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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테트라스 공작의 집무실.
“그리하여 저희 상단이 최근 화제가 되는 최고급 양초를 전량 선점하게 되었습니다.”
공작은 호라시오 준남작의 보고를 듣다가 물었다.
“그 양초장 말일세.”
“예.”
“딸, 아들 할 것 없이 성화를 부린단 말이지. 아들은 아들대로 정부들에게 나눠 줄 양초를 구하고 싶어 하고, 딸들은 골치 아프게도 양초장 녀석을 펫으로 거느리고 싶다고 난리야.”
귀족 여식의 펫이라면 장난감이 되는 시동이기도 하지만 성적 유희의 뜻이 다분히 담겨 있었다.
한은 작위 수여를 받느라 얼굴이 노출되었다.
검과 야만이 득세하는 전란기의 카테르니아 대륙에서 깡마른 남자는 허약하고 볼품없는 남자를 뜻했다.
하지만 한의 깔끔한 외모와 섬세한 외양은 일부 매니아층의 방심을 자극했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한의 불운을 속으로 비웃었다.
테트라스 공작의 자식들은 변태 성향이 다분한 걸로 유명했다.
뒷배 없는 잠자리 상대들은 불구가 되어 나오기 일쑤였다.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공작 각하.”
“방도가 있겠는가?”
테트라스 공작의 주름진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는 심계가 깊고 모략 정치에 능한 전형적인 중앙 귀족이었다.
설령 자신이 꾸민 복안이 있더라도 주위에서 자발적으로 나서기 전까지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자신 있게 장담했다.
“양초장은 얼마 안 가 사자굴에서 모든 걸 팽개치고 앗 뜨거라 도망쳐 나올 것입니다. 그때 그자를 공작 각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휘하로 거두시면 됩니다.”
말은 자비를 베풀라 하지만 실상은 영지가 망해 도망 나온 한을 공작가에서 잡아들이라는 파렴치한 권유였다.
뒷배 없는 한은 꼼짝없이 테트라스 공작가의 족쇄를 차고 노예처럼 중노동에 시달릴 게 확실했다.
“각하께서는 그저 알고만 계십시오. 포획은 제가 하겠습니다.”
드워프를 사냥해다 바치겠다 장담하는 뻔뻔한 노예 사냥꾼 같은 말이었다.
이렇게 대신 나서서 설쳐 주는 자들이 있으니 테트라스 공작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테트라스 공작이 원흉임을 아는 이들도 막상 닥치면 대리인들을 욕했다.
테트라스는 가혹하게 당한 자들에게 선심 쓰는 척 약간의 너그러움만 보이면 자복하는 얼간이들도 수두룩했다.
한은 처음 보상이었던 왕국 내 자작령을 그대로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빼돌려 갈기갈기 찢어 나누고, 한을 국경 너머의 불모지로 내몰도록 뒤에서 주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테트라스 공작이었다.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땅도 먹고 기술자도 삼키고.
뒤가 구리긴 하지만 겉으로는 자애의 탈을 쓰고 영지와 이권과 장인까지 털도 안 뽑고 손에 넣으려는 농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음흉한 수작은 테트라스 공작 특유의 것은 아니었으니, 딱히 그를 유난히 탐욕스럽다 지목할 바는 못되었다.
혼란기의 대륙은 약육강식, 힘과 권력이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자네만 믿겠네.”
“감사합니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테트라스 공작을 우러러 보았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기타 잡다한 보고를 마치고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는 마차를 타고 공작가를 나와 오시오 상단으로 돌아갔다. 상단의 집무실에 도착한 호라시오 준남작은 품에서 몇 장의 스크롤을 꺼냈다.
호라시오는 익숙하게 마법 탐지 방어 및 방음 환각 스크롤을 찢었다.
조금 천박해 보이는 알이 굵은 반지의 뚜껑을 열자, 둥근 구슬이 이중으로 숨어 있었다. 반지를 턱 가까이 대고 시동어를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집무실에 들어서기 전까지와는 판이했다.
탐욕과 모략에 찌든 얼굴의 분위기가 일변하며, 잘 단련된 암살자 같은 기도를 풍겼다.
“밀보다 보리가 이문이 남아 연락 드렸습니다.”
“보리와 밀이 8대1이라고 합니다.”
통신구를 통해 정해진 암호 문답이 오갔다. 잠시 기다리자 목소리가 바뀌었다.
“반응이 빠르군. 역시 테트라스 공작, 그리고 자네다워.”
“과찬이십니다.”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공작의 음흉한 속내에 어울리는 장기말로써.”
호라시오 준남작이 끼고 있는 통신구는 누비오드 제국의 드래곤의 레어에서 발견되었다는 희귀한 유물로, 통신 방해나 도청이 안 되는 물건이었다. 누비오드 제국 내에서도 비어 있던 드래곤 레어의 발견과 발굴 사실을 아는 이는 손가락으로 꼽았다.
두 사람은 약간의 암호와 정해진 함정 단어를 섞어 가며 통신했다.
“계획대로 진행했습니다. 3황자 전하의 예측대로 테트라스 공작은…….”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 항시 떠밀리 듯하게.”
“예. 공작이 보상을 암시하며 저에게 힌트를 던져 주면 그때 나서고 있습니다.”
호라시오 준남작은 테트라스 공작의 먼 친척이자 심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신분은 누비오드 제국 3황자가 카르텐 왕국에 심어 둔 첩자였다. 테트라스 공작과 먼 혈연이지만, 어차피 대접받지 못하는 사생아 출신에 적국인 누비오드 혼혈이었다. 그는 누비오드에 충성을 다했다.
“수고하게. 양초장이 카르텐에서 비참하게 구를수록 좋아. 그가 푸대접을 받고 악질적인 카르텐의 귀족에게 걸려 골수까지 빼 먹히다가 누비오드에서 구제해 준다면 가장 좋지만, 아쉬운 대로 처참한 최후를 맞아도 되겠지.”
강대국들은 성녀의 영웅 소환을 달갑게만 여길 수 없었다.
성녀의 요청에 소환돼 대륙을 구한 영웅이 한낱 소왕국에 나타났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민심은 전란에 크게 개입 안 한 소왕국 카르텐과 제국들을 비교했을 것이다. 자칫 전란의 책임을 제국들이 고스란히 짊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평민들이 감히 귀족층과 맞설 엄두를 못 내지만, 민심이란 것은 전후 혼란기에 뜻밖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자국민들의 심리적 이탈이 얼마나 무서운지,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사상은 생각도 안 하는 대륙인들이지만 최소한 그 영향은 알았다.
과거, 번성하던 카르텐 제국이 내분에 분열을 거듭한 끝에 소왕국으로 축소된 역사 또한 그랬다. 카르텐은 오래전에 보잘것없는 소왕국이 되었다. 하지만 제국들은 오랜 역사를 이어 오며 잠재된 역량을 무시하지 않았다.
누비오드 3황자의 무서운 점이 그것이었다. 자신과 타인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철저히 지배자로서 황족다운 시각에 의해서였다.
그가 황위에 오르면 제국은 융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호라시오 준남작을 포함해서 정보부가 3황자를 지지하고 적극 충성을 바치는 이유였다.
“다행히 따로 탐욕에 불을 지필 필요가 없었습니다. 양초장을 궁지로 몰려고 여론몰이를 하는 자들이 있어서요.”
“아아, 얘기는 들었네.”
“충동질한 것들은 역시 발톤의 그들입니까?”
“영웅이 될 기회를 놓친 작자들이지.”
호라시오는 쓴 미소를 지었다. 통신구 저편에서 시니컬한 미소를 짓고 있는 3황자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테트라스 공작은 아직 그들과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동안은 묵인하고 있습니다. 발톤 측도 손을 내밀지는 않고요. 테트라스 공작은 욕심을 나눌 인물이 아니니까요.”
“그래 봤자 궁지에 몰리면 언제든지 붙어먹을 것들이야. 탐심에 눈이 멀어 자국 내에 병을 키우는 벌레 같은 귀족들이지. 제국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누비오드의 3황자는 통신구 저편에서 눈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순간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일세.”

* * *

한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공부와 영지 경영 계획을 구상하고, 밤에는 연일 베풀어지는 승전 연회에 불려 다녔다.
마탑에서는 하루 건너 서너 시간 꼴로 초청을 빙자해 불러냈다. 카르텐은 과거에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마탑이 남아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한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고 마법적 검사를 했다. 마탑에서 얻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한은 전사나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체력이나 마력이 일반인보다 약간 나은 정도였다.
한의 월등한 자연 친화력이나 종족 친화력은 마법과 성질이 달랐다. 설령 정령사라 하더라도 한보다 수준이 월등히 낮은 사람은 알아채기 어려웠다. 한은 드래곤과 엘프마저 능가하는 자연 친화력의 소유자. 정령왕의 계약자 정도가 아닌 이상 감지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마법사들은 한이 선보인 아공간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특히 카르텐 마탑의 탑주이자 6서클 후반인 시슬리 후작의 관심이 컸다.
“제가 온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면 신들로부터 직업과 관계된 아공간을 내려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법사들은 웅성거렸다.
“신의 이적과 아공간이 그렇게 흔하단 말이오?”
“별도로 아공간을 관리하는 신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이라는 신이.’
“아아! 그래서 물질계에 아공간을 그렇게 다양하게 구현할 수 있는 거로군.”
한의 아공간은 마법이나 종족의 차이가 아니라 신(神)의 역사이므로 흥미를 가져 봤자 별로 얻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은 마법사들에게 「드래곤 쇼크」에 대해 두루뭉실하게 설명했다. 게임 속의 랭커들은 카테르니아 대륙에서는 초인들이라 불렸다. 한은 ‘아주 특별한’, ‘세계 1, 2위’, ‘신의 축복을 받아’라는 표현으로 몹시 드물고도 예외적으로 느껴지도록 설명했다.
한에게서 앞서 나가는 문명과 마법 지식을 얻을 수 없을까 기대하던 마법사들은 크게 실망했다.
마법사들은 한이 풍기는 뉘앙스에서 마법적으로 비슷하거나 뒤처진 세계라는 인상을 받았다.
“저희는 기계 장치를 만들어서 쓰는데…….”
마법사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드워프나 고블린들이 만들어 내는 기계 장치들은 화려하고 기발하지만 마법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마법의 부족을 조잡한 생산 기술로 보완하는 정도로 형편없다는 뜻이군.”
설령 은거기인이 있어서 놀라운 마법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 있더라도 일개 양초장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카르텐의 마탑에서는 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한은 아침부터 낮까지 아카데미에 가서 도서관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들였다.
아카데미의 장서관은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었다.
또한 학자와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주위에 서점들이 있었다.
일일이 손으로 채식이 입혀지는 책들은 고가에 귀중품이어서 고객이라도 함부로 보여 주지 않았다.
한은 여러 권을 놓고 비교하는 척하며 개중 몇 권을 사들였다.
한이 훌훌 넘기는 전화번호부 네 개 겹친 크기의 책에 대해 옆에 서 있는 서점 주인이 공손히 물었다.
“이 책은 저희 서점의 자랑입니다. 손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라뮬레온 대왕의 치세기에 대표적인 유행이었던 은입사 기술로 만들어졌지만 좀 더 발전된 채식 기법으로 보면 오토왕의 시대 것으로 보이는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정말 책에 대해 해박하시군요.”
한은 멋쩍게 웃었다.
시야 한쪽에 떠오르는 서지 정보를 컨닝하며 간간이 책에 대한 평을 한마디씩 흘리니, 책에 빠진 학자이자 서점 주인이 눈을 반짝이며 경외심 가득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동종업계 전문가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한이 서점 내의 모든 책을 살펴보도록 배려해 주었다.
심지어 따로 보관해 둔 희귀 장서들과 개인 소장본들까지 한에게 내보였다.
한은 드물게 서점 주인이 잘못 알거나 모르던 책의 정보를 몇 권 넌지시 알려 주었다.
뚜렷한 근거와 서지 전문가다운 해박한 한의 식견은 누구도 반박 못할 확실한 자료였다.
서점 주인은 덕분에 정체를 모르고 사들였던 낡은 고서 두 권이 고대 문서이자 진귀한 기록물임을 알게 되어 몹시 기뻐했다.

한은 저물녘에 궁에 돌아왔다.
정보창을 통해 찍어 둔 책들을 불러내 읽었다.
남들의 눈에는 한이 멍하니 앉아 허공을 주시하며 간간이 찌푸리거나 눈동자를 휘휘 굴리는 것으로만 비쳤다.
“연회 준비할 시간이 촉박합니다.”
시녀장 안나가 재촉했다.
한참 독서에 빠져 있던 한은 마지못해 책갈피를 지정해 둔 뒤, 일어서서 옷시중을 받았다.
승전 연회의 주인공이자 카르텐 왕국의 업적을 빛내는 장신구 역할인 한은 빠질 수 없었다.
왕실 연회도 나쁘지는 않았다.
왕국의 주요 귀족들 및 외교 사절들의 인물 정보와 사교계에 흘러 다니는 고급 정보를 가끔 얻을 수 있었다.
종종 한의 기술을 염탐하거나 갑자기 들어온 재물을 빼돌리려고 접근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한은 얕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워낙 생산직을 전문적으로 털어 가는 사기꾼들을 유형별로 당했던 「드래곤 쇼크」에서의 쓰디쓴 경험 덕분이었다.
한은 자신을 경시해서 경계하지 않는 귀족들을 역으로 이용했다.
한은 귀족들의 인물 정보를 통해 접근해서 조금씩 여론을 형성했다.
거창한 여론은 아니고, 한의 요구 사항을 큰 반대 없이 받아들여지도록 미리 설득해서 지지자들을 만들어 두는 작업이었다.
일단 한의 공로가 있어서 대부분은 한에게 친밀도와 호감도가 적절히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욕 없는 영웅의 일행을 사지로 보내는 게 미안한지, 국왕과 대신들은 한의 요구를 최대한 성의껏 들어주었다.
추가 선물들로 죄책감도 덜고 성의 표시로 생색을 내면서.
한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국왕측이 제시한 10년간의 세금 면제와 더불어 관세 및 거래세를 최소화하고 통관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수도로 물품을 상납할 때 교역할 상인들도 함께 보낼 거라는 이유를 대 가며 설득했다.
둘째, 침략 방지 조약을 자작령의 인접국들 공동으로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는 종이짝이 되더라도 한동안은 안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밑작업이었다.
셋째, 왕국 내 전면적인 상거래 허가였다. 상단의 통과와 관세 최소화를 자작령과 상호 체결했다. 물론 이것은 왕국의 입장이고, 각 영주들과는 또 각기 협약을 맺어야겠으나 그래도 미리 제약이 될 부분을 최소로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넷째, 수도와 이어지는 이동 마법진을 1개 설치해 달라고 했다. 1인용 간이 마법진이긴 하지만 한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한은 영웅이 보장하는 최고급 양초 납품과 밀랍의 대량 구매를 이유로 들었다. 이 문제는 호라시오 준남작을 건드려서 지지를 받았다. 호라시오 준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한이 위험한 영지에서 비상 탈출 용도로 이동 마법진을 원한다고 믿었다.
다섯째, 영지에서 화폐는 개별로 제작해 쓰겠다고 통보했다. 어차피 대륙에서 유통되는 금화와 은화는 금은 자체의 가치로 통용되니 상관없었다. 금력이 되고 과시욕이 있는 영주들은 자신들의 얼굴과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통화를 유통하기도 했다.
여섯째, 자작령 내에 길드의 설립 인허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예를 들어 양초장으로 알려진 한 자작이 대장장이 길드를 마음대로 세우면 기존의 대장장이 길드들이 발끈할 가능성이 높았다. 직업별 길드들은 장인들의 자존심과 기득권 유지를 하려는 심리 때문에 영역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아 했다.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였지만, 국왕은 영웅을 운운하며 기존 길드장들을 타협시켰다.
귀족들은 한의 이 요구를 비웃었다.
길드를 설립할 금력이나 인력도 없으면서, 기존 길드들의 반감을 사는 어리석은 처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일곱째, 한은 10년간 수도로 오가는 의무를 면제받았다. 흔히 지방 영주들은 일정 기간 가족이나 가신을 볼모로 수도에 보내야 하는데, 한은 가족도 가신도 없으니 인정받았다. 한이 10년이나 자작령에서 버틸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여덟째, 한 자작령이 완전한 치외법권임을 분명히 했다. 국왕이 언급했던 것처럼 ‘자유도시’와 ‘독립 영지’를 내세워 문서로 공증했다.
차후 영지가 발전하면 자작령에 준하는 세금을 내는 외에는 일단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을 보장받았다.
한은 스스로 로비스트로서 재능이 있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창의성을 발휘해서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앉히고 서로에게 윈윈(Win―Win)이 되도록 다각적인 전략을 통해 협상을 벌이곤 했다.
한은 하고 싶거나 혹은 할 수 있어서 협상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사를 하고 연구를 해서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 진행했다.
한은 자신이 이뤄낸 협상 결과를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특유의 자신감 부족으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람 대하길 어려워하는 한이 게임에서 상대에 맞춰 적절한 말투를 구사하는 것은, 일종의 필요한 상황에 맞춘 역할극 흉내 내기였다.
카테르니아 대륙은 게임이 아닌 실제였지만 게임 기능이 그대로 쓰이고 배경이 유사한지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은 내성적이었고 달변가이긴 커녕 말투가 어눌한 편이었지만 대화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해서 자연스럽게 친화력을 발휘하는 힘이 있었다.
꼭 필요한 때 발휘되는 한의 창의성과 협상에 대한 재능은 생산직으로서 닥쳐오는 어려움을 뚫고 마이스터를 달성하게끔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저 막노동을 성실히 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은 수도에서 한 달 반을 보내는 동안 이렇게 순조로운 타협을 마쳤다.
그 사이에 한은 헤더 남작의 추천과 소개를 받아 머들러스 정보 길드를 다녀왔다.
머들과 러스라는 절친한 친구가 창업자인 이 길드는 한이 의뢰한 대륙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의뢰비가 크지 않고 시일이 촉박해 표면적인 정보였지만, 책에 기록되지 않은 실생활을 담고 있는 한에게 필요한 정보였다.
꽤나 성실히 전달된 문서에 한은 만족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에 한은 이따금 「드래곤 쇼크」의 포르테 남작령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아직 영주로서 직위를 상실했다는 알림이 없으니 내 영향력이 발휘되는 동안 안전할 것이다.’
영주가 게임에 오래 접속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면, 영지는 자동 관리 모드로 들어갔다.
포르테 영지는 자립도가 거의 완성되어 있는데다 행정관들이 한에게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 유능했기에, 공격적인 성장은 못하더라도 내실에 더 치중하며 안정감 있게 유지될 것이다.
‘과연 돌아갈 수는 있으려나.’
한은 씁쓸하게 회상을 접고 다시 카테르니아 대륙의 역사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 케인이 성녀의 연락을 가져왔다.
“성녀께서 길 안내자를 보내셨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들여보내게.”
두 명의 인상 좋은 신관이 들어왔다. 젊은 신관은 약간 마르고 중년의 신관은 살집이 있었다. 둘은 대륙에서 신관들이 공통으로 쓰는 인사로서 성호를 긋고 겸손히 인사말을 건넸다.
성녀의 심부름꾼으로 온 두 신관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명한 신관들인지 은은한 신성력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성좌의 거룩함이 찬란하시길.”
한은 종교의 여부와 상관없이 가장 흔하고 무난하게 쓰이는 신관에 대한 인사로 화답했다.
두 신관의 인물 정보는 거의 비어 있었다.
‘역시.’
기본적으로 신관과 마법사 같은 직업은 정신계 저항이 높았다. 어지간히 친해지거나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인물 정보를 알기 힘들었다.
예상하면서도 인물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껴서였다.
궁에 떠도는 정보로는, 성녀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몰락한 신의 초라한 암자에 기거했다고 들었다. 일개 심부름꾼으로 찾아온 이들은 부유하고 세력 있는 교단에서 정통적인 신관으로 길러진 꽤 고상한 취향이 의복에서 태도에 이르기까지 드러났다.
“얼마 전부터 성녀님의 수발을 들게 된 데프입니다. 이분은 총본단에서 오신 디클레어이고요.”
“반갑습니다. 디클레어 사제시라면 혹시 ‘고대신의 태동’과 ‘신학요강’을 쓰신……?”
통통한 중년의 신관 디클레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잘 아시는군요.”
“고대신 연구 서적으로 가장 이름 높은 책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께서 웬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성녀님께서 한 경에게 방문을 요청하셨습니다.”
“혹시 저의 귀환에 관한 일인가요?”
“관련된 꿈을 보셨다는군요.”
한은 두 신관을 따라 성녀의 암자로 갔다.
성녀는 암자에서 은거하고 싶었으나 세상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암자 주위로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고 있었다.
“이분들은 교단에서 보내 오신 분들입니다.”
“성녀님이 섬기는 여신의 교단은 성세가 기울었다고 들었는데요.”
결례를 무릅쓰고 묻자 성녀는 잔잔히 웃었다.
“저도 그렇다고 여겼지요. 본당조차 무너지고 경전이나 교리독본조차 실전된 지 오래랍니다. 이 지방 토속 종교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오로지 여신님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해 왔었습니다. 이번 역사로 소식이 알려지자, 저와 같은 고대신을 섬기는 분들이 찾아오셨더군요.”
성녀가 섬기던 여신은 고대신으로 원래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미약한 신이었다고 했다. 당시 힘을 잃은 데다 대륙의 파멸을 불러온 마도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감을 느껴 신전을 봉문했다.
“어제밤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신성력이 사라진 몸인데 신의 뜻을 엿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성녀는 한의 두 손을 잡고 합장 하듯이 끌어 모았다.
백일몽이 펼쳐졌다.
신을 섬기는 자들이 꿈 혹은 백일몽을 통해 엿보는 비전이 옮겨졌다.
신의 비전은 한에게 보이는 창이 열리며 동영상으로 떴다. 게임속에서처럼.
현실에서 한과 주변의 상황이었다.
현실 시간으로 1일은 드래곤 쇼크에서 12일이었다. 카테르니아 대륙과 드래곤 쇼크의 시간은 다시 1대12의 비율로 흘렀다. 즉, 한이 카테르니아에서 144일을 보내면 지구에서 1일이 흘러갔다.
한과 함께 왔던 두 랭커는 카테르니아 차원 이동을 퀘스트라고 믿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한이 접속 안 한 상태로 뜨자 잠시 기다리다가 자기들끼리 길드 관리를 하러 떠났다.
한의 집도 보였다.
게임기에 누워 있는 한의 몸은 흐릿했다. 한의 몸은 신성력으로 둘러싸여 있어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게임 속 한의 영지는 자생 능력을 키워 놨으니 한이 세워 두었던 경영 방침으로 그럭저럭 돌아갔다.
“언제든 귀환하실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성녀는 한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한은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성녀가 섬기는 여신이 한을 충분히 혹사시켰다고 여기거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풀리리라 여겼다.

한이 급한 대로 준비를 마쳐갈 때쯤, 자작령으로 이동을 시작하도록 명령받은 날이 닥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