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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유달리 조용한 미사였다. 성가를 연주하는 낡은 파이프 오르간의 삐걱거림이 이따금 거슬릴 뿐이었다. 추기경의 목소리는 젊었지만 깊었다. 정확하고 우아한 라틴어 발음으로 읊는 성경구절이 아치형 기둥 사이사이로 파문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장미창을 통과한 색색깔의 햇빛이 추기경의 붉은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위에서 부서졌다. 안젤로는 눈을 깜박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사람은 완벽한 성직자였다. 그의 표정은 경건했고 목소리는 진지했다.
“기도합시다.”
추기경의 말에 다들 몸을 일으켰다. 안젤로는 넋 놓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허둥대며 벌떡 일어섰다. 추기경이 포도주가 담긴 잔을 높게 들어올렸다. 옆에서 어린 복사가 종을 쳤다. 성당 안을 가득 메우는 소리와 함께 안젤로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곧 영성체를 받을 시간이었다.
안젤로는 천천히 영성체를 받으러 가는 줄에 합류했다. 추기경이 앞에서 순서대로 영성체를 나눠 주고 있었다. 가능하면 추기경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자꾸 밀려오고 있었다. 안젤로는 마치 억지로 밀쳐지는 듯한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가능한 느리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곧 안젤로의 차례가 다가왔다.
추기경은 안젤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안젤로는 그를 향해 입을 벌렸다. 추기경은 얇은 밀떡을 안젤로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밀떡이 혀에 닿는 것과 동시에 추기경의 엄지손가락이 안젤로의 입술에 닿았다. 그 손가락이 안젤로의 입술을 훑듯이 매만졌다. 안젤로의 눈과 추기경의 눈이 마주쳤다. 추기경의 녹색 눈은 웃고 있었다.
안젤로는 손길에 담긴 게 무슨 의미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추기경은 손을 뗐고 안젤로는 서둘러 줄을 벗어나 자리로 돌아갔다. 앉고 나서도 자꾸 얼굴이 붉어지고 그가 만졌던 입술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경건하게 기도를 할 시간이건만, 입속에서 녹아 가는 밀떡과 함께 머릿속도 같이 녹아 가는 것 같았다.

추기경의 출발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젤로는 단 한 시간 만에 모든 짐을 다 꾸려야만 했다. 물론 짐이 많지는 않았다. 조그만 등짐 하나가 전부였다.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작별 인사였다. 지금껏 평생을 살아온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다. 수도원의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추기경의 호위 기사가 재촉해서 결국 수도원장님과, 같은 방을 쓰던 형제들 그리고 안젤로 이전에 약초 담당이었던 구이도 형제와 인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도원장님은 안젤로를 꼭 껴안아 주면서 말했다.
“신이 너와 함께 하실 게다.”
“감사합니다, 수도원장님.”
왠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애써 괜찮은 척 웃으면서 안젤로는 작은 조랑말에 올라탔다. 옆의 기사들과, 추기경의 크고 늠름한 말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초라했지만, 이 작은 수도원에서는 이 조랑말이 그나마 제일 큰 동물이었다.
추기경이 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기사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안젤로도 고삐를 당겼다. 사람들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안젤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도원의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산굽이에서, 마침내 사람들이 점으로 보일 때까지, 안젤로는 줄곧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수도원이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됐을 무렵, 추기경이 안젤로에게 다가왔다. 그는 예의 장난치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때, 느낌이?”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안젤로의 말에 추기경은 흐음, 하고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안젤로는 조심스럽게, 계속해서 마음속에 맴돌던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절 데려가기로 하신건가요?”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이었다. 추기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었던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 안젤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자에게서 상식적인 대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안젤로는 좀 더 단순한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추기경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대답은 빨랐다.
“니콜라. 니콜라 알바네제.”


#2. 내기

로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도시다. 기나긴 역사와 시간과 사건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가장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폐허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른 건물과 집을 짓고 살아간다. 로마 시대의 울퉁불퉁한 돌길 위로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낡은 대리석 건물 사이로 들어찬 시장. 귀족과 추기경의 거대한 마차 사이로 작고 지저분한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른다. 다 부식된 아치형 수도교 너머로 청동 기마상이 조그만 광장 중앙에 자리 잡고, 노점상은 그 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물건을 판다.
안젤로는 그 모든 것을 경이에 가득 차 둘러보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이토록 커다란 건물들이 존재하는 것을, 이토록 수많은 혼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다. 안젤로는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기에 바빴다.
그때 누군가 안젤로를 툭 쳤다. 니콜라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로마까지 오는 동안 친해질 법도 하건만, 호위 기사들은 도통 말이 없었다. 그들은 한낱 평수사인 안젤로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안젤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함부로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안젤로가 알아낸 것은 그들의 이름 정도가 전부였다. 세르지오란 이름의 각진 얼굴의 호위 기사는 언덕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우리 목적지다. 정신 팔리지 말고 잘 따라와라.”
언덕 위에는 웅장한 저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 사이로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저택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지저분한 뒷골목, 혼란스러운 언덕 아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르지오가 가리킨 곳은 그 저택들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저택이었다. 바로 알바네제 가문의 저택이었다. 안젤로는 왠지 주눅이 드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일행의 뒤를 따라갔다.
저택의 문지기는 안젤로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거칠고 낡은 수도사복을 입은 안젤로가 우아하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호위 기사, 그리고 붉은 옷의 추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분명히 니콜라가 떠날 때는 없었던 존재였기에 문지기는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안젤로를 노려보았다. 그때 니콜라가 손을 들어 말했다.
“마르코를 불러와. 아참, 그리고 뒤꽁무니에 붙어 있는 놈 있지? 내가 데려온 놈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그들을 맞으러 서둘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니콜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예하, 사냥 여행은 어떠셨는지요.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거 없었어. 그냥 몇 마리는 죽이고, 몇 마리는 놓치고. 실수로 너무 멀리 나가 버렸지만.”
“그래도 문제가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남자의 말에도 니콜라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다른 하인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때 마침 뭐가 생각난 듯 갑자기 남자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아참, 마르코. 저기 이번에 내 시종으로 쓸 놈을 데려왔어. 방이랑 그런 것 내주고. 잘 씻겨서 오늘 내 목욕 시중을 들게 해.”
마르코는 니콜라의 말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호위 기사의 거대한 말 뒤로 조그맣게 앉아 있는 안젤로를 발견했다.
“음? 그런데 저분은 수도사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냥 하라는 대로 해. 평수사 한 명쯤 시종으로 쓴다고 해서 문제될 거 있나.”
“알겠습니다.”
마르코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차피 니콜라의 기행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하인들에게 눈짓해 호위 기사의 말을 마구간으로 보내게 하고, 다른 하인에게도 뭐라 지시를 하더니 곧장 안젤로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안젤로입니다.”
“그럼, 안젤로 씨. 일단 말에서 내려서 저 하인에게 넘겨주십시오. 마구간으로 보내서 쉬게 해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안젤로 씨가 머물 방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얼 해야 할지도 알려 드리지요.”
안젤로는 어리둥절해졌다. 니콜라와 마르코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들렸지만,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일단 알려 준다니까 선선히 마르코의 말에 따랐다.
저택은 1층 중앙에 위치한 정원을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벽과 원주가 줄 이은 1층 복도를 따라가니 발코니와 머물 수 있는 방들이 있는 2층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 한참을 걸어가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화려한 저택과는 달리 방 안은 검소했고 필요한 것만 갖춰져 있었지만, 수도원의 방에 비하면 무척이나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침대가 하나뿐인, 혼자 쓰는 방이었다. 마르코는 점잖은 태도로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짐을 여기 푸시고 목욕탕으로 가십시오. 목욕탕은 저쪽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알바네제 추기경 예하의 시중을 들어야 하니, 내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저택의 규칙은 무엇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지금은 추기경 예하의 목욕이 먼저이니 그것부터 도와 드리십시오.”
“네?? 시중이요?”
안젤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르코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그럼 뭘 하는 걸로 알고 계셨습니까? 추기경 예하께서 직접 지명하신 일이니 따라주십시오.”
안젤로는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시중이라니? 자기는 수도사인데? 물론 평수사일 뿐인 자신을 손님으로 대접한다는 건 기대조차 안했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여기 갈아입을 옷과 수건이 있습니다. 목욕 후에는 이걸로 갈아입으십시오.”
마르코가 옷과 수건을 내려놓았다. 옷은 하인들이 입는 그런 옷이었다. 안젤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젤로는 수건만을 집어 들고 옷은 마르코 쪽으로 슬쩍 밀어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수도사이므로 이런 옷은 입을 수 없습니다.”
마르코는 의외라는 듯 안젤로를 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수했군요. 그럼 혹시라도 궁금한 사항 있으면 다른 하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럼 이만.”
마르코는 예의 바른 태도로 문을 닫고 나갔다. 안젤로는 멍하니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람. 어리둥절한 일의 연속이었다. 안젤로는 한숨을 푹푹 쉬다가, 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목욕탕에 가라고 했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하라고 한 일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안젤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욕탕은 수증기로 자욱했다. 난생처음 목욕탕이라는 곳에 와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안젤로에게 다른 하인들이 손짓했다. 안젤로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들이 말했다.
“일단 시중을 들기 전에 먼저 씻으십시오. 여행을 한 더러운 몸으로 목욕 시중을 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쭈뼛쭈뼛하며 다른 하인들이 일러 준 대로 씻고 나서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목욕탕 안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목욕탕이 원래 이렇게 큰 곳인가? 안젤로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목욕탕이란 델 가 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없었다.
문이 열리고, 후끈한 수증기가 훅 끼쳐 왔다. 자신을 안내했던 다른 하인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수증기 사이로 욕탕에 앉아 있는 형체가 보였다. 안젤로는 천천히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니콜라가 물속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안젤로를 발견하고 웃어 보였다.
“여어.”
저번에도 보았던 것이지만, 니콜라의 상체는 대리석 조각상처럼 미끈하고 희었다. 안젤로는 수건 하나로만 가리고 있는 자신의 앙상한 몸이 문득 창피하게 느껴졌다. 안젤로는 주춤주춤 니콜라 근처에 앉았다. 니콜라는 기분이 좋은지 쾌활한 어조로 안젤로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이 욕탕. 로마에서 이런 욕탕을 가진 저택은 여기뿐일걸.”
“그렇군요……. 확실히 크네요.”
안젤로는 니콜라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욕탕 안에서 수영해도 될 만큼 무척이나 컸다. 안젤로가 감탄하는 사이에 니콜라는 안젤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안젤로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콜라는 짓궂게 웃으면서 안젤로의 팔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풍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젤로는 물에 빠졌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안젤로는 벌떡 일어섰다. 무척이나 뜨거운 물에 그대로 몸을 처박았으니 괜찮을 리가 만무했다. 거기다가 코로도 입으로도 물이 들어가 죽을 맛이었다. 안젤로는 캑캑거리며 비틀거렸다. 그때 니콜라가 손가락으로 안젤로를 가리켰다.
“거기.”
어느새 수건이 벗겨져 있었다. 안젤로는 얼굴이 새빨개져 황급히 두 손으로 국부를 가렸다. 하지만 계속 니콜라는 그것도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안젤로는 그대로 물속에 풍덩 앉아 버렸다. 물이 매우 뜨거웠지만 창피함에 달아오른 몸이 더 뜨거웠다. 안젤로는 얼굴의 반만 물 위로 내밀고 니콜라를 노려보았다. 니콜라는 큭큭거리며 신나게 웃고 있었다.
니콜라는 손을 뻗어 안젤로의 팔을 잡았다. 안젤로는 흠칫 놀랐지만 감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니콜라는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럽게 안젤로를 끌어당겼다. 곧 안젤로는 니콜라의 몸에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상태가 되었다. 물 아래긴 하지만 둘 다 알몸이고 피부가 거의 맞닿을 지경이라 안젤로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추기경 앞에서 감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니콜라는 여전히 안젤로의 팔을 잡은 채, 싱긋 웃으며 질문했다.
“너 사실 여기 있기 싫지? 내 시중드는 건 더 싫고.”
마치 자기 마음을 읽은 듯한 질문에 안젤로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하지만 결국 안젤로는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다.
“……네.”
하지만 니콜라는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럼, 나랑 내기하자.”
“……네?”
안젤로가 멍하니 되물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지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니콜라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는 손을 까딱거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기하자고. 네가 내기에서 이기면 수도원으로 돌려보내 줄게. 하지만 만약 내가 이기면…… 넌 평생 내 시중을 드는 거야.”
“내기 내용이 뭔데요?”
니콜라가 붙잡고 있던 안젤로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어느새 안젤로는 니콜라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안젤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웠다. 니콜라의 얼굴도, 몸도. 니콜라는 한쪽 손으로는 계속 안젤로를 붙잡은 채, 한쪽 손으로는 안젤로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젤로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더 박아 달라’고 애원하면 내가 이기는 거고,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네가 이기는 거고. 기한은…… 그래, 내가 네 몸에 질릴 때까지로 하지.”
안젤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니콜라의 손은 안젤로의 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가슴으로 이동한 뒤,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니콜라의 입술이 안젤로의 입술로 서서히 다가왔다. 안젤로는 애써 니콜라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빼빼 마른 안젤로의 팔 하나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안젤로는 거의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 하기야 넌 모를 수도 있겠구나. 동정이지?”
안젤로는 동정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뭔지도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젤로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역시. 흐음……. 설명을 해 주자면 말이야…….”
니콜라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안젤로의 중심을 움켜쥐었다. 안젤로는 화들짝 놀라 버둥댔지만 이미 안젤로는 니콜라에게 단단히 안겨 있었다. 니콜라는 안젤로의 귀에 속삭였다.
“우린 이제부터 매일 밤 이런 걸 할 거야. 네가 참아 낼 수 있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넌 이기는 거야. 하지만 네가 이런 걸 너무 좋아하게 된다면, 그래서 더 해 달라고 애원하게 된다면 말이야…… 그러면 너도 소위 말하는 타락한 성직자가 되겠지. 나처럼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내가 이기는 거야. 어때? 물론 자신 없으면 안 해도 좋아.”
안젤로는 깜짝 놀라 니콜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니콜라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고 있었다. 안젤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난 지금 장난감이 된 거구나.
안젤로의 몸이 갑자기 확 식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안젤로는 니콜라의 몸을 뿌리쳤다. 갑작스런 행동에 니콜라는 깜짝 놀라 안젤로를 보았다. 안젤로는 벌떡 물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안젤로를 보는 니콜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똑똑히 말했다.
“그 내기, 받아들이죠. 그럼 이만.”
그리고 안젤로는 떨어져 있던 수건을 집어서 몸에 두른 다음 욕탕에서 나갔다. 안젤로는 굳은 얼굴로 니콜라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니콜라는 멍하니 안젤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는 청량한 웃음소리가 욕탕 안에서 메아리를 일으키며 울려 퍼졌다. 니콜라는 안젤로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그럼 내기는 내일부터다!!”
안젤로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니콜라는 흡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재밌어질 것 같았다.

*

하인이 찾아온 것은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차피 안젤로도 새벽에 일어나는 수도원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별 불만은 없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제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탓이다. 안젤로는 까맣게 변한 눈 밑을 문지르며 하인을 따라나섰다. 하인은 이전까지 니콜라의 시중을 담당했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매일 추기경 예하가 일어나신 뒤에 이불을 정리하도록 하십시오. 시트는 이틀에 한 번씩 교환하지만 혹시라도 시트가 더러워져 있으면 세탁실로 당장 가져가야 하는데, 세탁실은 저기 동쪽 복도 끝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하께서는 아침에는 무척 예민하시니 아침 일찍 깨우지 마십시오. 적어도 9시는 지난 후에 깨우시고, 또…….”
하인의 말은 도통 끝날 줄을 몰랐다. 안젤로는 최대한 귀담아 들으려고 했지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때 안젤로의 귀에 의외의 단어가 들렸다.
“아, 하지만 긴급한 볼일이 있을 때는 예외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이따금 방문하시는데, 그럴 때는 지체 없이 추기경 예하를 깨워야 합니다.”
“교황 성하라구요?”
안젤로의 질문에 하인이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원래대로 표정이 돌아가더니 딱딱하게 대답했다.
“네. 교황 성하께서 이따금 이곳을 방문하십니다. 그럴 때는 절대로 결례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보통은 마르코 하인장님이 시중을 들 테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교황이라니, 안젤로는 가슴이 요동쳤다. 베드로의 후예, 가톨릭의 반석, 신의 대리인이 아니셨던가! 여기에 그분이 온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분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안젤로는 흥분에 가득 차서 다시 질문했다.
“저, 교황 성하는 무슨 일로 여기 방문하시곤 하나요?”
“가족을 보는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인의 말에 안젤로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가족이요?”
“네. 알바네제 추기경 예하는 교황 성하의 조카입니다.”
안젤로는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교황과 직접적인 혈연이 있을 줄이야. 니콜라는 자신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자기 예상이야 어떻든 자신과는 말도 섞을 이유가 없는 존재긴 했다. 안젤로는 낮게 감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니콜라가 어제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순간 안젤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안젤로도 지금 자신의 얼굴을 덥히는 것이 분노인지, 치욕감인지, 창피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어제도 이것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또 이렇게 생각해 버리다니. 안젤로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사이 하인은 어느새 다른 주제로 넘어가 신나게 또 안젤로가 뭘 해야 하는지 줄줄줄 읊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안젤로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안젤로의 머릿속에서 어젯밤 니콜라가 한 행동에 대해서 분석하고 싶은 욕구와 그냥 잊어버리려는 욕구가 충돌해서 어느새 양자 토론을 벌이다가 마침내 잊어버리려는 욕구가 기나긴 사투를 끝내고 분석욕구를 짓밟고 올라서 승리의 함성을 지르려는 순간, 하인은 마침내 설명을 끝냈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이 정도인데, 혹시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기 바랍니다. 수고해요.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인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안젤로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인은 어느새 쌀쌀맞게 몸을 돌리고 떠나가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안젤로는 왠지 주눅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후 모든 하인들이 자신을 굉장히 사무적으로만 대하고 있었다. 물론 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무언가 자신을 손대선 안 되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안젤로는 몸도 마음도 피곤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뜨고, 니콜라를 깨울 시간이 다가왔다. 안젤로는 하인이 일러 준 대로 작은 물병과 컵을 들고 니콜라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안젤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척이나 커다란 방이었다. 여기서 미사를 열어도 될 만큼 컸다. 넓은 창문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침대 위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소파 옆에 서 있는 청동 조각상을 지나서, 커다란 프레스코화가 걸려 있는 벽 쪽으로 안젤로는 천천히 걸었다. 섬세한 문양이 조각된 작은 서랍 위로 물병과 컵을 내려놓고,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의 커튼을 걷었다.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 니콜라가 잠들어 있었다. 안젤로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추기경 예하,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하지만 니콜라는 조금도 듣지 못한 듯 미동도 없었다. 안젤로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예하, 일어나세요!”
그제야 니콜라는 부스스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채 부스스 일어서서 눈을 비비다 안젤로를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는 아직 덜 풀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맞다. 너 데려왔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