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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단향 1권(10화)
五. 파고들수록 비범해지는 곳이 국가의 기관(2)
나라 최고의 기루.
거기에 머무는 열 명의 궁희.
말 그대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인 것이다.
천화는 비교하고 싶진 않았지만, 엄마들 중에서 가장 우아한 이를 꼽으라면 춘희 주아란을 꼽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었다. 괜히 기름을 뿌리고 불 속에 뛰어드는 취향은 없었으니까.
“엄마들이 많이 가르쳐 줬어. 춘희 엄마에게도 배우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엄마가 아는 걸 가르쳐 줘야겠네요. 하지만 엄마는 나이만 먹었지 워낙 능력이 없어 가르쳐 줄 것이 없는데 어떡하죠?”
“엄마는 뭘 제일 잘해요?”
“그렇군요……. 그중 나은 거라고 하면 금기서화(琴棋書畵) 쪽일까요?”
미모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재주를 따지자면 다른 아홉 엄마 모두를 합친 것보다 뛰어난 이가 주아란, 눈앞의 궁희다.
최후까지 현 황제와 맞서 싸우던 여자였다. 그 대장군이 황제의 편일 때도 호각을 이뤘던 불패의 승부사이자 여걸이었다.
겸양의 말을 하지만 실제의 능력은 한 나라의 지배자가 될 만하다.
“후후, 미안해요. 이 엄마는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답니다. 아니면 나라 전복하는 법을 배워 보겠…….”
천화는 표정 하나 변하는 바 없이 화제를 바꾸었다. 다음 말을 들었다간 듣는 것만으로 목이 달아날 우려가 있었다!
“으음, 금기서화라, 정말 싫어하는 건데…….”
후후 하고 웃고는 춘희는 천화를 안기 좋은 자세로 바꾸고는 아이 특유의 보들보들한 뺨에 손을 가져갔다.
“금기서화를 배우기 싫어요?”
“으, 으음. 솔직히 말해도 돼요?”
천화는 조금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천화의 뺨을 쓰다듬으며 춘희가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사람의 입이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있는 거랍니다.”
“……난 머리 쓰는 거에 약해서 그런 거 잘 못한단 말이에요. 바둑이나 뭐 이런 거. 도무지 배워도 재미가 없는 걸.”
천화는 그래도 몇 년을 배웠는데 이제 배운지 두 달 되어 엄지와 검지로 돌 쥐는 전희에게도 패배한 전적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머리 쓰는 것의 문제였다는 것을, 천화는 아직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우물쭈물해하며 변명하는 천화를 바라보며 춘희는 실로 그윽한 목소리로 흑옥루 최약자를 위로했다.
“사랑하는 아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별로 쓸모가 없답니다.”
“왜?”
천화는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쳐도 별로 이상하게 안 보일 것 같은 인간을 알고 있었다. 쓸모가 너무 많아서 황제 옆에서 대장군 해먹는 인간.
“그런 사람은 인간성이 꽝이거든요. 뭔가를 시키면 고만고만 잘하지만 결국 자기 마음대로랍니다. 하다가 그만두고 이런답니다. 자기완성형 인간이라고 하는데,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점점 발전하는 모습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아들, 그런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능력이 있어서 처음부터 재는 것보단, 능력이 조금 주독해서 노력하고 용기 내어 최후에 미소 짓는 이가 되기를 이 엄마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그 말의 어느 정도는 흑희가 몇 달 전에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응!”
천화가 소리 높여서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큰 소리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춘희는 포근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말을 아나요?”
“그…… 무슨 뜻이에요?”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을 자연히 알 수 있다는 한자 성어랍니다. 삼국지 위서에 나오는 내용이죠. 엄마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한 번 읽고 뜻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천재보다는 범재가, 그보다 약간 떨어지더라도 성실한 둔재가 좋아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건 알고 있나요?”
“……모르겠어요.”
“논어의 공자님 말씀이랍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의미랍니다. 배움이라는 건 지식을 알게 된다는 것 외에도 지혜를 축적하는 것이기도 해요. 금기서화가 그런 종류죠. 그건 인격을 향상시키고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취미라고 할 수 있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들은 무림에 나가서 하류배하고만 어울릴 건가요?”
“하류배? 엄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좀…….”
천화의 얼굴에 떠오른 거부감을 본 춘희가 으음 하고 신음했다.
“그 점에 대해선 엄마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그러나 예의범절을 모르는 이들만 상대할 건 아니잖아요? 높은 지위에 있거나 좋은 곳에서 자란 기재들은 예의가 없으면 아예 상대해 주질 않는답니다. 사람에게는 격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벽이죠. 아예 시도도 못해 보고 벽에 막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어요?”
“으응. 그거야 뭐…….”
천화가 어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실수한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 아들이 무림을 알기 위해선 높은 신분의 이나 예의범절 바른 이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이건 최소 조건이죠. 최소한 그들이 취미삼아 익히는 상류 문화는 배워야 한다는 말이랍니다.”
“결국 익혀야 한다는 거네요.”
“그 외엔 딱히 가르쳐 줄 게 없어서 미안해요. 아, 제왕학을 가르쳐 줄까요?”
“……반역으로 죽긴 싫으니까 됐어요.”
“후후, 그래요? 안타깝네요, 아들은 능력이 있는데.”
대장군이 없었다면 황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를 춘희가 말하니 농담이 농담 같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내게 있는 능력이 황제가 될 능력이야?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능력이잖아!’
그런 생각이 찰나같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강한 무림인은 기연 따위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훌륭한 품격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해요. 사랑하는 아들, 무림인이 되고 싶다면 제왕의 풍모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답니다.”
“아니 그러니까 제왕은 좀…….”
진땀을 흘리며 천화가 거절했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춘희는 금기서화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럼 금기서화 중에서 거문고를 타는 법은 가르치지 않겠어요. 아들이 딱히 좋아할 취미도 아닌 것 같은데다 음공을 익히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만세!”
“금을 뺀 것들을 가르쳐야겠는데 기(棋)도 문제란 말이죠. 엄마가 그리 바둑에 조예가 없어요. 본래는 국수급이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에 금지당했죠.”
천화는 이해한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라도 가졌다간 처절한 국문 후에 초주검이 되어 버려지게 될 것을,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잘 이해했다.
“남은 건 서화(書畵)인데…… 그림 그리는 것도 별로 관심 없죠?”
“네, 맞아요.”
나이를 좀 먹으면 꽃을 그리고 나비를 그리는 등의 일에 관심을 가질 일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혀 관심 없었다. 요 장난꾸러기라는 듯이 천화의 머리를 살짝 손가락으로 민 춘희가 미소 지었다.
“그럼 서예를 해 보도록 하죠. 글자는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척도랍니다. 비밀단체에서는 글자 자체만을 모아서 상대방의 성향에서부터 연령, 좋아하는 취미나 특기 따위도 알아낼 수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사실인 경우가 많죠. 뿐만 아니라 글자를 잘 쓰는 이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낼 필요도 없이 상대가 주목하게 되어 있어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춘희는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
“가정을 해 보죠. 아들은 어디의 원님이라고 생각해 봐요. 상상할 수 있겠나요?”
“네.”
천화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은 내용의 상소가 올라왔어요. 글자를 괴발개발로 쓴 이와 아주 정갈한 글자로 쓴 이가 있다고 가정해 볼까요? 얼굴은 몰라요. 소문도 몰라요. 그러나 서로가 못된 녀석이라고 상소를 올릴 경우 호감이 어디로 가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음, 세상사를 별로 살아 보지도 않고 흑옥루를 나선 적도 별로 없으니 별로 상상이 가질 않는 모양이군요. 가정이 잘못되었네요. 그렇다면 그 상상 그대로에서 상황만 바꿀게요. 아들은 원님이고 누군가가 탄원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깨끗한 서체로 쓰여진 탄원서를 읽는 것이 편하겠어요, 악필인 탄원서를 읽는 것이 편하겠어요?”
“으, 으음. 역시 깨끗한 서체의 탄원서겠죠?”
“사람은 말이에요. 알몸으로 태어나지만 알몸으로 인생을 끝내진 않아요. 문화와 함께 발전하고 문명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회는 그 문화에 적합한 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 번 예를 들게요. 옷이 지저분하고 봉두난발의 남자와 깔끔하게 씻고 하얗게 빨아 옷을 입은 남자가 길을 물어 온다면, 누구에게 말을 걸겠어요? 그 두 남자가 일행이라고 가정하고 말이죠.”
천화는 눈을 감은 채로 작게 인상을 썼다.
“봉두난발의 그 남자, 입도 안 씻었나요?”
“네.”
“당연히 깨끗하게 옷을 입은 남자죠.”
“그런 거예요. 서체가 깨끗하고 자신의 신념을 담을 수 있는 명필이 될수록 상대에게 호감을 주게 되어 있어요. 눈을 떠도 좋아요.”
눈을 뜬 천화를 바라보며 춘희가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먹과 벼루를 가져왔다. 대궐 같은 집을 살 수 있을 최상품의 벼루였지만 천화가 놀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 엄마? 춘희 엄마? 그거 뭐야?”
“벼루인데요? 현 시대 최고의 장인인…….”
“아니, 방금 그 행동.”
“허공섭물 말인가요?”
“그걸 할 수 있어?”
천화가 숨겨 놓고 읽던 무협 소설에서는 허공섭물을 사용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우선 내공이 엄청나게 받쳐 줘야 하는데다가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일부 강자는 그걸로 멀리 떨어진 상대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들어 올려 내팽개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신검합일을 이룬 상태에서 허공섭물이 합쳐진 기예가 바로 이기어검(以氣馭劍), 검의 절정인 기술이다.
“그, 그거 어떻게 해요?”
내공은 충분하지만 그럴 정도의 기량은커녕,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천화가 침을 꿀떡 삼키며 물었다. 춘희는 허공에 둥둥 떠 날아와 이윽고 단상에 떨어진 먹과 벼루를 보다가 짓궂게 말했다.
“그럼 서예의 수준이 만족스럽게 된다면 이걸 가르쳐 줄게요.”
춘희가 생각하는 천화의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평생을 흑옥루에서 살다 보니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이 너무 심하다는 것.
동경이 심해지다 보니 소설을 읽고는 쾌도난마의 고수가 되고 싶어하여 학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것.
과연 천화는 조금만 배우다 말 요량이었는지 몹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아서 춘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윽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천화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약속 꼭 지켜요, 춘희 엄마.”
“물론이죠.”
허공섭물.
이 상승의 무공을 위해서라면 서예 따윈 뛰어넘어 주마!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탈색된 천화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두려워졌다. 그래도 눈은 떠지고 공부는 계속된다.
천화는 춘희가 있는 층으로 올라섰다. 그곳에는 이미 단장을 마친 미인이 곱게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제왕의 기품이 넘쳐흐르는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 기루는 황궁과 같은 무게감을 갖추고 있었다.
“왔군요. 차를 한 잔 할까요?”
기루에는 열 명의 궁희와 천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중도 요리사도 그리고 시녀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척을 해야 했다.
초창기 때의 흑옥루에는 정말 그런 사람들만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거기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어도 하고 있고 오랜 규칙으로 인해 차를 데워 온 이들은 눈을 감고도 잘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천화는 경이적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천화는 그들 시종이나 시녀들조차도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왜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인가요?”
“흑옥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서요. 시종과 시녀들조차도 저렇게 상승무공을 익히고 있었을 줄이야…….”
“저들의 운신 수준 말인가요? 높긴 하지만 화후에 달한 건 아니고, 또 생존과 은신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무림인의 그것과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요.”
“그래도 몰랐었어요, 지금까지는.”
그저 조용한 사람이구나, 없는 사람 취급하면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해 왔던 천화는 흑옥루의 비범함을 새삼 느꼈다.
“그럼 이제 하나 알았네요. 자, 이제 공부를 시작해 볼까요?”
따뜻하게 데운 차를 마신 후 춘희가 직접 먹을 가는데 그 동작은 너무도 섬세해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간다.