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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욱…….”
담임의 발길질에 토악질을 할 듯 내닫는 진만의 얼굴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억울하단 말도 한마디 못 하고, 박진만은 고된 매질을 참아 내며 벌겋게 부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렇게 맞을 바에야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게 나았다. 믿어 주지 않을지언정 강하게 어필한다면 평소 박진만에게 후하게 굴던 다른 선생들이 나와 편을 들어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묵묵히 누명을 감내하는 박진만의 태도에 있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차츰 사그라지고 있던 체벌이 박진만을 앞에 두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세를 올렸다. 한때 온갖 험한 별명을 달고 다녔다는 나이 많은 제 담임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만에게 연달아 따귀를 날렸다.
상황이 그쯤 되자, 진만의 가방에 제 소지품을 몰아넣었던 녀석들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몰래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교실 안은 쥐 죽은 듯 잠잠했고, 간헐적인 매질 소리만이 크게 번질 뿐이었다.
“야, 씹. 저러다 좆만이 죽는 거 아냐?”
옆에 앉은 재형이 성범의 어깨를 치며 속삭였다. 다른 녀석들도 저마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나서 담임을 말리는 이가 없었다. 박진만은 말없이 잘못을 뒤집어쓴 채 체벌을 감내하고 있었고, 그 반 학생 중엔 굳이 스스로 나서 진만을 구제할 배짱을 가진 녀석들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담임을 지켜보던 성범은 인상을 구겼다. 담임의 폭력 행사는 체벌이라기보단 단순한 화풀이로 보였다.
가만히 매를 받아 내던 진만이 결국 물리적 고통에 못 이겨 끅끅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 종이 울렸다. 담임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치달았을 때, 성범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종례할 시간입니다.”
여전히 분이 나 씩씩대던 담임은 갑작스러운 제지에 누가 저를 막아서냐는 듯 성을 내며 돌아보았다. 물러서라는 듯 거칠게 어깨를 튕기던 담임은 더 강하게 버티고 선 저지에 마지못해 손을 내렸다.
성범은 담임의 손을 놓아주고 쓰러져 있던 박진만에게 다가가 녀석의 몸을 일으켰다. 여태 조용히 앉았던 다른 녀석들도 우르르 일어나 성범을 도왔다. 담임은 몇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는 곧바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박진만은 많이 놀란 듯 한동안 진정을 못 하고 계속해서 끅끅 울었다. 반 녀석들의 어깨와 어깨 사이로 무거운 죄책감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미안한 듯 박진만의 등을 두드렸다.

“자, 여기 신분증 검사 좀 할게요.”
12월에 들어서자 연말 분위기를 타고 호프집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그 덕에 덩달아 바빠진 진만은 피크 타임 즈음해서는 한자리에 서 있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부산히 움직여야 했다.
우르르 몰려든 손님들을 치러 내고 가까스로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또다시 한 팀이 들어왔다. 진만은 잠시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나 손님들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 손님들은 안내된 자리에 앉자마자 저마다 외투를 벗어 한옆으로 곱게 개어 놓았다.
진만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그들에게 메뉴판을 건네주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입을 슬쩍 귀에 걸었다. 내심 좋으면서 아닌 듯, 괜한 야유가 터져 나왔고 진만은 앞치마에서 꺼낸 볼펜을 딸각거리며 그들과 함께 웃음을 섞었다.
“아휴, 진짜 내가 못살아. 이 나이에 아직도 신분증 검사를 해야 된다니까? 정말 일부러 빨리 늙을 수도 없고……. 잠깐만 기다려 봐요, 지갑 좀 꺼내게.”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은 여자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귀찮다는 듯 진만을 흘겼다. 곧 가방을 끌어다 뒤적뒤적 안을 살피는 여자를 내려다보던 진만은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말렸다.
“앗, 아뇨. 누난 괜찮고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요.”
진만의 말에 일행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고 여자는 도끼눈을 뜨며 진만을 째려보았다.
그는 어느 손님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편이었다. 술집이라면 으레 별별 사람을 다 만나기 마련인데, 그런 다양한 군상들을 부드럽게 잘 상대하는 진만이었기에 임으로선 가게를 운영하기가 한결 쉬웠다. 사장인 제가 하나하나 나서지 않아도 웬만한 일은 전부 진만의 선에서 해결이 되었던 것이다.
가끔씩 술에 취해 꼬장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도 꾸중이나 화를 내서 억지로 쫓아내기보단 잘 타일러서 제 발로 걸어 나가게 하는 사람이 진만이었다.
“저 새낀 액면가를 보면 모르나, 얼굴에 딱 써 있구만 무슨 신분증 검사를 한다고 지랄이야.”
언제 들어왔는지 그 같은 진만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범이 불쑥 말했다.
“니가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기별도 없이 찾아온 성범의 모습에 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범은 대답 없이 손에 든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호텔 데일리 로고가 박힌 빵이었다.
“아까 백화점에 갔는데, 뭐 빈손으로 오긴 그래서…….”
“……어, 고맙다. 니가 이런 걸 다 사 오고 참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
“형 말고 저 새끼 먹으라고 사 온 거예요.”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던 진만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성범이 대답했다. 임은 다시 얼굴을 굳히며 눈을 흘겼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임성범의 말투는 참으로 정나미가 없었다. 저 성격으로 또 군 생활은 순탄하게 해냈다는 게 함께한 자신이라지만 도무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진짜 말 한마디도 그냥 안 넘어가지, 새꺄?”
“진짠데 믿기 싫은가 보네요. 여기 앉아도 되죠?”
앉아도 되냐 물어본 말과는 달리 성범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소파에 앉더니, 입고 온 코트를 벗어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진짜 왜 왔냐?”
어느새 다가온 나비를 끌어다 무릎에 앉히며 임이 물었다. 지난번 성범이 다녀간 것이 채 3일이 안 되었다. 임과 성범은 안부차 가볍게 만나 소식을 주고받을 정도는 되어도 며칠 만에 다시 볼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성범이 연락도 없이 불쑥 가게에 찾아온 것이다.
임의 질문에 성범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턱 끝으로 진만을 가리켰다.
“저 새끼 보러 왔다니까요.”
임은 몸을 틀어 잔에 맥주를 따르고 있는 진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까지 성범의 방문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진만이? 너 진만이랑 친했냐?”
“아뇨.”
“그럼, 진만이가 너한테 빚이라도 졌냐?”
“저 새끼가 나한테 빚지고 도망갔으면, 지금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걷고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섬에다 팔아서라도 원수는 갚을 새끼지, 넌. 그럼 왜? 무슨 일 있냐?”
“이 형이 아까부터 실없는 소리만 계속 하시네. 그냥 저 새끼 보러 왔다니까요. 따로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성범은 짜증 난다는 듯 흘기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툭, 불붙이기를 끝낸 라이터를 테이블 위로 던지며 그는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댔다.
청바지에 회색 니트를 받쳐 입은 성범은 단조로운 차림새에도 어딘가 시선을 끄는 단단한 분위기를 풍겼다. 임은 비슷한 차림임에도 그와는 사뭇 차이가 나는 저를 내려다보며 ‘잘난 놈은 달라도 다르네.’ 하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곧 끝나죠?”
“방금 손님들 자리에 앉는 거 못 봤냐? 이제 시작이야, 끝나려면 멀었어, 인마.”
임은 저도 함께 담배를 피워 물며 투덜거렸다. 여자 손님이었고 방금 주문을 마쳤으니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더 머무를 터였다. 먼저 와 있던 다른 팀들도 아직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밥집이 아닌 이상에야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게 술자리였다.
그 같은 임의 대답에 성범은 얼굴을 구기며 담배를 든 손으로 이마를 긁었다.
“어이, 진만아.”
마침 안주를 내가던 진만을 돌아보며 임이 손짓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만은 멀찍이 앉아 있는 성범을 발견하곤 눈썹을 올려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냈다.
지난 밤 차를 얻어 탄 날의 찝찝함이 여전히 남은 채였다. 특별한 사과 없이 돌아선 탓에 서로가 데면데면할 법도 했으나, 성범도 진만도 별말 없이 고개를 까딱하고 수인사를 나누었다.
“그거 다 하면 잠깐 와서 앉았다 가라.”
진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전했고, 임은 다시 몸을 틀어 성범을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 가득 안주를 서빙하는 진만을 묵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새끼 일 잘해. 성실하고, 싹싹하고.”
임의 평가에 성범은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변했다지만 성격까지 변한 건 아닌지 박진만은 여전히 박진만다웠다. 재형의 말대로 착하다는 소릴 곧잘 듣던 녀석이었다. 착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 외에 박진만에게 어울리는 말이 없다고 느끼기도 했다.
“뭐, 그렇겠죠. 그런 성격이니까.”
마침 진만이 서빙을 나간 테이블에서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서빙을 갈 때면 여자들은 대화를 멈추고 은근한 눈웃음을 흘기며 말장난을 걸었다. 진만은 또 진만대로 그런 장난들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저렇게 싹싹하게 굴어서 단골도 많은 편이고, 손님들한테 인기도 많아.”
임의 말에 성범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단골들 오늘은 다 딴 가게들 가셨나 보네, 지금 딸랑 두 테이블 있는 걸로 보이는데…….”
“얀마, 그건 니가 장사가 안 될 때만 골라 오니까 그런 거잖아. 있던 손님들도 니놈이 들어오면 다 몰려 나간다, 새끼야.”
성범은 대충 성의 없는 투로 임의 말을 받아치며 멀리서부터 제 테이블로 다가오는 진만을 바라보았다. 내내 바빴던 모양인지 그는 후, 한숨을 뱉으며 임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술 마시려고 왔냐?”
“아니, 차 가져왔다.”
고개를 젓던 성범은 임을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나 아직 밥 못 먹었는데, 형 밥 좀 주세요. 배고프네.”
마침 손님이 뜸한 시간이었다. 성범의 말에 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저녁을 먹지 못했는지라 안 그래도 출출하게 허기진 참이었다.
“저도 좀 출출한데, 형 같이 먹어도 되죠?” 진만은 고개를 돌려 임에게 허락을 구했고, ‘오냐.’ 하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대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호프도 음식 장사인 건 마찬가지인지라 적당한 안주에 밥만 놓으면 그게 곧 식사가 되었다.
익숙한 솜씨로 안주용 찌개를 끓이고 찬밥을 덥혀 성범의 테이블로 내갔다. 이미 끼니를 치른 임은 둘이 먹으라며 진만을 앉히고 모처럼 만에 스스로 손님을 보겠다며 홀에 나섰다. 진만으로서는 가게를 오픈하고 몇 시간 만에 처음 취하는 휴식이었다.
“저 형 놀고먹는 건 여전한가 보네.”
임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성범의 말에 진만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 바쁠 때가 아니면 임은 그다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 탓에 가끔씩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그래 봐야 크지 않은 규모의 가게라 혼자서도 할 만했다. 더욱이 자신은 직원이고 임은 사장이니 불만을 가져 봐야 마땅히 득 되는 일도 없었다.
성범은 기껏 밥상을 차려 준 진만에게는 고맙다는 말도 한마디 않고 곧바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제법 먹을 만은 하게 끓이네.”
“자취가 몇 년인데, 이까짓 거 하나 못 끓일까 봐 그러냐.”
“자취하는 건 나도 마찬가진데 내가 하면 꼭 먹고 죽을 것 같은 음식이 되더라고. 그래서 난 아예 뭐 만들어 먹을 생각도 안 해. 차라리 사 먹고 말지.”
찌개가 무난하다 싶어 선택한 식단이었지만 성범은 군말 없이 잘 먹었다. 사실 재료만 갖춰 놓으면 제일 쉬운 음식이 찌개였는지라, 진만은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민망한 듯 웃었다.
“전에 같이 살던 애도 음식 해 준다니 뭐니 하면서 이 비슷한 거 끓여 내온 적 있었는데, 그건 진짜 못 먹겠더라. 그딴 걸 음식이라고 입에 넣나 싶어서 밥상 엎을 뻔했는데, 걔보단 니가 백배는 낫다.”
“너 동거했었냐?”
김치찌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불쑥 꺼낸 성범의 말에 진만은 놀라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스물다섯 끝물이면 적은 나이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학생 신분이었다. 말본새를 보니 성범은 동거를 했단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부모님도 아셨냐?”
“모르지,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바쁘신 양반들인데 신경이나 쓰겠나. 그러고 보면 뚱뚜루는 좀 눈치챘던 것도 같은데.”
진만은 풋, 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전에도 성범이 제 엄마를 가리켜 뚱뚜루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야 어려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만큼 자라고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제 엄마를 부르기엔 퍽이나 우스운 호칭이었다.
진만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성범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보리밥집 카운터에 앉아 ‘어서 오세요.’ 인사하던 그녀는 장사를 하는 사람답게 늘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한 녹색으로 번진 눈썹 문신과 빨갛게 칠한 입술이 어우러진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결코 만만치 않게 기가 센 사람이라는 것 또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는 넌, 여자 친구 없냐?”
30명이 넘는 보리밥집 직원들을 향해 호통을 치며 닦달하던 성범의 엄마를 떠올리다가 불쑥 들려온 물음에, 진만은 퍼뜩 눈을 들었다. 손으로는 열심히 반찬을 집어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보며 진만은 잠시 입을 벙긋하고 망설였다.
“아…….”
“아, 뭐.”
대답을 하라는 듯 성범이 눈썹을 꿈틀거렸고 진만은 이내 멋쩍은 웃음을 지어냈다.
“나 게이야.”
성범의 숟가락질이 딱 하고 멈췄다. 진만은 민망한 듯 이마를 긁적이며 시선을 내렸다. 성범은 난데없는 커밍아웃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예상했던 반응에 진만은 목을 가다듬으며 물을 마셨다.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워낙 거짓말을 못했다. 음식 삼키는 것도 잊어버린 듯 멍해 있던 성범은 곧 저 또한 컵을 들어 물을 삼켰다.
“아, 씨발.”
그러고는 나온 첫마디가 욕이었다. 진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
“…….”
“진짜 게이는 또 처음 보네.”
“……뭐?”
진만은 다시 숟가락질을 시작한 성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을 보인 채, 성범은 멀찍이 놓인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태원에서야 지나치면서 많이 봤지. 근데 내 주위 사람이 게이라는 건 진짜 처음이다. 솔직한 건지, 자각이 없는 건지 놀라게 하는 재주는 있네.”
한바탕 더럽다느니 불쾌하다느니 하는 욕을 기대했던 진만은 전혀 다른 성격의 욕이 성범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안도하는 한편, 조금은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니가 몰라서 그래. 찾아보면 분명 더 나올 거다, 인마.”
웬만해서는 숨기지 않고 제 성향을 솔직하게 말하는 진만이라지만 커밍아웃을 할 때마다 상대에게서 나올 반응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범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짙은 눈썹을 들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며 진만은 제 그릇과 다 비운 반찬 접시를 포갰다. 성범의 말은 조금 철없어 보이기는 했으나 표정이나 말투는 반대로 진지한 편이었다. 그것이 또 잘난 외모에서 만들어 내는 분위기이지 싶어 그 와중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외모에 묻혀 무례함이 상쇄되는 느낌이었다.
“그럼 넌 진짜 섹스할 때 남자한테 뒤 대 주냐?”
잠시간의 침묵 뒤에 던져진 말에 진만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말만큼은 어지간히 불쾌했다. 그러려니 하고 방심하고 있으면 또 이처럼 불쑥 예의 없는 말을 던졌다.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화법이었다. 진만은 저도 모르게 곱지 않은 심사를 내비쳤으나,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본래부터 입이 걸었다. 배려가 없을 뿐 악의는 들지 않았을 거라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히 걸고넘어져 봐야 서로의 기분만 나쁠 것이다. 식사를 끝내듯 수저를 내려놓고 진만은 물끄러미 성범을 마주 보았다.
“왜, 너한테도 한번 대 줄까?”
저를 빤히 보며 어울리지 않은 농담을 던지는 진만의 행동에 성범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도 안 웃기니까 쪼개지 마, 새꺄.”
그는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쨌든 잘 먹었다. 가서 일 봐.”
성범은 숟가락을 던지며 말했고 진만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부산하게 움직여 진만이 밥상을 거두어 가고, 성범은 테이블 한쪽에 치워 두었던 재떨이를 끌어다 놓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3. 친절 혹은 동정

소지품 검사가 있은 후, 병이라도 났는지 박진만은 내리 며칠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던 담임도 나중엔 미안한 맘이 들었는지 반장인 성범을 시켜 진만의 집엘 다녀오게 했다. 성범은 담임의 조치로 그냘 야자를 쨌고, 손에 건네진 주소를 받아 들고 진만의 집으로 향했다.
“뭔 골목이 이렇게 많아?”
자신이 일생 동안 살아오던 동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몇 번 지나치면서 판자촌 골목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 안을 애써 모험하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헤맨 건지 그 골목이 그 골목 같아서 몇 번이고 담임이 적어 준 주소를 확인해야만 했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 박진만이 사는 데가 어딥니까.’ 묻고 나서야 가까스로 녀석의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젠장, 된소리를 내뱉으며 성범은 잔뜩 녹슨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기척을 하기 전부터 문 안쪽에서는 콜록콜록 마른기침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한겨울에 등목이라도 하는지 차갑게 물 끼얹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뭐야?”
낮게 지껄이며 대문을 들어서려 했을 때였다. 좁게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허연 뒷몸에 성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박진만이 발가벗은 채 몸을 씻고 있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분명 데운 물이 아닐진대 녀석은 추위를 참아 가며 제 몸 위로 물을 끼얹고 있었다. 한바탕 매타작을 증명해 주듯 붉게 멍이 든 몸이 꼭 점박이 송아지 같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골이 얼어 버릴 듯 추웠다.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성범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별안간의 인기척에 놀랐는지 박진만은 앉은 자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헐레벌떡 방 안으로 내달음질을 쳤다. 괜히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담임이 가 보라는데 반장이 거절할 명분 따윈 없는 거였다. 천천히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야, 박진만.”
낮게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방 안에서 우당탕탕, 구르는 소리가 났다. 잠시 입을 다물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후로는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다시 한번 진만의 이름을 불렀다.
“야, 좆만이.”
성범은 잠시를 못 참고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벌컥 하고 안에서 문이 열렸다. 급하게 옷을 챙겨 입었는지 진만이 숨을 몰아쉬며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냉수마찰 때문인지 옷 밖으로 드러난 진만의 모든 피부가 붉었다. 뚝뚝. 머리에서 흐르는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서리가 될 것처럼 차 보였다.
“어쩐 일이냐?”
잔뜩 쉰 목소리로 진만이 입을 열었다.
“이 날씨에 너 미쳤냐? 속 까놓고 냉수마찰을 다 하고.”
흘끔 녀석의 손끝을 살폈다. 얼마나 박박 닦아 냈는지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진만의 손끝은 잔뜩 트다 못해 발갛게 벗겨져 있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재촉하듯 다시 묻는 말에 성범은 녀석의 손끝에서 시선을 거두고 진만을 마주 보았다. 얼굴은 더 가관이었다. 그나마 붓기는 빠진 것 같았지만 입술 주변이며 눈 주변에 난 멍은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었다.
“넌 니가 며칠째 학교 쨌는지는 알고 있냐?”
성범의 물음에 박진만은 입을 다물었다. 곧 여지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날카롭게 찬바람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젖은 몸에 바람까지 맞은 녀석은 추운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희게 터 피가 나는 입술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성범은 가방을 뒤져 몇 장의 프린트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