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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 당신은 안팎으로 제법 괜찮은 여자거든. 5년 간 봐 왔으니 그건 내가 보장해. 당신은 믿을만한 여자야.”
어딘가 미묘하게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표정. 여자의 그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지금 무척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놈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토록 흔들리다니. 빌어먹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우현은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총무 3부의 대리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을 접한 1년 전 보다, 헤어졌다면서 여전히 그 놈의 이야기에 발끈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지금이, 더욱 불쾌했다.
“무척 의외였지. 당신이 연애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은 뭐랄까……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인형 같은 여자처럼 늘 느껴졌거든.”
“그러셨습니까?”
신희는 한숨을 쉬며 억지로 대답했다. 상무라는 직위만 아니면 저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상무와 비서로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꾸만 건드리고 도발해대는 이 개망나니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도발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의 간섭은 참을 수가 없다. 하여 신희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고 다시금 말했다.
“제 사생활입니다, 상무님. 더 이상 언급은 말아주십시오.”
“내 비서의 사생활이지. 난 내 직속부하직원의 복지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어. 그 첫 타자가 당신이 될 거야.”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덤덤하게 쳐다만 보고 있던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상무님.”
내뱉듯 대답하곤 신희는 그의 치수를 재는 일을 재개했다. 마음대로 하라는 그녀의 대답과 반응이 사뭇 의외였던지 우현이 실눈을 뜨고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후로 그와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치수를 재는 것도 무난히 마무리 되었지만, 사뭇 팽팽하게 늘어진 긴장감 때문에 방을 나설 때까지 어깨가 저릴 정도였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관찰하듯 그녀를 따라다녔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까지 말이다.
“후우…….”
우현의 방을 나온 신희는 방문에 뒷머리를 기대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경훈을 두고 우현과 굴욕적인 대화가 오고갔던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나쁜 새끼. 신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방문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그가 그 자리에 있는 듯, 그것을 향해 나직이 일갈했다.
“오늘부로 너 같은 개망나니하고 엮이는 것도 끝이야!”
****
“짐은 다 챙겼어요? 신희 씨?”
그룹의 비서실장인 최은구가 하얗게 새어버린 앞머리를 조금 매만지며 커피 잔을 건넸다. 신희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상자를 손으로 툭툭 치며 멋쩍은 듯 웃었다.
“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요. 노트 몇 권에 볼펜 몇 개,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뿐이에요.”
오늘이 이 회사에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주에 사표를 제출했고 내일이면 유성전자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새 직원이 차출 되어 올라올 것이다. 그룹 본사의 비서실 직원은 모두 다섯 명. 그중 최인구 실장은 회장님을 보좌하고 있으며, 신희 말고도 다른 비서들이 각각 다른 직위의 임원들을 보좌하고 있다.
신희는 5년 전 비서로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우현을 모셔왔던, 이 회사 직원들 사이에선 이른바 ‘보살’로 불렸다. 김우현 상무의 비서 자리는 모든 비서실 직원들이 기겁을 하며 마다했던 것이다. 처음엔 우현의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몸매에 반하여 자기들이 그의 비서가 아님을 통탄해 했지만, 그를 조금 겪고 나선 다들 현실에 발을 디뎠는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며 혀를 내두르는 것이다.
그러니 우현의 비서자리에 무려 5년 동안이나 일을 했던 신희는, 그들에겐 보살이 아니라 보살 할아버지격인 것이다. 최인구도 그 점이 아쉬운지 연신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무척 섭섭해요. 신희 씨처럼 일 잘하는 직원을 만나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다들 일 잘 해요. 실장님이 저를 예쁘게 봐주셔서 그렇죠.”
“퇴직하는 거, 상무님께는 말씀 드렸어요?”
“아뇨. 하지 못했어요. 정 비서님이 후임을 맡으시면 어차피 다 알게 되실 테니 그때까진 조용히 있고 싶어요.”
최인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입에 물었다. 점심시간 직후의 휴식시간 인지라 다른 비서실의 직원들은 모두 외출을 한 상태였다. 항상 그랬든 이런 여유시간에도 신희만큼은 꿋꿋하게 비서실을 지키고 있어 최인구는 늘 대견해 했다. 그랬던 직원이 퇴사를 한다니 요 며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굳이 사퇴까지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어서 신희를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내가 항상 신희 씨한테 미안해. 하필 상무님 비서로 붙인 게 늘 마음에 걸렸거든. 출근을 제대로 하길 하나, 보고할 일이 있으면 항상 자택으로 가야 되지,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서 별 심부름을 다 시키지. 신희 씨가 그동안 참 많이 힘들었을 거야. 내가 그걸 알아요.”
“아신다니 다행이에요. 좀 덜 억울해요.”
신희는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어리광을 부렸다. 평소 아버지 같은 분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 비서가 잘 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야. 상무님이 성격도 그렇고, 워낙 신희 씨만 찾아대시니.”
“비위만 잘 맞춰드리면 나쁘진 않아요. 상무님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보조를 맞춰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개망나니라는 거?”
최인구가 찡긋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우현이 이런 신세로까지 전락했는지 생각하며 신희는 웃음이 났지만 부러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건 인정이 아니라 그냥 포기하는 거지. 회장님도 상무님 때문에 여간 골치가 아니셔. 앞으로 이 회사가 어찌 될는지.”
이 회사에 청춘을 다 바친 중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제 몸과 다를 바가 없을 회사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신희는 다분히 숙연해졌다. 남은 커피를 다 마신 최인구가 다시 물어왔다.
“그래. 이제 회사 그만두고 뭘 할 생각이에요?”
“우선은 좀 쉬다가, 모아둔 돈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려고 해요.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거든요. 가능하면 외국으로 나가서요.”
“그렇군요. 가족이 없다고 했지? 혼자라고 들었는데.”
“네.”
“부양할 부모도 형제도 없고 단출하니, 공부를 하면 되긴 하겠어요.”
“네. 실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최인구는 비서실장 실로 돌아갔고, 비서실은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종이컵을 정리하고 자리로 돌아온 신희는 책상 위의 짐 상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지난주에 우현이 주었던 벨벳 상자가 들어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꺼내어보았다. 뚜껑을 열자 금빛 라인의 한 가운데에 짙은 파란색의 보석 알이 빛을 내고 있었다. 신희는 어제 우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라피스라줄리라고 했던가. 차갑고 도도하다더니, 과연 보석의 빛깔은 매우 싸늘하게 여겨졌다.
신희는 그것을 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목걸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버려야 하나. 수 초 동안 갈등하다가 결국 짐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
비서실을 나와 화장실을 향하는 복도의 중간쯤 모퉁이 뒤에서, 신희의 걸음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귀에 익은, 그래서 아직도 가슴이 복잡해지게 만드는 경훈의 음성이었다.
“어. 그럼 나도 보고 싶지. 너 오늘 강의 몇 시에 끝난다고 했었지? 오빠가 데리러 갈까?”
경훈은 새로 사귀기 시작했다는 여대생과 통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와 사귀었던 지난 1년 동안 핸드폰으로, 그리고 회사 안에서, 끊임없이 들으며 행복해했던 바로 그 목소리가 이제는 다른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7시에 학교정문 앞에서 봐. 오빠가 갈게.”
그의 어린 애인을 향한 눈물겨운 배려가, 신희의 입에서 훗 하고 실소가 터지게 만들었다. 씁쓸한 맛이 입가에 감돌았다.
모퉁이 뒤에서 구둣발 소리가 나자, 신희는 정신을 챙겨 걸음을 재촉했다. 그와 마주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걷고 있는데 재수가 없었다. 경훈이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유신희!”
신희는 걸음을 멈추었다. 턱이 굳어지고 얼굴에 금세 붉은 빛이 올랐다가 사라졌다.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등 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신희는 천천히 경훈을 향해 돌아섰다. 한때 정말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통화를 나눈 그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그녀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네. 박 대리님.”
신희는 깍듯하게 대리라는 호칭을 붙였고, 경훈은 조금은 민망한 낯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조금 전에 라희와 했던 통화를 다 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오고 갔다. 무슨 얘길 꺼내어야 할까, 잠시간 고민하다가 이윽고 경훈이 입을 열었다.
“회사 그만 둘 거란 얘기 들었어. 잘 생각했어. 어차피 너랑 나 이렇게 깨진 마당에, 이 회사에서 계속 오며 가며 얼굴 부딪히는 거 피차에게 좋은 일 아니잖아.”
“네.”
“미안해. 네가 사퇴하게 만들어서.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길 바라.”
“제가 사퇴하는 게 왜 박 대리님이 미안해하실 일인가요. 그러지 마세요. 전 개망나니 상무님을 더 이상 모시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