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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담임이 가 보래서 왔다, 때려 놓고 저도 미안하긴 한가 보더라. 그러니까 너도 엔간하면 그만하고 학교 나와라. 그동안은 왜 안 나왔냐?”
진만은 추위 탓에 떨리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아팠어…….”
“그래, 꼬라지를 보니까 그런 것 같다.”
성범은 물끄러미 진만을 바라보았다.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 처지를 티 내는 듯한 그의 모습에 또다시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짧게 한숨이 나왔다.
문득 진만의 어깨 너머 방이 궁금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 안을 살피자 박진만이 당황한 듯 시야를 막아섰다.
“왜.”
“할머닌 안 계시냐?”
“시장에 갔어.”
“언제 들어오시는데.”
“몰라. 늦게. 왜.”
“뭐, 그냥.”
성범은 멋쩍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만은 평소답지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채 저를 노려보며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이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샜다. 늘 쪼개고 다니는 녀석이 얼굴을 굳히는 날이 다 있네.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야, 박진만.”
“왜.”
진만이 다시금 눈에 힘을 주었다. 발갛게 멍든 눈꺼풀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뜻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너한테서 빨랫비누 냄새 나, 인마.”
박진만의 귀가 빨개졌다. 표정은 억지로 민망함을 참고 있었지만, 미처 귀까지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 간다.”
당황해 어정쩡하게 선 어깨를 툭 쳤다. 퍼뜩 고개를 쳐든 진만이 ‘……그래.’ 하고 배웅 인사를 뱉어 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성범은 느릿느릿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야쟈도 쨌겠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발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야, 하는 표정으로 진만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근데 너네 집엔 바세린 같은 것도 없냐?”
사람이 힘에 부친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싫다고 느낀 일은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란 것은 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것이었으나 일을 안 하고 쉴 때면 또다시 사람이 그리워지곤 했다.
“끝나면 내 차 타고 가라.”
그런 면에 있어서 성범은 힘에 부치는 사람이었다. 앞뒤 안 가리는 무례한 말을 내던지다가도 또다시 불쑥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어린 그 시절부터 그랬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지 편견이 없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들쭉날쭉 진만을 흔들기 일쑤였다.
“넌 참 모를 놈이야.”
“뭐?”
아니, 어쩌면 알 수 없는 건 성범이 아니라 성범을 대하는 자신일지도 몰랐다. 진만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무슨 말이냐는 듯 표정을 구기는 성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그를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경직된 얼굴을 할 뿐이었다.
성범은 이번에도 장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듯했다.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임과 간간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영업시간을 가게에서 때우고 있었다.
이미 다른 한 테이블은 일어나 가게를 나섰고, 이제 남은 테이블은 마지막에 들어온 여자 손님들뿐이었다.
진만은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돌아와 방금 파한 술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잔을 걷어 가 싱크대에 넣고 다시 과일 접시며 안주 그릇을 치웠다. 이력이 난 일이라 힘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야, 야. 저기 저 사람 진짜 잘생기지 않았냐? 모델 같애.”
행주를 가져와 테이블을 꼼꼼하게 닦고 있을 때, 옆에 남은 손님들이 성범을 가리키며 주고받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한데 모으고 귓속말을 하듯 ‘분위기 있다’느니 ‘조각’이라느니 하면서 호들갑 섞인 말을 줄줄이 뱉어 내고 있었다.
비록 웃음이 나기는 했지만 그리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성범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확실히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압도적일 것이다.
고개를 틀어 다시 성범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팔짱을 낀 채 무료한 눈으로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 외에 별다른 장신구 없이 단순한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넘칠 만큼 그의 외모는 눈에 띄었다.
깨끗한 피부에 눈썹은 짙고, 코는 높고, 입술은 뚜렷하고, 무엇보다 모든 게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었다. 시선을 돌릴 때의 얼굴의 움직임, 긴 팔을 움직이는 각도, 단단한 듯 날렵한 다리, 심지어 자세며 행동거지 하나도 조각가가 하나하나 만져 주고 간 것만 같았다.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을 외모였다. 사서 비교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년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내가 아까부터 먼저 보고 있었거든?”
“야, 착각하지 마라. 난 저 사람 들어올 때부터 보고 있었다고.”
“야야, 난 들어오기 전 입구에서부터 저 사람 차에서 내리는 거 봤어.”
“이게? 그럼 난 저 사람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있었어.”
“사실은 전생에 내가 저 사람 점지한 삼신 할매였어.”
“난 저 친구 학교 다닐 때부터 봤는데…….”
“네?”
불쑥 대화에 끼어든 진만의 말에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멀뚱멀뚱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들을 보며 진만은 씨익 웃음을 지어냈다.
“어이, 누나들. 거 내가 듣고 있는데 제 앞에서 딴 남자 얘기를 하시네요, 섭섭하게. 아까는 나한테 귀엽다고 여자 친구 있냐고 묻더니.”
“어머, 이 오빠 좀 봐. 질투하나 봐.”
여자들은 이내 까르르 웃음을 쏟아 냈다. 진만은 질투한다는 말에 절대 아니라는 듯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하, 아뇨. 내가 질투를 왜 해요? 뭐가 꿀린다고.”
테이블에서 일제히 “에이~” 하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오빠, 그건 아니죠.”
한 여자가 시선을 옮기며 다시 성범을 살폈다. 그는 TV만 쳐다보는 게 무료했던지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적당히 밥도 먹고 얼굴도 봤으면 돌아갈 것이지 그가 왜 굳이 저를 기다리겠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진만은 그가 오늘 가게에 찾아온 이유조차 묻지를 않았다.
“왜요, 저 친군 괜찮고 저는 별로예요?”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했어야 했나 싶었다. 굳이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을 붙들어 놓은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아니죠, 오빤 괜찮은 거고 저쪽은 완전 퍼펙트한 거지.”
“와아,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섭섭하다.”
시무룩한 척 눈꼬리를 내리는 진만이 싫지 않았던지 여자들이 괜찮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오빠는 그런대로 귀여운 매력이 있다니까요.’ 하고 거들며 막내 남동생을 대하듯 어깨를 토닥이는 시늉도 했다.
소란스럽게 이어지는 수다가 신경이 쓰였던지 성범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여자들이 꺄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얼핏 마주친 시선이 민망해 진만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짧은 눈빛에도 괜히 위축이 될 만큼 성범은 확실히 분위기가 남달랐다.
“다음에 또 올게요.”
계산을 마친 여자들이 호들갑스럽게 수선을 피우며 가게를 나서고, 진만은 드디어 하루를 다 끝냈다는 생각에 속 시원하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맥주를 두 번씩 리필 해 마신 여자들은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늦었다며 점잖게 술자리를 파했다. ‘다음에 오면 서비스 주는 거 잊지 마세요.’ 너도 나도 진만에게 한마디씩을 건네며 여자들이 떠나자, 한차례 떠들썩했던 가게 안이 부쩍 조용해졌다.
성범은 어느새 테이블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퍽 지루하고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마감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면서도, 역시 이렇게 피곤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돌려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쌓인 눈이 희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용했을 거리가 눈 오는 소리에 갇혀 더욱 적막했다. 성범은 찌뿌듯했던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달빛에 비친 실루엣 너머로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말없이 차에 올라 진만이 타길 기다렸다. 임은 약속이 있다며 열쇠를 내맡기고 먼저 자리를 떠난 후였고, 진만은 혼자서 뒷정리를 하고 나온 차였다.
차에 오르는 진만을 보며 성범은 안전벨트를 당겨 맸다. 히터가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차 안 공기가 찼다. “고맙다, 매번.” 가볍게 인사를 전하며 진만도 안전띠를 당겼다.
불쑥, 핸드폰을 쥔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만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휴대폰과 성범을 번갈아 보았다.
“뭐.”
“니 번호.”
“내 번호 뭐.”
“니 번호 찍으라고, 인마.”
그러고 보니 번호 교환도 하지 않은 채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번호 교환이니 이제야 핸드폰을 내미는 건 조금 뒤늦은 감이 있었다. 진만은 말없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해 보았자 몇 번이나 그 번호를 쓸 일이 있겠나 싶었다. 지금도 제 폰에선 몇 달 혹은 몇 년씩 연결된 적 없는 전화번호들이 곱게 휴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패턴이나 비밀번호 잠금 없이 바로 해제된 화면에, 진만은 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곧 조용했던 차 안에 요란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진만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빼 들자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쉴 새 없이 ‘당근, 당근’을 외치는 유치한 동요 가사에 성범이 기가 차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뭐, 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차 안을 채우던 벨 소리도 그쳤다.
“벨 소리하고는…… 쌍욕 들어 먹기 딱 좋겠다.”
낮게 지껄이며 도로 핸드폰을 받아 든 성범은, 진만의 이름을 눌러 저장한 후 곧 차를 출발시켰다.
거리는 한창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늦은 건지 이른 건지 대중없는 시각의 거리는 아직도 활발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의 간판과 아직 장사가 한창인 고깃집이며 술집의 네온사인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성범의 차는 그런 불야성을 뒤로한 채 한산한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충분히 운전하기 귀찮을 법한 거리였다. 그나마 다리는 안 건너는 곳이라지만 진만의 집은 늦은 밤엔 택시마저도 빈 차로 돌아 나와야 하는 곳이라며 승차 거부를 하기 일쑤인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얻어 타고 가는 진만이야 편하다지만 다시 한참을 돌아 나와야 하는 성범은 많이 피곤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 사냐? 나 내리면 한참 나와야 되는 거 아냐?”
진만의 뒤늦은 물음에 성범은 일찍도 물어본다며 진지하지 않은 타박을 했다. 이어서 “반포.” 하고 돌아온 대답에 놀란 진만은 홱 고개를 돌려 성범을 바라보았다.
“뭐야, 가게 있는 동네잖아.”
“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성범을 보며 진만은 인상을 썼다. 굳이 제 귀가를 위해 기다릴 필요도 차를 운전할 필요도 없는 성범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저 가는 길이겠거니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가 사는 동네가 반포라면 말이 달랐다.
“나 때문에 일부러 나올 필욘 없잖아, 조금 있으면 첫차도 다니는 시간인데.”
“나도 니네 동네가 이렇게 먼진 몰랐어, 인마.”
“그럼 오늘은 버스 타고 가게 그냥 두지 그랬냐.”
“사사건건 묻고 대답하는 거 귀찮으니까 그냥 닥치고 좀 가자. 다음부턴 태워 달래도 안 태워, 새꺄.”
이어 몇 마디 더 덧붙이려는 진만의 말을 무시한 채 성범은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진만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더 했다가는 다시 이전과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것 같았다. 굳이 저를 태워 주는 고마운 사람에게 기분 상하는 말을 해서 돌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진만은 제 동네에 들어서기까지 내내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다.
지난번과 같은 곳에 차가 멈췄다. 딸각, 안전벨트를 풀어낸 진만이 성범을 돌아보았다.
“정말 고맙다. 근데 다음부턴 안 태워 줘도 돼, 진짜로.”
성범은 귀찮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진만의 팔을 잡더니 몸을 돌려 뒷좌석에서 큰 종이봉투를 집어 건넸다.
“받아.”
“……이게 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제게 건네진 종이봉투를 내려다보던 진만의 얼굴이 굳었다.
“옷 하나 샀다. 아까 가게 가기 전에.”
공기가 텁텁해진 것처럼 답답한 숨이 진만의 가슴께를 눌렀다.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걸 왜 주냐고.”
“옷을 입으라고 주지 먹으라고 주겠냐? 좀 두껍게 입고 다녀, 새꺄. 보는 내가 더 추워.”
진만은 지그시 종이봉투를 주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물쩍 넘어가기도 싫었다. 넘어오는 한숨을 짓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깔았다.
“너 말이야, 뭘 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착각을 해.”
내내 종이 백에 주던 시선을 들어 성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저를 마주 보았다.
“여유 있다고까지는 못하겠는데, 나도 이젠 좀 살 만은 하거든? 옷 하나 못 사 입을 만큼 없이 살진 않아.”
성범이 비식 웃었다.
“그럼 사 입어, 새꺄. 신경 좀 쓰든가. 니가 온갖 궁상은 다 떨고 다니니까 내가 이런 거나 사게 만드는 거 아냐.”
“뭐?”
“그리고 니가 게이인 거 진작에 알았으면 이런 거 사지도 않았을 거다.”
“뭐라고?”
“니가 게이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이런 거 사다 줄 생각도 안 했을 거라고. 이런 거 받고 혹시나 엄한 일 생기면 씨발, 뭐 되는 거니까.”
그 같은 발언은 진만으로서도 도화선을 당긴 격이었다. 이런 상황에 굳이 제 성향을 걸고넘어지는 건 아무리 진만이라도 그러려니 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너 말이라고 막 던지냐?”
한껏 언성을 높이며 성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성범은 시선을 피하며 귀찮다는 듯 마주 보려 하지도 않았다.
“아, 됐어. 괜히 입씨름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갖고 꺼져. 나도 집에 들어가서 좀 쉬고 싶으니까.”
진만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그의 차를 얻어 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안 그래도 꺼져 줄 생각이었다.”
“그럼 빨리 가든지.”
“그런데 이건 정말 받기 싫다. 보니까 백화점에서 산 것 같은데, 그냥 가서 환불해. 난 안 받을 거니까.”
“아, 씨발.”
종이 백을 던지듯 조수석에 둔 채 진만이 차 문 밖으로 나서자, 성범이 욕지거릴 내뱉으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진만이 팽개친 봉투를 집어 들고 그 또한 거칠게 차 문을 나섰다. 몸을 돌려 집을 향해 걷는 진만의 팔을 억세게 붙잡고, 성범은 종이 백으로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그냥 입어라.”
“환불하라고.”
하, 진짜 사람 열 받게 하네. 성범은 화를 참듯 시선을 돌렸다.
“야, 좆만이. 너 솔직한 거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해 줄까? 너 지금 니 꼬라지가 어때 보이는지는 알고 있냐? 한눈에 봐도 불쌍하고 구질구질해 보여. 그래서 내가 니 꼬라지 좀 돌보라고 옷 하나 샀다. 그래,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냐?”
“야, 임성범.”
“왜, 동정받는 것 같아?”
“입 다물어라.”
“하. 맞아, 동정. 근데 동정이면 또 어떠냐. 넌 니가 동정받으면 안 될 처지 같냐?”
진만은 할 말을 잃고 가까스로 헛웃음만 뱉어 냈다. 거칠게 몰아치는 성범의 말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버렸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 그냥 가라. 어쨌든 태워 준 건 고맙다.”
그는 끝내 봉투를 받지 않은 채 뒤돌아섰고, 이에 뒤에서 크게 소리 지르는 성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성범은 억센 힘으로 진만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이에 질세라 진만은 시선을 피하며 거칠게 팔을 쳐 냈다.
“얼른 꺼지라고, 새꺄.”
“아, 씨발. 그럼 버려, 새꺄. 버리면 되겠네. 어차피 나도 환불할 생각 없고 너도 받을 생각 없으니까 끝난 거네. 버리면 되지, 씨발. 그래, 들어가라. 나도 갈 테니까.”
말과 동시에 성범은 손에 들린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거칠게 구겨지며 봉투가 담벼락에 처박혔다.
성범은 뒤돌아섰고, 성난 듯 성큼성큼 차 위에 올랐다. 탁, 거칠게 차 문이 닫혔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진만은 핸들을 잡는 성범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부릉 하고 세게 헛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기어를 바꾸지 않은 채 액셀을 밟은 모양이었다. 성범은 짜증이 난다는 듯 핸들에 주먹을 날리더니 곧 차를 움직여 멀어져 갔다.
“하.”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터지듯,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치닫고 말았다.
4. 조우
겨울엔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 많았다. 전기요를 돌리며 오르는 전기세야 그러려니 할 수준이었지만 12월에 접어들면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가스 사용량만큼은 골치가 아팠다. 난방을 최대한 아껴도 온수만큼은 안 쓸 수가 없었다. 동파 직전의 수도관을 거쳐 나오는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의 찬물 샤워란 몸을 씻어 내는 게 아니라 얼음 코팅을 하는 것 같았다. 살가죽은 떠 있는데, 뼈와 근육은 수축하여 몸이 가죽 안에서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배수관이 얼기라도 하면 세탁기마저 쓸 수 없었다. 물을 끓여 부어 억지로 녹이려 들다가는 급격한 온도 차로 배수관이 터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기에 미지근한 물로 서서히 녹여야 했는데, 이게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겨울이 되면 세탁기에 연결한 배수관에 단열재를 덧씌우는 일을 제일 먼저 하곤 했다.
주인집의 우편함에서 두툼한 우편 뭉치를 꺼내 넘기며 제 이름을 찾던 진만은 여지없이 수직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가스요금 청구서에서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의 휴일에 모처럼 옷을 갖춰 입고 나서던 차 살핀 우편함엔 돈 내라고 아우성을 치는 지로 용지만 가득했다. 집 문마저 추위에 얼어 열리지 않는 바람에 어깨에 반동을 주어 밀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열쇠를 돌려 문을 잠그면서도 제발 집에 돌아왔을 때 자물쇠가 얼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자물쇠가 얼면 당장 입김으로 녹이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진만은 제 몫의 우편을 추려 가방에 넣고 나머지를 다시 우편함으로 밀어 넣었다.
밤새 내린 눈 탓에 집 앞 경사로는 이미 빙판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가 부지런하게 움직였는지 내리막길엔 희게 탄 연탄이 뿌려져 있었는데, 덕분에 엉덩방아를 찧는 불상사는 면할 수 있었다.
진만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살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약속 장소는 일하는 가게 근처였다. 덕분에 휴일임에도 마치 일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 다닥다닥 붙은 낮은 지붕 위의 눈이 흩날렸다. 간밤의 추위에 빙수같이 얼어 버린 눈가루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야상 점퍼에 얹힌 눈을 툭툭 털어 냈다. 짙은 검정의 점퍼는 지난번 성범이 담벼락에 내던지고 간 것이었다.
그 밤 성범이 떠난 후 진만은 한동안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났으나 나중엔 기가 막혔다. 한참 후엔 웃음까지 나왔다. 저 성격, 저 말투에 군대에서 영창 한 번 안 간 게 신기했다. 진만은 대차게 돌아서 집에 들어왔고, 옷이야 버려지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사 달라고 했나, 또 누가 버리라고 했나.
그렇게 옷도 벗지 않은 채 벌렁 자리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만은 확실히 옷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돈 문제이기 앞서 진만의 성격인 탓이 컸다. 많은 옷을 잘 차려입기보다는 적은 옷을 단정하고 무난하게 입는 편이었다.
입고 다니는 외투가 얇긴 했으나 추위를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겨우 한 번의 만남에 옷차림이 어떠니 궁상이니 욕을 뱉으며 새 옷을 건네는 성범의 행동에 갑자기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야 그런 동정쯤 고맙게 여겨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까지 ‘고구마 팔던 좆만이’로 남고 싶진 않았다. 철저하게 제 앞가림을 하고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한 덕에 많지는 않아도 모아 놓은 돈도 제법 있었다.
제 벌이로 아직까지 월세는 감당하기 버거워 그나마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을 찾느라 달동네에 정착한 것이 성범에게 궁상으로 비쳤다는 게 기분 나빴다. 제 능력과 제가 겪어 온 시간이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