입김이 하얗게 얼며 공기 중으로 번졌다.
“후우, 더럽게 무겁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얼핏 고개를 들어 올린 성범은 때마침 스트레칭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박진만이냐?”
“……임성범?”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뜻밖의 만남에 놀란 것은 성범도 마찬가지였다.
하.
헛웃음을 뱉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실로 몇 년 만에 보는,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자신을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진만에 대한 기억 중 그나마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대부분 즐겁거나 기쁜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진만은 밝고 명랑한 제 행동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가련한 분위기를 풍겼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그러는 척하는 것인지 늘 웃는 얼굴로 다니는 진만이었으나, 그의 가정사를 모를 리 없는 동네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늘 안됐다는 눈빛을 꺼내곤 했다. 특히 그런 시선은 녀석의 엄마와 알고 지내던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졌는데, 꾸벅 인사를 하는 진만에게 그네들은 항상 고생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건네곤 했던 것이다.
그날은 억지로 옷을 차려입은 성범이 엄마와 함께 장에 나선 날이었다. 겨울임에도 장터 구석구석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서로 간에 어깨를 비비며 느린 걸음을 걷고 있었다. 파란색이며 주홍색으로 친 차양 아래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물건을 팔러 나온 장꾼들이 저마다 큰 소리로 흥정을 해 댔다.
알싸한 찬바람과 함께 흘러든 근처 어물전의 비릿한 내음에 성범은 언 손을 들어 코를 쓸었다. 무엇 하나 멋스러울 것 없는 시골 장은 왁자하고 지저분하기만 했다.
“그 집 아들내미는 언제 봐도 잘났다니까?”
인사치레 건네지는 덧없는 한마디에 엄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시골 장을 돌기엔 퍽 부담스러운 털 코트를 꺼내 입은 그녀는 장마당에서 으레 오가는 자식 칭찬에 잔뜩 콧대를 높이며 흐뭇해했다. 아들 자랑으로 낯을 세우고 싶었던 모양인지, 아침부터 유난을 부리며 닦달해 댄 엄마 덕에 성범은 성미에 맞지 않는 장돌기에 끌려 나온 참이었다. 집에 붙어 있느니 장바구니라도 들라며 성화를 해 대는 통에 억지로 나오긴 했지만 내리 하품만 나올 뿐이었다.
“보리밥네 막내는 서울로 대학 가야지?”
“어휴, 이 녀석이 성적이 좋기는 한데…….”
찬 날씨에 얼어 버린 홍시를 내놓던 과일전이 포문을 열었고, 때를 만난 듯 두 사람의 수다가 이어졌다.
성범은 찍 하품을 하며 곁에 있던 난로로 손을 뻗었다. 타탁 소리를 내며 전기난로에 불이 올랐다.
“되게 춥네.”
입고 있던 코트를 한껏 여미고, 서서히 붉어지는 난로를 내려다보며 추위로 시큰해진 코를 훌쩍였다. 짙은 청색 코트는 잘난 아들 좋은 옷 해 입혀야 어디 가서 기 안 죽고 산다며 일전 서울 나들이에 엄마가 사다 준 것이었다.
“보리밥집네는 좋겠어, 이런 번듯한 아들 둬서.”
“에이, 그냥저냥 변변한 자식 하나 안 둔 집이 어디 있다고 자꾸 그래.”

난로 앞에서 불을 쬐는 성범을 보며 던진 과일전의 말에 빈말 말라는 엄마의 손사래가 이어졌다. 짐짓 아닌 척 즐거워하는 제 어미의 모습에 성범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작 자랑 대상인 아들은 일찌감치 방치해 두고, 그녀는 여기저기서 한마디씩을 거드는 와글와글한 수다에 열을 올리기가 한창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범의 지루함 또한 덩달아 커져 가고 있었다.
무료함에 지친 성범은 뻐근한 목을 뜻 없이 휘이 돌렸다. 제대로 못 자고 나와서인지 어깨가 묵직하고 피곤했다.
적당히 좀 하고 그만 가면 안 되나.
입에서 한숨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긴 지루함에 내려앉은 어깨를 바로 펴며 문득 시선을 돌렸고, 멀찍이 장거리 구석에 앉아 삶은 고구마를 팔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진만…….”
“응?”

무심코 터뜨린 말에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성범은 ‘아냐.’ 하며 곧바로 머리를 내저었다. 난로에 뻗었던 손을 거두고 고구마를 팔고 있는 진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진만이 자리를 깔고 앉은 곳은 장터 끝머리의 길가였다. 가까스로 차도를 피해 자리를 차지한 진만은 변변한 의자 하나 없이 얇게 찢어 깐 박스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었다.
좌판에 늘어놓은 고구마는 멀리서 보기에도 형편없이 바짝 말라 있었는데, 그걸 팔아 보려는 심산인지 간간이 ‘고구마 좀 사세요.’ 하고 외치며 나름대로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길만 건너면 드럼통을 잘라 만든 불가마에서 뜨뜻하게 고구마를 구워 파는 군고구마 장수가 있었음에도, 상인조합에 끼지 못한 진만은 어쩔 수 없이 그와 가까운 한길 쪽으로 자리를 잡은 듯했다.
“나 저기 좀 갔다 올게.”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이르며, 성범은 진만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일찍부터 수다에 정신이 팔린 엄마는 ‘응.’ 하고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번잡스러운 인파를 헤치고 고구마를 파는 박진만 앞에 다가가 섰다. 변변치 않은 입김으로 손을 녹이고 있던 진만은 갑작스레 드리워진 그림자에 눈을 찌푸리며 성범을 올려다보았다.
“너 여기서 뭐하냐?”
돌연 다가와 내던진 성범의 질문에 진만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을 굴리는 표정으로 보아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긴, 하필 같은 반 놈에게 들킨 것이 창피할 수도 있겠지.
진만은 딱 보기에도 제 몸엔 커 보이는 낡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는데, 성범의 눈에 굉장히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눈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야 그 바람막이가 지난겨울 불우 학우를 돕자며 벌였던 헌 옷 모으기 행사에 자신이 냈었던 옷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저놈한테로 갔나.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은 모습만 보니 녀석이 평소 어떤 옷을 입는지는 성범으로서도 알 길이 없기는 했다. 중학 시절 내내 입었던 터라 낡기도 낡고 작기도 작아 쓰레기 처리하는 셈 치고 낸 옷이었는데, 진만이 헐거운 듯 여며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쪽에서부터 왜인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야, 좆만이. 대답 안 하냐?”
재촉하며 묻자, 앞선 질문에 대답 없이 눈만 내리깔던 진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보면 모르냐, 고구마 팔고 있잖아.”
“너네 할머니는?”

입보다는 눈으로 웃음을 지어내는 편인 박진만은 예의 그 눈웃음을 씁쓸하게 내보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평소대로라면 고구마든 옥수수든 남들이 사지 않는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은 녀석의 할머니여야 했다. 번화한 곳이라곤 장이 서는 골목 몇 개가 전부인 동네에서, 날이 덥든 춥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늘 그의 할머니였다.
박진만네 쌀독 사정이야 온 동네가 빤히 알 정도로 훤한 것이었고, 그 형편을 알기는 성범도 마찬가지라 오가는 길에 고구마를 사들인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토록 가난한 살림이었다.
“……할머니는 몸이 좀 아파서.”
성범은 목도리에 턱을 파묻으며 진만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튼 진만의 얼굴이 쌀쌀한 겨울바람을 무방비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장갑도 끼지 못한 손은 발갛게 터서 부었고, 입술마저 건조함을 못 이겼는지 말라 뜯겼다. 한눈에도 녀석의 외양은 딱히 건강해 뵈지 않았는데, 그간 불어온 바람에 얼었던지 제대로 손가락을 놀리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넌 장갑도 없냐?”
얼굴을 구기며 묻는 말에, 양쪽 눈을 들어 올리며 어리둥절해하던 진만은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무릎 위의 손을 접어 가렸다. 이를 꾹 다문 채 애써 웃음을 짓는 입술에선 희게 뜬 껍질 사이로 피가 새고 있었다. 다시금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군고구마 장수가 바로 앞에 있는데 다 말라빠진 고구마가 잘도 팔리겠다. 불쌍해 보여서 사 주려다가도 먹기 싫어서 안 사겠다, 인마.”
무뚝뚝하게 내뱉는 말에 진만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구겨졌다. 어깨가 살짝 떨리는 듯도 했는데, 창피한 건지 분한 건지 이렇다 할 내색도 없이 묵묵하게 시선을 내려 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뭐, 어쨌든 많이 팔아라.”
학교에서 흔히 진만을 부르는 별명을 입 밖으로 던져두고, 성범은 이내 등을 돌렸다.

“좆만이…….”
제 앞에서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는 얼굴 위에 어린 시절의 얼굴이 겹쳐 보였고, 성범은 저도 모르게 그 같은 말을 뱉어 냈다.
“야, 지금 지난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까지 좆만이냐?”
오랜만에 듣는 옛 별명이 낯설기라도 한 듯 진만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몇 년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인상에 성범은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쩐지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랐다.
조금은 더 자란 듯해 보이는 키에, 몸에 딱 맞는 옷과 신발, 밝은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는 흘러간 세월 딱 그만큼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살다 보니까 널 여기서 다 만나네. 잘 지내냐?”
문 앞에서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은 바람을 피해 호프집 안으로 몸을 옮겼다. 사실 따지고 보면 썩 반갑지만은 않은 인연이었다. 둘은 함께 학교를 다닐 당시에도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진만은 수능이 끝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춘 녀석이었다. 이렇듯 우연히 마주치기 전까지 내내 그를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그럭저럭 잘 지내지. 너야말로 잘 지냈냐? 너 그때 갑자기 잠적했잖아, 수능 전에. 그 뒤로 어떻게 살았냐.”
성범은 진만이 형식적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고 건성으로 흔들며 대답했다.
술짝을 내놓는 것도 그렇고,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걸로 보아 진만은 호프에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감색 바탕에 연두색 글씨로 촌스럽게 소주 이름이 프린트된 앞치마 주머니엔 기껏해야 원가 몇백 원일 것 같은 볼펜이 주문지와 함께 꽂혀 있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일이 있었지.”
우연한 만남이 으레 그렇듯 두 사람은 가게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서 알맹이가 빠진 대화를 주고받았다. 몇 차례 사소한 질문과 빤한 답변이 오갔다.
슬며시 이마를 긁적이는 진만의 행동으로 보아, 몇 년 새 짧은 몇 마디 말로는 다 풀지 못할 많은 일이 있었을 거란 짐작을 할 뿐이었다. 수능 전 그 겨울 이후 벌써 꽉 채운 6년이 지나 있었다.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그만큼의 사연을 쌓아 올렸을 터였다.
가게 안 히터의 열기에 조금 답답함을 느낀 성범은 손에 낀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혼자 사냐?”
“뭐, 그렇지.”
이번에도 역시 시원치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성범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렸다.
“하긴, 넌 별다른 친척도 없었다고들 했으니까. 원양어선 타러 갔다느니, 나이트에서 삐끼 하고 있는 걸 봤다느니 하는 소문은 많이 돌았지.”
“아아…… 그런 소문이 났어?”
진만은 몰랐다는 목소리로 말을 흐리며 물었고, 성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뭐, 이렇게 서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일단 자리 좀 잡고 앉을까?”
영양가 없이 어정쩡하게 길어지는 대화가 불편했던지 진만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일하는 중이었으니 길어지는 이야기가 부담이 됐을 터였다.
“너 누구 만나러 온 거 아냐? 약속 있어서 온 걸로 보였는데.”
“아아―, 여기 임이 형.”
진만으로서는 자리를 벗어나고자 던진 질문이었으나, 성범은 뜻밖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성범이 임이 형이라고 지칭한 이는 그곳 호프의 사장이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놀란 듯 진만의 눈썹이 이마 위로 불쑥 솟았다.
“너 우리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냐?”
“임이 형이 내 군대 선임이었어.”
“뭐…….”
성범의 말에 진만은 이내 얼굴을 파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임과의 일면식을 소개하고자 할 때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선 임. 이름이 선임인 탓에 그는 군대에서도 어지간히 놀림을 받곤 했다. 성범은 그나마 임의 후임이었기에 충격이 덜했지만, 임이 이등병이던 시절엔 후임 주제에 이름이 선임이라고 괴롭힘도 많이 당했다고 들었다.
“안 그래도 그 소리는 들었는데. 이름이 그래 놔서 엄청 욕먹었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군 생활 땡보로 한 것 같긴 한데…….”
“뭐, 그렇긴 하지. 말년 병장 때도 저렇게까지 놀고먹는 인간은 처음 본다고 유명하긴 했어.”
“그래, 분명히 그랬을 것 같다. 아, 이 고양이도 임이 형 제대할 때 같이 전역한 놈이야.”
진만은 어느새 다가와 제 발목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성범은 그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어째 어디선가 짬내가 나더라니.”
하얗고 누런 점박이의 몸집이 퉁퉁한 고양이는 느긋하게 눈을 올려 성범을 노려보더니 진만의 다리 사이를 돌아 나가며 걸음을 옮겼다.
냐아.
나른한 울음을 놓으며 고양이가 종종걸음으로 가게 안쪽을 향했다. 임이 느릿하고 게으른 걸음으로 주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 성범이 왔냐. 명함 주고 혹시나 했는데 진짜 바로 왔네?”
제게 달려오는 고양이를 번쩍하고 안아 든 임은 반가운 듯 성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러 간 친구 놈들도 죄다 병신 같은 놈들뿐이라 그냥 빠져나왔어요. 형이 자신 있게 가게에 오라고 하길래 좀 기대했는데……. 뭐, 장사 잘 안 되네?”
악수를 청하는 임의 손을 보지 못한 듯 성범은 크지 않은 규모의 가게를 훑으며 말했고, 임은 내밀었던 손을 걷어 성범의 어깨를 한 대 쳤다.
“아.”
“새끼, 돌려 말할 줄 모르는 건 여전하네. 어쨌든 들어와서 앉아라. 뭐 좀 먹을래?”
“아뇨, 먹고 왔어요. 돼지 같은 놈들이 처먹긴 드럽게 처먹어서…….”
성범은 임이 안내한 소파에 몸을 기대며 곁에 선 진만을 올려다보았다.
“아, 너도 재형인 알지? 같이 학교 다녔으니까. 방금 그 새끼랑도 같이 있었다.”
“재형이…….”
성범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던 진만은 이내 생각났다는 듯 “아아.”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임은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범과 진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 너네 둘이 아는 사이냐?”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만이 둘의 사이를 설명할 마땅할 말을 찾으며 머리를 굴렸으나 먼저 말을 뱉은 쪽은 성범이었다.
“우리 집 도우미 하던 아줌마 아들이에요, 이 새끼.”
“뭐…….”
찰나간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성범의 말에 움찔한 것은 진만뿐만은 아니었는지, 임이 조심스럽게 진만의 표정을 살폈다. 말문이 막힐 법한 민망한 소개에 임은 성범을 향해 꾸중의 시선을 던졌다.
“야, 인마. 넌 도대체가 무슨 말을…….”
“맞아요. 우리 엄마가 임성범네 집에서 꽤 오래 일했어요. 한 2년 했지,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땐 얘네 집이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집이었다니까요.”
언짢아진 임이 성범을 나무라려는 듯 입을 열자, 진만이 서둘러 막아서며 성범의 말을 긍정했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소파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싸가지 없는 도련님 말투도 여전하긴 하네요. 형도 알긴 하죠? 얘 말투가 어떤지.”
임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진만은 다시 희게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형, 뭐 갖다 드릴까요?” 하고 버석한 주문지를 들췄다. 그의 유한 대처에 그럭저럭 일단락되었지만, 임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만이 둥글게 잘 넘어가는 녀석이었기에 망정이지 보통의 사내새끼들 성격이었으면 주먹질이 오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임은 내키지 않는 손길로 제 품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래. 골라 봐라, 임성범 니가 먹고 싶은 걸로. 술 한잔할래?”
“그냥 차 한 잔 주세요. 어차피 장사도 끝물이잖아요. 곧 끝날 것 같은데.”
성범의 말에 임은 간단하게 끓인 차 두 잔을 진만에게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게 김이 오르는 찻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성범은 고개를 까딱하며 진만에게서 잔을 건네받았다.
크지 않은 규모의 가게라 직원은 한 사람뿐이었다. 손님을 본다며 곧바로 자리를 뜨는 진만을 바라보며 성범은 막 끓여 낸 뜨거운 차를 입에 댔다.

임과 그간 못 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마지막 손님들이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흘긋 살핀 낌새로 보아 호프는 슬슬 마감을 할 분위기였다.
“가게 언제 접어요?”
성범은 테이블을 정리하는 진만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왜, 나 끝나고 술 한잔하게?”
“아뇨, 이만 가려고요.”
섣부른 기대에 “그럼 이쯤에서 접을까.” 하고 일어서던 임은 성범의 얄짤 없는 대답에 김샜다는 듯 콧바람을 흘렸다.
“새끼, 정 없는 것도 여전하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추스르고 앉으며 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범은 가게 저편의 진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박진만.”
술상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던 진만이 고개를 꺾어 성범을 돌아보았다.
“넌 언제 끝나냐?”
그는 흘긋 시계를 살폈다. 몇 시나 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듯 눈썹을 찌푸리던 진만은 이내 임을 바라보았다. 딱히 정해진 퇴근 시간은 없는 듯 사장의 허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쥔 손을 앞뒤로 내저었다.
“그래, 진만인 이제 가 봐라.”
허락이 떨어지고, 앞치마를 허리에서 풀어내 옷을 챙겨 입는 진만을 보며 성범도 벗어 두었던 코트를 손에 들었다. 시원시원한 동작으로 목도리를 둘러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엔 친구들 데려와서 가게 좀 흥하게 해 줄게요.”
카운터에 앉아 마감 작업을 하는 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성범은 진만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훅 얼굴을 덮치는 찬바람에 귀가 얼얼했다.
“넌 집이 어디냐? 차 있으니까 태워 줄게.”
잘 들어가라는 어정쩡한 인사를 준비하던 진만에게 성범이 불쑥 말을 건넸다. 우연한 만남에 어색하게 이어지는 헤어짐이었고, 그래서 더욱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려웠던 진만은 예상 못 한 제안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뭐…… 그럼 나야 고맙지. 집이 꽤 먼데, 괜찮겠어?”
성범은 대수롭지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발걸음을 옮겼다. 진만이 느린 걸음으로 뒤따랐다. 삑 소리와 함께 차 잠금장치가 풀리고, 진만이 넉살 좋게 먼저 문을 열고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