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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3. 영지민과 병사를 인수받다


3인의 영웅이 카테르니아 대륙으로 소환되어 온 지 한 달째.
한은 왕궁 밖의 작은 별궁에서 머물렀다.
작다고는 하지만 왕자가 결혼하면 내보낼 집이었던지라, 넓은 뜰과 기사 훈련장까지 갖춘 호화로운 대저택이었다. 아직 미혼인 왕자에게 배정할 예정이었기에 빈 궁이어서 당분간 한이 쓰도록 했다.
호위병들은 물론이거니와 왕궁의 시녀와 시종들을 여럿 보내 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카르텐 왕국은 외국의 사절들 앞에서 얕보이거나 나쁜 평판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귀한 국빈 대접을 철저히 해 주었다.
출발 일주일 전, 몇 귀족을 거느리고 한을 찾아온 국왕은 한에게 영지민과 용병들을 인계했다.
넓은 정원에 왕의 병사들이 창으로 거칠게 위협하며 도시 빈민가의 오갈 데 없는 거렁뱅이들을 몰아왔다.
“경의 신민(臣民)들이오.”

―띠링! 영지민을 인수했습니다.
―평민 천5백. 농노 천5백. 그들의 가족 2천 3백. 전쟁 노예 2천 명.
―영지민들은 오랜 영양실조와 전염병의 위협에 시달려 왔으며, 위정자를 불신하고 극히 두려워합니다.
―전란에 내몰려 피난민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위생, 교육, 충성심이 모두 바닥입니다.

국왕의 뒤에서 난쟁이 광대들이 이죽거렸다.
“내 귀가 이상해졌나 봐. 빈민이 신민이라고 잘못 들려.”
“내 귀도 그래. 경의 빈민들이오∼가 경의 신민들이오로 들리는군?”
낯이 뜨끈해진 국왕이 헛기침을 하며 공연히 성질을 버럭 냈다.
“이들은 왜 이렇게 거지 꼬락서니인가? 카르텐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차마 믿기지 않는군!”
‘거지들을 모아 놓았으니 그렇지요.’라고 간 크게 답변할 자는 없었다.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이제 저의 영지민이 되었으니 이들을 건사하는 문제는 제 책임입니다.”
공손한 한의 답변에 왕은 마지못한 척 진노를 가라앉혔다.
한은 덤덤했다. 기대가 없었으니 실망도 안 했다.
영지민들은 전쟁 난민으로 도성 주변에 모여 빈민가를 형성한 유랑민들이었다.
귀족들은 도성을 지저분하게 만들며 일자리도 찾지 못해 거지굴에서 살던 그들을 청소할 겸 한에게 떠넘겼다.
한은 유니세프의 소말리아 난민 광고를 실사판으로 보는 것 같았다.
미이라처럼 바싹 마른 거죽에 퀭한 두 눈은 초점 없이 흐렸다.
헐벗고 굶주려 황달기가 보였다.
차라리 쇠사슬을 차고 피죽만 얻어먹으며 중노동해 온 노예들의 상태가 더 나을 정도였다.
개중 쓸 만한 전문 기술이 있는 자들은 벌써 따로 추려서 내갔다.
비록 저열한 수준의 개발이 거의 안 된 농사와 가축 방목 기법 정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한은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냈다.
‘가족 단위라서 다행이군.’
평민과 농노 3천이라는 숫자는 15살에서 45살까지 남자들의 수였다.
그들에게 딸려 있는 아내와 어린아이들은 영민 취급도 받지 못했다.
현대인의 개념으로 노인 인구가 없는 이유는 대륙인들의 평균 수명이 열악한 보건, 식량 사정으로 인해 짧은데다 그들이 전란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15살 정도면 장정으로 취급되어 노동 인구로 투입되었다. 노쇠 또한 빨라서 40대의 주민들은 거의 현대의 60대처럼 보였다.
형편없는 수준의 영민들이지만 가족 단위가 반절은 넘으니 새 영지에 정착시키기 쉬울 터였다.
“이들이 경의 병사들이오. 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짐이 따로 군사를 내어 호위할 것이오.”

―띠링! 최하급 용병 3백을 인수했습니다. 무장도가 미미하게 올랐습니다.

광대가 자신의 귀를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는 시늉을 했다.
“방금 경의 병사라고 들리지 않았나? 자네.”
“에잉, 그 귀 천하의 몹쓸 귀로군. 똑똑히 잘 듣게. 국왕 폐하는 말씀하셨네. 이들이 경의 병맛들이라고. 저들이 병사면 파리는 드래곤도 때려잡겠다. 호롤롤로!”
자동 외국어 번역 능력은 가끔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단어가 나오면 비슷한 단어를 찾아 주었는데, 주로 비속어들이 번역이 어려웠다.
영지민들 옆에 용병들이 서 있었다.
조악한 자작 방어구를 걸치고 있는 그들은 규율이 엉망이었다.
대기 중인 용병들은 군사 정보를 볼 필요도 없이 형편없었다.
이름 있고 강한 용병들은 이미 고용되어 있거나, 굳이 사지로 따라갈 만큼 궁하지 않아서 급히 긁어 모은 용병의 수준은 오합지졸 오브 오합지졸, 최하급이었다.
무력이 약한 한에게는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은 수준이었다.
그들을 노려보는 기세만으로 움칠거리게 만드는 2인의 기사가 한에게 더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영지병의 훈련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경들은 자작령의 기사들이오. 군사 문제는 두 분께 일임할 테니 뜻대로 하시오.”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사 롤랑과 힌덴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의를 표했다.
기세등등한 2인의 기사가 하얗게 질린 용병들을 연병장으로 끌고 갔다.
국왕과 귀족들은 민망한 낯을 감추려고 인수만 시켜 주고 일찍 퇴장했다.
“안나.”
“예, 자작님.”
시녀장 안나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넋을 잃고 영지민들을 바라보다 급히 대답했다.
“샐리와 함께 시녀들을 데리고 만 명의 묽은 미음을 준비할 수 있나요?”
식량은 미리 보급받았다.
그동안 안나는 대규모 이동을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시녀들을 닦달해 빵과 훈제 고기를 말리는 등 건량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 주방의 솥을 모두 꺼내 뜰에다 불을 여럿 지피면 세 번에 나눠서 준비가 가능합니다.”
“미음 준비가 다 되면 나에게 알려 줘요. 케인, 주방에서 식기를 꺼내요.”
집사와 시녀장은 각기 맡은 일을 하러 떠났다.
한은 인벤토리에서 헤더 상단을 통해 사들여 슬롯별로 분리 저장해 둔 약초와 약용 열매를 꺼내 연금술로 조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한이 허공을 주시하며 팔을 몇 번 허우적거리고 손가락을 악기 연주하듯이 조물락거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한의 손가락 체조에 익숙해진 시종들은 개의치 않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양초를 만드는 한의 아공간은 유명해서, 오시오 상단에 납품할 물량을 틈틈이 만든다고 여겼다.

―띠링! 베오베타 3만 정을 조합했습니다.

베오베타 (알약)
―품질 : 최상급
―용법 : 알약 또는 가루약을 복용. 식사 전후 혹은 음식에 타서 먹을 수 있음.
요약 : 갓난아기가 100일 이후 이유식에 타 먹는 소화에 도움을 주는 유산균 제제보다 개량된 약.
하루에 최대 한 알씩 먹으면 소화 흡수가 잘된다.
영양실조로 탈진한 환자에게 특효.
*최상급 베오베타에 부가되는 특수 효과 :
―섭취 후 한 달간 약효가 지속된다.
―유소아의 입에 넣으면 자동으로 흡수된다.

한이 대륙의 지리 정보 책을 절반 읽는 동안 1차 분의 조리를 마치고 안나가 보고하러 왔다.
“3천 5백 인 분의 미음을 쒔습니다.”
“그럼 이제 무료 급식소를 차리죠.”
한은 식기 배급조, 식사 배급조를 꾸리고 케인과 호위병들로 하여금 난민들을 몇 줄로 서게 했다.
“이 약을 반드시 삼키고 식사를 하라.”
한은 일장 훈시를 하고 배급조의 옆에 서서 영지민들에게 먼저 알약부터 나눠 주었다.
피죽도 못 먹은 영지민들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물도 없이 약을 삼켰다.
알약도 배급조에 맡길 수 있지만 한은 일부러 직접 나눠 주었다.

―영지민 한스(25세. 피난 전에는 농부)와 친밀도가 올랐습니다.
―영지민 한스의 부인(24세)과 자녀들(5, 3, 2세)이 매우 고마워합니다.
―영지민 미첼(36세. 피난 전에는 광부)이 미심쩍어 하면서도 고마워합니다.
…….

영지민들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었고 친밀도가 상승했다.
또한 영지민과 직접적인 대면이나 접촉이 있으면 영주의 특성이나 능력에 따른 영향력이 더 잘 발휘되었다.

―띠링! 영지민들이 의심을 많이 거두었고, 일부는 감화되어 충성심 스탯이 생겨났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배탈이 난 것은 알약을 감추거나 몰래 뱉어 낸 5명뿐이었다.
‘베오베타 효과 확인.’
영지민들의 머리 위로 약효가 그래프와 색상으로 표시되었다.
정보창에서 일부를 지정하자 8명만 화살표가 떴다.
한은 약효가 잘 안 듣는 5명과 먹지 않은 세 명을 찾아내 알약을 추가로 투여시켰다.
한은 남은 미음과 베오베타를 연병장에서 기사들의 호령에 죽을상이 되어 ‘스빠르뚜아아아∼’라는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치며 구르고 있는 용병들에게 휴식 시간에 먹였다.
긴 여로에 소화불량은 피로를 가중시키고 일정을 지연시켰다.
한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이 아사하거나 과로사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내일까지 미음을, 모레와 글피는 된 죽을 쒀서 오늘처럼 배급해요. 그 다음날은 스튜와 빵을 주되, 식사 준비를 요리 솜씨 좋은 사람들을 뽑아서 같이하고. 내가 하루에 한 알씩 약을 나눠 줄 테니 아침 식사를 앞으로 함께하면 되겠군.”
한은 빵 한 덩어리를 씹어 넘기고 멀건 미음을 후루룩 마시고 그렇게 지시했다.
영양제와 몇 가지 회복약 및 치료약을 나눠 줄 예정이었다.
아사 직전인 사람들이 약물을 과량 복용하면 좋지 않을 터라 시간 간격을 두었다.
“이들의 숙소는?”
집사 케인이 답했다.
“날이 따뜻하니 안뜰에서 잘 겁니다.”
“모포도 제대로 없어 보이는데.”
“빈민가의 똥오줌 진창인 골목길에서 잠잘 때보다는 훨씬 안락할 겁니다.”
한은 집사와 시녀장을 데리고 집무실 근처 빈 창고로 갔다.
미리 옷감을 사서 만들어 놓은 평복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케인과 안나는 한이 허공에서 만 명 분의 옷을 꺼내자 놀라는 눈치였지만 거의 내색하지 않았다.
한이 아공간을 신에게 받았다는 일은 유명하지만, 당분간은 구체적인 사항은 밝히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최대한 미뤄야 했다.
견물생심이라고 미친 마법사의 실험실에라도 끌려가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한은 두 사람을 믿었다.
둘 다 이전 주인에게 충직했고, 고위 귀족가의 살림을 책임졌던 인물들답게 입이 무거웠다.
헤더 남작이 일꾼들을 시켜 보내온 물품들은 모두 차곡차곡 한의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슬롯에 자동 분배하도록 명령을 내리면 물품들이 종류별로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은 저가의 옷감을 다량 사들였는데 옷으로 바뀌어 튀어나오더란 것은 집사와 시녀장도 아직 몰랐다.
한은 양털로 모포를 제조해 옷 옆에 부려 놓았다.
여행용 망토로 걸치는 띠가 달려 있으며 이불 대용으로도 쓰도록, 얇지만 치밀하게 직조한 수수한 모포였다.
한이 신발을 내놓자 둘 다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국왕이 인계한 영지민들은 예상대로 맨발인 사람들이 많았다.
“긴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 신민들이니 신발은 좋은 걸 신어야지요.”
“양이 많아 보이는군요.”
“노예들까지 나눠 주도록 하세요.”
돈 좀 있는 평민들이 모처럼 장만할 만한 천에 가죽을 덧댄 신발이었다.
물자가 귀한 전시에는 구하기 어렵고 비싼 물건이었다.
집사와 시녀장은 한이 영지민들을 위해 큰 돈을 썼을 거라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겉모습은 평범했지만 한은 천과 가죽에 통풍, 방수, 항균 처리를 했다.
발의 굴곡을 맞춘 인체공학적 디자인은 발과 발목을 편하게 감싸 오랜 행군에 발의 피로를 덜게 했다.
밑창에는 에어 쿠션도 깔아 두었다.
누가 신발을 빼돌려 분해하면 에어 쿠션은 기능을 잃고 평범한 밑창이 되도록 만들었다.
케인과 안나는 한이 동정심으로 자금을 다 써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눈길이었다.
“예산은 걱정 말아요. 적어도 일 년간은 굶기지 않을 테니까.”
긴장을 풀어 주고자 하는 한의 농담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한은 더욱 가중된 우려의 눈길을 받았다.
그래도 새 주인의 자비심에 감복한 두 사람의 우호도와 친밀도가 올랐다.
“케인은 며칠 동안 부인과 갓난아기들까지 포함시켜서 인구조사를 하고, 안나는 별채 뒤의 숲에 흐르는 개울에서 사람들을 나눠서 목욕을 시키면서 이 옷과 신발들을 나눠 주시오.”

일주일 동안 때 빼고 광내고 호의호식(?)을 한 영지민들은 미이라에서 못 먹고 못살지만 건강에는 아직 큰 이상이 없는 빈민층 정도로 살이 올랐다.
악에 받친 용병들은 기강이 바짝 오르고 군기가 살았다. 무장도가 미미하게 올랐다.
일주일이 지나 자작령으로 출발할 때에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군기가 바짝 들어 도열한 용병들과 그들의 선두에 선 두 기사는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뒤따르는 영지민들은 멀끔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약간 희망에 찬 밝은 모습이었다.
환송하러 나온 국왕과 귀족들은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랐다.
수도의 백성들은 그저 영웅을 반기며 기뻐했다.
“영지민들까지 빛이 나는 것 같아!”
실상을 아는 귀족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수도에는 은근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한이 막대한 거금을 써서 치료약을 영지민들에게 나눠 주어 목숨을 살렸다는.
귀족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