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신희가 매우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자로 잰 듯한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났다. 신희는 늘 저런 식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형, 고결한 꽃, 손을 대면 금세 파괴될 것 같은 맑은 호수 같은 여자.
사귀는 내내 신희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 말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녀의 그런 도도하고 고고한 점들이 마음에 들어 그가 먼저 들이댔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점들이 도리어 그를 지치게 했다. 가장 결정적으로 이별의 계기가 된 것은 물론 2주 전 호텔에서의 일이었지만.
신희가 침대에서 그를 거부한 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 일이었다. 1년여를 사귀면서도 한 번도 섹스를 나누지 않았던 건 그녀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렀던 호텔에서 그 인내는 무너졌다. 호텔 방에 들어서는 신희를 본 순간 본능이 주체할 수가 없어졌던 것이다. 마침내 경훈은 신희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옷가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희의 눈물을 발견했을 때, 경훈은 손길을 천천히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라고 여기기엔 그들은 1년을 사귄 상태였고, 신희의 눈물은 경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길로 신희를 혼자 두고 호텔을 나온 경훈은,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간 술자리에서 친구의 후배라는 라희를 처음 만났다. 신희에게서 거부당한 그날 밤, 경훈은 22살의 라희와 함께 자신의 오피스텔 침대에서 뒹굴었다.
경훈은 화장실 안으로 사라지는 신희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하다가 돌아섰다. 복잡한 마음을 비워내려 일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어린 애인과 오늘 밤 끝내주는 시간을 가지려면, 더는 잡다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경훈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화장실에 들어온 신희는 손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세면대의 찬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에 그제야 물속에서 손을 빼내고는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흐려 보였다. 그에 따라 아주 자연스럽게, 언젠가 경훈이 했던 말이 떠올라선 새삼 가시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대었다.

‘가끔 너의 그 무덤덤한 얼굴이 질릴 때가 있어. 좀 웃어. 울기도 하고.’

그 말을 건네면서 경훈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넌 참 재미없는 여자야.
그런가, 하며 신희는 손가락으로 입술 양 끄트머리를 잡고 길게 늘여보았다. 조금 웃는 인상이 되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신희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웃거나 울지 않는 건,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 열다섯 살에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은 후 큰집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없는 살림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신희가 터득한 것은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지내는 것이었다. 절대로 두 분의 신경을 건드려선 안 되었다. 절대로 두 분의 눈 밖에 나선 안 되었다. 말없이, 감정도 없이, 그렇게 딱 5년만 죽은 것처럼 지내다가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하리라 결심했다.
재미있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봐도 소리죽여서 웃어야 했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슬퍼도 절대 눈물을 보여선 안 되었다. 처음엔 의지였고 고집이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어느덧 습관이 되어갔다. 이젠 환하게 웃는 것이나 엉엉 무너지며 우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경훈을 사랑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처음으로 설렘을 준 남자임은 분명하다.
시린 초봄 날 아침에, ‘신희 씨한테 관심 받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경훈이 커피 한 잔을 건넸을 때부터, 그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나란히 로비의 벤치에 앉아 있었을 때에, 난생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생각해보면 그 두근거림은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것, 의지할 곳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에 기인한 것이 클 지도 모르겠다. 그 커피를 건넨 이가 경훈이 아니라 누구였다고 해도 두근거렸을 거란 뜻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경훈과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경훈이 소문이 그러니 그럼 우리 사귈까요? 라고 묻자, 신희는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사귀는 내내 어떤 감정의 격랑도 없이 그저 잔잔한 일상 같은 만남을 공유했지만, 사랑이니까, 라는 핑계로 그것을 정당화시켰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의 날카로운 파편은 잔인하게 흩어졌다. 신희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세면대의 물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호텔에서 그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눈물까지 흘리며 그를 밀어낸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외투를 벗기고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차례로 벗기는 순간에, 왜 하필 머릿속이 윙윙 거리며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인지.
그 다음날 아침, 미안한 마음에 비교적 일찍 그의 오피스텔에 찾아갔지만, 신희가 본 것은 웬 어린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함께 현관을 나서는 경훈의 모습이었다. 그 여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차에 태우는 경훈의 개운하고 밝은 모습은 신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별을 하는 데는 딱 한 마디면 되었다.
‘우리 헤어져요.’
경훈은 동의했고, 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신희는 완벽한 마지막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목으로 침을 넘긴 그녀는 거울을 통해 블라우스 깃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깨에 다시금 힘을 준 후 그곳을 나갔다.

****

“상무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우현은 감고 있는 눈살을 잘게 찡그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기운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어지러운 와중에도, 이 목소리가 일주일에 두 번 듣는 그녀의 것이 아님을 쉽게 알아챌 수가 있었다. 신희의 그것에 비해 둔탁하고 굵다. 또한 부드럽지도 않다.
왜…….
우현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밝은 불빛이 동공을 찌르자 한 쪽 눈을 스윽 감고는 침대 맡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주시했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다시 뜸과 동시에 실루엣이 차츰 선명한 실체로 우현의 시야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서 있는 이가 신희가 아닌 다른 사람임을 알았을 때, 그는 튕기듯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곳에는 몸집이 제법 큰 중년의 여자가 아이를 나무라는 선생의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좀 그렇긴 합니다, 상무님. 제 소개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쪽이 누군지 내가 알고 싶진 않고. 그 여잔?”
우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잠시 덮은 후 미간을 구겼다. 치솟으려 하는 불쾌감을 억지로 밀어 넣은 채였다. 저곳, 저 자리는 늘 신희가 서 있었다. 잠들어 있던 눈을 떠 그녀의 작은 두 발이 시야에 잡히는 그 순간이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퍼지곤 했다. 그랬는데 지금의 이 낯선 상황이 우현으로선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고 있었다.
기세 좋게 나가던 말문이 막힌 민숙은 곤혹스럽게 입술을 비틀대었다. 최인구 실장의 언질이 아니더라도 그룹 본사의 김우현 상무이사는 계열사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이미 개망나니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그의 비서가 되라니, 처음엔 노골적으로 거절을 했으나 본사 비서실장의 위치까지 올라가려면 필히 거쳐야 하는 단계이므로 몇 번의 고민 끝에 수락했던 것이다.
그래서 회사가 아닌 저택으로 출근을 해야 할 거라는 최 실장의 조언에 민숙은 각오를 단단히 했다. 망나니와의 기 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결의까지 다부지게 밝힌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 라니? 그 여자가 대체 누구지?
“죄송합니다, 상무님. 그 여자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쪽 말고 여기에 와 있어야 할 여자.”
우현이 손으로 머리를 쥔 채로 순간적으로 이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 민숙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팔 하나 잃을 각오 정돈 하라는 살기까지 느껴져선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 유 비서……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희 씨는 어제부로 퇴사했습니다. 저는 유성전자 비서실에서 근무한 정민숙입니다. 이번에 그룹 본사의 비서실로 차출되어 올라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상무님.”
머리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우현은 눈동자를 분주하게 굴렸다.
정민숙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긴 말들 속에, 우현의 뒷머리를 강타한 단어는 한 가지 뿐이었다.
퇴사.
왜, 라는 의문보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라는 오만한 고집이 먼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그녀가 퇴사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그의 의견이나 생각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건가. 어떤 언질도 없이, 어떤 인사도 없이, 할 일을 다 끝내고 마땅히 돌아서는 사람처럼 이렇게 냉정하게.
습관처럼 신희가 드나들었던 방문을 바라보았다. 5년 동안 저 문턱을 넘나들던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선연했다. 노크소리가 들리면 으레 신희라고 생각하게끔 버릇을 들여놓고 이렇게 갑자기 앙큼하게 땅 밑으로 꺼져버리다니.
그러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게임이라면 반칙을 일삼은 셈이다. 누구도 아닌 바로 유신희, 그녀가.
우현은 거친 손길로 시트를 확 젖히곤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작스럽게 표정이 일그러진 그를 보곤 민숙은 적잖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침대를 비껴가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긴 우현은 손바닥으로 까칠한 얼굴을 문질렀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양광을 대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신희가 옆에 없다는 현실을 곧장 자각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