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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과 수도사




1화


- prologue -

“안젤로, 한 가지 알아 두렴.”
따스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살짝 젖혀 올려다본 수도원장님의 얼굴은 온화하면서도 근엄했다. 낮은 목소리로 마치 비밀을 알려 주듯, 수도원장님은 내게 말했다.
“신은 언제나 널 사랑하고 계신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원장님은 그제야 얼굴 가득 푸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기쁜 듯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1.

시원하게 부는 마에스트랄레(북서풍)가 기분 좋게 뺨을 쓰다듬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고요하고 평온하던 수도원이 웬일로 시끄럽고 떠들썩한 날이기도 했다.
몇 년째 당나귀 외의 다른 동물은 한 번도 발 디딘 적이 없었던 낡은 마구간은 번쩍번쩍하게 청소되었고, 요리를 담당한 수사들은 고이 길렀던 닭 코코를 잡기 위해서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야 했다. 수도원에서 제일 좋은 손님방은 뻑적지근하게 청소한 지 오래였으며, 침대에는 수사들이 평생 본 침대 시트 중 제일 깨끗하고 하얀 시트가 깔렸다.
그 분주함 속에서 짧은 갈색 머리카락의 한 수사, 안젤로도 덩달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본래는 약초를 키우는 담당이었지만 지금처럼 손이 하나라도 절실한 날에는 그런 담당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지금 주방에 갖다 줄 허브를 한 꾸러미 가득 안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곧 도착한 주방에서 만난 동료 수사는 허브 꾸러미를 받아 들면서 잡담을 걸었다.
“안젤로 형제, 오셨다는 그 추기경님 말입니다. 혹시 얼굴 본 적 있습니까? 피곤하다고 바로 방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얼굴 볼 여유도 없었거든요.”
“글쎄요, 디에고 형제. 저도 그 추기경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오늘 그분 저녁 수발을 들어 드리게 되어 있으니 나중에 가르쳐 드리지요.”
안젤로의 그 말에 디에고의 표정이 환해졌다. 디에고는 손에 들고 있는 허브 꾸러미가 떨어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안젤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젤로 형제!”
“디에고 형제!! 빨리 이리 오세요!!”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디에고는 얼굴 한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러면서도 거듭 안젤로에게 고마워하면서 멀리 뛰어갔다. 안젤로는 아하하 웃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젤로는 이제 추기경님이 쓰실 세숫물을 데우러 가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거든 가져다 드려야지. 안젤로는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그렇게 생각했다. 무려 추기경님의 수발을 드는 일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기다가 디에고에게도 말했지만, 추기경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자신은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안젤로는 너무 벅차서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은 인자롭고 자애로운 수도원장님 덕분이었다. 안젤로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수도원장님은 추기경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는 안젤로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신 것이었다. 본래는 약초 담당인 안젤로가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특혜를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안젤로는 발걸음을 이제 동쪽 탑으로 향했다. 수도원에서 제일 좋은 손님방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봤자 산골에 박혀 있는, 농지도 별로 없는 조그맣고 가난한 수도원인지라 깔끔하고 수수한 방인 정도였다. 하지만 평생 이 수도원에서 살아온 안젤로로선 그저 이 동쪽 탑 손님방에 계신 분에게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안젤로는 심호흡을 가볍게 한 번 한 다음, 문을 조심스럽게 똑똑, 하고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안젤로는 ‘잠깐 어디 나가셨나?’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못 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청년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안젤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추기경이라기에 나이 많이 드신 분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안젤로는 곧 귀한 가문 자제들의 경우 곧바로 추기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안젤로는 조심스럽게,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낡은 나무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인 광경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추기경과 여자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었던 것이다.
추기경은 젊은 남자였다. 기껏해야 스물이 조금 넘었을까 싶은 말끔한 얼굴이었다. 짧은 적갈색 머리카락과 끝이 올라간 눈꼬리가 사납게 보였지만, 섬세한 코와 입술이 그런 인상을 중화시켰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열정적인 듯하고, 잔인한 듯하면서도 예민해 보였다. 마치 얼음 속에 갇힌 불꽃 같은, 그런 기묘한 인상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의 선명한 초록빛 눈동자가 안젤로를 응시했다. 안젤로는 순간 왠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눈을 돌려야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시선을 피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기경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봐?”
‘당신과 여자가 반나체 상태로 엉켜 있는 거요.’라고 말하기엔 안젤로는 담이 그리 크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새빨개진 얼굴로 쩔쩔맬 뿐이었다. 추기경은 심기가 불편한지 비스듬히 누운 채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벙어리인 건가? 분명히 내가 물었는데도 대답을 안 하니 말이야.”
추기경의 말에 안젤로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닙니다! 저, 전…… 그러니까…… 어…….”
“벙어리는 아닌데 말더듬이로군. 여기 왜 왔는지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서야 미사 때 낭독은 하시겠나?”
추기경의 비꼬는 말에 안젤로는 아까보다 얼굴이 더 새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워낙 눈앞의 광경이 파괴적이다 보니 할 말이 쉽사리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한참을 헤집고 나서야 안젤로는 간신히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저……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드시러 오시라고……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추기경은 안젤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안젤로는 될 수만 있으면 그 시선에서 얼른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추기경은 안젤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다시 한 번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네가 오늘 내 시중을 들 녀석이냐?”
“네…… 네. 그렇습니다.”
“변변찮군. 여기도 별로 즐겁진 않겠어. 가 봐.”
추기경은 귀찮다는 듯이 대충 말하고는 몸을 여자 쪽으로 돌려 그녀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여자가 간지러워 하면서 깔깔거렸다. 안젤로는 홀린 듯 가만히 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안젤로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벽에 등을 대고 몸을 기댔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추기경이라면, 신의 대리인인 교황을 보좌하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분들이 아니셨던가? 방금 내가 본 광경은 도대체 뭐지? 아니 그전에, 여자라고는 씨암탉 정도가 고작인 이 수도원에 도대체 무슨 수로 여자를 데려온 거야? 온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잖아??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사이에 여자를 데려와서는 저러고 있는 건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추기경이라면, 응당 추기경이라면 선지자처럼 성스러운 분이셔야 할 텐데. 이건, 이건…….
안젤로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생각에 현기증이 나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절로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시중들겠다고 자원한 게 급속도로 후회되었다. 저런 분을 상대로 무슨 시중을 들어야 할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행여 심기라도 거슬렸다간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할지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나타난 추기경은 좀 전과는 다르게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추기경의 붉은 옷이 그의 적갈색 머리와 잘 어울렸다. 그는 수도원장의 말에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이따금 비웃는 듯한 미소가 슬쩍슬쩍 입가에서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대체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이런 시골 수도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품이 있었다.
소박한 수도원의 음식에도 그는 불평 하나 없었다. 수도원장은 오랜만에 만난 귀한 손님 덕분에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그리고 추기경의 수행원인 기사 둘은 다른 이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형적인, 유쾌한 저녁식사였다.
그러나 안젤로는 그 모든 것을 마치 연극인 것처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추기경을. 안젤로가 보았던, 미끈한 상체를 드러낸 채 여자와 나른하게 누워 있던 그 청년이 지금 붉은 사제복을 입고 수도원장과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그때, 추기경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안젤로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젤로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추기경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젤로는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추기경은 곧 다시 수도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화 내용이 조금 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 시중을 들기로 한 사람이…….”
“아, 안젤로 수사입니다. 아주 신실한 형제죠. 물론 오늘 이미 그를 보셨겠지만요. 어떠셨습니까?”
“아, 물론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지는 못했지만…… 수도원장님의 말씀대로 아주 신실한 친구 같더군요.”
안젤로의 얼굴이 점점 더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안젤로의 고개는 점점 더 내려갔다. 그러나 추기경은 안젤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뭘 하는 친구입니까? 요즘 보기 드물게 신실하고…… 순수한 형제 같아서요. 사실 요즘 교회에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지 않습니까. 개탄할 일이지요. 그러다 보니 저렇게 순수한 이가 있다는 게 오히려 놀라워서 말입니다.”
“아, 안젤로 수사는 지금 약초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나이 들어 가는 구이도 형제를 대신해서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약을 만들어 주어야 하거든요. 개인적으로도 참 아끼는 형제입니다. 여기 수도원 문 앞에 요람에 싸여 버려져 있는 것을 저희가 키웠지요.”
“오, 과연 그렇군요. 그럼 지금까지 쭉 수도원에서 지냈을 테고, 세속의 때가 묻을래야 묻을 수가 없었던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차라리 이곳에 버려진 것이 그에게는 주의 축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만 말해 주세요……. 안젤로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아무도 안젤로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대화로 여겼을 따름이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안젤로는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저 추기경의 속셈이 무척이나 불안했다. 분명 자신에게 ‘변변찮다’고 말했던 주제에, 지금 와서는 갑자기 신실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칭찬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이제 밤이 되면 또 시중을 들어야 하겠지? 안젤로는 정말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안젤로의 생각이야 어떻던, 밤은 다가왔다. 어느덧 해는 지고 하늘엔 불그스름한 노을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안젤로는 추기경의 방에서 그의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촛대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고 벽난로에 불을 땠다. 아직 10월이었지만 산기슭에 위치한 이곳은 밤이면 제법 쌀쌀해지곤 했다. 안젤로는 모든 일을 끝마친 후, 허리를 쭉 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안젤로는 아마도 그녀가 말로만 듣던 ‘창녀’일 것이라 짐작했다. 나이 든 수사들이 해 주는 이야기 중에서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게 직업인 여자들이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간혹 남자도 그런 일을 하긴 하지만, 여자가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건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안젤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추기경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수행원인 기사 두 명이 있었다. 추기경은 안젤로를 보더니 뭐야, 하고 짧게 내뱉었다. 안젤로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저…… 죄, 죄송합니다. 침구를 정리하려고 왔는데…….”
“아, 됐어.”
추기경은 뒤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한 다음 문을 닫았다. 나가려고 했던 안젤로는 어리둥절해져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추기경은 의자에 대충 몸을 던지듯이 앉고는 안젤로에게 이리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안젤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에게 다가갔다. 추기경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너, 이름은?”
“안젤로…… 수사입니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제대로 말했다. 안젤로는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자신이 뿌듯했다. 물론 그전까지 한 바보짓은 너무도 창피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똑바로 하면 되겠지.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전 아까 말씀드렸듯이 침구를 정리하러…….”
“아니,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바본 줄 알아? 너, 약초 담당이라며. 그런데 니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안젤로는 당황한 듯 뺨을 긁적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딱히 다른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안젤로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기경님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거든요. 오늘 오셨을 때는 멀리서 뒷모습밖에 못 봐서…….”
“날 가까이 봐서 뭐하게? 죽이려고?”
추기경의 말에 안젤로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젤로는 손사래를 치며 당황해서 급하게 소리쳤다.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제가 누굴…… 그리고 죽인다니, 그런 무슨 무서운 말씀을……!!”
그 순간 안젤로의 눈에 추기경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단검이었다. 자신이 약초를 채집할 때 쓰곤 하는 그런 나이프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찌를 용도로 만들어진 검이 촛불 아래서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안젤로의 눈은 공포로 이제 동그랗게 커졌다.
추기경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한 발짝, 한 발짝 안젤로에게 다가왔다. 안젤로는 겁을 먹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안젤로의 목에 차가운 검신의 끝이 닿았다. 예리한 칼날은 조금만 움직여도 안젤로의 피부를 그어 피를 낼 것이다. 안젤로는 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한 채, 개암색 눈동자를 굴려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추기경의 녹색 눈동자는 촛불에 비쳐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네가 만약 암살자라면 지금쯤 도망가든지 나한테 덤비든지 했어야 했겠지. 그전에, 하는 행동 자체가 너무 멍청해서 도저히 암살자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수준이지만. 한번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그렇다면 이 칼은 제발 치워 주세요…….’라고 안젤로는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목의 서늘한 감촉이 그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추기경은 잠시 후 단검을 거두었다. 안젤로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추기경은 한심하다는 듯이 안젤로를 바라보았다.
“넌 도대체 뭐냐?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단순히 내가 추기경이란 이유만으로? 정말 그것 때문이야?”
“네…… 네. 추기경님이시잖아요. 교황을 보좌하는, 귀하신 분들.”
안젤로의 대답에 추기경이 기가 차다는 듯이 하!! 하고 낮게 혀를 찼다. 그는 몸을 굽혀 안젤로와 시선을 맞추고,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넌 정말 어리석구나. 우매한 백성 그 자체군. 내가 교황을 보좌한다? 교황이 정말로 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정말로 신의 율법을 수호한다고 생각하나? 교회가 신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조금도?”
낮게 깔린 목소리 위로 벽난로의 불빛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니, 추기경의 눈에서 타오르는 불빛이다. 그 불빛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 안젤로는 침을 삼켰다.
저 불빛은 위험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저 열기에 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추기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추기경님 말씀대로……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매하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 우리가 장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베푸는 것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수도원의 바깥은 조금도 모르지만, 분명 교회는 그러해야 하고 어딘가에는 그런 교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추기경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안젤로를 손에서 놔주고는 일어섰다. 안젤로 역시 엉거주춤 일어섰다. 추기경은 곧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그 상태로 침묵이 흐르고, 추기경은 약간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 봐.”
“아…… 넵. 저 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아까 그 여자분…….”
안젤로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다 이 질문은 왠지 무례해 보였다. 하지만 이왕 말 꺼낸 거, 이야기는 해야 했다. 추기경이 자신을 이렇게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저…… 그, 여자분은 어떻게 데려오신 건가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 계신가요?”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추기경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하고 웃어 버렸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뭐야, 너 몰라? 이 동네 사는 것 같던데. 이런 시골구석에도 괜찮은 창녀가 있어서 놀랐어. 여기에도 전에 여러 번 왔다던데.”
안젤로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는 걸 떠올렸다. 오다가다 마주쳤을 법도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추기경은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런 건 묻는 거지? 너도 꼴에 남자라고, 그 여자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그, 그럴 리가요! 저, 전 그저 궁금해서……. 신께 맹세코, 전 그런, 그런 작자가 아닙니다! 여자에게는 털끝만큼도 관심 없고, 또 그래야만 하고…….”
안젤로는 놀라서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어쩐지 속내를 들킨 것도 같아서 무척이나 창피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대충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추기경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가 말하는 그런 작자는 뭐지?”
“네? 그, 그야 여자와, 어…… 음…… 관계하는 그런 성직자 말이죠…….”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그런 작자는 바로 나겠군.”
안젤로가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추기경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안젤로는 뭔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기경의 눈빛이 차갑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혹감에 달아올랐던 얼굴이 빠르게 식어 갔다. 그 대신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넌 나와는 다르다는 말이지. 나는 타락한 성직자고, 너는 고결하고? 말해 봐라. 너는 내가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안젤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추기경의 질문은 위협적이었고 어떻게 대답하든 좋은 반응이 나오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이미 무례는 많이 저질렀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게다가 스스로도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추기경을 보니 왠지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안젤로는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믿었던 것과는 반대로, 추기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안젤로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추기경은 갑자기 몸을 움직여 안젤로에게 성큼 다가왔다. 안젤로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추기경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웃고 있었다.
“너, 정말로 재밌는 녀석이구나.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졌어.”
조금 전의 위압적인 분위기는 거짓말이었던 듯, 추기경은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오늘 처음으로 보는, 자기 나이에 맞는 상쾌한 웃음이었다. 추기경은 안젤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즐거운 듯 말했다.
“재밌는 생각이 났어. 아마 너도 즐거울 거야.”
추기경의 말에 안젤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손짓으로 안젤로를 방에서 내보냈다. 안젤로는 뭐에 홀린 듯 얼결에 방을 나오면서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추기경의 차갑고 선명한 녹색 눈동자와 그의 유쾌한 미소가 빙글빙글 돌면서, 혼란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가 있었다. 추기경의 일정은 촉박했고 오늘 내로 떠나야 할 몸이었지만, 미사를 집전해 달라는 수도원장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 대신 그는 미사가 끝나면 곧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안젤로는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본래 맡고 있던 약초의 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추기경이 맡게 될 미사 준비도 도와야 했다. 하루만이긴 하지만 시중을 자처한 주제에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추기경의 몸집에 맞을 만한 미사 집전용 사제복을 준비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던 참에, 누군가 안젤로를 불렀다. 수도원장님이었다.
“안젤로. 잠깐만 나와 이야기하자꾸나.”
무슨 일이지? 안젤로는 당황하면서도 수도원장을 따라갔다. 그들은 수도원장이 집무를 보는 크고 밝은 방으로 들어섰다. 수도원장이 의자에 앉자 안젤로도 엉거주춤 마주 보는 의자에 앉았다. 수도원장은 주름진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안젤로야, 로마에 가보고 싶지 않으냐?”
안젤로는 수도원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잠깐 멍해졌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되물었다.
“네?”
수도원장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그득히 띤 채,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추기경 예하께서 너를 로마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다.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시더구나.”
하느님 맙소사. 안젤로는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안젤로의 머릿속에서 어제 추기경의 웃음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그 ‘재밌는 생각’이란 말인가? 안젤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수도원장은 안젤로가 깜짝 놀랐다고만 생각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깜짝 놀랐단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싶구나. 너에겐 분명 좋은 기회일 게다. 너는 지금까지 여기에서만 줄곧 살아서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이참에 도시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수도원장은 가볍게 안젤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애정이 담긴 몸짓이었다. 수도원장은 가만히 안젤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인자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 분명 너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내 너를 아들처럼 생각하기에, 조금 아쉽기도 하구나. 하지만 네가 추기경 예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단다.”
수도원 앞에 버려졌던 자신을 주워서 지금까지 키워 준 분이었다. 안젤로도 마찬가지로 수도원장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다고,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수도원장의 얼굴을 바라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안젤로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어 보였다. 수도원장도 그를 마주 보며 함께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