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여비서






1화


제1 장



평창동. 고급 대 저택의 2층.
방 문 앞에서 노크를 하기 전, 신희는 한 번 더 심호흡을 골랐다. 그런 다음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이 정도면 우현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제법 오래 기다려준 셈이리라.
신희는 마지막으로 늘씬한 몸에 딱 붙는 정장의 깃 여기저기를 정돈하고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커다란 창가 쪽에 장승처럼 서 있는 키가 큰 화분이 보였다. 그녀가 5년 동안 우현의 비서로 있으면서 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저 화분일 것이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중 한 명인 임 씨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저 화분에는 우현의 생모의 유해가 뿌려져 있다고 했다. 우현의 나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보석 방을 운영하며 몰래 숨어 살던 생모가 죽었는데, 우현이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후 혼자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저 화분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기하게 단 한 번도 이파리가 시든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희는 우현의 방에 들러 저 화분을 볼 때마다 섬뜩해 하곤 했다. 우현이 유성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로 상무이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아직 유성그룹이나 이 가문에 완벽하게 속하고 있지 못하고 주위만 맴도는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들어왔으면 내 얼굴을 봐야지, 뭘 보고 있는 거지?”
잠이 묻은 나른한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려왔다. 신희는 순간적으로 굳어진 어깨를 살짝 푼 후 그쪽으로 돌아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잘 훈련된 인사를 건넸다.
“아……일어나셨습니까? 상무님?”
“보다시피.”
우현은 침대에 누워 한 쪽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신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제법 또렷하여 마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신희는 스윽 스치듯 다 벗은 그의 상반신을 지나쳐, 바람에 날리고 있는 커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창문을 닫을까요? 3월 초라 아직 바람이 차갑습니다.”
“놔 둬. 시원한데. 당신 묶은 머리칼이 날리는 게 보기 좋기도 하고. 목을 조인 리본 끈이 흔들리는 게 보기 좋기도 하고.”
쿡쿡대는 웃음과 함께 그가 말했다. 농담이 진하게 섞인 말들, 비스듬한 입가에 매달린 조소. 우현이 그녀를 볼 때마다 장난하듯 놀리듯 말하고 쳐다보는 것에는 이제 이골이 나 있다. ‘유비서’가 아닌 ‘당신’이라는 호칭도 지금은 별스럽지 않다. 서른 살이나 먹고 아직도 그룹의 회장님이신 모친에게 반항하듯 대하는 것에도 이제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룹의 직원들이 우현을 향해 ‘개망나니’라고 몰래 손가락질을 하는 것도 나 몰라라 하게 되었다.
김우현, 그는 절대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신희는 5년 간 비서로 일하면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오늘 일정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후 2시에 울산 유성자동차 제3 공장 방문이 있습니다. 저녁 6시에는 유성자동차 박민재 사장님과 그곳 지부장들과 만찬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주에 있을 창립 기념식 파티에 입으실 정장을 주문하기 위해 치수를 재어야 합니다.”
“당신, 그 목걸이 왜 안 했어? 내가 준 거.”
신희가 준비해 온 줄자를 주머니에서 꺼내려는데 우현이 대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질문을 돌연 해왔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신희는 당혹감에 입술 안쪽을 살짝 깨어 물었다. 하지만 곧장 5년 동안 단련된 냉정함을 얼굴에 드러내며 우현을 똑바로 마주했다.
“일주일에 이틀 밖에 출근을 안 하시니 모든 일정을 그 이틀에 다 구겨 넣어야 합니다. 그걸 잘 아실 테니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상무님. 오늘은 무척 바쁩니다.”
“다시 묻지. 왜 그 목걸이를 하지 않지? 나 같은 개망나니가 준 거라 불쾌하단 건가?”
헉! 개망나니라니. 그의 입에서 그 단어가 쏟아지자 신희는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직원들이 우현을 두고 저들끼리 수군덕거리는 그 단어가 정작 그의 입을 통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설마 직원들이 뒤돌아서 그를 흉보는 것에 대해 그가 모두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아뇨. 그저 제 취향이 아닐 뿐입니다.”
목걸이의 행방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절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여서, 신희는 대뜸 그렇게 대답했다. 그 목걸이는 지난주에 호텔리조트 합작 건으로 홍콩출장을 다녀온 우현이 그녀에게 건넨 파란색 벨벳상자 속에 담겨 있었다. 회장님의 성화에 못 이겨 꾸역꾸역 출장을 간 것이지만 그것조차 대견하고 기특하여, 신희는 그걸 마지못해 받았다. 하지만 열어보지도 않고 책상에 툭 던지듯 놔두었었다.
“그럴 리가. 난 예쁜 여자를 스캔할 땐 매우 섬세해.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하니까. 홍콩에서 그 목걸이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당신을 떠올렸지. 당신은 흔한 다이아몬드보다 바로 그 라피스라줄리가 어울릴 여자야. 아주 차갑고 도도하거든. 틀림없이 마음에 들었을 텐데?”
“다음에……기회가 되면 반드시 착용하겠습니다.”
“다음에 언제?”
“다음에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신희는 말끝을 흐렸다. 그 목걸이를 건 모습을 우현에게 보여줄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줄자를 든 손에 힘을 주며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은 늘 그랬듯 무감해 보였다. 신뢰감을 주는 안정된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늘 한결같다. 5년 동안이나 봐왔지만 여전히 저 여자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주로 어떤 때에 웃는지, 웃을 땐 어떤 모습이 되는지, 울 땐 어떤 얼굴이 되는지, 우현이 신희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웃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필요에 의해서일 뿐, 한 마디로 보여주기 용 미소인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돌아볼 법한 아름다운 외모와 남자를 자극시키는 나긋나긋하고 여린 몸매를 가졌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무기로 사용할 줄을 모른다. 어떤 일에도 절대 마음을 내보이지 않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질리도록 무표정한 저 얼굴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 씩 그녀를 돌아보게 된다. 우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맞는 것인지 무뚝뚝한 그녀의 표정을 통해 일일이 확인하고 체크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를 재차 돌아보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돌아보면,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늘 있었다.
5년 전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앞으로 자신의 비서 일을 맡게 될 거라며 인사를 하던 그녀의 모습은 지나치게 단정해 보였다. 그때가 갓 대학을 졸업했을 때였으니 지금 그녀는 스물여덟이다. 한 치의 실수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처음과 끝이 완벽하게 맞물린 행동이 저토록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에게서 보이는 것이 제법 신기하기까지 했다. 목까지 채워진 블라우스의 단추, 늘 흰 톤을 유지하는 소매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남김없이 모두 뒤로 넘겨 묶은 긴 머리칼까지.
모든 것이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고 무질서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자신의 삶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완벽해 보이는 여자였다.
지금도 항상 생각하는 부분이다. 틈도 없이 채워져 있는 저 블라우스의 단추를 모두 뜯어버리면 어떨까.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을 모두 풀어 버리고 침대로 넘겨버린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몸을 나눌 때, 그녀의 얼굴은 어떻게 일그러질까. 어떤 신음소리를 낼까.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서 있는 도미노 속의 한 조각을 빼낸다면, 도미노는 당장에 쓰러지겠지.
지나치게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져서 파문이 일게 만들어보고 싶은, 그런 충동에서 벗어나서, 우현은 마침내 시트를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하체에 트레이닝 바지만을 걸친 반라의 모습으로 신희의 앞에 서니, 그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쿡, 하고 내뱉은 웃음소리를 다시 삼키며 우현은 그녀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치수 잰다며.”
“네. 우선 양 팔을 벌리십시오, 상무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그가 부담스러워서 신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그 거리만큼 다시 다가와선 양팔을 벌렸다. 숨소리마저 확연하게 들려오는 지척의 거리. 각이 진 어깨와 매끈하게 뻗은 팔의 잔 근육 때문에 신희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감해 했다. 그는 늘 그랬듯 분명히 그녀를 놀리려는 심산이다. 그리고 신희는 오늘도 변함없이 그것을 간파했다. 그녀는 어깨를 바르게 펴곤 이내 예의 딱딱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줄자를 가지고 그의 가슴팍을 두르는데, 포옹을 한 것처럼 묘한 자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팔 둘레보다 그의 가슴둘레가 더 크고 넓어서, 치수를 재기 위해 그를 완전하게 껴안아야만 했다.
신희는 줄자를 들고서 그의 가슴을 팔로 두르며 입술 끝을 깨물었다. 머리로 그가 내뱉는 더운 숨결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빨리 재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생각에 이 곤혹스러운 순간을 견디고 있는데, 갑자기 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얼마 전에 애인이랑 헤어졌다며?”
순간적으로 관자놀이가 부르르 떨렸다. 억지로 잊으려 마음에서 저만치 밀어두었던 것이 욕지기로 목을 넘어오는 것 같았다. 신희는 그의 가슴팍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장난스럽게 빛을 내는 눈동자와 마주하면서, 그가 급기야 자신을 놀리고 도발하는 것에 정점을 찍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일상에 존재하는 장난감.
그녀, 유신희는 그에게 그런 존재인 것이다.
“……상무님.”
“총무 3부 박경훈 대리. 아냐?”
“…….”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반대편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직원들 수다소리가 제법 크더군. 덕분에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놈이 새로 사귄 여자가 열 살 연하의 여대생이라던데, 맞아? 그게 사실이라면 능력은 있군. 남자의 자존심은 애인의 어린 나이에서 오는 법이긴 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