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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5화)
二. 여자의 치맛바람이 고수를 만들다(2)


작은 손이었고 따스한 손이었다.
지저분하다고 여기지도 않는지 천화의 눈곱까지 떼어 준 혈희가 다시 거리를 조금 벌린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혈희?”
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기에…….”
천화는 혈희가 왜 여기에 있고 자신이 의식을 잃은 것 마냥 잠을 자고 있었는지를 떠올리다 순간적으로 헛하고 헛기침을 했다.
기억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것은 요희가 싸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요희 엄마!”
요희가 내공심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가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천화가 입에서 불꽃이라도 뿜어낼 것 같은 기세로 고함치다 쿨럭하고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그의 몸은 탱탱 부어 있는 상태였고 내공을 가졌을 때 느낀다는 미지의 충족감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엄마가 나를 속였구나, 속였어!”
그러면 그렇지, 빠르게 익히고 최강의 내공을 지니게 해 주는 심법이 있을 리가 있나! 천화가 그리 생각하면서 몸이 빨리 나으면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아 댈 때 혈희가 속삭이듯 말했다.
“속이지 않았어.”
“어, 응?”
“안 속였어.”
“응, 나는 요희 엄마가 속였다고 말한 거야.”
“그러니까…….”
혈희가 천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있어, 내공.”
“……정말?”
끄덕.
“그럼 난 이제 무림인이야?”
혈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무인이 되기 위해서 영약의 기운을 제어하려고 내가 왔어.”
“정말? 이 몸을 어떻게 제어해 줄 수 있어?”
끄덕.
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희는 유달리 말이 적었다.
숫기가 부족하다고 할까, 나이가 가장 어린데다 소심해서 엄마 중에서는 제일 이야기하기 쉬운 상대였다. 다른 엄마들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바람난 망아지 같은 엄마들 사이에서 혈희는 그야말로 마음속의 샘물이라고 천화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정말 움직일 때마다 아파. 온갖 혈도가 아프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도 따가워.”
끄덕끄덕.
천화의 투정 섞인 대답에 혈희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확실히 알아들었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곧 모호한 시선으로 천화를 바라보았다. 천화는 표정의 의미를 읽고 잠시 망설였다.
“꼭 불러야 해?”
끄덕, 끄덕끄덕.
무려 세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혈희에게 있어선 다시없이 확고한 자기주장이었다. 천화는 한숨을 약간 실어 말했다.
“……도와줘, 엄마.”
혈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혈희와 대화가 편하긴 하지만, 그 대화를 더욱 정겹게 하기 위해서는 꼭 엄마라는 표현을 붙여 줘야 했다.
혈희는 매우 어릴 때 고아가 되었는데, 그래도 엄마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눈도 띄지 않았을 아기 시절 엄마의 품속에 있던 기억한 혈희는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우상시 하고 있었고, 그녀를 키우다시피 한 춘희가 워낙 모성애가 넘치다 보니 그게 생활 전반에 파고들었다.
때문에 혈희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유독 천화를 아꼈고 그에게서 엄마라고 듣기를 원했다.
혈희가 입술을 달싹여 주의하지 않으면 듣지도 못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공이 충만한 때는 그럭저럭 수월하게 들릴 터이지만, 온몸 가득 퍼진 고통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두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천화는 말을 이해했다.
“내공심법은 이미 요희 엄마가 가르쳐 줬으니 혈궁(血宮)의 비전무공인 요상심법(療傷心法)을 가르쳐 주겠다고? 아니 언제 내공심법을 가르쳐 줬는데? 난 뒤통수 맞은 기억뿐이야!”
“하지만 있어.”
내공이라는 건 정제된 힘이다. 선천지기와도 그렇다고 영물이 지니는 힘도 아니라 만들어 낸 그런 힘. 무림인이 일반인과 다른 이유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잠깐, 엄마. 뭔가 이상한데? 나 내공이 안 느껴지는데?”
끄덕.
“조금만 자세히 좀.”
혈희가 쑥스러워하면서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가르쳐 줬대. 일반적인 내공심법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그런 게 가능해? 영약만 먹는다고 내공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지금 이 몸이 두꺼비처럼 팅팅 부은 것도 영약의 기운을 제어하지 못해서가 아니야? 내공심법은 그 뭐냐, 사용하는 사람이 깨어 있고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일정한 방법에 의해서……”
혈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천화를 향해서 혈희가 다가와 쓰다듬었다. 등을 어루만지자 뜨거운 열기가 잠시 감도는가 싶더니, 몸속에서 폭발적인 힘이 감돈다. 마치 폭풍이 이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이건 도대체…….”
“내공, 이 갑자.”
“세상에, 그 내공을 이렇게 쉽게……. 이게 다 요희 엄마가 해 놓고 간 거야?”
끄덕.
“그랬구나, 내가 내공이 있긴 했구나. 요희 엄마가 가르쳐 준 그건 좋은 내공심법이야?”
끄덕끄덕.
두 번의 끄덕임에 천화는 만족한 듯 웃었다. 혈희가 다가와 머리를 아프지 않게 쓸어 주었다.
“그럼 엄마는 요상심법을 가르쳐 줄 거야? 이 기운을 소화하는데 적합한 기술로?”
끄덕.
“좋아, 난 무림 소설을 익으면서 늘 그게 궁금했어. 왜 내력이 실린 무공을 맞으면 온몸이 뒤집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까 하고. 그걸 위한 대처 방안도 있지 싶었는데, 이것도 그런 걸 당하면 급히 치유할 수 있는 거지?”
혈희가 긍정했지만,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혈희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용케 알아들은 천화가 정리하듯 반문했다.
“맞긴 한데 그 정도의 효율을 가지려면 팔성(八成)에 도달해야 해? 거기까지 도달하기 어려워?”
끄덕.
그녀는 그나마 천화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 순수한 영약의 힘이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했다. 타인의 내공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면 육체가 뒤틀리고 장기의 손상도 입을 수 있다고. 혈궁(血宮)에서 비전으로 전해지는 요상심법을 제대로 익혀 팔성에 도달하면 타인의 내공도 자의로 완벽히 해소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근데 혈궁이라니, 단체의 이름치곤 좀 살벌한 것 같은데 혈희 엄마는 혈궁의 비전무공을 어떻게 배운 거야?”
혈희가 자신의 별명을 허공에 써 보였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허공에 血 자를 그리는 것을 보고서야 천화는 이해했다.
“혈궁의 무공을 익혀서 혈희였던 거야?”
끄덕끄덕.
“아하, 그렇구나. 난 그냥 그 별명들은 옷을 입는 형식에 따라 달라지는 줄 알았어.”
천화가 오해할 만하게 혈희는 다홍색으로 물든 옷을 주로 입고 있었다.
혈희가 콩 하고 천화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천화가 멋쩍게 웃자 그녀 또한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녀는 충분한 미녀가 될 거다. 혈희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엄마들 전부는 실로 미모가 뛰어났다. 무림이었다면 중원제일화(中原第一花)라거나 강남제일미녀(江南第一美女) 소리는 쉽게 들을 미모의 여성들이 열이나 모여 있었다.
문득 천화는 강호로 나가면 이 높아진 안목 덕분에 여자와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왜?”
천화의 시선이 곤욕스러웠던지 혈희가 주춤거리며 기어들어갈 것 같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 엄마가 너무 예뻐서.”
혈희가 화들짝 놀라더니 발갛게 된 얼굴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천화의 뒤로 돌아섰다. 천화의 시선을 피할 곳이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
천화는 온몸이 아픈데도 배를 잡고 웃고 싶어졌다. 그 요희나 사희 엄마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즐겁기까지 했다.
혈희는 한참 후에야 진정했다. 그동안 천화는 웃다 웃다 방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내 혈희의 손가락이 훑듯이 천화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 감각에 어깨를 떨면서 자라목을 하려는 순간, 온몸에 가는 진통이 느껴졌다.
“미안해.”
주의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혈희의 목소리에 놀라는 것도 잠시.
“참아.”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쥐어 짜이는 듯, 뼈가 조각나는 어마어마한 격통을 느꼈다. 이 고통을 뭐라고 해야 하더라? 소설에서 뭔가 자주 쓰던 표현이 있었는데.
고통이 뇌리까지 미치는 순간 천화는 간신히 그 단어를 떠올렸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부작용!
“합죽이.”
한때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처단당했던 단체 혈궁의 비전술식.
기공으로 온몸의 근육과 혈관을 쥐어뜯는다. 요상심법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상대를 고문할 수도 있고, 죽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신의 뜻에 달린 기술.
영약의 기운에 팅팅 부어오른 몸이 정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온몸 가득 품고 있던 영약의 기운이 대부분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몸에 실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힘이었던 데다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화는 가뿐해진 몸 덕분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너무 많은 기운이 빠져 나가서 그렇게 느낀 것일 뿐 상당량의 내공이 잠력의 형식이 되어 몸에 깃들어 있었다.
천화는 이내 실신했다.
그의 몸을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으며 혈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시련을 이겨 낸 아들을 뒤에서 끌어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품고 혈희는 작지만 확고한 의지를 담아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수고했어, 아들.”
천화는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혈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응.”
깜짝 놀라는 혈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천화가 눈을 감았다.



三. 나라엔 반드시 수 명 이상의 인재가 있다(1)


천화가 의식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두 여인의 눈이었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 쌍둥이 여인은 천화가 눈을 뜨자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천화는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혈희를 소리 없이 불렀다.
‘어, 엄마! 왜 하필 이런 뱀 단지에 나를 놓아두셨어!’
물론 혈희는 대단한 고수지만 천화의 속마음을 읽을 정도의 신통력은 없고, 또한 여기에 있지도 않아 공염불이 되고야 말았다.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천화는 순간 몸이 떨렸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사희 엄…….”
“이제부터 영약으로 실핏줄까지 팅팅 부은 개구리 아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계획, 통칭 ‘배부른 개구리 언제쯤 제정신을 차리나.’가 있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를 해도 모른다.’는 장자(莊子)의 표기에 따라, 바다를 알려주겠어요. 와아, 전부 박수.”
박수는커녕 한숨 쉬는 이도 한 명 없었지만, 그 말을 한 여성들의 귓가에는 천 명이 일제히 박수를 친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지 지극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복장을 한 여성들 모습을 보며 배부른 개구리 꼴이 되어 있던 천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계획 이름 구려.”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똑같이 생긴 엄마들이 다가와서 천화의 몸을 주물렀다. 주무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것도 잠시, 몸이 시원해지면서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천화가 놀라서 입을 열려 하자 뱅어처럼 가는 손가락이 조심스레 천화의 입술을 덮었다.
열 명의 궁희 중 한 명, 아니 두 명. 사희의 이름을 공유하는 쌍둥이 엄마들의 미소를 보며 천화는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고 사흘에 걸쳐 벌모세수를 받고 환골탈태를 해 버렸다.
사흘 후 천화가 의식을 차렸을 때 제일 처음 본 것은 똑같이 생긴 얼굴을 가진 두 여인의 눈이었다.
천화가 눈을 뜨자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천화는 순간 몸이 떨렸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잡아먹진 마. 사희 엄마.”
두 명의 사희 사영령(謝零玲), 사양령(謝襄玲)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먹고 싶으면 어떡해?”
“참아, 굶어서 살 빼.”
“참기 싫으면 어떡해?”
“그래도 참아.”
“참는 건 싫은데.”
“그럼 다른 먹을 걸 찾아 다녀. 귀찮아도 움직여야 먹는 보람이 있는 법이야.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더 맛있는 법이잖아?”
“흥, 이 무슨 직론이람! 우리 아들 재미없어!”
“재미없어서 다행이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여인이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져 앉았다.
천화가 이마에 손을 얹고 기분 좋은 피로감이 남은 몸을 점검했다. 마치 끓는 것처럼 열기를 품은 내공이 단전에 담겨 있었다.
영약의 기운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던 이 갑자나 되는 내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천화가 만족한 표정을 짓자 쌍둥이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고 짓궂게 웃었다.
“좋아?”
“좋아.”
“그럼 더 좋게 해 줄게! 와아!”
그녀들이 곧 천화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아, 안 돼! 잡아먹힌다!”
“잡아먹을 거야, 크릉, 크릉!”
“우리는 뱀이니까 츄릅 츄릅해야지.”
“아, 맞아. 그랬지.”
천화는 결국 이 뱀의 별명을 가진 엄마들에게 잡아먹힌다며 비명을 질러 댔다. 나름 제정신을 차렸을 땐 오폐물에 검게 되어 버린 옷을 벗기고 간단하지만 기능성을 갖춘 옷을 입은 후였다.
천화는 그제야 민망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옷이 더러우면 더럽다고 말만 하면 되지, 잡아먹히는 줄 알았잖아!”
“그러라고 한 거야. 까르르.”
똑같이 생긴 자매 궁희가 입가에 손을 얹고 발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