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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알 수 없는 말이 비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저 같은 사람이라고? 찬은 고개를 삐딱하니 틀고 비야를 쳐다보았다. 그런 찬의 모습에 비야는 픽 하고 웃어 버렸다.
“그래서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아.”
“무슨…… 소리야?”
찬이 미간을 모은 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물었다.
“훗, 강찬. 출출하지 않아? 우리 편의점 라면 먹자. 어때?”
“싱거운 자식.”
찬은 픽 웃으며 비야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날 이후로 비야는 자신보다 두 시간 더 늦게 끝나는 찬을 기다리고는 했다. 본래는 끝나자마자 집에서 과외를 했는데, 그냥 그만뒀다고 말했다. 찬은 그 이유가 자신임을 알았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보던 비야는 자신을 바라볼 때, 유독 눈을 빛내고는 했으니까.
학교에는 금세 소문이 퍼졌다. 차갑고 도도한 전교 일등이 외국에서마저 쫓겨 온 안하무인 강찬에게 빠졌다고. 그것은 찬이 다음 대권 후보로 유력한 국회의원 강원욱의 손자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바로 다음 일이었다. 찬을 괴롭혔던 녀석들도 그 대단한 배경에 제풀에 꺾여 버렸다. 그리고 둘은 전교생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안에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은 뒤에서 속닥거리는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비야는 어김없이 찬을 기다렸고, 찬은 누구보다 빨리 교실을 빠져나와 비야와 함께 하교를 했다. 그건 찬이 전학 온 이후 늘 빼먹던 야간 자율 학습을 꼬박꼬박 받는다는 의미였다. 찬의 성적은 점점 더 좋아졌다. 그리고 늘 화가 난 것만 같던 얼굴도 조금씩 부드럽게 풀어졌다. 물론 그건 비야와 함께 있을 때에만 해당되는 변화였다.
“내가, 네 여자 친구래.”
하굣길, 말이 없던 비야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듣기 싫었어?”
비야의 말에 찬이 빙글거리며 물었다
“아니.”
찬의 빙글거리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응. 좋았어. 넌 잘생겼잖아.”
“훗.”
비야의 말은 의미와는 달리 참으로 심드렁했다. 찬은 그에 웃음이 났다.
“잘생겼어, 내가?”
그래서 부러 되물었다.
“잘생겼어.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그렇게 난리들이지.”
“네가 내 여자 친구인 줄 안다며?”
“그래도 난린 걸 보면 정말 잘생겼다는 얘기야. 알다시피 네 성격이 좋지는 않잖아?”
비야가 새침하게 말하자 찬은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그렇지. 자신의 성격은 좋지 않다. 그나마 이렇게 비야와 함께 있을 때 말고는 여전히 차갑고 사나우니까.
“왜 내 구역에 널 들여놓았을까?”
찬은 마음이라는 말 대신 항상 구역이라는 말을 썼다. 별로 듣기에 좋지만은 않았지만 비야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네 말처럼 나와 네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서?”
“지금에 와서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않아. 이미 넌 내게 가장 중요한 녀석이니까.”
“황송해야 하는 건가?”
비야가 삐뚜름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찬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찾았어.”
“……응.”
비야는 찬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달라 부탁했다. 자신이 움직이기엔 아버지의 눈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었다.
“놀라지 않네?”
“찾아줄 줄 알았으니까.”
“그래.”
“어디에 있어?”
“뉴욕 암 센터. 꽤 유능한 분이래.”
“……그렇구나.”
“비야…….”
“이제 엄마 얘기는 하지 말자. 어디에 있는지 안 걸로 됐어.”
“보고 싶으면…….”
“하지 마, 아무 말도.”
“…….”
단호한 비야의 말에 찬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찬아.”
“응.”
“아빠가 알면 안 돼. 아빠가 알면 엄마가 됐든 내가 됐든……. 그대로 두진 않을 거야. ……알아?”
비야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찬을 향해 물었다. 무얼?
“가장 두려운 건, 버림받는 거야.”
“겁쟁이.”
찬이 천천히 뇌까렸다. 하지만 그에 비야는 곧바로 응수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도 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만큼 너도 겁쟁이잖아.”
찬은 뻔히 아버지인 걸 알면서 할아버지라 불렀다. 제 형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형수님을 어머니라 불렀다. 싸늘한 할머니의 눈초리를 견뎌내며 밖에서는 방황하는 십대를 연기하고 있었다. 겁쟁이라…….
그래. 겁쟁이.
“빌어먹을. 털어놓는 게 아니었어.”
짜증난다는 듯 찬이 비야를 향해 중얼거렸다.
“훗.”
그에 비야가 슬쩍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찬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런 비야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 걸었다.
“사탕 있어?”
찬이 담배 연기를 허공에 뿌리며 비야에게 물었다.
“아니.”
“쳇. 어떻게 매번 딱딱 개수를 맞춰 가지고 다녀? 담배가 끝이면 사탕도 끝? 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사탕도 없어. 아아. 이거 담배 끝에 먹는 박하사탕 은근히 중독이야. 봉지째 가지고 다니면 안 돼?”
“네가 가지고 다니면 되겠네.”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비야가 말했다. 그에 찬은 또 얼마간을 투덜댔다.
“자.”
비야는 집 앞에 다다르자 찬의 손에 담배 한 개비와 박하사탕 하나를 쥐여 주었다.
“뭐야? 있었어?”
찬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응.”
“근데 왜 아까는 안 줬어?”
“내 담배에 짝이 안 맞잖아.”
“하여간 싱거운 녀석.”
찬이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가.”
“응.”
벌써 몸을 틀고 손을 휘휘 저어 대는 찬의 뒷모습을 비야는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는 것이 괜스레 아쉬워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에 아쉬움이 더해져 조금씩 아플 것 같다는.


2장



해사한 얼굴을 한 채 찬의 팔에 매달려 있는 건, 유란이었다. 한국대에서도 꽤 유명한 퀸카 중의 퀸카. 아마도 이번엔 김유란, 저 애인가 보다. 비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후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휑한 바람, 그리고 찬의 새로운 여자. 괜스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훗.”
하지만 비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면역이 생겼는지 가슴은 이제 전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아아, 다른 여자구나, 할 뿐이다 . 한데 그런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와 버렸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뭐 그 같은 생각이 든 탓이다.
“왜 웃어?”
비야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빙긋 웃으며 묻는 세훈이 보였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건만 항상 세훈은 자신을 살갑게 대하고는 했다. 하긴, 세훈은 워낙에 활달하고 발이 넓은 녀석이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한 것이 세훈의 성격이라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오늘은 혼자네?”
세훈이 저쪽에서 유란과 함께 걷고 있는 찬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응. 보시다시피 찬이에게 어여쁜 여자찬구가 생긴 모양이야.”
“황비야.”
“응.”
“난 네가 찬이의 특별한 여자 친구인 줄 알았어. 그래서 너에게 가려던 마음을 포기했더랬지.”
“훗, 아깝네.”
세훈의 말에 비야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넘겼다.
“찬이의 어디가 널 잡아두는 걸까?”
섣불리 알은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세훈의 그 말에 비야는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뿐, 비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훈은 그런 비야의 눈치를 살짝 보아가며 여전히 비야의 곁에서 걷고 있을 뿐이었다. 우뚝. 비야가 걸음을 멈췄다. 한 걸음 더 나아갔던 세훈이 멈춘 비야를 느끼곤 비야를 돌아보았다.
“내 말, 기분 나빴니?”
“안 가니?”
“가는 중이야.”
“나랑 어디까지 함께 갈 건데?”
“글쎄…….”
세훈이 빙글 웃으며 말을 끌었다.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차나 한잔할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비야에게 느릿한 어조로 세훈이 말했다.
“훗.”
“그 웃음은 수락한다는 뜻이지?”
이젠 아예 대놓고 빙글거리며 묻는 세훈이었다. 항상 웃는 낯이던 세훈은 저렇듯 활짝 웃을 때면 빛이 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러워했더랬다. 부러워만 했더랬다.
“배가 고파. 차는 됐고, 밥이나 먹어. 괜찮아?”
비야의 말에 더 활짝 피는 얼굴. 그것을 바라보며 비야는 생각했다. 정말 예쁘다. 부럽다. 거리낌 없이 저렇듯 활짝 웃는 얼굴이 될 수 있다니. 온통 제 세상인 듯 밝은 그 모습이 정말이지 부럽다.
“좋지. 먹고 싶은 건?”
“칼칼한 김치찌개.”
“훗.”
“왜 웃어?”
“넌 스테이크나 스파게티가 어울릴 것 같거든.”
“저런, 네가 아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내가 깼나보구나?”
“훗, 그런 건 아니야. 의외로 좋아. 고급스럽지만은 않아서.”
세훈의 말에 비야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고급스럽다…… 자신의 출신 성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회사인 태성은 그만큼 거대하고 견고한 궁전이니까.
“죽이는 데를 알아. 조금만 걸으면 돼. 차는 두고 가자.”
“그래. 죽이지 않으면 가만 안 둬.”
세훈의 말에 비야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나란히 캠퍼스를 벗어났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찬의 시선은 모른 채.


“어때? 죽이지?”
“응. 죽여.”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비야가 재밌어 이번엔 세훈이 픽 웃었다.
“넌 사는 게 즐겁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 잔을 집어 들며 비야가 세훈에게 물었다. 세훈은 그렇게 묻는 비야의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설핏 비꼬는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지나치듯 별 의미 없이 물은 말 같기도 했다.
“그러는 넌 사는 게, 별로야?”
“그냥…… 살아.”
무덤덤한 말에 세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경이 쓰였다.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무표정한 얼굴, 무겁게 내려앉은 눈빛. 한데 그것이 찬을 바라볼 때면, 그와 함께일 때면 달라졌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부러워졌다. 비야의 눈을 반짝거리게 만든 찬이. 늘 비야의 시선 끝에 머물러 있던 찬이.
“그러지 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에 비야의 눈이 흔들렸다. 세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눈이라니.
“쉬운 게 아냐.”
“찬일 놓지 못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