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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7화)
三. 나라엔 반드시 수 명 이상의 인재가 있다(3)
초췌한 얼굴의 천화를 바라보며 흑희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흘 동안 안 보이던데 영령, 양령 언니들에게 좀 배워 왔어?”
“벌모세수를 시켜 줬어.”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흑희 엄마가 보기엔 내가 재능이 없어?”
“응.”
천화는 한층 더 상처 입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희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천화가 힘없이 다가오자 가슴을 편 후 흑희는 머리부터 끌어안았다.
“재능이 없다고 상처 받을 생각이야? 천화 너의 재능이 무공의 습득에 있다고 믿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강한 게…….”
신장이 작고 가슴도 작은 혈희에게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흑희의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천화가 울음기 섞인 소리를 냈다. 흑희는 한 차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천화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영령, 양령 언니들의 장난이 좀 심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그거 알아 천화야? 재능이 넘치는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나 있어.”
천화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흑희는 천화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노래하듯, 시를 읊듯 자상하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성공할까? 그렇지 않아.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의해서, 그리고 의지와 각오에 의해서, 운명과 시련에 의해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꺾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무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야. 사람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고 우리 아들도 그래. 그게 무공을 익히는 재능이 아니었을 뿐이야.”
흑희는 가슴에서 떼어 냈다.
천화는 나이에 걸맞게 엉엉 울고 있었다. 코까지 조금 흘렸다. 흑희는 손수건을 꺼내어 콧물을 닦아 주었다. 더러운 걸 만진다는 기색 하나 없이.
“천화에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 무공을 익히는데 재능이 있는 이들보다 그 습득은 느릴지 몰라. 하지만 그들에 비해 불리한 곳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
“……그렇진 않아.”
“그럼 재능은 충분하지만 바탕이 받쳐 주지 못하는 이들은 아들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운이 좋다고 하겠지.”
“그 운을 만든 건?”
“엄마들……아냐?”
“아니야.”
흑희는 자상스럽게 말하고서 천화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엄마들을 이렇게 기쁘게 하고 모든 것을 주고 싶게 만들어 준 우리 아들의 능력이야.”
그 말은 분명 억지일지도 몰랐다.
태어난 곳이 부족함 없는 곳이라는, 운이 좋게 작용했다는 말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천화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무공을 익히는데 재능이 없다는 말은 아직도 가슴 한곳에 남아 있지만, 그게 울음을 나오게 하지는 않았다.
“나도 도움이 되는 거야? 능력이 있는 거야?”
“물론이지.”
“……씻고 올게.”
“기다리고 있을게.”
흑희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른스럽게 웃었다. 그녀도 나이가 결코 많지 않은, 이제 막 어른이 된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다른 어느 엄마의 그것과도 달랐다. 천화는 눈 밑이 빨갛게 된 채로 헤실 하고 웃었다. 그리고 씻으러 종종걸음을 해 사라졌다.
흑희는 팔짱을 끼고 가볍게 턱짓했다.
천화와 흑희가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두 명의 궁희가 쭈뼛쭈뼛해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사희였다.
“이해는 하겠지만 너무 기분 냈어요, 언니들.”
“으음, 미안해. 너무 기분을 냈나 봐.”
“우리들의 특기를 사랑하는 천화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마음에 그만…….”
뭔가 변명을 하려던 사희는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흑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천화는 사내아이란 말이에요. 당연히 그런 것에 상처 받죠. 여자아이와는 달라요.”
“그래, 그런 것 같네. 아무튼 잘 처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들도 잘 부탁해.”
“네네, 나쁘게 말하지 않을게요. 대신 언니들이 가진 보물 중 하나를 줘야겠어요.”
사영령, 사양령이 움찔했다. 두 명의 사희는 뭔가 배신을 당한 얼굴로 흑희를 바라보았다. 흑희가 주도권을 잡은 장군의 그것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싫어요?”
“……천벌 받을 거야.”
“후회하게 해 주겠어.”
“흐응, 그거야 언니들 소관이고. 그래서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사희 두 명은 치를 떨다가 이내 서로의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떼어 내어 흑희에게 던졌다. 상승의 무리를 섞어 던진 귀걸이였지만 흑희는 쉽게 잡아냈다. 그녀는 곧 자신이 달고 있는 귀걸이를 떼어 내고 우윳빛을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를 달고 싱긋 웃었다.
“두고 봐.”
“두고 보자는 사람 중에 무서운 사람 없던데요.”
사희가 이를 갈면서 올라갔다.
조금 늦게 천화가 물기 젖은 얼굴로 걸어왔다.
“응? 흑희 엄마, 왜 그런 표정이야?”
“엄마 뭔가 달라진 거 없니?”
“사희 엄마가 한 짝씩 달고 있는 것과 같은 귀걸이를 걸었네?”
“……그걸 아는구나?”
“응, 그런 걸 모르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자랐잖아, 난.”
흑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나?”
“그랬지. 다들 뭔가 달라진 거 없니 하고 물었을 때 모르겠어 하면 밥을 안 주잖아.”
“……그랬나?”
“응.”
그 이상 확고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천화였다.
“그런데 뭐 나 봐 주는 거 순번이라도 정해 둔 거야?”
공부에 앞서 천화가 물었다.
“순번이라니?”
“이러다 엄마들에게 전부 하나씩 배울 것 같아서 말이야.”
“응, 아마도 그렇게 될 예정인데?”
“그래도 돼?”
“뭐가 그래도 돼?”
흑희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지 모호한 얼굴로 반문했다. 천화는 말하려다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졌다. 뭔가 부조리함을 느꼈는데 그걸 말로 토해 낼 수가 없었다.
“아니, 뭐 됐어. 그런데 흑희 엄마는 쓰던 향수를 바꿨나 봐?”
아직 전해지지 않았지만 최고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실권자들은 향을 정제해 액체에 담아 살짝 뿌리는 향수를 애용했다. 향낭(香囊)을 서역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물건을 가지고 온 상인은 같은 무게의 금과 바꿔 갔지만 궁희 누구도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천화도 자신이 쓰는 향수가 있었다.
흑옥루의 궁희들은 공교롭게도 좋아하는 향이 전부 달라 각기 다른 향수를 샀다. 그게 또 흑옥루를 이용하는 손님들의 흥미를 자극해서, 그녀들만의 특징이 되었다던가.
“응, 무슨 향기인지 알겠어?”
“이건 뭐지? 익숙한데.”
“매화향기야. 주의력을 좀 키워야겠네, 천화는.”
“겨우 그 정도에 주의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야?”
“물론, 소설을 보면 그냥 칼 쓰고 다 때려잡고 되도 않는 정의감으로 사파를 싹 쓸어버리고 산적들 다 목을 베어 버리는 녀석들이 많지만 사실 다 쓰레기야. 능력 있는 남자는 이런 걸 배워야 한단다.”
“하지만 남자는 쾌도난마(快刀亂麻)여야지!”
“흐응, 그래?”
“당연하지!”
“그런 말을 하면 남자를 그만두게 만들어 준다?”
흑희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뭔가 손아귀 안에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천화는 오금이 저려 무릎을 오므리고 덜덜 떨었다. 천화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탓인지 흑희는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화제가 바뀌었다.
“아참, 이 말을 안 했구나. 아들은 무림에서 최고의 강자가 되어도 검황(劍皇)이니 지존(至尊), 패왕(覇王) 이딴 별호는 쓰면 안 된다?”
“왜!”
한때 소설에 심취해 자신이 무림에 나가면 파천검황지존패왕이라는 별호를 지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소년이 반문했다.
흑희는 매우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런 별호를 가진 놈들 다 재수 없어.”
“……뭐?”
“게다가 요즘 시대에 칼부림 잘한다고 되는 시대니? 천 년 전에 태어나서 부족 생활이나 하라지. 하여튼, 태어날 시기를 잘못 고른 녀석들이 꼭 그런 표현을 쓴단 말이야. 시대가 어느 시댄데 말이야.”
“그, 그럼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흑희는 단호하게 손가락 두 개의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돈의 시대지.”
“뭐야 그게!”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어. 이게 진리야. 무림 맹주라고 옷 안 입고 잠 안 자고 밥 안 먹니? 다 돈이 들어가는 거야. 싸움 못해도 돈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싸움 잘한다고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요즘 세상이 상인을 좀 비천하게 대하긴 하는데 그러면 못써요. 나중에 크게 경을 칠거야.”
“그래서 엄마는 돈 버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거야? 접수계를 맡고 있으니까?”
흑희는 으음 하고 침음했다.
“사실은 엄마도 그걸 가르치고 싶었어. 그런데 강호에 나가도 삶이 궁핍하지 않게 금붙이가 따로 지원될 거라고 하더라고.”
“만세!”
아무리 그래도 수전노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천화가 만세를 불렀다.
흑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엄마도 다른 도움될 걸 가르쳐야 하지 않겠니?”
“그럼 흑희 엄마는 뭘 가르쳐 줄 건데?”
기다렸다는 듯 흑희가 대답했다.
“공부!”
“으악, 공부라니!”
천화가 불퉁거리자 그제야 흑희는 픽 웃고는 옷자락을 크게 펼쳤다. 코를 살짝 울리는 매화향기. 흑희가 천화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정보야. 이제부터 엄마가 가르쳐 줄 건 무림의 정세와 각 문파의 위치, 그리고 주의해야 할 것들과 강호의 이름 높은 고수들에 관련된 내용을 가르쳐 줄 거야.”
“그런 공부라면 환영이야.”
“그렇지?”
흑희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고서 천화를 떼어 놓았다. 그녀는 다른 언니들이 천화를 가르치는 동안 모아 둔 강호의 이야기들을 모아 둔 책을 펼쳐들 었다.
“그리고 강호에서 행동할 때 아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교육할 거야.”
“즉 정도인의 바른 자세라거나, 적을 만났을 때 싸우는 태도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아니, 헛바람 안 들고 바보 같은 별호 안 짓도록 머리에 찬물을 씌워 줄 거야.”
“너무 냉정한 말인데? 흑희 엄마는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헛바람만 잔뜩 들어 있을 것 같아?”
흑희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들, 무림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
화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화는 그런 것을 말해서 분위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천화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그렇게 대뜸 물으면 안 되지. 질문이었으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으음, 아무래도 내공과 익히고 있는 무공의 숙련일까?”
“아니야.”
천화도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다. 아까 들었던 말 때문에 흑희가 중요하게 두는 비중이 무공이 아니라는 건 명백했으니까.
“그럼 인맥?”
“뭐, 인맥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네 번째쯤 되겠네. 더 생각해 보면 없어?”
“으으음……. 그럼 돈일까?”
“안타까워라. 그건 두 번째야.”
돈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것 같아 설마 해서 말해 봤지만 아니었다. 천화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럼 뭐야?”
“사건을 맞서느냐 피하느냐의 선택. 상대를 앞에 둔 채 이야기를 할 때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그리고 사람의 심성을 알 수 있는 관상. 아들이 무림에서 살아가면서 겪을 모든 사건과 사고의 감별. 그리고 선택이 기로에 섰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
“그런 게 가능해?”
“물론이지! 나만 믿어.”
흑희가 가슴을 펴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천화는 그 점이 못 미더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해 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다른 엄마보다 흑희가 말을 좀 조리 있게 한다고 생각했더니 그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솜씨는 빼어난 지식이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금을 잘 탄다는 말을 할 때도 그 시대의 금을 타는 탄주법 따위를 설명해 가며 말하니 훨씬 납득이 갔다.
황궁에 들어오는 온갖 소식과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들을 조합해 말하는 다양한 지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
그런 법칙이 지켜지고 있다곤 하지만, 어쨌든 무림은 세력을 가지고 무력을 휘두르는 집단이다. 아닌 척해도 황궁은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고 있었고 그 정보를 흑희가 차곡차곡 모아 두고 나름의 생각을 곁들여 정리한 것이다.
흑희는 사희와 달리 무공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무공이 약해서는 아니고, 그저 엄마들끼리의 역할 분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법을 말할 때 흑희는 사희처럼 경로를 가르쳐 주고 어떤 식으로 무공배분을 해야 하는지 대신, 검법의 이름이 그렇게 된 이유나 사용된 예, 그리고 현재 그 검법을 누가 익히느냐 등등을 알려 주었다.
흑희는 정말 소설에서 말하는 만박자(萬博者)라도 되는 것 같았다.
흑희가 가르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노숙을 할 때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대를 찾는 방법이나 물이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방법, 주변을 살피고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 받는 것까지, 무척이나 많은 걸 배웠다. 어디 메마른 사막 지대로 가는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다 배워야 하나 고민하던 차, 흑희는 이젠 여러 방파에서 사용하는 암호문을 건네어 천화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이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 공부는 조금만 하자.”
“와!”
암호해독에 골머리를 썩이던 천화는 흑희가 다시 전해 주는 이야기에 환호했다.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배운 천화는 시간 가는 것을 잊었다. 흑희에게 무림의 이야기를 듣고 장난기가 조금 줄어든 사희와 함께 무공을 익히며, 그러다가 무리하면 혈희가 와서는 요상심법으로 몸을 풀어 주는 매일.
그게 익숙해졌다 싶을 즈음 다른 엄마가 천화를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