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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1. 마왕의 하수인을 퇴치하다
카테르니아 대륙.
다양한 이종족(異種族)들과 몬스터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인간들이 왕국을 세워 모인 곳.
대륙 전체에서 얼마 안 되는 인간들의 영토는 오랫동안 전화에 타올랐다.
귀족들의 영토 분쟁에서 시작된 다툼은 쉽게 번져 나가 대륙 차원의 전쟁이 되었다.
그 와중에 인간들에게 휘말리거나 제물로 이용당한 종족들도 수두룩해 인간들은 이종족들의 공분을 샀다.
권력과 재물, 피의 복수를 향한 추악한 아귀다툼 끝에 인간들은 대륙을 무너트릴 금기된 힘에 손을 뻗쳤다.
바로 마왕(魔王)의 힘이었다.
권력가들은 오래전부터 겉으로는 흑마법사를 도외시하면서 실상 수하로 거둬들여 부려 먹고 있었다.
이들을 부추겨 마계(魔界)의 마물(魔物)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이지와 감정이 없이 오로지 약육강식의 본능만 있는 마물들은 피폐한 대륙을 순식간에 초토화시켰다.
누군가 불러낸 마물은 다른 자들이 더 많고 강한 마물을 부르도록 만드는 촉매제 노릇을 했다.
권력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경쟁적으로 흑마법사를 지원, 닦달해야 했다.
마침내는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쓰는 계약자까지 출현시켰다.
그러나 작은 가죽 부대에 과도한 물을 우겨 담으면 터지는 법.
마왕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받도록 계약에 성공한 흑마법사들은 그릇이 작아 광기에 휩싸였다.
‘마왕의 하수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거의 대부분 스스로 자해하거나 상잔해서 목숨을 잃었으나, 단둘은 살아남았다.
단 두 명의 ‘마왕의 하수인’은 무시무시한 마왕의 힘으로 대륙을 암흑에 물들였다.
그들 자신도 강했거니와 사악한 광기의 영향으로 대륙의 몬스터들이 더욱 흉포해지고 비옥한 농지는 정기를 잃고 물은 썩었으며 질병이 퍼져 나갔다.
인간들의 영토는 바싹 말랐다.
절대적인 공포의 나락에 빠져서야 인간들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꼼짝 못한 채 마물의 대군단을 맞이해 전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소왕국의 이름 없는 성녀(聖女)가 간절한 기원을 올린 것은 그때였다.
오랜 전쟁 덕분에 귀족과 교단들의 타락은 절정에 이르렀다.
정의롭고 충성심 깊은 기사들은 가장 먼저 전쟁터에 내몰렸으며, 신심 깊고 신성력이 강한 사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왕국 카르텐은 변방국인데다 두 강대한 제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 위치로 공교롭게도 일종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느라 제법 평화로웠다.
덕분에 작고 소박한 신전이 명맥을 유지했다.
성녀는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평생을 바쳐 얻은 적은 신성력이나마 아낌없이 쏟아붓는 노파였다.
성녀는 어느 날 계시를 받고 도성으로 나아갔다.
구름처럼 따르는 인파의 경건함에 왕성에서도 막지 못하고 어전에 들였다.
어전에는 왕과 귀족들 및 외국의 사절들까지 모두 성녀의 위엄에 이끌려 나와 있었다.
성녀는 왕과 귀족들,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절히 기원을 올렸다.
꿈에서 계시받은 모습 그대로, 성녀는 메마른 손을 모으며 간절히 기원했다.
“대륙을 파괴하는 마왕의 하수인 둘을 물리칠 용사 두 명을 보내 주세요.”
성녀는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륙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이를 함께 보내 주시길…….”
성녀의 기도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에 닿았다.
하늘에서 눈이 멀 정도로 광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도성의 모든 이가 볼 만큼 휘황한 빛이었다.
찬란한 빛 속에서 장신의 세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두 명의 전사, 그리고 깡마른 한 사람이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이 가라앉았다.
빛이 사그라들면서 세 사람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훌륭한 갑옷과 무기들을 갖춘 전사 둘과 밋밋한 연푸른색 로브를 둘러쓴 채 휘청거리는 어설픈 사내가 그들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어엇, 세틴 동생도?”
“류 형님도 이 퀘스트를 받으셨군요. 그럼 랭킹 1, 2위가 다 불려 왔다는 소리인데… 흠?”
반가워하던 두 사람은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털퍽 주저앉은 말라깽이를 돌아보았다.
“이 익숙한 어정쩡함은…….”
“하하, ‘망캐’ 1위 한 님까지 왔군요. 생산직까지 포함이라니 특이한 퀘스트인가 봅니다.”
둘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조금 티꺼운 표정으로 한을 보았다.
「드래곤 쇼크」에서는 자고로 생산직이 낀 퀘스트는 별 볼일 없고 중노동만 강요되며 보상은 쥐꼬리만 한 최악의 퀘스트란 게 정설이었다.
그야말로 민폐 직업.
「드래곤 쇼크」에서 생산직들이 경원시당하는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였다.
“아, 오랜만입니다. 양초는… 자동 거래로 보내고 있습니다.”
랭킹 1, 2위답게 두 유저는 각기 거대 길드를 운영 중이었다.
일반 유저들이 생산직이 만드는 물품 중에서 가장 유용하게 쓰는 것은 ‘최고급 양초’였다.
그것은 잡화점에서 파는 양초에 비해 예쁜 무늬가 있고 사용 시간이 몇 배나 길었다.
대량 주문을 하면 길드 엠블럼도 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일반 양초도 현실 시간으로 10시간 정도 탔다.
평상시엔 일반 양초만으로도 충분히 모험이 가능했다.
최고급 양초의 쓰임은 단지 돈을 몇 푼 더 얹어서, 우리는 이런 사치품을 쓴다며 남들에게 과시하는 기능에 불과했다.
잡화점에서 공급하는 필수품들이 워낙에 저렴하고 질이 좋아서 생산직들은 변변히 경쟁할 수가 없었다.
“뭐, 한 님이 계시니 최고급 양초는 걱정 없겠군요.”
“가능하면 물약도 공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 사람은 먼저 익숙하게 인벤토리와 스탯, 스킬창을 점검했다.
퀘스트에 따라서 게임 기능에 제한이 붙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비창, 스킬, 스탯은 멀쩡하고… 인벤토리는 비어 있군요.”
“저도요, 류 형님.”
세틴이 장비창을 바꾸는지 칼과 도끼, 활을 번갈아 휘두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허― 우리야 장비와 방어 스킬이 있으니 물약 없이 버텨 본다지만, 한 님은 원료와 가공 기계가 없어서 어쩌신답니까?”
“아, 걱정 마십시오. 일단 저도 장비창에 채집 도구와 기초적인 가공 장비들은 있으니, 원료 수급만 된다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한은 머뭇거리다 실토했다.
“제 경험상 이렇게 원료를 비워 두는 퀘스트는 원료 수급이 불가능할 때가 많아서…….”
류와 세틴이 동시에 썩은 표정을 지었다.
생산직이 유일하게 파티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막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생산직.”
“뒤로 넘어지면 파티원 코까지 함께 깨지는 더러운 생산직.”
두 사람은 슬금슬금 한으로부터 몇 발 물러났다.
길드의 체면 유지를 위해 낭비용 고급 물품을 몇 가지 고정 거래하는 두 사람이지만, 한과 별다른 친분은 없었다.
생산직과 강제 퀘스트로 엮였다는 점에서 한이 원망스러운 두 랭커였다.
「드래곤 쇼크」의 일반적인 유저들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시간 낭비일 퀘스트가 뻔했으니까.
“얼른 끝내고 가죠, 형님.”
“그래. 퀘스트 내역은… ‘마왕의 하수인’ 2인 퇴치라. 지역 정보창!”
세 사람은 각기 지역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시야에 반투명한 지역 정보창이 떴다.
카르텐 (소왕국)
―?????
지명 외에는 모든 정보가 비공개였다.
“단서를 직접 캐라는 소리군. 퀘스트 정보도 불친절하고. 어쨌거나 여기는 왕궁인 것 같으니 이곳의 국왕 폐하께 임무를 받는 걸까?”
“요, 용사들이여. 신의 부르심을 받고 와 준 신성한 기사들이여!”
얼어붙어 있던 좌중을 헤치고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한눈에도 ‘나 소왕국의 왕이오’라는 옷차림이었다.
왕의 뒤에서 ‘두 용사와 양초장이 성녀의 기원에 불려왔다.’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용사들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양초장에 대해서는 ‘고작’이라는 실망이 깃든 목소리였다.
세 사람은 왕을 주시하며 조용히 인물 정보창을 불렀다.
카르텐의 국왕
―?????
이번에도 최소한의 정보였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소속이 다르거나 강력한 정신 저항 능력이 있으면 서로 정보를 직접 나누기 전까지는 인물 정보가 비공개로 떴다.
인물 정보가 훤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직속 수하 중에서 충성심이 깊은 관계일 때였다.
셋은 적절히 왕을 알현하는 대륙 공통의 예법을 취했다.
왕으로부터 돌아온 예법은 조금 낯설었다.
국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비어 있던 퀘스트 창에 제법 많은 정보가 차올랐다.
국왕은 이들에게 ‘마왕의 하수인’ 퇴치를 의뢰했고 보상으로 귀족 작위와 영지를 내걸었다.
두 랭커는 피식 웃었다.
“우린 고국에서 공작입니다. 한 이 친구는 남작이고요.”
국왕의 얼굴에 무색함이 지나갔다.
전사들에게는 백작위를, 한에게는 준남작을 제안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는 귀족들을 제치고 국왕은 보상을 상향 조정했다.
전사들은 공작, 한은 자작이었다.
랭커들은 애초에 별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였다.
“왕국을 위협하는 ‘마왕의 하수인’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들에게 하급마족보다 약한 ‘마왕의 하수인’은 별게 아니었다.
광기 때문에 강화되었긴 해도 마왕의 하수인과 그들이 부리는 마물 따위는 아무리 둘러싸도 순식간에 도륙낼 만큼 레벨에서 차이가 났다.
물론 「드래곤 쇼크」에서의 일이었지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랭커들은 환송식을 사양하고 빨리 마왕의 하수인이 있는 위치로 보내달라 요구했다.
궁정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어서 몇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전송 마법진을 그렸다.
왕과 귀족들이 보관해 둔 귀한 마나석을 몽땅 쏟아부었다.
소왕국이다 보니 장거리 전송 마법진을 쉽게 그릴 만한 대마법사는 꿈도 못 꿨다.
그나마 외교 사절단에 제국 궁정 마법사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동!”
마법진을 통해 전송된 곳은 마왕의 하수인이 점거한 성이었다.
성은 이미 마굴이었다. 마물들과 하수인의 기운에 대지는 검게 갈라져 오염되어 있었다.
하늘은 시커먼 구름에 덮여 있었다.
마물들이 체액과 독기 어린 숨결로 몰고 오는 마계화(魔界化) 현상이었다.
세 사람은 미니맵(축소 지도)을 확인했다.
전투에 특화된 랭커들에게는 적 추적 기술도 있지만, 미니맵에는 간단한 지형과 시야에 들어오는 마물들만 표시될 뿐 건물 내부의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미니맵이 먹통이야.”
“나도요.”
“39,278―55,561 좌표로 가면 되겠군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이 말하자 랭커들은 의외의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음?”
“마왕의 하수인들은 본체가 인간이다 보니 마물들과 달리 마계화된 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은 장비창에서 곡괭이를 꺼내 검게 갈라지고 돌처럼 단단한 바닥의 암석을 파내 들어 보였다.
저급한 마기를 품고 있는 암석이었다.
“이 마계의 흙인 크라바트는 저에게 채집 가능한 자원이기에 미니맵에 표시가 됩니다. 대개 가장 짙은 크라바트 사이의 유난히 흐린 공백에 마왕의 하수인이 위치해 있지요. 마물들에게 주위의 크라바트를 치우도록 지시하니까요.”
“오! 그거 쓸만한 조언이군요.”
“페가수스! 한 님을 지켜라.”
류가 승용펫이자 전투력이 어마어마한 자신의 페가수스를 불러내 한을 호위시켰다.
두 랭커는 즉시 성으로 난입했다.
작전이고 잠입 계획이고 없었다.
“진공검!”
“빙하의 칼날!”
소닉 붐이 일직선의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사방을 얼리며 몰아치는 칼날의 범람이 마물들을 난자했다.
돌진 스킬을 마스터한 그들은 한이 일러 준 좌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성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랜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급인 그들에게 문제거리는 없었다.
쿠쿠쿵!
한이 일러 준 지점에서 마왕의 하수인을 만났는지, 번쩍하는 거대한 빛기둥과 함께 성이 무너지는 굉음이 들렸다.
두 랭커는 광역 스킬을 아낌없이 난사하며 마왕의 하수인과 마물들을 학살했다.
일단 하수인을 해치면 그가 소환한 마물들은 거의 즉시 마계로 역소환되거나 검은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극소수는 인간계에 남았지만 마계와 소통이 끊어져서 힘이 급속도로 약해졌다.
강한 몬스터 정도로 약해졌으니, 대륙의 인간들이 군대를 동원해 충분히 잔당을 소탕할 정도였다.
“과연 얌전히 기다리고 있더군요.”
“한 님 덕분에 빨리 끝났습니다. 가시죠.”
두 용사와 한은 지체하지 않고 귀환스크롤을 찢어 성으로 돌아갔다.
왕궁 대전에는 실망의 한탄이 흘렀다.
그들이 지나치게 일찍 돌아왔기에 실패하고 쫓겨서 대피한 걸로 오해받았다.
“첫 번째는 해결했습니다. 다음 하수인이 있는 장소로 보내 주십시오.”
경악, 그리고 다음 순간 환호가 찾아왔다.
속속들이 전달되는 마법 통신으로 대륙에 퍼진 마물들이 한순간 급감했음이 확인되었다.
세 사람은 두 번째 마왕의 하수인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두 랭커가 싱글거리며 아직 뜨거운 김이 날리는 점액이 뚝뚝 떨어지는 칼을 어깨에 걸치고 돌아왔다.
“이거 한 님과는 의외로 전투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생산직에 편견이 있었는데 시정해야겠군요.”
“돌아가면 적당한 장소를 찾아 우리 셋이서 파티 사냥을 해 볼까요?”
랭커들의 태도는 아까보다 정중하게 바뀌었다.
생산직을 전투에 있어서 무시하는 바가 없잖아 있었으나 한은 파티원으로서 제 몫을 다해 냈다.
심지어 파티 사냥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생산직 중에서도 마이스터인 한의 특별함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한은 랭커들이 전투하는 동안 길가에서 채취해 만든 차를 나무를 깎아 만든 찻잔에 따라 건넸다. 기분이 상쾌해지고 약간 피로 회복 효과가 있는 차였다.
랭커들은 찻물의 산뜻함에 놀랐다.
“이런 차도 만들 줄 아십니까? 한 님이 개설한 식당 체인은 저도 자주 이용합니다만.”
“차는 주로 NPC들에게 판매합니다. 유저들은 생명력이나 마나 회복 같은 기능성 음료를 원하거든요.”
“하긴. 그래도 이 정도 기호품은 저희 길드 하우스에 들여놔도 좋겠습니다.”
“이 차는 여기서만 자생하는 풀 같습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향과 맛이 좋은 차를 저희 포르테 영지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원하신다면 납품하겠습니다.”
“일 차분으로 100일분 보내 주십시오. 저희 길드원 수는 아시지요?”
“당연히 거래 정보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에… 여기서는 영지 관리창이 공백으로 뜨는군요. 거래도 나가서 해야 할 듯합니다.”
“어서 퀘스트를 마칩시다, 형님. 한 님, 저희 길드도 주문하고 싶습니다.”
세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귀환 스크롤을 찢었다.
“와아아!”
왕궁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전 대륙을 공포에 밀어 넣은 광기 어린 마왕의 하수인들을 세 영웅이 순식간에 도륙하고 돌아온 것이다.
카르텐은 본격적인 피해가 적었지만, 마물들에 영지가 파괴되어 간신히 도망치거나 쫓겨 온 외국의 망명 귀족들이 있었다. 덕분에 카르텐의 수도는 일시적으로 각국 사절과 첩자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화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흠모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양초장이 아니라 두 랭커뿐이었지만.
귀족들은 한을 두 영웅의 시종쯤으로 치부했다.
한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을 지킬 무력이 없는 생산직은 유용성이 발각되면 무급 노예처럼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한은 이미 「드래곤 쇼크」에서 유저들과 NPC들에게 치이며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거대 길드에 소속된다면 보호받아 편하겠지만, 길드는 길드 나름대로 인간관계의 고충이 있으므로 한은 길드 가입을 꺼렸다.
“도탄에 빠진 대륙을 구원하고 당당하게 개선한 영웅들이여―”
국왕은 장황한 환영사 뒤에 작위를 수여했다.
랭커들은 공작, 한은 자작위를 받았다.
마왕의 하수인과 마물들을 간단히 처리할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소유한 인물들이라면 즉시 왕국 소속으로 붙잡아 두자는 복안이었다.
랭커들은 작위를 받은 뒤 퀘스트 창을 열어 완료 버튼을 누르며 한을 돌아봤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한 님.”
두 영웅이 빛과 함께 사라지자 탄성이 울렸다.
안타까움도 섞여 있지만 화색이 도는 귀족들이 더 많았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권력자에게는 남아 있는 영웅보다는 사라져 주는 영웅이 더 고마운 법이었다.
왕에게 자작위와 영지를 수여받은 한은 퀘스트 완료 알림이 뜨지 않자 미심쩍음을 느꼈다.
한은 퀘스트 창을 열어 다시 확인했다.
돌발 퀘스트!
―이계의 신으로부터 호출
―성녀의 기원
―강제 퀘스트
―난이도 : ?
―요약 : 성녀는 두 영웅을 청원한 뒤 피폐한 대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대륙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줄 이를…….”
―보상 : ?
―실패 패널티 : 없음
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쩐지 쉽게 달성했다 싶더니만.’
밑도 끝도 없는 퀘스트였다. 대륙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라니.
물품의 수량이나 종류가 표시되지 않았다.
기한도 한도도 정해지지 않은 퀘스트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막연히 대륙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무한정으로 댈 수 있었다.
한이 창백하게 굳어 있는 동안 귀족들도 웅성거렸다. 두 영웅이 사라졌는데 남아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쾌변을 보았는데 밑을 덜 닦은 듯 찜찜한 느낌. 뭔가 처치 곤란한 덤만 남아 있는 그런 달갑잖은 상황이었다.
“접속 종료.”
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접속이 종료되지 않았다.
한은 당황해서 게임 메뉴창을 불러왔다. 로그 아웃과 강제 종료 버튼이 모두 비활성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한은 대륙 전체 지도를 불렀다.
아까부터 강한 위화감이 들었는데 잘 모르고 지나쳤던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플레이 타임사(社)는 「드래곤 쇼크」의 중간계가 단 하나뿐이라고 공언했다.
광활한 몇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들이 사는 중간계 자체는 하나뿐이며 패러렐 월드나 공개되지 않은 다른 대륙은 없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전체 대륙 지도에 표시된 이름은 생소했다.
카테르니아 대륙
해안선 약간과 산맥만 표시된 채 나머지는 어둠이 밝혀지지 않은, 정보가 거의 없는 조악한 지도였다.
‘이세계의 신(神)… 설마……?’
한은 장비창에서 단도를 꺼내 약지 끝에 작은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흘렀다. 상처가 따끔하고 쓰라렸다.
“……!”
게임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상현실 게임이 지나치게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게임 속의 피 색을 규제했다. 피 색으로 붉은색 계열은 쓸 수 없었다. 한은 푸른색을 주로 선택했다.
또한 게임 내 유저들이 체험하는 고통은 실제의 20% 이내였는데, 지금 느껴지는 생생한 고통은 현실과 똑같았다.
다행히 상처는 게임에서처럼 빠르게 아물었다.
‘붉은 피, 이 아픔. 설마 여기가 정말로 이세계?’
게임 속의 기능이 고스란히 쓰이기는 하지만 이곳이 게임 속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내가 게임 속의 캐릭터 그대로 이런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 같은 곳에 차원 이동을 했다는 건가? 이세계의 신이 불러서?’
한은 로브의 왼 소매를 걷어 팔뚝을 확인했다. 한의 왼팔에는 고등학교 때 왕따를 당하며 담뱃불에 지져진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한은 지난 암울한 세월이 남긴 상흔이 싫어 가상현실 게임에서 캐릭터를 만들 때 흉터는 모두 제거했다. 가상현실법에 의거해 얼굴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고칠 수 없지만, 흉터나 몸매는 교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팔뚝을 확인한 한은 또 다른 혼란에 빠졌다. 팔뚝에 화상 흉터는 안 보이지만, 화상 자국이 남아 있던 위치에 희미하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이건 뭐지? 화상 자국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니. 마치 내 진짜 몸과 게임 속의 몸이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은 상황이라니……’
나중에 따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등과 배에 형에게 구타당한 흔적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한은 지역 정보를 다시 열었다.
활동이 늘어나자 지역 정보창도 더 자세히 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