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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카르텐 (소왕국)
언어 : 카테르니아어
…….
카테르니아어는 별도로 고대어라거나 비의(비밀스럽게 기록된 전승)라는 표시가 없었다.
현재 쓰이는 언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쇼크」의 대륙어 목록에 카테르니아어는 없었다.
한은 생산직 퀘스트를 하다 보니 드래곤이나 마왕 등이 편하게 부려 먹기 위해 부여해 준 언어 번역 능력이 있기에, 대륙 어느 지역에서도 조금의 불편함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
두 랭커는 통역 마법이 걸린 장비를 당연히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별자리!’
별자리 지도를 불러냈다.
「드래곤 쇼크」에서는 별자리가 어디에 가더라도 똑같았다.
별자리가 신성계(神聖界), 즉 신계(神界)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별자리마저 달랐고 거의 표시가 되지 않았다.
한은 오랜 방랑 생활로 천체 관측과 별자리 해석 스킬마저 덤으로 마스터했다.
밤이 아니어서 별자리가 아직 관측되지 않아서인 것 같았다.
한은 우뚝 서서 미칠 듯한 심정으로 카테르니아 대륙이 원래 세상과 다른 이세계이며, 자신은 게임 내에서 선택되어 불려왔음을 확인했다.
한편, 난장판이 되어 버린 궁성에서는 남겨진 영웅의 종자에 대한 처분을 놓고 정치적인 대화가 오갔다.
귀족들은 제멋대로 한의 처분을 정했다.
명목상이나마 대륙을 구원한 영웅도, 국왕도 논의에 힘을 쓸 수 없었다.
사실 국왕도 대륙의 환호와 인기, 권력을 독차지할 영웅이 달갑지는 않았으니 한을 도와줄 이는 없었다.
측은지심이나 정의감을 가진 자도 분명 있겠지만, 그들은 권력과 거리가 멀었다.
“자작위는커녕 남작위도 가당찮지요.”
“그러나 대륙의 은인…….”
“어허― 은인이라니요? 은인이신 영웅 두 사람은 신의 은총을 받아 이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소이다.”
“일개 양초장에게 자작은 과분한 것이 사실 아니오? 원래 남작이었다 하니 귀족 신분을 인정해 줘야겠지만.”
“이럴 때 꺼낼 얘기는 아니겠소만, 성녀님이 저희 영지 출신이라는 걸…….”
“허허… 신전은 저희 영지에 있지요.”
염치없이 논공행상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자들도 출현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의 말에 좌중에 침묵이 깔렸다.
기진맥진하지만 정신을 차린 성녀는 주위에서 한의 사정을 듣고 아차 싶은 얼굴이 되었다.
“젊은이, 미안하네. 기도는 올려드릴 수 있지만 내 신성력은 모두 기원에 쏟아 버려서…….”
파리하고 창백한 성녀는 부들부들 떨며 자세를 잡고 기도를 올렸다.
아무 일 없었다.
귀족들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대륙의 위기를 구하고 퇴물이 된 건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성녀에게는 원래 지내던 신전이 있었다.
“신의 부르심을 받을 때 젊은이에게 부여된 임무를 마치면 돌아갈 수 있을 터.”
한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밀랍을 원합니다.”
시종들이 부리나케 밀랍을 가져왔다.
양초는 귀한 물건이지만, 궁성에서는 벌집과 밀랍을 상비하고 있었다.
한은 밀랍을 녹여 양초를 만들었다.
‘제조창’
제조창을 열어 원료 칸에 밀랍과 심지를 올려놓자 자동으로 양초 제작이 지정되었다.
‘품질은 최고급, 디자인은 보통으로.’
한은 최고급 양초를 선택했다. 제조창에서 한에게만 보이는 양초 제작 과정이 동영상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양초 다발이 끈으로 깔끔하게 묶여 만들어졌다.
심지로 쓴 실과 포장한 노끈은 아까 채집한 길가의 풀에서 섬유질을 뽑아 꼬아서 만들었다.
한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눈에 신기하게 비쳤다.
밀랍을 받아 들더니, 갑자기 밀랍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양손만 공중에서 몇 번 허우적거린 다음, 한참 기다리나 싶더니 서른 개 남짓한 완벽한 형태의 초가 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공간(亞空間)?”
“허― 아공간에서 고작 양초를 만들어 내다니.”
마법사들이 경악 어린 감탄과 질시를 내비쳤다.
아공간은 8레벨의 마법이었다. 대마법사들이 쓰거나 유물 같은 아티팩트에 걸려 있는 귀중한 마법이었다. 더구나 단순한 저장 용도가 아닌 경우는 이론으로만 전해졌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개 양초장이 아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고작 양초 제작 비품용에 쓰다니 탄식할 만도 했다.
엄밀히 따지면 마법의 힘으로 시공을 비틀어 만든 아공간과 달랐다.
한은 그저 게임 기능인 소지품창(인벤토리)과 제작창을 열어서 양초를 만들었을 뿐이다.
인벤토리는 ‘물품 저장 창고 역할을 하는 아공간’, 제작창들은 ‘제작용 비품 창고 노릇을 하는 아공간’이라 불러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다만 「드래곤 쇼크」의 유저들에겐 누구나 당연히 가지고 있는 개인만이 열어 볼 수 있는 귀속된 아공간이겠지만.
한은 양초 만들기 스킬이 마스터 랭크이기 때문에 빠르게 만들었다.
양초 제작을 처음 배울 때는 제작창이 따로 뜨지 않고 일일이 계량컵과 저울로 계량하며 중탕하고 틀에 넣어 굳히는 과정을 손으로 거쳐야 했다.
생필품 제작 마스터리가 100%를 넘어서고, 양초 만들기 마스터 랭크를 찍으면서부터, 양초 제작창과 여분의 양초 저장 슬롯이 생겨나 편해졌다.
재료만 있으면 제조창을 통해 양초를 뚝딱 만들었다.
만들어진 양초는 무한히 저장할 수 있는 전용 슬롯이 있었다. 양초의 원료가 되는 밀랍과 심지도 저장 슬롯이 할당되었다.
그것은 생산 스킬을 마스터 한 유저에게만 주어지는 배려였다. 워낙 척박한 환경을 딛고 마스터를 했으니 혜택을 주는 것이다.
궁수는 화살 슬롯이, 암살자는 단검과 독병 슬롯이 주어지지만, 수량에 한계가 있는 것에 비하면 특별한 혜택이기는 했다.
어느 게임에서던 생산직에게는 대량으로 쌓이는 재료와 생산품의 보관이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한도 본의 아니게 건축 스킬 마스터를 찍을 정도로 저장고 제작에 심혈을 기울일 만큼 허덕이다가, 생산직 마이스터가 되면서부터 인벤토리 부족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튼 순식간에 대량으로 양초를 찍어낼 수 있는 한이 짐짓 한참 시간이 걸리는 척 기다렸다가 꺼낸 이유는 제 실력을 고스란히 노출시켜서 득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법사나 귀족들이 한의 아공간(?)에 번들거리는 눈길을 던지는 판국이었다.
심지어 무례하게 한을 향해서 마법적 검사를 시도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 봤자 밝혀진 것은 없었기에 더욱 안달하는 눈치였다.
“그 아공간은 특수한 아티팩트로 엽니까?”
“제가 온 세계에서는 장인들이 경지에 이르면 신의 축복을 받아 이런 특수한 아공간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무뚝뚝한 한의 말에 겨우 탐욕의 눈길을 거두었다.
신의 축복으로 내려진 것이라면, 장인에게 귀속되어 있어서 그 외의 용도로는 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대륙에서도 ‘유랑하는 성자에게 내려진 무한한 바랑’이라던가 ‘착한 드워프 소년의 나뭇짐이 무한히 들어가는 지게’같은 전설처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귀족들의 시선은 한이 내놓은 최고급 양초에 쏠렸다.
과연 최고급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최상품이었다.
한이 내놓은 양초는 세 종류였다. 굵은 방망이 모양, 중간 굵기 막대기 모양, 손바닥 길이의 가는 양초.
양초 디자인은 한이 마음대로 고를 수 있지만, 일단 이 궁성에서 쓰이는 모습대로 만들어 보았다.
매끈한 당밀 빛 표면에는 장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한은 시험 삼아 손가락 굵기인 가느다란 양초 한 개에 불을 붙였다. 연기도 냄새도 없고 깜짝 놀랄 정도로 오래 가는 한의 양초에 다들 감탄했다. 불꽃이 흔들리거나 심지가 튀지 않고 일정한 밝은 빛을 환하게 뿜었다.
“과연 용사들의 인정을 받은 장인…….”
“신의 축복을 받을 만하군요.”
한은 양초를 국왕에게 상납했다.
그러나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았다.
한의 얼굴이 급속히 어두워졌다.
하나를 줘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몇 개를 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은 침묵을 지켰다.
암담했다.
퀘스트 창을 몇 번이고 다시 들춰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대륙 전역에 생필품을 조달해야 하나?’
한은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드래곤 쇼크에서도 사실상 전 대륙에 구석구석 생필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그럴 준비는 착실히 갖추었다. 작은 영지를 고도로 발전시켜서 생산 기지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미 두 번이나 해 본 일이었다.
‘영지를 개발하고 자립도를 갖춘다. 그리고 영지를 기반으로 대륙에 필요한 물건을 전달한다. 흠…….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륙이라면 식량이 가장 중요할 테고, 의식주를 집중 공략해서 해결되면 좋겠지만 고약한 퀘스트라면 생필품 전체를 뜻할지도 모른다. 생필품이 종류가 무한하긴 해도, 막상 진짜 이것이 없으면 인간이 살기 힘들다는 물건은 몇 종류 이내로 압축할 수 있겠지.’
한은 잠시 골치가 지끈거렸다.
‘생필품을 만들어 내더라도 막상 사들일 자금력이 없어서 퀘스트가 해결이 안 된다면 시장이 구매력까지 갖추도록 도와야 하려나? 휴― 당장 시급한 일부터 차근차근 하면서 어려운 나중 일은 체크만 해 두자.’
일부 영지끼리 일이라면 어렵지 않았다. 한은 주위의 가난한 영지들을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일에도 익숙했다.
대륙 전체를 놓고 보면 아찔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일부 지역으로 한정해서 보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곳이 게임이 아닌 실제 세계이니 위험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설마 게임처럼 부활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시스템이 다른 부분들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인맥과 유저들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는 점도 난점이었다. 한은 홀로 늑대 무리 같은 NPC들 틈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사상과 종교적 배경이 지구와 다른 부분이 있겠지.’
자칫하면 누군가의 의도적이거나 우발적인 선동에 의해 위험한 마녀사냥에 몰릴 수 있었다.
‘정신 차리자.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한은 자꾸 현실 도피하고 싶은 부정적인 마음을 추슬렀다.
‘내 유용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밟힌다. 가진 것을 지나치게 드러내면 호구로 먹힌다.’
한은 바싹 긴장했다.
앞으로 퀘스트가 완료되는 순간까지, 한평생 전쟁과 정치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경쟁하며 살아남은 이세계의 귀족들을 상대로 적절한 균형을 잡으며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아직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했다는 사실마저 실감나지 않고 믿고 싶지 않았으나 살아남으려면 일초라도 빨리 인정하고 현재 처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은 돌아가는 정세를 알기 위해 주위의 상황에 집중했다.
귀족들은 한의 처우를 마저 논했다.
곧 가닥이 잡혔다.
“한 경, 영웅을 따라 위험한 곳에 다녀온 그대의 노고에 치하하는 바이다.”
왕은 한을 용사의 부스러기 정도로 취급하며 생색 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영웅들의 면모를 보아 그대의 자작위는 그대로 인정하겠다. 영지는 더 넓은 곳으로 변경토록 하였다.”
일부 귀족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우리 왕국에 인접한 너른 공지(空地=빈 땅)가 있다. 그곳에서 그대가 개척하는 모든 영토는 그대의 영지로 인정해 주겠노라.”
시종이 커다란 두루마리를 가져와 탁자에 열어 보이자 지도가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한의 정보창에도 지도가 자세히 표시되었다.
왕과 귀족들은 한을 무시해서 듣거나 말거나 대놓고 토의했기 때문에, 한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대를 한 자작으로 봉하고 공지의 이름을 ‘한’이라 하겠다. 자유도시이자 독립 영지가 될 것이다. 더불어 한 자작령을 개척하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말은 그럴싸했다.
체면을 세운 왕과 귀족들의 얼굴에 흡족함이 차올랐다.
양심적이지만 힘이 없는 소수의 귀족들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왕이 말한 공지는 주변 어느 국가에서도 손대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몇 개의 나라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넓은 공지는, 인간들의 영토 밖이었다.
소왕국의 북쪽에 인접한 그 지역은 바위 사막이나 자갈 사막에 가까운 황무지였다.
뿐만 아니라 자작령(?)의 서북쪽으로는 엘프의 숲이, 북쪽으로는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험준한 산맥이, 동쪽에는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바다가 있었다.
공지에서 식수를 구하려면 숲 근처로 가야 했는데, 인간에게 적대적인 엘프들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또한 황폐한 땅에는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며, 봄이면 연례 행사로 북에서 범람한 몬스터들이 남쪽까지 밀려 내려오곤 해서 국경 지대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을 사지로 내보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자유도시니 독립 영지니 허울 좋은 수식어를 갖다 붙였지만, 왕국에서는 더 이상 책임지지 않고 손을 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3천의 백성과 2천의 노예를 영지민으로 주겠노라. 또한 3백의 병사로 하여금 한 자작과 그 영지민을 지키도록 하겠다.”
전쟁 유랑민인 평민과 농노 3천 명, 2천의 전쟁 노예는 단지 처치 곤란한 거렁뱅이들을 한에게 떠맡겨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병사 3백 명도 1년 계약한 어중이떠중이 계약 용병이었다.
어중이떠중이라 해도 오랜 전란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라 실력은 있겠지만 정예병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더불어 만 명이 일 년간 먹을 식량과 귀족으로서 그대의 소요품을 준비하기 위한 비용을 내리노라. 이는 전란으로 왕실의 재정이 풍족하지 않으나, 왕국의 귀족들이 성의를 보탠 바이다.”
한에게 내려질 예정이었던 왕국 내의 자작령을 쪼개서 가진 귀족들이 생색을 내며 식량과 금화를 보태기로 했다.
더불어 구색을 갖추기 위해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한 명의 신출내기 행정관을 한의 보좌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집사와 시녀장 및 2명의 시종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들은 얼마 전 왕국에서 축출된 귀족 밑에서 일하던 자들로, 유능하지만 껄끄러운 김에 유배하듯이 딸려 보내는 것이었다.
한쪽에서 마법사들이 한에 대해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세계 인과 문물을 조사해 오라.”
“예, 스승님.”
몇 궁정 마법사의 명에 3인의 견습 마법사가 동행을 자처했다.
귀족들 틈에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의 그늘진 곳에 서 있던 한 명의 어린 소년이 한에게 다가왔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12살인 그는 귀족의 사생아이고 어리지만, 정령사라서 일찌감치 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별 발전 가능성이 없는 하급 정령사로 판명이 나 후원자도 없이 버려진 아이였다.
‘정령사군.’
한은 소년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한은 자연 친화력과 정령 친화력이 극상이었다. 때문에 소년의 주위에 맴도는 하급 정령을 정령사들보다 더욱 뚜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소년은 한이 가진 맑은 정령의 기운에 막연히 이끌렸을 것이다.
한은 4대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몸이었다.
한은 소년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오르트
나이 : 12
직업 : 불의 하급 정령사
신분 : 명문 귀족가인 롱골로스 후작가의 버려진 사생아. 여기저기 떠돌이 신세라 상처가 많다.
요약 : 한 자작에게 의탁하려고 요청
정령사로서 타고난 자질은 미약하나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한 자작의 수하가 된다면 발전 가능성은…….
정령사 오르트는 물끄러미 한을 올려다보았다.
오르트는 박대당하며 자라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한에게 버림받았다는 동질감과 부모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감싸주는 포근함을 느끼고―정령왕의 기운 덕분에―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덕분에 그가 언급하지 않은 정보도 상세히 표시되었다.
“따라오렴.”
한은 오르트의 인물 정보에 별 이상이 없기에 합류를 받아 주었다.
달라진 보상에 항의를 하지 않고 고분고분한 한의 태도에 만족한 국왕은 보너스를 내렸다.
“짐의 개인적인 호의로 고급 창녀를 고용하겠노라.”
고급 창녀는 고용비가 상당했다.
이런 걸로 한의 불만을 무마하고 체면을 살리려는 수작이었다.
한은 처음으로 자기 주장을 폈다.
“폐하, 지금 제 처지에 고급 창녀는 과분합니다. 그 비용으로 다른 선물을 내려 주시옵소서.”
국왕은 호의를 거절한 한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깍듯한 태도에 마음을 달리했다.
“원하는 바를 말해 보거라.”
“영지를 다스리는 중책을 받았으나, 저에게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다양한 가축과 종자, 종류별로 소량의 광물 및 귀족가의 생필품들 약간량을 원하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이 세계가 생소하옵니다. 출발하기 전까지 대형 도서관에서 이곳에 대해 공부하고 싶습니다.”
“좋다. 필요한 물건은 내무대신이 챙겨줄 것이다. 도서관은 특별히 그대의 공로를 생각해 왕국에서 가장 큰 두 곳, 왕궁 도서관과 로열 아카데미의 도서관 출입을 허하겠노라.”
“감읍하옵니다.”
국왕은 한의 설설 기는 태도에 완전히 만족했다. 왕은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외군. 그대는 양초장이니 밀랍을 원할 거라 여겼는데.”
한은 고개를 조아렸다.
“밀랍을 주신다면 양초를 왕실에 꾸준히 상납하겠습니다. 10년간 영지의 세금을 면제해 주셨으니 그리하고 싶습니다. 소신의 양초는 제 원래 세계에서 최상품이었습니다. 왕실의 권위에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왕실의 문장을 함께 새겨 넣겠습니다.”
국왕은 반색했다.
한의 양초는 국왕과 귀족들이 보기에도 대단한 걸작이었다.
이 세계의 양초는 한이 만드는 최하급 양초에도 못 미칠 정도로 기술이 낙후되어 있었다.
“허락한다. 그대의 양초는 대단하더군. 대륙에서 그런 물건은 본 적이 없도다. 양초인줄 몰랐다면 마법 물품인 줄 알았을 게야. 틀림없이 구매를 원하는 귀족들이 많을 터. 내친김에 내무대신은 상업 허가도 함께 처리하도록.”
왕의 칭찬에 발 빠른 귀족들이 눈을 빛내며 한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호라시오 준남작이 거드름을 피우며 접근하자 다른 귀족들은 한 발 물러났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왕국 최대의 오시오 상단주였다.
오시오 상단은 테트라스 공작의 어용 상단이었다.
“그대가 양초장인가? 장인은 판로를 찾기 어렵지. 내가 그 양초를 전량 구입해 주겠네. 오시오 상단은 왕국 최고의 상단. 오시오 상단 이상의 거래처는 찾기 힘들 거야.”
호라시오 준남작은 테트라스 공작의 방계 친척으로 기사 작위가 없고 준남작이지만 뒷배를 믿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오시오 상단은 그만큼 힘과 권력, 재력이 있었으며 반발하는 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한은 인물 정보와 상단 정보를 통해 주위 귀족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적대감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정보창에 표시되었다.
‘익숙한 작자들이지.’
이런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 접근할 것을 예상했다.
어차피 한에게 양초는 많은 물건 중의 한 가지일 뿐이었다.
더구나 양초는 일종의 사치품.
반드시 사수해야 할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한은 미련 없이 오시오 상단과 계약했다.
왕실 납품을 제외하고 왕국에서 유통될 물량은 전부 오시오 상단이 판매를 대행하기로 했다.
성녀가 일으킨 기적, 대륙을 구원한 영웅의 소환과 보상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명예를 아는 2명의 기사가 나섰다.
“카르텐의 기사 롤랑. 한 님을 따르고 싶소.”
“카르텐의 기사 힌덴. 저 또한 한 님의 수호 기사를 자처하는 바입니다.”
공분에 잠긴 두 기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