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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8화)
四. 고수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돈만 있으면 될 것도 같다(1)
요희보다 나이 상으로 앞선 두 명의 엄마 중 하나, 구희(究姬).
궁희 가운데서 최강의 힘을 가진 요희 다음으로 강한 무위를 갖춘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도저히 기녀라고 생각되지 않는 강렬한 인상이 있었다.
이름은 단리서라(端里庶羅).
이름으로 알 수 있다시피 서역인, 아니 북해 건너 살고 있는 백인이었다.
“와, 구희 엄마! 너무 오랜만이에요.”
“음.”
구희는 아리따운 기녀들 가운데서 외형적으로 가장 특이했다.
그녀는 화려하게 굽이치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피부가 놀랄 만큼 하얀데다 키도 훤칠했다. 눈동자는 맑은 날의 하늘을 닮은 푸른색. 왜 저 서역 너머의 사람이 여기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히 중원인이 아니었다. 한때 천화는 그녀가 안기만 하면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리서라가 몹시 속상해했다고.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날 일. 천화가 와, 소리를 내며 구희에게 달려들었다.
구희가 천화를 받아서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구희는 궁희 가운데서 황족 수호의 임무를 거의 하지 않는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유달리 눈에 띄는 외모 탓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로는 서역과의 교역 덕분에 대단히 바쁜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궁희가 만들어진지는 이 나라가 개국된 직후였다고 한다.
무로 일어서 대륙을 정벌하고 그 와중에 숱한 배신과 반역이 있었고 그것은 나라의 주인이 된 이에게 있어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주인은 목숨이 위협당할 때도 있었고 정적을 제거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기에 궁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사병 집단으로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병은 그 외에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궁희는 다른 어떤 황궁의 집단과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덕분에 지금은 그 형태도 꽤나 괴이하게 변해서 황족 수호의 임무를 맡지 않는 구희 단리서라도 궁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단리서라가 왜 궁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나설 때는 사신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흑옥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화도 물경 수개월 만에 보았다. 무공을 수련한 지도 벌써 수개월이지만 단리서라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 당시 요희가 흑옥루의 모든 기녀를 모았을 때 빠진 세 명의 궁희 중 한 명이었다.
“피곤하죠? 주물러 줬으면 좋겠죠?”
“응.”
천화가 잽싸게 달려와 구희의 어깨를 주물렀다.
말로만 듣던 기린(麒麟)의 목이 이러할까.
가늘고 긴 목에서 뻗어 내려온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곡선.
이것이야말로 미인의 어깨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 만져 보면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예전에야 팔 힘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내공을 가진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음?”
구희가 어깨를 주무르는 천화의 악력을 느끼고 짐짓 의문의 소리를 냈다.
“내공?”
“아, 엄마는 몰랐었구나. 응, 내공 가지고 있어요.”
구희는 뒤에서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던 천화를 앞으로 오게 해 손목의 맥을 짚고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사 갑자?”
“허, 그걸 알 수 있어요?”
“응.”
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중원인 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어는 모국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발음상의 문제 덕분에 구희는 특히 말수가 줄었다. 숫기가 부족해 말을 해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혈희와는 또 다른 특징이었다.
구희는 말수가 특히 적고 과묵하게 변했다.
그게 또 그녀의 매력을 더해서 흑옥루를 드나들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하얀 공주가 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게 만들었다. 어디에선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저 북해를 넘어 나오는 나라의 공주가 볼모로 잡혀와 흑옥루에 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응? 그래서라니 뭐가요?”
“무기, 다른 아우들.”
“무기라뇨?”
“가능할 것…… 같아.”
천화는 구희의 단락적인 말을 이해했다.
“아, 그러니까 다른 엄마들이 무기를 가르쳐 주라고 해서 이상했는데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라고 말하는 거죠?”
“응.”
구희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견.”
“에헤헤.”
구희의 풍만한 가슴에 안겨서 채취나 다름없게 된 박하 향을 맡으며 웃었다. 그녀에게는 요희 이하의 엄마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온화함과 근엄함, 그리고 엄마로서의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천화도 구희를 상대로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해 왔다.
“그럼 구희 엄마가 무기를 가르쳐 줄 거예요?”
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를?”
“무슨 무기를 쓸 거냐고요? 여러 개 쓰면 안 되나? 전희(戰姬) 엄마처럼 십팔반무예를 다 쓰고 무기 엄청 많이 짊어지고 싶은데요.”
전희 악자연(岳紫燕). 궁희 중에서 세 번째로 무공이 강하며, 네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다. 현재는 흑옥루에 없다. 외부로 늘 나가 있는 두 명의 궁희가 바로 구희 단리서라와 전희 악자연이었다.
“음…….”
그 신음 뒤에는 ‘전희처럼 되고 싶다고, 네가?’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천화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구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
천화는 잠깐 울컥했지만 곧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수개월 전이라면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혹은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천화는 이제 알고 있었다. 무리(武理)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재능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인정한 이후의 천화는 그런 것에 다소 실망할지언정 가슴의 멍에가 되어 속마음을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구희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이었다가 말끔히 털고 방긋 웃는 천화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후후, 아들이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변했어.”
“좋은 방향이겠죠?”
“응.”
구희야 나라일 때문에 사절단에 합세한다고 치면 전희는 그 별명 그대로 전장에서 장군들을 암살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는 했다. 구희 다음으로 강한, 궁희 중 세 번째 무공 서열의 전희를 따라가는 건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단번에 확답이라니, 좀 너무해요.”
그래도 부우 하고 입술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
구희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천화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은 다른 엄마의 그것과는 달리 몹시 딱딱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천화는 금방 기분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말을 알고 있으니까. 비록 말을 잘하지 못하고 표정도 별로 없는 구희라고 해도, 그를 좋아해 주며 몹시 사랑해 주는 엄마인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진다.
천화도 구희를 좋아했다.
“그럼 뭘 가르쳐 줄 거예요?”
“뭐든.”
“칼? 창? 뭐 이런 거 다 되는 거예요?”
“응.”
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엄마들에게 이런 거 다 배워도 되나?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지는데.”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배우는 건 배우는 건데, 엄마들의 무공 수준이나 배우는 것이 너무 고급이 아닌지 우려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말에 구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화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좀 자기밖에 모르는 녀석이라면 날름 영약 처먹고 각종 무공이나 섭렵할 것을, 흑옥루에서 금이야 옥이야 길러 놓으니 이렇게 자기에게 주워진 특권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가.
살며시 천화를 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결과만 내.”
“…….”
그 결과를 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투정이었는데 구희 엄마는 쌈빡하게 그리 정리해 버리고 말았다.
“과연 구희 엄마. 위로를 진짜 한 문장으로 끝맺어 버릴 줄이야.”
천화가 허탈한 웃음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어쨌든 잘 배울게요.”
“믿어.”
“저, 혹시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신해.”
천화는 말만 앞세운 이들을 몹시 많이 알고 있었고 말뿐인 행동을 할 때의 표정 변화를 잘 알았다. 그가 사는 장소가 장소다 보니 국가를 지탱하는 관료들을 무수히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희에게선 그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결론은 두 가지뿐이다. 표정 변화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가 거짓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정말 질문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일 때.
천화는 굳이 답을 묻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일 아침 이 방에.”
“내일 아침 일찍이요?”
“응.”
구희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파란 눈동자로 천화를 바라보며 가볍게 긍정했다.
“무기 구하자.”
다음 날 천화는 잔뜩 기대하여 구희의 층계를 밟아 올랐다.
밤을 새다시피 하며 기대해 버렸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서 깨어나기 전에도 신검이니 보검이니 하는 걸 잔뜩 쥐는 꿈도 꿨다.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는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이 잔뜩 뭔가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달칵달칵 거리는 소리에 의문을 느끼며 올라서려 할 때 두 명의 사희가 잠복해 있다가 천화를 기습했다.
한 명은 천화의 입을 막고 다른 한 명은 횡경막을 쳐서 반쯤 기절시켰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걸음을 옮겨 사희가 머무는 사 층에 도착.
천화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바라보자 두 명의 사희가 귀염성 있게 웃으면서 화를 풀려 애썼다.
지는 건 결국 천화였다. 엄마들 중에서 특히 유쾌하고 장난기 많은 사희의 애교 넘치는 행동은 소동에 불과한 천화조차도 웃게 만들었으니까.
한차례 웃고 나자 화를 내기도 마뜩잖은 천화가 졌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뭐야 결국? 사희 엄마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납치한 거야?”
“시종들이 방금 무기를 나르는 것 봤지?”
“보따리를 짊어지고 움직이긴 하던데 그게 무기였어?”
“응, 전부 검이야.”
“검!”
천화의 눈이 반짝였다.
“검 좋지! 나도 반드시 검을 쓰고 싶었어!”
“그건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알지.”
천화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사희였던 것이다. 사희는 다른 도법이나 편법, 창법 따위는 손도 대지 않고 검법에만 골몰하던 천화를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검이 좋다던가. 무슨 말을 해도 검을 들고 싶다는 말에 사희 두 명은 몹시 골몰해서 오래전 실전된 무공을 꺼내었고 천화에게 가르쳤었다.
“아무튼 우리 이야기를 들어. 단리 언니가 황궁무고까지 동원해서 무기를 꺼내고 있어.”
“우리가 넌지시 이야기를 흘려서 검만 가져오게 했지.”
“그러니까 저기는 검 천지일 거란 말이야.”
“검이 이렇게 많아.”
이렇게 하고 가슴 앞에서 큰 원을 그려 보이는 사희를 바라보며 천화는 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 겨우 그거 말해 주려고 날 이 꼴로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있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단리 언니는 널 위해서 기껏 그런 일까지 벌였어. 그리고 저 많은 검 중에서 하나를 뽑아가지라고 할 거야.”
“뭐 검의 좋고 나쁜 것 따위는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명검과 마검, 보검 따위의 특징은 보는 순간 알 수 있는 거거든. 하물며 그렇게 많은 검인데 특징적인 것들을 골라 보면 평범한 건 고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중요한 문제야. 황궁무고에는 네가 익힌 무공과 짝을 이루는 검이 있어. 아마도 틀림없이.”
천화의 눈이 커졌다.
“금고검(金古劍)이?”
“응, 금포마인(錦袍魔人)이 사용하던 검이 있어. 유래를 살펴보면 틀림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