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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군대는 갔다 왔고?”
“어, 인제로.”
“어지간히도 빡센 데에 있었네.”
성범도 진만도 딱히 낯을 가리며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진만이야 워낙 사교성이 좋아 친화력이 몸에 밴 성격이었고, 성범도 입이 좀 걸다 뿐 말이 없는 성격은 아니었다. 어릴 때 알던 사이라 그런지 둘의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지난날의 처지를 꽤나 자세히 알고 있는 동창이기 때문일 터였다.
차가 교차로에 잠시 멈추고 진만은 창문에 팔을 기댄 채 도로를 바라보았다. 신호등 불이 주황색으로 바뀌었고, 곧 초록색 좌회전 신호가 떴다. 성범은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돌렸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미끄러지듯 맞은편 도로로 진입했다.
“……엄마는 찾았냐?”
대화가 끊긴 후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불쑥 성범이 물었다. 몰려오는 피로에 잠시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진만은 질문보다는 목소리에 먼저 반응하여 퍼뜩 성범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의 말을 되짚어 보고 나서야 성범이 엄마에 대해 물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대답은 짧았다. 사실 찾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가끔씩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나, 이사를 할 때, 여권을 만들 때 필요한 서류를 떼어 보고 나서야 제 이름 위에 올라 있는 엄마의 흔적을 발견하곤 했을 뿐이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성범이 궁금해할 만한 수년 전 이야기를 전했다.
수능을 앞두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의지할 곳이 마땅히 없던 진만은 자주 만나지 않던 고모 댁에서 잠시 몸을 의탁했다. 한 달 정도 그곳에서 지냈지만, 고모 집도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지라 진만은 곧 그곳을 나와 독립을 해야만 했다.
다른 말은 없었지만 성범은 고모란 사람이 진만에게 딱히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일을 다녔다고 했다. 처음엔 고달팠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할머니와 둘이서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던 때보다는 차라리 제 한 몸 건사해 혼자 사는 게 더 나았다고 말했다. 얼마 받지 못하는 벌이라도 보조금보다는 훨씬 나아서, 일할 수 있는 처지가 참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며 노인네 같은 소리도 내뱉었다.
“……하나같이 뻔하네.”
“뭐?”
“니 인생 얘기. 어떻게 그렇게 드라마에서 본 것같이 예상을 안 벗어나는지.” 그간의 사정을 전해 들으며 묵묵히 운전을 하던 성범이 불쑥 그렇게 입을 열었다.
“한겨울에 얇게 입고 다니는 거하며, 입술 다 터 가지고 다니는 꼴하며, 너는 정말 어떻게 그렇게 여전할 수 있냐.”
“……뭐라고?”
운전을 하면서도 흘긋흘긋 눈을 돌린다 싶더니 진만의 차림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범은 한쪽 팔을 뻗어 오버헤드 콘솔을 열더니 달그락거리는 무언가를 집어 진만에게 건넸다.
“이거 좀 써라.”
뻔하다느니, 여전하다느니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말을 읊는 태도에 표정을 굳히던 진만은 얼떨결에 성범이 건넨 물건을 받아 들었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값싼 입술 보호제였다.
“뭐 샀더니 주더라. 그거라도 좀 바르고 다녀, 새끼야. 그런 거 하나 살 돈도 없는 건 아닐 텐데, 넌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거냐?”
갑작스럽고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진만은 그것을 잠자코 받았다. 비싼 물건도 아니고, 이미 한 번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것이니 부담되는 것도 아니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으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진만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거냐? 진짜 멀리도 산다.”
먼데 괜찮겠냐는 말로 양해를 구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뒤늦게 와서 불만이었다.
“넌 왜 이 동네까지 알바 다니냐? 거긴 일 없어?”
“원래는 금호동에 살았는데, 재개발한다고 나가라 그래서 나왔어. 마침 이사할 즈음해서 아는 형이 알바 할 생각 없냐고 물었는데, 그 형 친구가 선임 형이야. 마침 나도 알바 구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안 할 이유도 없었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퉁명스러운 성범의 질문에도 진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적당히 거절도 좀 하고 살아, 새꺄.”
“뭐,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일 끝나면 버스도 지하철도 다 끊길 거 아냐.”
“보통은 첫차 시간까지는 영업하니까.”
어지간히 해라. 진만이 연달아 말을 받아치며 제 처지를 옹호하고 나서자 성범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다른 일 알아볼 생각은 하고 있어. 언제까지 밤일을 할 수도 없는 거고.”
“…….”
“여기서 세워 주라.”
진만의 말에 길옆으로 차를 세운 성범은 고개를 숙여 차창 밖의 동네를 살폈다. 경사 높은 허름한 달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도심 한가운데선 잘 보이지 않는 전봇대며 오래된 시멘트 계단이 여기저기 비죽 솟은 곳이었다.
“하, 정말 여전하네. 궁상으로 사는 것도.”
안전벨트를 풀고 문손잡이를 당겨 잡던 진만은 성범의 말에 멈칫 몸을 굳혔다. 이내 조용히 몸을 틀어 성범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진만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달칵, 차 문을 열었다.
“너도 입 굴리는 건 여전하네.”
“그렇다고들 하더라.”
진만에게서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성범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줄곧 감정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어쨌든 고맙다, 간다. 진만은 상한 제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가까스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성범은 다시 운전할 준비를 하며 변속 레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차 밖으로 발을 내리는 듯싶던 진만이 다시금 길고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야, 임성범.”
그저 얌전히 집에 들어가기엔 진만의 기분은 이미 꽤나 언짢아져 있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줄곧 내리누르던 충동이 뒤늦게 진만을 부추겼다. 망설이길 잠시, 이내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진만이 물끄러미 성범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가자니 영 찝찝해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뭘.”
“넌 정말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냐?”
뭐가. 차 밖으로 몸을 내리다 말고 갑자기 자신을 노려보는 진만의 말에 운전대를 고쳐 잡던 성범이 되물었다.
“뻔하다느니, 여전하다느니, 궁상이라느니……. 그래, 내가 니 말버릇 몰랐던 것도 아니고 기분 나빠도 좋게 참을 수 있다 치자. 그런데 나는 그냥 좀 궁금해서. 어떻게 넌 그 나이 먹고서도 말이라고 나오는 대로 다 뱉을 수 있냐? 남이 궁상으로 사는 건 잘 봐도 스스로 철 안 드는 건 못 보는 거냐?”
잠자코 듣고 있던 성범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까도 그랬어, 그냥 동창이라고만 말했어도 되는 거 아니었냐? 굳이 그 상황에서?”
뜬금없는 대화 전개에 진만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던 성범은 이내 그가 종전 선임에게 둘 사이를 설명할 때 담았던 말을 도마에 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당시에는 잘 넘어가더니 이제 와 뒤늦게 따지나 싶어 성범은 못마땅한 눈으로 진만을 흘겼다.
“하, 정말 뒤끝 한번 뜬금없는 데서 튀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야, 박진만. 넌 니가 뭐라고 생각하냐.”
“뭐?”
“내가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니네 엄마가 우리 집 도우미 일 했던 건 맞지 않냐? 니가 니 엄마 아들인 건 사실이잖아. 설마, 자식 버리고 도망간 사람은 내 부모도 아니다, 뭐 이런 생각인 거냐?”
호프집 문 앞에서 진만과 조우한 성범은 동창이기에 앞서 장날에 고구마를 팔던 진만의 모습을 먼저 기억해 냈다. 그런 진만을 눈앞에 두고 그의 엄마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범은 지난날 민망한 듯 웃으며 제게 고구마를 팔고 있노라 대답하던 어린 얼굴을 상기하며 말을 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 진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창피했냐? 그런데 너 그런 거 없었잖아. 옛날부터 다른 놈들 시다바리 노릇은 다 해 주고 다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없던 자존심이 생기기라도 한 거냐?”
진만의 앙다문 입술이 더욱 꾹 눌려 닫혔다. 노려보는 눈빛이 드세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짜증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은 성범은 그런 진만의 눈빛을 피해 정면으로 고개를 틀었다. 진만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말을 말아야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굳이 못 참고 이런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다.”
“그러게.”
“하.”
무신경하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진만의 말을 긍정하는 성범의 행동에 진만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찼다. 입안에서 계속해서 말이 헛돌았다.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 냈다.
“어쨌든 태워 줘서 정. 말. 고맙다.”
부러 비꼰 말을 던져 놓고, 진만은 차 밖으로 몸을 내렸다. 탁, 문이 닫히자 성범은 곧바로 액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
“어이없네.”
핸들을 억세게 움켜잡으며 성범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이드미러로 살핀 길가에 진만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서서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점점 멀어져 사라지자, 시선을 거둔 성범의 미간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히터 때문인지 목이 답답했다.
2. 박진만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에, 진만은 힘들게 손을 뻗어 핸드폰 알람을 껐다.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이불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렴풋이 들어오는 빛에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날이 추워지고부터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주 곤욕이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이불을 걷어 내고 쭉 기지개를 켰다.
자는 사이 웃풍이 스며들었는지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잔 얼굴이 찼다. 전기장판에 데워진 등만 뜨거울 뿐이었다. 한겨울 단칸방 공기의 건조함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차게 쏟아지는 물로 얼굴이며 목과 귓바퀴를 적시고 분홍색 싸구려 비누로 번들거리는 거품을 빚어냈다. 미끄덩거리는 비누가 얼굴에 묻어났다.
물로 헹구어 거품을 걷어 낸 후 고개를 들자, 정면 거울에 비눗기 하나 없이 뽀드득한 얼굴이 비쳤다. 까끌까끌한 수건을 목에다 걸친 채 욕실을 나섰다.
닫아 놓은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샜다. 몇 번의 장마와 몇 번의 겨울을 지난 탓에 울어 뜬 창가의 벽지가 위잉, 바람 괴는 소리를 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문풍지를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을 나서며 들이켠 바깥 공기는 제법 상쾌했다. 밤새 돌아다닌 건지 서리를 맞은 고양이 한 마리가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서는 진만의 앞으로 날쌔게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진만은 괜히 머쓱해져 뒷머리를 쓸었다. 같은 고양이라지만 가게 안을 어슬렁어슬렁 돌며 살을 찌운 나비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열쇠를 가방 안에 챙겨 넣고 바람을 피해 손을 넣은 외투 주머니 안에서 문득 동글동글한 물건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지난번 만남에 성범이 건넨 입술 보호제였다. 손에 잡힌 물건을 주머니 밖으로 빼 들고 진만은 가만히 성범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
곧고 짙게 뻗은 잘생긴 눈썹 아래서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이 진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운 감색의 체육복 저지에 턱을 숨긴 채, 성범은 제 가슴팍에 어깨를 부딪고 놀라 뒤를 도는 진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은편 줄에서는 이미 순서를 바꿔 잡은 재형이 냅다 공을 날린 참이었다.
막무가내로 내던져진 공은 구역을 이탈할 기세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열을 맞춰 체육 수업을 듣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공에 모였고, 어느 순간 하늘로 불쑥 솟은 손 하나가 거칠게 날던 공을 탁, 하고 받아 내었다.
때마침 체육관 창으로 들던 햇빛이 산란되며 길게 고리를 그었다. 고개를 들어 공을 좇던 진만은 시려 오는 눈을 슬쩍 찌푸렸다.
커트된 공은 머리 위로 뻗은 손 안에서 핑그르르 돌다가 다시 한번 하늘로 튕겼고, 이내 성범의 손안으로 안착했다. 유리창에 굴절된 빛이 곧은 손가락으로 받친 하얀 공 위에 부서져 흩어졌다.
“…….”
단단한 성범의 가슴이 진만의 어깨를 지탱하고 서 있었다. 공을 잡은 긴 손과 손목, 팔꿈치 위로 걷어 올린 체육복 소매, 그리고 그 아래 길쭉하고 단단하게 뻗은 팔뚝까지. 하나하나가 차례로 진만의 시야에 들어왔다. 귓가에선 어렴풋한 숨소리가 들렸다.
“안 비키냐?”
어깨를 부딪친 후 바짝 붙어 버린 진만 때문에 머리 위로 받아 낸 공을 내리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들고 선 성범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만은 ‘어, 미안.’ 하고 말하며 서둘러 몸을 틀었다.
테이프를 늘린 듯 슬로모션으로 진행되던 상황이 성범의 한마디를 신호로 빠르게 제 리듬을 되찾았고, 진만은 다시 걸음을 추스르며 맨 뒷줄로 향했다.
커다란 존재감이었다. 성범은 어려서부터 늘 사람의 중심에 있었다. 여태 흐릿했던 기억이 색을 입힌 듯 선명해져 돌아왔다.
진만은 가만히 내려다보던 물건의 뚜껑을 열어 제 입술에 발랐다. 텁텁한 립밤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너 박진만 기억하냐?”
재형이 얹혀살고 있는 큰집에서 성범은 일주일에 두 번, 재형의 사촌동생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재형은 워낙 말주변도 없고 게으른 터라 사촌동생의 과외를 부탁하는 숙모에게 제 친구 성범을 추천한 것이었다.
처음 한두 번 봐주던 것이 바로 치러진 중간고사에서 효과를 보자, 성범의 과외 실력에 대한 입소문이 퍼져 어느새 수업은 여럿이 함께하는 그룹 과외로 변해 있었다.
직설적인 성범의 성격은 아이들을 통제함에 있어서도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가 꽤 좋은 편이었다.
학습 효과와 학벌이 더해져 성범은 그룹 과외로 꽤나 쏠쏠한 수입을 벌었다. 가끔씩 졸업한 선배가 부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다른 부수입까지 함께 올리고 있던 성범은 제 용돈 벌이만으로도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크게 귀금속점을 운영하는 성범의 아버지는 당신 자신도 부동산 재벌이라 부를 만한 재산을 조부모에게서 물려받았고, 보리밥집 체인 사업을 활발하게 불려 나가는 어머니까지 더해 성범은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지낸 편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부모님의 이혼 이후 성범은 두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생활을 해결하고 있었다. 20여 년을 함께한 가족도 한순간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탓이 컸다. 그런 상실감은 스스로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부추겼고, 그때부터 착실하게 경제 감각을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재형은 ‘비빌 언덕 있는 새끼가 친경 나온 왕자처럼 군다.’라고 비아냥댔으나, 그런 말 따위 쉬이 무시하는 무던함이야말로 성범의 타고난 성정이었다.
과외를 마친 학생들이 우르르 집 밖으로 몰려 나간 후, 성범은 재형과 함께 근처 밥집에서 국밥을 배달시켜 끼니를 때웠다. 한창 식탁에 차린 국밥을 입에 넣고 있던 중에 성범은 생각났다는 듯 진만의 이름을 꺼냈다.
재형은 우물우물 국밥을 삼키며 눈을 찌푸렸다.
“박진만? 좆만이 말하는 거냐?”
“어, 어째 바로 기억한다? 니가 웬일이냐, 기억력도 나쁜 새끼가.”
“뭐, 걔야 여러모로 유명했으니까.”
“박진만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꺼내는 재형의 반응에 성범은 의문을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진만이 존재감 있는 녀석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조용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나는 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장 바닥에서 고구마를 팔고 있던 녀석을 만난 일과 같이, 싸가지는 개나 주고 없다는 소릴 듣는 성범마저도 마음 한편에서 연민을 갖게 만드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성범은 국밥을 젓던 숟가락을 멈추고, 계속해 말을 잇는 재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집 사는 것도 그랬지만 그 새끼 진짜 착하지 않았냐? 애들이 뭐 좀 부탁하면 군말 없이 다 들어주고 그랬잖아.”
재형의 말에 성범은 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걸 보통 빵 셔틀이라고 하지 않냐?”
“에이, 빵 셔틀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그 새낀 그냥 성격이 좋아서 다 해 주는 편이었으니까. 걔가 찌질하고 존재감 없었던 애도 아니고, 나설 땐 나서면서 적당히 주접도 쌀 줄 알고……. 딱히 걔 싫어하는 애들도 없었는데?”
“왜 내 기억하고는 다르냐. 소지품 검사할 때 놈들이 그 새끼 가방에다 담배 넣었던 거 나는 기억하는데.”
“야, 그건 어쩌다 보니 일이 꼬였던 거고. 다들 적당히 훈계 조치로 가볍게 넘어갈 줄 알았지, 누가 그것 때문에 박진만이 그렇게 얻어터질 줄 예상이나 했겠냐? 그런데 갑자기 박진만은 왜, 어디서 만나기라도 했냐?”
재형의 물음에 성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군대 선임이 호프집 하는데 거기서 일하고 있더라.”
“이야, 그 새끼 살아는 있었구나.”
어디 배에 팔려 갔다느니 실종됐다느니 말이 많았는데…….
성범은 주절주절 입을 놀리는 재형의 말을 흘려들으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마주친 진만은 확실히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좀 더 환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때는 많이 변했나 보다 했지만, 따지고 보니 썩 눈에 띄게 바뀐 구석도 없는 진만이었다.
녀석의 말마따나 오히려 제 한 몸 제가 건사하고 사는 게 더 편하고 쉬웠을 수도 있겠다. 고구마를 팔아 버는 돈보다야 직접 일해 받는 쪽이 훨씬 더 좋은 벌이가 되었을 테니까.
성범은 다 비운 뚝배기에 숟가락을 놓고 물컵을 가져다 들었다. 웃으며 악수를 청하던 찬 손과 함께, 깨끗하고 단정했으나 소매는 낡아 해져 있던 진만의 차림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 맞다. 영은이가 나한테 연락했어, 저번에.”
뚝배기를 들어 남은 국밥을 마시듯 입안으로 쓸어 넣던 재형이 남은 깍두기마저 모두 씹어 삼키며 말했다. 성범은 재형의 입에서 나온 영은이라는 이름에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달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걔가 왜 너한테 연락을 하냐.”
“잘 지내냐고. 이것저것 말을 하긴 하는데 결국 니 안부 물어보려고 전화한 것 같던데 뭐.”
“꺼지라 그래. 떨어져 나갈 땐 언제고.”
성범은 비워 낸 물컵을 탁,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밥도 다 먹었으니까 간다. 곧바로 몸을 일으킨 그는 벗어 두었던 겉옷을 갖춰 입으며 재형의 집을 나섰다.
밖에선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성범은 미리 받아 놓은 과외비 봉투를 툭 조수석에 던져 놓고 시동을 걸었다. 차창에 제법 눈이 쌓였다. 와이퍼를 작동시켜 눈을 털어 내고 주차된 차를 빼냈다.
“돈도 받았고, 눈도 내리고…….”
백화점에나 가 봐야겠다, 성범은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쫘악.
따귀를 올리는 소리가 교실 안을 메웠다. 박진만이 짐승처럼 얻어맞고 있었다. 불시의 소지품 검사에 당황한 사내놈들이 담배며 성인 잡지를 모아 급하게 몰아 둔 곳이 그의 가방이었다. 어쩌면 그런 일쯤은 가볍게 넘어가 줄 것만 같은 진만이기에 녀석들이 더욱 쉽게 일을 벌였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박진만은 그 안에서 쏟아지는 담배와 성인 잡지에 놀라 멍청하게 선도부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길로 교무실에 불려 갔고, 학생주임에게 한차례 체벌을 받고 들어와서는 또다시 담임에게 매타작을 당하는 것이었다.
한창 교내외의 분위기가 예민한 시기였다. 평소였다면 훈계 조치로 끝나고 말았을 일이었지만 때가 좋지 못했다. 부쩍 교내에서도 금연 캠페인을 벌이며 깨끗한 학교 만들기니 뭐니 하는 면치레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학업 평가 및 학습 태도에 대해 윗선으로부터 한 소리 들은 담임이 교장 눈 밖에 났느니 행정실장이랑 사이가 좋지 않느니 하는 소문이 돌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